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는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나와. 점심 같이 먹자.” “너 지방촬영에서 언제 돌아왔어?” “어제. 얼른 나와.” “나 지금 밖에 있어. 사진관이 아니거든.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어딘데?” “금방 갈게. 기다려.” 그녀와 보내야 할 시간들이 어제의 불민한 과실로 인해서인지 송구스럽고 민망할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파랑이
1 파랑이 감시카메라에 대해 물은 것은 이삼일 전의 일이다. 사진 찾으러 왔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던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에서, 그녀와 마주서면 언제나 감도는, 조금은 긴장하고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화제려니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 혹시 cctv고화질감시카메라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요?” “네. 잘은 모르지만 조금
그래도 미라의 마음속엔 석재수가 가엽다는 동정심 같은 건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에게 23년 간이나 고스란히 간직해 온 처녀의 순결을 짓밟히는 순간 미라는 석 사장이 늑대와 같은 짐승으로 여겨졌다. 돈이면 순결은 물론이고 귀신까지 부릴 수 있다고 믿는 이따위 짐승들에게 실패의 쓴맛을 느끼게 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받았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인생의 이치
미라는 자신의 눈부시고 싱싱하고 섹시한 몸매로 호색한인 석재수 사장의 넋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 오늘도 석 사장은 그녀의 현란한 섹스몸짓과 유혹에 침대위에서 벌벌 길 정도로 기운이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미라는 사실 석 사장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육탄공격에 무너질 줄은 몰랐었다. 그가 호색한이라는 풍문을 듣고 그의 약점을 악용돌파구로 삼고 준범에게로 접근하
준범은 자신의 눈길이 한동안 그녀의 뒤를 짓궂게 따라다니는 걸 뒤늦게야 의식하고 황급히 길게 풀려나간 시선을 말아 들였다. 점잖지 못하게 식당종업원의 엉덩이나 훔쳐보다니. 내가 언제 이렇게 저질인간이 된 거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혼자서도 술이 목구멍으로 잘만 넘어갔다. 잠간사이에 술 두 병을 다 비웠다. 사장이 서비스로 소주 한 병과 계란찜 한 접시를 더
8장 악연 1 석준범은 꼭 열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제주도야외촬영이 예정보다 앞당겨 끝났기에 가능했다. 스케줄대로라면 한 달은 걸렸을 것이다. 어쩐지 촬영기간 내내 집이 걱정되었다. 떠나는 날에도 아내 김정실은 외박 이틀째인데 귀가하지 않아 빈 집에 문만 덜컥 잠그고 나왔었다. 휴대폰은 아예 꺼놓고 있어 연락도 안 되었다. 새엄마와 놀러 다닌다
인천상륙작전이라! 대대장의 선견지명이 드디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UN군은 인민군의 텅 빈 후방의 허점을 노리고 기습 공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군은 이제 앞뒤로 포위되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것이 아닌가. 대대장이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팔로군장령 임표장군이 즐겼다던 용병술인 포위전술에 걸려든 것이다. 김성철 대대장은 이 날을 미리 예견하고 그를 죽
2 8월초까지는 그래도 전세가 인민군에게 유리했지만 중순부터는 전황이 역전되면서 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8월 11일에 인민군 766부대는 포항시가지를 점령하고 안동12사단은 무방비상태의 기계를 점령했지만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반복되었다. 인민군의 일방적 공격은 우세한 적 병력과 화력에 저지당하고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UN군
