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키잡이

1995년 2월 나는 두번째로 경신진으로 갔다. 초행길엔 홀몸이였지만 그번엔 일행이 여럿이였다. 한국의 김윤찬선생, 시인 박장길과 소설가 최국철씨 등이였다. 경신진 정창권진장이 이도포에 주둔한 군부대에 가서 통행증을 만들고 방천으로 안내했다.

렴아가씨가 운전하는 라다는 경신진을 떠나서 10여키로메터 달려서 권하에 이르렀다. 바로 여기 길목에 설치된 군초소에서 신분증과 통행증을 검사했다. (그해 여름부터는 국내인한테는 통행증이 취소되였다) 정진장이 군부대의 군관들과 무랍없는 사이인지라 검사는 형식에 지났다. 상위견장을 단 대대장이 병사를 파견하여 우리 일행을 권하국경다리 중간까지 안내해주었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권하국경다리는 1936년 11월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놓은것인데 다리의 너비는 6메터, 총 길이는 500메터, 중조 두나라가 각각 250메터씩 나누어있는데 중국측은 빨간색, 조선측은 흰색으로 칠을 했다. 다리가 받는 재중량(載重量)은 60톤인데 1945년 쏘련군이 조선으로 진군하면서 60톤 무게의 땅크가 줄쳐서 다리를 건너는 바람에 다리가 20센치메터 갈아앉았다고 한다. 다리건너는 원정리, 원정리 앞산을 넘어서면 유명한 아오지탄광이라고 하며 조선의 라진과 선봉은 바로 이 다리로 통한다.

콩크리트다리는 반은 중국이고 반은 조선인데 중국구간의 중간에는 엄지손가락만큼씩 굵은 철근으로 만든 쇠사슬을 다리표면에서 한자높이로 가로 막아놓았다. 로지심의 주먹처럼 큰 자물쇠가 쇠사슬 량끝을 이어서 잠겨있었다.

웬간한 메로 때려도 마사지지 않게 육중한 자물쇠는 나의 마음에 여간한 중압감을 주는것이 아니였다. 국경이란 이같이 사람의 발걸음을 얽어매는 옥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리 두만강에서 국경다리는 권하다리까지 합쳐서 열개였다. 화룡시의 숭선진 고성리와 덕화진의 남평, 룡정시의 삼합진 삼합과 개산툰진의 개산툰, 도문시 국경철교와 공로다리, 그리고 량수, 훈춘시의 사타자향의 사타자와 영안향의 만자, 경신진의 권하 등이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은 다리는 량수와 권하국교였다. (1995년 가을부터 비로소 자물쇠를 뚜드려 마스고 권하국교는 왕래가 되였고 1997년에는 다리 건너 조선의 원정리에 국제자유시장이 서기도 했다. )

다리아래의 두만강은 꽁꽁 얼어있었다. 한겨울 뼈를 에이는 북풍은 모래를 휘몰아 하늘같이 파란 강판 얼음을 쓸고 갔다. 강건너 조선쪽에는 모래언덕이 산처럼 덩그렇게 쌓여있었다.

통행이 금지된 다리우에 서서 발밑에 떵떵 얼어붙은 두만강을 굽어보는 나의 마음도 웬간히 얼어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자물쇠를 부시고 이곳에 통상구가 선다는 권하에 이르러 나는 국제화시대, 정보화시대, 아세아태평양시대라는 인류발전추세에 떠밀려 우리 민족의 군체와 함께 나자신도 력사적 전환점과 시대의 교차점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전통사회가 궁극적으로 현대화사회로 탈바꿈하는 준엄한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력사의 이 준엄한 시기는 우리 민족한테 민족문화를 도약시킬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고 또한 민족문화가 스러져갈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라다는 강역 산비탈을 굽이굽이 에돌아간 큰길을 따라 달렸다. 왼손켠은 로씨야이고 오른손켠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이다. 이제 10키로만 가면 두만강 하구의 마지막 변강마을---방천이다. 3국 접경지대를 달리면서 나는 느닷없이 그 전해(1994년 8월) 북경에서 열린 <<21세기에 대비한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열린 중국조선족청년학자들의 세미나가 머리에 떠올랐고 조성희(趙成姬 42세)씨의 발언이 귀에 쟁쟁 울려왔다.

<<해방이래 조선족은 중국사람들이 받았던 고통외에도 민족의 분단이라는 고통도 간접으로 받았습니다. 당당한 중국사람으로 나섰으면서도 민족차별의 아픔도 겪어야 했고 한반도의 남북과는 동족이면서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답니다. 그렇다면 구경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구경 누구인가?

흘러가면 다시 돌아올수 없는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것인가?

생사존망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것인가?

나의 마음의 천정엔 꺽쇠와 같은 의문부호가 한겨울 고드름처럼 디룽디룽 매달렸다.

방천촌의 양관평(陽關坪)에 이르러 정창권진장이 문득 차를 멈추라고 했다.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서쪽과 서남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동으로는 중로국경과 잇닿은 곳이였다.

