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나쁜 것의 표준이 뭔데. 나한테 좋게 대하면 좋은 사람이고 나쁘게 해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잖아. 그밖에 또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어.” 알게 모르게 외제차 한 대로 이 가정에 심어놓은 불화의 불씨가 벌겋게 눈을 부릅뜬다. 외제차는 지금부터 아내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갈등과 반목의 장벽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버려. 당장 돌려줘. 내가 사줄 테니
아내 정실의 손길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오더니 준범의 허벅지를 쿡쿡 찔러왔다. 왜, 젊은 새엄마한테 반했어요? 하는 질투가 섞인 불만이 실려 있다. 여자들에게는 엄마를 포함한 모든 여성이 라이벌인 듯싶다. 준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수그린 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기강과 법도가 있어야 돼. 어른을 모실 줄 알고 아랫사람을 사랑할 줄 알
2 “레디 큐!” PD인 석준범의 지령이 떨어지자 전 스태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돌아갔고 효과와 조명이 작동했고 배우들이 연기에 돌입한다. 준범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전체스태프가 일치하게 움직이는 이 지배욕 충족 때문에 PD라는 직업이 마음에 든다. 벌써 며칠 전부터 미니시리즈 『인생에는 길이 없다』라는 드라마 옥외촬영이 진행 중이다
“솔직하게 자백하고 사과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그럼 광혁이도 옹졸한 사람이 아니니까 관용을 베풀 거야.” “오빠 가면 난 죽어. 알아. 난..... ” 미경은 전신을 화들화들 떨며 눈물까지 흘렸지만 정도는 동생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미경은 오빠를 따라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놀라 흠칫 발걸음을 멈
바람의 아들장혜영 자신의 모든 본능을 억제하고 견디면서 사는 것이 과연 오빠가 말하는 참된 인생일까. 사실 미경은 그런 심각한 인생문제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가끔씩 의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해답을 찾을 만큼의 집념을 해본 적은 없었다. 성격적으로 미경은 그런 진지하고 신중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유가 깊어지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파나곤 했다.
4장 천당과 지옥 1숨이 막혔다. 홀아비 집에서만 풍기는 그 이상한 냄새와 곰팡이의 악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숨통이 열릴 만한 공간마저도 충분하지 않은 콧구멍 만한 반지하방이었다. 습기 때문에 축축한데다 햇빛이 흘러들 수 있는 구멍이라고는 손바닥 만한 창문 하나 뿐이어서 어두컴컴하기까지 하여 대낮에도 조명을 밝혀야 했다. 2층 빌라전체를 소유한 그녀의 저택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사진관에 가보셔야 하잖아요.” 파랑은 쌀을 일어 전기밥솥에 안치며 말했다. 붉은 셔츠소매를 걷어 올린 파랑의 팔목에는 포시시한 보슴털이 불빛 아래 부드러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여동생이 나왔을 겁니다.” “그럼 저기 설악산스키장사진과 대관령설경사진을 벽에 걸어주실래요.” “아니, 이 사진들은 파랑 씨의 집에 걸라고&hel
그런데 아버지의 정신상태도 요즘 비정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는 어머니도 제 정신인 것 같지는 않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거실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동작을 멈추고 한 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군 했다. 꼭 마치 아내의 병이 급속하게 전염된 것 같은 집안분위기여서 저도 모르게 전신이 오슬오슬해진다. 오기만 해봐라. 이 계집애! 두 번 다시 진남이를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 사진인데 뭘.” 미경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네까짓 게 사진에 대해 뭘 안다고. 천재야. 천재! 천재가 아니고서는 며칠 사이에 사진기술을 이처럼 완벽하게 터득할 수가 없어. 미모도 출중할 뿐만 아니라 총명함도 비범한 아가씨야.”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찬탄을 연발했다. “피- 아가씨가 예쁘니까 사진도 예뻐 보이는 거겠지.”
