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지방별 종교 상황

만주의 지역에 따라 조선인이 신앙하는 종교는 조금씩 다르며 조선인 생활에 끼친 영향도 다소 차이가 있다.

봉천지방 서탑 거리에 설교소를 정한 장로파의 기독교는 1922년경 120여 명의 신도를 갖고 있었으며 1922년 7월초 개설된 동포 기독교감리교는 만주선교사 배형식(裴亨植) 씨를 위수로 위원을 설치하고 봉천에 있는 조일환(曹日焕), 고시환(高时焕), 서해주 (徐海主) 등의 노력 하에 10칸 방에 설교소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전도사 박희숙 (朴熙淑) 씨의 이하에 신도 60여 명에 달하였으며 부속사업으로 여자학교를 개설하여 양부령사의 부인 현영성(玄永成) 씨와 박영복(朴永福), 이도영(李道荣)여사가 교편을 잡았으나 당시 학생 수는 30여 명이었다. 또 동포의 일부는 일본기독교조합교회 목사 안재호(安在镐)씨의 교회에 있었으나 그 수는 극히 적다.

다음 대도주 김유영(金裕泳)씨는 흥경을 중심으로 집안, 환인, 통화에서, 더 멀리는 림강, 장백에서 수만의 신도를 갖고 있었다.

기타 통화, 흥경, 환인지방에는 기독교미국장로회 선교사 도마국구 씨의 주재 하에 흥경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수십 개의 교회 및 강의소를 설치하여 많은 신도가 있었으며 정말(丁抹)교회 및 프랑스천주교, 천도교 역시 신도를 각각 수백 명을 갖고 있었다.

해룡 기독교장로파신도가 가장 많았는데 1934년경 1100여 명에 달하였다. 불교신자는 거의 없었다.

영구 조선인이 경영하는 쌍교자(双桥子) 복음당에서 일요일이면 60-70명의 기독교 장로파신도가 집회를 가질 뿐이다.

안동 기독교장로파가 가장 활약하여 각 지역에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안동시가지역에 중앙유치원, 고려유치원 및 일요일학교 2개소를 경영하였다. 천도교는 봉성, 관전, 집안, 림강 등 현에 분포되었다.

금주 조선인이 많이 않았으며 대부분 빈곤했다. 종교 신자가 적으며 종교는 보급되지 못했다.

길림 조선 개성에 있는 남기감리교는 1921년에 목사를 길림에 파견하여 교회당을 설치하고 조선인 설교에 힘쓴 결과 한때 신자가 많았다. 9.18사변 후에는 상부지역에 교회당을 설치하고 설교를 시작했으며 1934년경 신도는 120여 명이었다. 장로파는 1922년 화전현성에 교회당을 설치하고 200여 명 신도에게 전문 설교했다.

길림시에 조선인기도교신도가 급증한 것은 1935년 후이다. 변승옥 목사(조선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가 1935년 3월 길림시 강밀봉 관지촌에 3칸 초가집으로 된 예배당을 지었다. 이듬해 길림신학교를 꾸리고 교장에 취임했다. 몇 년 후에는 길림시 7경로에 벽돌로 예배당을 지었다. 1941년경 이 예배당에는 일요일마다 300여 명 신자가 있었다. 1943년 변성옥 목사는 일본인감옥에서 옥사했다.

1930년 중엽, 40명 좌우의 조선인천주교신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독립적인 교회당이 없어 중국인천주교회당에 예배하러 다녔다.

불교신자가 많았다. 당시 상공업계의 민족유지인사들인 이기행, 이룡조, 강로영, 황백화 등은 모두 불교신자였다.

돈화 1926년 4월, 용정촌 장로파예수교회로부터 조선인전도사 박경선(朴敬善)이 파견되어 당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게 되었다. 1932년에 돈화현성에 예배당을 세웠다.
신경 재류조선인의 종교심은 극히 박약했다.

할빈 1935년 경, 예수교 3개소, 천도교 1개소가 있었다. 예수교는 1930년 경성 본부에서 파견한 미국 선교사를 당 지역에 주재시켰고 그 후 조선인목사 3명이 교체되어 계속 선교했다. 남감리파 예수교회는 80명의 신도를, 천도교는 교회당을 설치하고 20-30명 신도를 갖고 있었다. 1935년 경, 녕고탑을 거점으로 대종교가 발전돼 도외정양거리에 설교소를 설치하고 일요일마다 집합의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280명 이상의 신도를 발전시켰다.

