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장혜영2전화벨소리가 처음에는 꿈속에서 들렸다. 그러나 청각이 꿈의 계곡을 지나 의식을 유인하여 나온 곳은 현실이었다.정도는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지난밤 병원에서 늦게 귀가해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던 것이다. 셔터처럼 무겁게 드리운 눈꺼풀은 떠지지 않았고 흐릿한 의식에도 안개가 자옥하다.“네∼”“형.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두 번째로 만나 뵙고 박병술노인의 회고록을 끝까지 읽고 난 지금 정도는 파랑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와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갈망하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정직한 삶의 신조, 도덕적 결백을 지키려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나기까지 했
바람의 아들장혜영14장 꿈과 현실 1거리는 차량들이 일제히 내뿜는 배기가스로 인해 아침부터 후끈후끈 달아 올랐다. 빵처럼 노면을 노글노글하게 만들며 피어 오르는 지열이 차 밑바닥을 꿰뚫고 발바닥에까지 화끈하게 전달된다.기상예보에 따르면 오늘 낮 최고기온이 35도라고 한다. 8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더위는 조금도 꺾일 기미가 없다. 사람들은 이런 이상기후를 지구
바람의 아들장혜영스스로도 억이 막힌다. 해탈이 뭐고 성불이 뭔데……“저 혹시 미미어머님 되시는 분이 아니신지요?”심은하를 닮은 낯선 아가씨가 먼저 말을 건넨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또박또박한 어조다.“그러는 아가시는요?”“윤선생님과 아는 사이에요.”“미미아빠는 어딜 가고 아가씨가……”“선생님께서 일주일이나 혼자
바람의 아들 장혜영13장 관세음보살관음전 안에는 촛불만 새벽 찬 기류를 타고 그물거릴 뿐 고요하다. 전당 밖 섬돌 어딘가에 숨은 풀벌레소리만 냇물 소리와 더불어 화음을 조율하고 있을 뿐.만 팔배로 절하자면 아직도 천 사백배가 남아 있다. 그런데 벌써 자정이 넘으면서부터 관음보살상이 돛배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부터는 법당 안 전체가 기
바람의 아들장혜영그러나 박병술은 사단의 추격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부상을 당해 후방병원으로 호송되어야 만 했다. 적이 던진 수류탄파편에 왼쪽 대퇴골이 부서졌던 것이다. 다리는 가죽만 남겨 둔 채 간신히 몸뚱이에 붙어 있었다. 위생병이 응급처치를 하여 붕대로 허벅지 위를 조여 지혈을 시켰지만 피는 여전히 흘렀다. 들것에 실릴 때도 몸 따로 다리 따로 들려 올려
2연대의 분위기는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장교들의 비상 교체를 거친 연대는 사창리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불타는 전의로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불과 26일 전 사단은 중공군 20군과 13병단의 40군 일부의 포위공격으로 온정리전투에 이어 두 번째로 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6사단방어선이 뚫리고 무질서한 철퇴를 함으로서 애써 구축한 춘천 북방의 캔사스선
국군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통일이 당금 눈 앞에 당도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박병술에게는 어느 날 운 좋게도 뜻밖의 지프차 한 대가 생겼다. 행군 도중 길가에 버려진 인민군의 지프를 발견했던 것이다. 고장 난 데도 없는 멀쩡한 차를 휘발유가 떨어져 버리고 간 것이었다. 군용트럭의 기름을 뽑아 지프에 주입하자 엔진이 금방 작동했다.“효자 놈
1박병술은 수도사단 수색대를 따라 북진하다가 홍천에서 북상하는 6사단을 만나 원대 복귀했다. 전우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한 편으로는 감개무량하고 한 편으로는 두려운 감도 없지 않았다.민병기 소대장님은 건재하실까? 나의 거짓말을 믿어 주실지?긴장감으로 속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만난 소대의 장병들은 전부 생소한 얼굴들 뿐이어서 도리어 실망하기까
“나와 네 어머니 사이엔 약속은 있어도 부채관계는 없다. 신의를 지키는 것에도 순서가 있을 테고. 난 네 엄마와 먼저 약속을 어겼거든. 집에 계신 네 엄마에게는 그래도 얼마간의 신의는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 생모에게는 아무것도 지켜준 것이 없지. 비록 참회가 늦긴 하지만 네 엄마가 상실한 행복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고 싶다. 난 그녀가 옥살이를 마칠