“절에 가서 산란한 마음을 좀 정리해야겠어요.” “절이라니? 출가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공양주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사찰에 갈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아요.” “사찰에 가고 싶으면 일요일마다 불공 다니면 되잖아. 출가까지 할 필요가 뭔데.” “갈 거예요.” 뜻밖에도 강경하고 단호했다. 음성은 차분하고 잦아드는 듯 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의지가 강하게
24출근이 싫어진다. 길 건너편의 그 화려한 『동양사진관』의 요란한 기염에 주눅이 들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윤정에게서 전염된 것인지 정도도 덩달아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일상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했다. 윤정의 외할아버지의 경우처럼 사진관경영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 정당성이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선택한 생계수단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의며 신념이며 정당성 같은 건
22안방에 성큼 들어서서 두 남녀가 이불 속에 나란히 껴안고 누운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병태는 실망한 듯 말없이 돌아서 나갔다. “뭘 멍하니 보고들 있어? 어서 나가자.” 동행한 민청원들을 휘동해가지고 우르르 마당으로 쓸어나갔다. 박병술은 그들이 삽짝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기 바쁘게 후다닥 이불 속에서 뛰어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복금씨. 미안
20 박병술은 감자 한 광주리를 다 비우고 나자 뒤미처 밀려드는 식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단잠이 들었다. 농부내외와 복금이가 상처를 씻고 오소리기름을 바르고 쑥뜸을 뜨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렇게 하루 낮, 하룻밤을 내처 자고 그 다음날 점심때에야 잠을 깼다. 주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18-2 박병술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은 뒤 이튿날 아침에야 의식을 개복했다. 다행이도 무성한 머루덩굴위에 떨어져 생명은 건졌으나 발목이 퉁퉁 부어있었고 이마가 찢어져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떨어지면서 풀뿌리나 나뭇가지에 충돌한 모양 어깨의 통증도 발목의 통증 못지않게 극심했다. 아침이슬에 축축하게 젖은 심곡深谷에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16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 잘지 기약이 없는 만큼 틈이 나는 대로 자꾸만 자두어야 한다. 전투 중에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졸음이다. 졸음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며칠 간의 후퇴 길에서 겪었던 피로와 기아, 공포와 졸음은 유령처럼 그의 뒤를 짓궂게 따라다녔다.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이 죽었고 국토가 위험에 봉착했다는 위기감도 졸
14. 그래 난 이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두려움과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전신이 화들화들 떨리기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쥐새끼들처럼 다들 어디가 숨었어? 어서 기어 나오지 못해. 다 총살해버리기 전에! 이런 개, 돼지보다 못한 새끼들! 명색이 군인이란 놈들이 전쟁이 터졌는데 싸울 궁리는 안하고 제살 궁리부터 하다니.
너무 상심하지 마.” 윤정은 놀라기는 커녕 미동조차 없다. 남편의 동정에 북받치는 그리움이나 슬픔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하고 심드렁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꿈속에서처럼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정도는 흠칫 놀라며 팔을 풀고 윤정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당신보다 전 저 사찰의 목탁소리와 함께 하고 싶어요. 그 말은 그렇게 들렸다. 아
“예. 패밀립니다.” “여보 저 윤정이예요.” 아내다.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참아왔더니 드디어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윤정의 음성은 워낙 안개 흐르듯 차분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더구나 낮게 가라앉아 겨우 들릴 정도이다. 게다가 말꼬리를 축축하게 적시기까지 해 심상치가 않은 분위기다. “왜, 할아버지 병세가 더 악화되기라도 했어?”
그런데도 석준범의 콘돔콤플렉스와 미경의 성적 불만이 한번의 몽정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일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불만은 만 악의 근원, 뭐 이런 설법이 가능다면 몰라도...... 영문 없이 이 모든 의문의 해답이 파랑의 이상한 사진 속에 죄다 숨겨져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줌마가 주인이 좋아하는 북어찜을 만들어놓고 조반식사를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집을
왜 그녀는 자연풍경만을 사진에 담았을까? 사진기술에는 전혀 문외한이면서 말이다. 기자나 촬영애호가가 아닌 일반사람들은 대개 자동카메라를 사용하며 인물사진들을 주로 찍는 편이다. 그런데도 은파랑은 초보자들이 사용하기에 무난한 자동카메라가 아닌 프로들이나 애용하는 수동카메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카메라도 아니고 인젠 고물이 되기 시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