수분하 관할 내 신안진에 천도교신도 다수가 있으며 평양진, 해림, 동녕 등 각 지역에 약간의 예수교신도가 있다.

치치할 조선인이 신봉하는 종교로는 천주교, 룡화교, 유교 등이며 천주교가 가장 활약적이였다. 1906년 프랑스목사가 설교를 시작했고 1916년 교회당을 지었으며 신도가 점차 많아져 해룬, 통북 두 현에 상당한 지반을 닦았다. 선목 농장은 천주교회원조에 의해 조선인신도 농장으로 되었다.

정가툰 1933년 8월, 봉천 성결교교회의 전도사가 요원에 와서 설교하였는데 1935년경 통료에 신도 25명, 조남 시내에 장로파신도 5명이 있었다. 후엔 사원(寺院) 교회를 설치하였다.

적봉 재류조선인 중 신도가 거의 없었다.

승덕 조선인 중 1/7은 기독교, 3/7은 유교, 나머지 3/7은 무종교신앙자이다.

해라얼 조선인 대부분은 종교를 믿지 않으며 일부분이 기독교를 신앙한다. 1922년 해라얼 교외에 있는 신도가 소규모의 교회당을 설치하였고 신도는 30명 좌우였다. 할빈으로부터 전도사를 일 년에 한 번씩 청하여 전도하게 했다. 1935년경 신도는 29명이고 기타 기독교신도가 7명이다.

만주리 1933년 6월 기독교전도사가 조남으로부터 당지에 와 설교했으나 1935년 조선인신도가 거의 없어 해라얼에 돌아갔다.

용정촌 용정촌은 간도의 정치,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서 종교 활동도 활발했다. 1898년 카나다 장로파교회 해외선교부에서 간도에 선교부를 정하고 1912년 용정에 기독교 선교부를 세웠다. 10명의 카나다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1903년 이민을 따라 용정에 왔다. 선교부는 초기에 용정가 서경시원 뒤마당의 초가집에 설치되었다가 1913년 동산언덕에다 1일경에 315엔 값으로 4.78일경의 땅을 사서 주택 2채와 건평이 100 m² 되는 남향 2층 건물 한 채를 지었다. 선교사들은 사시절 검은 목사복을 입고 례모를 쓰고 조선글로 찍은 성경책과 여러 가지 약을 가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촌촌마다 찾아다니면서 환자를 찾아 병보고 무대가로 약을 주는 자선활동을 하였다. 용정기독교는 1906년 홍순국, 박무림이 용정교회를 세운 후 발전하기 시작하여 간도 각 지역에서 교회당이 육속 일떠섰다. 1911년 북경에서 온 김본렬이 용정 시천교교회당 남쪽에 운흥사를 세우려하였고 결국은 최기남에 의해 사찰은 준공되고 한시기 신도가 200여 호에 달하였다. 1922년 2월 선종파인 김교선이 주지하면서 보조사를 설립하였는데 신도는 300여 명이었다. 1923년 7월, 양우환이 용정의 부암촌에 용주사를 세웠는데 신도는 242명이었다. 1969년 스님이 병사하자 절간이 무너졌다. 1927년 3월, 대각교 대본사파의 교주 백룡성이 서울본부의 보조를 받고 불당을 세웠다. 1929년 3월에는 귀주사파의 임영준이 용정부근에 보흥사를 세우고 주지하였는데 신도는 약 500명이었다.

용정촌에는 간도를 들썽한 청림교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간단히 적는다.

청림교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칠성기도를 드렸다. 용정가 서쪽 대포산 산중에서도 100일 기도를 드렸다. 1944년 청림교는 《미구에 미군이 조선으로 등육할 것인데 미 국기를 만들어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자》고 포치했다.

1944년 12월 10일 새벽, 용정일본헌병과 괴뢰경찰은 영정가 수남의 토성포촌을 포위하고 70여 명 조선인《반일지사》와 청림교신도들을 체포하였다. 같은 때 투도구, 간도, 도문에서도 《청림교도》와 《반일지사》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120여 명이 체포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많은 사람은 2-3일 후에 석방되였으나 50여 명은 계속 구금되었다. 그중 20여 명이 죽고 15명이 사형, 무기형을 받았다. 8.15를 맞아 감옥에서 나온 사람은 12명뿐이며 그들은 등 집에 돌아와 앓다가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림교교주 림창세는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8.15를 맞아 석방되었다. 기타 골간분자들은 많은 사망을 보았다.

