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6월16일, 나는 잘살아 보려는 마음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고국을 찾아왔다. 입국 3일 만에 나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월 60만원 받고 다리뼈가 골절되어 운신 못하시는 89세 할머니의 간병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사십이 다 됐건만 왼쪽 인공 눈이 뿌옇고 백발이 된 할머니가 정말 무서웠다. 할머니 곁에 누운 나는 짧아 3년, 길어 5년을 계획하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0.27 00:00
-
서울특별시공고 제2008-1795호 제12회 서울이야기(Photo Essay) 공모 서울시에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서울이야기(Photo Essay)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서울을 소재로 하는 자유로운 이야기 형식의 Photo Essay를 신청 받습니다. 외국인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관심있는 외국인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2008년 10월 일 서울특별시장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0.20 00:00
-
70년대 말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시골학교 교원으로 가게 되였다. 20대 꽃나이에 시골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부모님들은 나의 혼사에 대하여 근심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나는 고모의 소개로 지금 남편을 만나게 되였다. 비록 소개로 만났지만 인연인지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였으며 앞날을 기약하게 되였다. 처녀 총각이 만나면 데이트도 하고 영화도 보아야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0.13 00:00
-
우산은 썼지만 온몸은 흠뻑 젖어 물병아리가 됐다. 나는 몸을 떨면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곳이 바로 역삼동 한성수산, 내가 고국 할아버지 땅을 밟아 처음 찾은 식당이다. 중국에 있을 때는 명색이 교사였는데 홀서빙이라니? 나는 자기가 억울하고 가여웠다. 식당 안은 덥지도 않은데 에어컨을 너무 켜놓아 썰렁했다. 한시간반정도 청소를 하고 나니 "아침식사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10.13 00:00
-
▲ 오른째 첫번째 홍정의 수상 나는 지난해 까지만도 중국심양에서 한국회사에 출근하였었다. 법률전업으로 대학공부까지 마쳤지만 나의 월급은 한화로 50만원좌우밖에 안되었으니 내 나이40이 다 되어가도록 집 한 칸 없이 결혼도 못한 나의 생활이란 암담하기만 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이란 운운할 여지도 없었다. 이렇듯 번민의 나날들을 반복하던 중 어느 날 우연하게 신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8.10.02 00:00
-
몹시 앓고 있는 아들 때문에 거액의 돈이 필요했던 나는 만사불구하고 한국에 나온 사람이다. 좋은 외국인정책의 덕택에 축국의 꿈은 이뤄졌지만 걱정은 태산 같았다. (중국에 있을 때 교편을 잡았던 내가 한국취업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한국에 친척도 없고 친척 중 한국엔 나온 사람도 없는 내가 끝까지 버틸만한가? 하는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룰 수 없었다.다행스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9.24 00:00
-
처음 한국 땅을 밟아 인천공항에서 부천 가는 길에, 전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고향에 온 듯한 푸근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갑자기 행복해졌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 강한 충동에 마음이 울먹거려 지던 그날은 7개월 전 무연고 방문취업제의 혜택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던 날이다. 중국에서 우수한 번역사로 인정받기 위해 악전고투했던 나는 많은 고민
문화·문학
[편집]본지 기자
2008.09.19 00:00
-
나는 올여름 휴가는 일본에서 유학중인 아들딸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불법체류로 몇 년 있다가 법무부 자진프로그램 덕분에 재입국을 하여 합법체류상태에서 마침 일본에 있는 자식들이 초청하여 다시 중국으로 에돌아 갈 필요 없이 곧바로 일본으로 갈수 있었다.몇 년만에 애들과 만나는 설레이는 마음에 밤잠도 설쳐 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김포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앉았다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9.13 00:00
-
나도 예전에는 산 좋고 물 맑은 중국의 한 농촌에서 덩실한 기와집 지어놓고 태산같이 믿던 남편에 귀여운 아들딸들을 거느리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며 근심걱정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때는 부부간에 자기의 밭에서 달갑게 땀 흘리며 맞들고 벌어 가정살림 늘여나가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최대의 낙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딸 하나 아들 하나 오붓하게 네 식구 살아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9.04 00:00
-
방문취업제로 입국하여 성공적인 취업생활을 하기까지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동포들의 긍지와 자부심 및 의욕을 고취시키고, 동포에 대한 내국인의 부정적인 인식을 제고하고자 마련된 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생활수기 응모 작품에 대한 심사결과를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아 래 - 상별 작품수 상 금 입 상 작 제목 이름 계 10 610만원 최우수작 1 100만원 유나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9.01 00:00
-
법무부와 매일신문사는 '2008 전국 다문화가정 생활체험수기'를 공모합니다.다문화 가정 가족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다립니다. ○ 참가대상 - 결혼 또는 취업 등을 계기로 한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 가족 - 결혼이민자 본인 및 배우자 - 결혼이민 가정의 부모(처가, 시댁 등), 자녀 등 - 외국인노동자 가정의 가족 - 그 외 국제결혼가정의 가족 ○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8.22 00:00
-
음력 12월 31일은 나의 큰딸 민희의 생일날이다. 이날이 돌아오면 나는 농짝속에 정히 간직한 색바랜 털실모자를 꺼내본다. 이 털실모자는 내가 딸애의 첫돌생일때 선물한 모자인데 여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깃들어있다.1966년 어느 겨울날, 주부련회에서 사업하던 나는 조직의 배려로 조선에 가 석달간 휴양을 하고 돌아왔는데 《외국특무》라는 어머어마한 모자가 나를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7.07 00:00
-
시대발전의 추세라고 할가? 지금 적지 않은 농민들이 돈벌이하러 해외로 나가다보니 마을은 텅 빈 집들이 많다.20~30년전까지만 하여도 남자가 녀성노릇한다는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집집마다 안해를 출국시킨 남자들이 녀자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다.7개월전, 연길공항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안해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녀자노릇하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7.07 00:00
-
1.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언젠가는 동쪽으로 쓰러진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은 막연한 꿈이었고 우리나라에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시절에도 나는 언젠가는 외국에 나가 볼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기르고 내 나이 서른이 지나서야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았었다.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6.20 00:00
-
한국의 거리에서 간혹 보이는 차이나레스토랑, 중국집 간판들을 보면서 친근감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중국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점심시간만 되면 중국반점을 찾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국반점에 가면 온통 중국에서 자주 먹지 못하는 요리들로 코스요리가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팔보채,오향장육, 심지어 짜장면도 그렇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5.14 00:00
-
▲ 안해금 캐리커 5월 3일과 4일 1박 2일 코스로 경기도 가평에 다녀왔습니다. 너무 걸어 다녀서 다리의 근육도 아프고 지금도 걸을 때마다 시큰거리는 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좋은 경치까지 구경하고 나니 기분이 좋네요. 연변대학 신문방송학과 다닐 때 동창생도 3년 만에 만나고 청심철죽축제, 유명산 계곡, 가평아침고요수목원에까지 다녀왔어요. 한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8.05.09 00:00
-
<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 김호웅> 조성일 회장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한국의 독지가(篤志家)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나는 구구히 설명하지 않고 “연변의 대표적인 지성이요, 최후의 애국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성일 회장만은 좀 도와달라고 청을 든다. 고작해야 대학교의 평교수인 내 힘이 얼마나 먹혀들어 갈가마는, 윤동주사상선양회 박영우 회장과도 그렇게
문화·문학
동북아신문 기자
2006.11.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