대대와 대치했던 국군 8사단 16연대는 인민군의 맹공에 저항도 별로 못해보고 급급히 21연대의 방어지역인 옥달봉쪽으로 퇴각했다. 21연대, 10연대는 사단의 공격을 저지시켰지만 16연대진지는 힘없이 돌파되어 국군의 방어에 불리한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동무들은 처음 전투에 참가했는데 참 잘 싸웠습니다. 특히 박병술분대장 동무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바람의 아들장혜영“막내아들을 찾으려고 집이며 가산이며 죄다 팔아버리고 올라가셨대요. 막내아들이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늘 앓았대요. 그게 걱정이 되어서……서울 가서 셋방 잡고 거리바닥에 난전을 펼치고 장사를 했지만……” “아들을 찾지 못하셨나 보죠.” “네.” “자식이 부모를 버리다니?!” 맥주를 따르는 일
정도는 확대경을 들고 금방 현상된 밀착 인화지를 면밀히 관찰했다. 역광을 이용한 늦가을의 호수는 춘천 의암호가 틀림없다. 산백양이 무성한 섬 풍경을 화면의 중경에 잡고 원경에는 병풍 같은 호수를 둘러 싼 산줄기들과 근경에는 출렁이는 수면과 단풍 든 은행나무들을 적절하게 선택한 작품이다. 1/16~1/4슬로셔터촬영효과로 소슬한 가을바람에 날리는 은행낙엽과 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비탈은 가파르고 험준했다. 가시덤불과 집채 같은 바위들이 앞을 막았다. 금시 숨결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돋았다. 파랑은 능선을 톺아 오르다가도 가끔 발길을 멈추고 풍경을 촬영했지만 정도는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사진 찍을 경황조차 없었다. 기운도 탈진한 상태여서 거의 기다시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가
6장 꽃은 왜 아름다운가? 1 정도에게 주말연휴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주말이라고 해도 영업을 하고 싶으면 사진관문을 열면 되었다. 그러나 새해에 접어들면서부터 정도는 주말이면 반드시 가게문을 닫았다. 두 번째 사진집 출간을 위한 촬영이 이유이긴 하지만 더 깊숙한 원인은 경영불황이었다. 『동방사진관』의 개업에다 갸울퍌 비수기까지 겹쳐 단골들마저
“행복이나 쾌락은 우리와 인연을 가진 공동체가 공유할 때에만 그 가치와 의미가 생산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 혼자만 행복하다면 그건 이기적인 행복이겠죠. 때로는 남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양도 하는 것도 이타적인 행복일 거고요.” “사랑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양도하는 것도 행복이라는 궤변은 자
미경은 셔터를 올리고 사진관 안에 들어섰다. 오늘은 오빠가 설악산야외촬영을 나갔기에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그러나 솔직히 오빠의 부재 때문에 이른 출근을 했다는 건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미경은 이 사진관에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상에 드러눕게 되자 수입원이 끊겼고 그래서 남편 대신 소비
윤도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는 척하고 반대 편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경찰이 달려와 덜미를 잡는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하고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좌석에서 문까지 이르는, 5~6m도 채 안 되는 거리가 백리, 천리가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 열차 연결 칸으로 나오자 그는 서둘러 승강문을 열
바람의 아들 장혜영 2 가로수낙엽들은 막바지계절을 타고 서둘러 거리에 낙엽 비를 억수로 퍼붓는다. 환경미화원들이 쉴 새 없이 쓸어내도 인도며 차도에는 플라타너스, 은행낙엽들이 융단처럼 두툼하게 깔린 채 늦가을바람에 속절없이 뒹군다. 윤도율은 대학생데모행렬이 경찰과의 충돌로 해산된 후 영화관에 잠시 피신했다가 날이 어둡기 시작할 무렵에야 후암동 자택으로 향했
“실종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예요. 지방법원에 변호출장차 나가신 게 아닙니까?” 정도는 아버지가 춘천지방법원에 살인사건 변호로 출장 나간 줄로 알고 있었다. “그 살인사건은 판결이 난지 벌써 며칠 된단다.” “그럼 사무실로 나가셨겠죠.” “전화를 걸어봤는데 사무실에도 없으셔.” “그럼 어디 가셨죠? 지방출장을 가신 거 아닙니까?” “가시면 가신다고 꼭
5장 아버지의 실종 1 해를 넘기고 소한에 접어들면서 계절은 추위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린다. 그러나 콘크리트구조로 된 도회지의 열기 앞에서는 엄동설한도 맥을 못 추고 한 걸음 주춤한 채 공격 대신 타협을 선택한다. 혹한을 녹이는 천만 시민의 굵은 입김에 도시는 도저히 얼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밤의 냉기에는 잠시 얼어붙었다가도 낮이 되면 처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