간도의 기독교전파에서 정재면 목사는 중요한 인물이다. 정재면(1884-1962, 본명 정병태(郑秉泰), 호는 벽가(碧剧))은 조선 평남군 숙천에서 출생, 1907년 신민회의 파견으로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으며 이동휘 등의 권고를 받고 1908년 이상설이 운영하는 서전서숙의 교육 사업을 계승하고저 원산을 떠나 용정으로 왔다. 서전서숙의 복구운영이 불가능하자 김약연과 상의하고 규암재 서당을 명동서숙으로,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고쳤으며 정재면이 교무 주임직을 맡았다. 정재민은 명동촌을 근거지로 배상희 전도사와 함께 1911년부터 1914년까지 간도 각 지역에 70여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명동촌은 정재민의 전도에 힘입어 기독교민족운동의 책원지가 되었고 후에는 민족반일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간민회》가 발족하자 정재면은 총무직을 맡았으며 1919년에는 명동촌 대표로서 의사부원으로 선출되여 상해임시정부 북간도대표로 되었다. 1923년 은진중학교교감으로 부임되었으며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은진중학교 목사로서 기독교민족교육을 철저히 수행하였다. 1930년 후에는 조선 청진과 원산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 중 1944년 9월 감옥에 있다가 광복을 맞고 인츰 서울로 돌아갔다. 1949—1950년 한국일보사 이사장직을 역임하였으며 후엔 중앙교회에서 목회자로서 삶을 살았다.

팔도구 1903년 말 조선에서 천주교교도 석해일, 김두일, 박성규 등이 이주하여 교세가 성했다. 1908년 교도가 1000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초가 10칸을 지어 예배장소로 하였다.

1910년 조선인신부 최문식이 팔도에 파견되었으며 1917년에는 100 m² 되는 교회당을 완공했다. 그 후 교도는 2000여 명에 달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팔도구천주교는 서울교구에서 분립된 원산교구에 귀속되었고 그 후부터 1945년까지 연길교구에 속했다.

팔도구에는 교도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1921년 독일인 구걸근 신부는 조양학교를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4년제 분교를 세웠다. 1924년 독일인 장리국 신부는 1917년에 지은 학교가 헐망하여 출자하여 벽돌로 새 교사를 지었다. 지금의 팔도중학교교사이다. 김구신부(세계본도회 수도원 총원장)는 조양학교에 사범과를 설치하였으며 1928년 안락만 신부는 한인학교를 세우고 조선인학교에 20여 종의 관악기를 선사했다. 악기는 모두 독일제수입품이다. 1932년경에 이 관악기를 연길교구에 넘겨주었고 해방을 맞아 연변가무단에 넘어갔다.

1935년 허가를 받은 해성중학교는 16회에 걸쳐 400여 명의 졸업생을 양성했다. 팔도는 연변조선인의 천주교 요람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도문 도문의 천주교는 연길, 용정에서 들어왔다. 1930년대 중엽 조선인 천주교신도가 도문에 나타났다. 당시 종교 활동은 가정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8년 초 독일적 신부 두걸근이 도문에 파견되었고 가을에는 200 m² 되는 교회당이 세워졌다. 《천주교 도문공소》라고 이름을 지었다. 많을 때는 신도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1935년 조선인신도 오영도가 홍광향 오공촌에 이사 온 후 신자 한수학의 5칸짜리 집을 빌려가지고 장로교파 전도활동을 했다. 1938년 초 조선 황해북도 평산군의 리동섭 목사가 도문에 정착했다. 그는 종교집회를 조직하여 전도활동을 크게 벌렸다. 신도가 많을 때는 180여 명이었다. 그해 가을 500m² 되는 2층 교회당이 락성되었다. 교회당 이름을 《기독교장로회 도문중앙예배당》이라 지었다.

감리교파는 제일 먼저 도문에 들어 온 종교의 하나이다. 1924년 조선인 김준근이 석현에다 《우후평기도처》를 세웠다. 이듬해 10월 김홍순 목사가 본부를 회막동(현 홍광촌 집중촌)에 옮기고 《우후평교회》를 세웠고 최세환 목사도 여러 곳에 기도처를 세웠다. 1938년 10월에는 건평 480 m² 되는 새 교회당을 세웠는데 투자금은 1만여 원(구원 110원)에 달했다.

성결교는 일찍 1924년 조선 경상남도 경주 성결교회의 박장환 신자가 월청 일대에서 전도했다. 1936년 10월 경, 150여 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불교는 비교적 일찍이 도문에 들어왔으며 1932년경 12개의 절이 있었고 1938년에는 조선인불교신자 295명이 있었다.

