장혜영4장 꿈틀거리는 은파강 2종수는 어둠이 짙게 내린 장지문 밖을 초조한 시선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작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과연 어렵게 얻은 순사자리와 비옥한 토지와 첩실 곱단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강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밤을 넘겨서는 안
장혜영4장 꿈틀거리는 은파강 땔나무를 할 수 있는 산은 강촌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읍내를 지나고 비옥한 논배미들이 아득하게 펼쳐진 벌판을 지난 다음 다시 강 두 개를 건너야만 했다. 해거름 전에 왕복 70리 길을 다녀오려면 새벽에 집을 나서야만 했다.덕민은 첫닭이 울자 자리에서 일어나 지주 한상권네 집으로 향했다. 어제 한지주가 그들 형제더러
장혜영3장 뜨거운 호수2준호가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5시였다. 택시에서 한잠 잤으나 술기운은 여전히 말끔하게 털어버리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가기가 숨이 차고 걸음이 비틀거렸다.무심히 미닫이를 열고 방 안에 들어서던 준호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부친은 방 가운데 장승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키가 껑충하고 허리는
장혜영3장 뜨거운 호수1진옥은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멀어져갔다. 낭떠러지를 향해서 허위허위 멀어져 가고 있었다.“오빠, 날 구해줘!”처절한 호소가 계곡을 뒹굴며 피투성이가 된다.“기다려. 내가 구해줄게.”준호는 진옥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아버지였다. 그 순간 진옥의 모습이 금시 한 유리로 변한다.“유리 씨!”
장혜영2장 고요한 은파강3덕덕구는 아침 일찍 청동불상을 휴대하고 은파로 떠났다. 해거름 전에 귀가해야 했기 때문에 출발을 서둘렀다.한나절이나 거리며 골목들을 누비며 골동품 점들과 전당포들을 뒤졌으나 기대했던 비싼 값을 주겠다는 점포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무쇠덩이에 구리물을 도금한 걸세. 가치가 없는 거네.”이유인즉 이러했다.저녁 무렵에야 겨우 어느
장혜영2장 고요한 은파강2““보셔요.”아내가 깨우는 소리에 종수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땜시 그랴? 졸려 죽것는디……”귀찮은 듯 이맛살을 구기며 다시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소로 나갈 시간이 되었어요. 오전에 하남마을로 순찰을 내려가 봐야 된다고 하셨잖아요.”“으매! 그라제. 내가 깜박혔어라우. 진즉 깨워줄 것이제.”종수는 졸음이
2장 고요한 은파강1르륵- 철떡 쿵!쭈르륵- 철떡 쿵!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구성지다. 달빛은 무르익어가는 황금벌에 은가루처럼 은은하게 부서져 내린다. 손가락으로 찍으면 흠씬 젖도록 묻어날 것만 같다.덕구는 곱단의 옆에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베치마저고리를 입은 그녀가 확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곡식을 몽당비로 쓸어 넣고 있는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보
2일요일은 날씨가 화창했다.봄 계절 특유의 권태로움은 도리어 희락으로 느껴졌다.4월의 황홀한 꽃 바다 속에 묻힌 서울의 휴일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울긋불긋한 옷단장으로 또 한 줄기의 꽃물결을 이룬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준호는 드디어 남 교수의 소개로 한종수 노인을 방문하러, 그분이 계신다는
장혜영 소설가 출간 작품단편소설: 화엄사의 종소리 외 60여 편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외 10여 편장편소설: 살아남은 전설(전 2권)희망탑바람의 아들여자의 문(전2권)무지개그림자붉은아침(전2권)카이네 기생학술저서: 한국을 해부한다(대학교재)한국의 고대사를 해부한다한국전통문화의 허울을 벗기다 붉은아침 1 장혜영작가의 말 황홀한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그런
바람의 아들장혜영서울까지 돌아오는 동안 줄곧 아기 거취문제에 대해 머리를 짜 보았지만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시설에 보내자니 미라한테 미안하고.청량리를 지나 신설동으로 진입하는데 갑자기 휴대폰벨소리가 울렸다. 준범이와 미라가 죽고 나서는 전화가 오는 차수도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기다려지는 전화도 별로 없었다.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수화기속