2어머니 양진옥의 느닷없는 내심 고백은 정도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 충격의 체적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불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매달리며 졸음마저 소낙비를 맞은 듯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인생 중반에 생의 원초적 의문에로 되돌아 간 느낌이다. 자식까지 낳은 아버지가 되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니 되기나 할 말인가.어머니를 진정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는 순희의 멱살을 움켜쥐고 뺨을 연거푸 호되게 후려쳤다. 어찌나 아프게 때렸던지 순희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야, 이 년아! 네 년이 우리 가문에 똥칠을 하려고 아주 작정을 한거니? 이게 무슨 짓이냐! 세상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가리켜 뭐라고 흉보겠니. 오랑캐집안이라고 침을 뱉을거 아니냐!”“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낳은 아인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62 11장 참회 1연 일주일이나 병원에서 지낸 정도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항암치료가 진행되면서 미미는 구토와 두통 증세가 더욱 극심해졌다. 딸애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두 가지 약물치료만으로는 관해유도가 어려운 고위험군 환자로 분류되어 며칠 전부터는 부작용의 빈도가 높은 제4의 항암제 추가약물치료에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61“이 일기는 언니가 죽기 전에 나한테 편지로 우송한거예요. 여기서 끝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언니는 죽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당신이 사람들을 시켜 시신을 안치한 텐트를 골목에서 치우라고 했잖아요. 강제로 텐트를 철거했고 시신마저 병원으로 실어가려고 했어요. 경찰까지 불러왔던 걸 기억하죠.
2 미라는 지난밤 지리산 행에서 늦게 귀경한 노독으로 늦잠을 잤다. 그동안 타고 다니던 승용차는 얼마 전에 석재수의 가택과 승용차 등 가산이 채권은행에 의해 차압되면서 고속버스교통편을 이용하느라 피로가 심했던 것이다. “이 석재수가 아무리 죽게 되어도 복녀 하나만은 호강시켜 줄 수 있어. 걱정 마.”호화주택에서 쫓겨나 어느 달동네의 월세방으로 옮기면서도 석
도리어 공포와 두려움에 전율하는 쪽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준범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죄 값을 치르자'면 도대체 어디까지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가. 파산, 타락을 이어 죽음까지……강복녀는 약속한 커피숍에 나오지 않았다. 벌써 그녀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잔뜩 불어 넣은 기가 얼마쯤은 빠져 나간 느
10장 핏빛 석양“벌써 열시잖아. 출근이 늦었어. 서둘러야겠어.”준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하늘과 아침 정사를 즐기다보니 시간이 늦어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지난밤에도 아내는 귀가하지 않았고 빈 집을 지키기 싫어진 준범은 김하늘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왔었다. 하늘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준범이 지금 촬영중인『연적』에 잠간 나오는 단역만이라도 시켜달라는
"자기야. 어디 있어?”다시 섬돌에서 내려와 암자 주위를 초조한 시선으로 둘러본다. 평소 점잖고 느긋하던 신사풍도가 아니어서 윤정의 마음도 긴장해졌다. 자꾸만 지난밤의 악몽과 연결된 어떤 불행이 발생했을 것만 같은 우려와 불안감이 그녀의 등을 뜰로 내밀었다. 암자 뒤에서 주춤주춤 앞뜰로 나오는 아내를 보자 정도는 이곳이 사찰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듯 갑자기
자기야. 어디 있어?”다시 섬돌에서 내려와 암자 주위를 초조한 시선으로 둘러본다. 평소 점잖고 느긋하던 신사풍도가 아니어서 윤정의 마음도 긴장해졌다. 자꾸만 지난밤의 악몽과 연결된 어떤 불행이 발생했을 것만 같은 우려와 불안감이 그녀의 등을 뜰로 내밀었다. 암자 뒤에서 주춤주춤 앞뜰로 나오는 아내를 보자 정도는 이곳이 사찰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듯 갑자기 목
“자기야. 어디 있어?” 다시 섬돌에서 내려와 암자 주위를 초조한 시선으로 둘러본다. 평소 점잖고 느긋하던 신사풍도가 아니어서 윤정의 마음도 긴장해졌다. 자꾸만 지난밤의 악몽과 연결된 어떤 불행이 발생했을 것만 같은 우려와 불안감이 그녀의 등을 뜰로 내밀었다. 암자 뒤에서 주춤주춤 앞뜰로 나오는 아내를 보자 정도는 이곳이 사찰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듯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