안도 1918년 1월, 이윤지, 장응세, 이형도, 신학봉 등 4명이 명월구 기독교회를 창립했다. 교도가 가장 많을 때는 약 500명에 달하였다.

천주교회는 백화동白化洞)이란 별명을 가진 독일인이 명월구에서 건립했다. 해성(海星)학교, 병원, 신학원도 꾸렸다. 해방 전 명월구엔 도교가 2000여 명이 있었다.
불교는 좀 늦어 창립 되였는데 주요 활동지역은 송강진 일대이다. 1930년경 불교가 가장 흥성했는데 20명 교도가 있었다.

훈춘 주로 예수교와 천주교를 신앙했다. 특히 천주교가 흥했다. 천주교는 두개 도경을 거쳐 훈춘에 전파도었는데 한 경로는 경신향 륙도포촌에 들어왔으며 다른 한 경로는 북경에서 훈춘성으로 직접 전파되었다.

1897년 독일신부 베루스(白类思)가 원산교회의 파견으로 경신향에 와 설교했다. 1905년 3월 경신향 육도포천주교공소가 세워졌다. 연말에 훈춘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1927년 교회당은 훈춘성과 육도포에 2개 소, 천주교공소는 14개 소, 신봉자는 896명이다.

훈춘천주교회당은 독일수도원의 외방선교회와 로마교부 이탈리아 시시수도원에서 위 만주국 화폐 10만 원의 자금을 대주어 1934년에 준공되었다. 집은 모두 7채였는데 건평이 1940m²이며 성당, 신부주택, 수녀원, 병원, 학교 등 건물이 망라되었다. 1945년 해방직전 천주교신자는 1942명이었다.



제4절 종교단체의 역사작용


종교는 재만 조선이주민의 사회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처해있었으며 특정한 역사시기에 커다란 작용을 놀았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성립되기 직전과 직후에 일으킨 작용은 컸다.

조선이주민의 증가와 집거구의 형성에 따라 전통적인 조선민족종교는 조선인사회에서 주도적인 지위에 처해있었다. 즉 순수한 종교의 접수로 하여 정신상에서 안위를 가졌으며 어려운 생활환경과 악렬한 생존압력 하에서도 자아만족을 얻었으며 생의 용기를 잃지 않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종교 인사들은 만주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반일을 고취하면서 반일계몽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 예로는 용정촌의 서전서숙, 국자가의 창동강습소, 화룡의 명동강습소, 정동학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립학교는 반일계몽운동의 요람이며 반일독립운동의 책원지였다. 기독교신도 이동휘가 일으킨 《백 만 구령운동》에서도 당시 종교 인사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극력 설교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대종교, 원종교, 천도교, 청림교 등 많은 종교들이 학교를 꾸리고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많은 반일 애국주의자들은 종교인사인 동시에 걸출한 교육가였다는 점은 의의가 깊다.

만주의 조선인종교는 점차 항일무장 대오와 손잡게 되었다. 그 전주곡으로는 1919년 3.13운동이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영도자가 대부분이 기독교, 천도교계통의 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재만 조선인이 10여만 명이나 참가한 이 반일시위 속에 종교단체와 종교 인사들이 선도적, 선동적 역활을 하였다. 1919년 1월, 대종교의 김좌진, 기독교 장로파의 김약연, 유림파의 이범윤 등은 항일무장의 길을 택하였다. 기독교계통의 마??가 조직한 《충렬대》, 김상호가 조직한 《암살대》, 대종교신도 서일 등이 조직한 《중광 단》, 원종교 김중건이 조직한 《대진당》 등 무장 대오는 모두 성망이 높았다. 통계에 따르면 간도지역에 종교단체무장대오인수는 2500명으로서 독립군의 65%를 넘었다. 이런 종교무장단체는 자신의 신앙을 실천에 옮겼으며 휘황한 전과를 올렸다.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한 봉오동전투, 그해 10월 홍범도, 김좌진이 지휘한 청산리전투가 범예로 청사에 남아있다. 할빈역에서 히로부미를 격사한 안중근 의사도 천주교 신도였다.

20세기 20년대부터 종교는 일제의 탄압과 공산주의 전파로 하여 저조기에 접어들었으며 좌절을 겪었다. 종교계의 일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접수하였거나 그 경향을 띠였다. 대표인물은 구춘선, 안무이다. 종교의 역사작용은 제한되어 있었으나 특정한 역사 사회 환경에서 일으킨 선진적 작용은 부인할 바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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