바람의 아들장혜영에필로그갓난아기는 한 달 만에야 병원에서 출원했다. 조산이 원인인지는 모르나 체중 미달에 폐활량 불량, 심장기능 저하 등 선천적 체질장애가 극심해 병원간호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령 아이의 상태가 양호하여 며칠 안에 퇴원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정도는 거취 문제 때문에 선 듯이 아기를 받아 안고 병원문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지금도 아
바람의 아들장혜영그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창 촬영에 신이 나던 지혜가 갑자기 앗~ 하는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바윗돌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가 손에 잡았던 삼각대도 함께 넘어졌다. 카메라가 바위에 충돌하며 퍽! 하는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다행이도 이끼가 두터웠기 때문이다.“파랑 씨.”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촬영을 하
바람의 아들장혜영2오후부터는 가는 진눈깨비가 날릴거라던 날씨정보가 실감나게 하늘은 아침부터 흐리터분하다. 축축한 수분을 잔뜩 머금은 공기는 낮게 드리운 채 지면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날이면 정도는 보통 아침출근을 늦게 한다. 그러나 며칠 내로 사진집교정을 끝내어 출판사에 교부해야 했기에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을 나와 81번버스종점 부근에 이른 그는 무심
바람의 아들 장혜영뒤쪽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랑은 어느새 준비해 온 돗자리를 땅바닥에 깔더니 석불을 향해 공손히 예배를 드린다. 임신한 무거운 몸을 운신하기가 힘들어 보여 정도는 말렸지만 세 번은 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처럼 불문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전에는 한번도 그녀의 입에서 불교에 관한 말을 들어본 적이
16 죽음과 삶 1춘삼월이지만 아직 아침기온은 쌀쌀하다. 철 지난 겨울은 아직도 왕성하던 자신의 계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지나 숲속 그늘 밑에 잔명을 유지하고 있다. 낮에는 훈훈한 봄바람과 꽃잎들 뒤에 숨었다가도 밤만 되면 어슬렁어슬렁 도심거리로 밀려든다. 아직은 철 이른 꽃잎들을 얼리고 미니스커트속으로 기어들어 방종한 아가씨들을 추위에 움츠러들게 하
바람의 아들장혜영아니다. 그것은 옛날 정도의 생각이다. 지금은 정도는 동생 윤미경이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아내와 이혼하지도 않았고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으로서 파랑과 불륜마저 서슴지 않았었다. 그런 입장에서 더 이상 뭐라고 미경의 소행을 비난한단 말인가.이미 깨어진 물독이나 다름없다. 미경을 추적하여 잡아 들일 수도 없거니와 설령 잡아 들였다고
바람의 아들장혜영2정도는 차를 집에 두고 춘천행열차편을 택했다. 그것도 무궁화가 아닌 통일호를 탔다.북부 산악지대를 방불케 하는 풍경들이 신선한 느낌을 주며 창밖으로 흔들흔들 지나갔다. 소나무, 전나무, 향나무 같은 침엽수림은 벌써 노랗게 물든 서울시가지의 은행잎들과는 사뭇 다른 고집스런 푸름과 기상을 간직하고 있다. 간혹 보이는 희소한 수종들인 자작나무,
어느새 준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사지가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띤따 딴따 따라라란따-전화벨이 울리자 준범은 다급히 귀전에 가져갔다. “너 지금 무슨 짓거릴 하는 거냐. 허튼수작 다 집어치고 나랑 직접 마나서 결판을 내자.”“서두를 것 없잖아요. 준범 씨를 위해서도요.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배부르게 식사하고 얼근하게 마셔요. 그 식사가 최
1최 부장에게서 해고통지를 받았을 때 준범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 부장이 해고서류를 그의 앞으로 내밀며 사인을 하라고 강요하자 그제야 사실임을 알았다. “무슨 이유로 절 해고하시는 겁니까?”“나도 잘 몰라. 사에서 결정한 거니까.”“잘리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할거 아닙니까.”“말 안해도 석 PD가 잘 알텐데&he
준범은 휴대폰도 전화도 불통이다. 회사에 전화를 넣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석 PD부탁드립니다.”“그만뒀습니다.”“아니, 무슨 일로……”“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과 직접 문의해 보시죠.”“언제 그만둔 거죠?”“아마 열흘 정도 될걸요.”“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무작정……”“모른다니까요. 죄송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