큰길옆에 륙지국경에는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그리고 철조망옆 콩크리트 기좌(基座)우에 세워진 화강암 비석 정면에는 가로 <<양관평방천로제(陽關坪防川路堤)>>라고 씌여있고 맨 아래에 <<1983년 12월>>이라는 시간이 새겨져있었다. (1999년에 다시 이 길을 지나면서 보니 비둘기조각을 한 석비가 세워졌는데 <<유엔세계공원>>이라고 새겨있었다. 1999년 4월 22일에 세웠다고 씌여있었다. )

제방뚝길 저켠에도 똑같이 너비가 1. 3메터, 높이가 0. 93메터, 두께가 0. 60메터되는 기좌우에 너비가 1메터, 높이가 0. 70메터, 두께가 0. 225메터인 패신(牌身)을 올린 비석이 세워져있는데 두 비석사이의 거리는 880메터, 바로 제방길의 길이와 같았다. 깊은 두만강을 막아서 쌓은 이 제방의 너비는 5메터란다.

청나라 말과 민국초기엔 바로 이 구간으로 중조국계선이 지나갔는바 현재 제방길의 동에서 서에 이르는 너비 2천메터좌우의 지대는 중국령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1914년 홍수가 지면서 두만강이 조선 성안봉(城安峰)에 막혀서 사회도(四會島)를 에돌아 중국측 강안을 충격해 물길이 중국령토를 침범했다. 하여 물길은 점차 동, 서의 2천메터 구간을 채우고도 모자라서 1954년 봄에는 중로변계선에 접근했다. 1955년 로씨야는 국계철조망을 로씨야경내로 20메터 물리여주었다. 그때로부터 방천으로 가는 길은 로씨야계에 있게 되였다. 1957년 이 구간의 3백메터 되는 땅이 물에 뜯겨 이듬해 로씨야측은 철조망을 2백메터 더 들여갔다. 1954년 가을부터 1964년까지 방천길은 로씨야경내로 통했다. 1965년부터는 중국정부에서는 쏘련땅을 빌어서 통행하게 되였는데 빌린 길의 호선(弧線)의 길이는 557메터나 되였다. 1981년 중국 국무원은 두만강을 막아 제방길을 내는 공정을 결정, 이듬해 4월 1일에 시공을 시작해서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이 제방길의 총 투자액은 780만원, 총 공정량은 264, 639립방메터라고 한다.

쇠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국계철조망을 만져보았다. 등골이 섬뜩 소름이 끼쳤다. 철조망 건너는 로씨야땅, 자연 그대로 흐르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마주한 중국과 조선은 나라가 다르지만 평화로운 감을 주지만 륙지에 철조망으로 금을 그은 국계앞에서는 불안한 심정을 걷잡을수 없었다. 예전에 로씨야땅을 빌어서 통행을 할 때 방천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557메터 쏘련길을 에도는 때면 숨이 한줌만 했다고 한다. 총을 쥐고 선 로씨야 군인이 등뒤에 대고 금시 총을 갈길것만 같은 공포에 덜미를 잡혔다는것이다. 그러다가도 중국땅에 들어서면 막혔던 숨이 나가며 잔뜩 오그라졌던 가슴이 금시 펴졌다는것이다. 비록 두만강 건너 눈앞에 고국을 바라보면서도 중국국민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군 했다는것이다.

흑룡강신문사의 박문봉부장은 북경 세미나에서 말했다.

<<우리는 비록 이민민족이기는 하나 력사의 행정에서 이미 중화민족의 일원―조선족으로서의 떳떳한 존재가치를 실현하였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맨주먹으로 동북땅을 개척했습니다. 아울러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이룩한 업적은 우리 민족의 위치를 확립했습니다. 한국인도 조선인도 그리고 한족들과도 구별되는 우리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현실적인 존재와 고국을 갖고있는 지구촌 코리아민족의 일부분으로서의 본체적인 존재를 동시에 지닌 모순체입니다. 망향의식, 타향살이의식은 이땅에서의 주인공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멸의식입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들은 불법체류의 취체를 받고있는 실정이며 앞으로 통일된 한반도 역시 2백만 우리를 절대 받아줄수 없을것입니다. <내가 살고있는 이 땅의 주인은 바로 나이다>는 주인공의식을 확고히 세워야 할 때입니다. 온갖 예속을 밀어내고 남한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존재로 부상되여야 합니다. >>

다시 차는 달렸다. 차창으로 저만치 둥실 솟은 장고봉과 사초봉이 멀리 바라보였다. 한쌍의 녀인의 풍만한 젖통같은 산봉우리에 세워진 로씨야 군초소의 망원대가 마치도 젖꼭지처럼 안겨왔다. 그런데 방천촌에서 바라보면 5리밖의 장고봉이 장고처럼 보인다는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이 장고봉, 일찍 유명한 <<장고봉사건>>이 거기에서 벌어졌다.

1931년 <<9. 18사건>>으로 동북을 강점하고 다시 1936년 <<7. 7사변>>을 조작하여 화북, 화중으로 진격하면서 기고만장해진 일제는 쏘련을 침략할 야심에 불이 당겼다. 1935년 한해에만도 국경선변경분쟁을 176차 감행하면서 쏘련을 집작거리기 시작한 일제는 1938년 전쟁의 도화선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그해 7월 15일 조선족 농사군으로 가장한 마쯔시마오장과 이동군조 등 일행 셋은 김해남, 고운필을 안내자로 하고 쏘련군사시설을 정탐하다가 마쯔시마오장이 쏘련군에 격사되였다. 이것을 구실로 삼아 1938년 7월 31일 밤 12시 일군은 흥의리에서 장고봉을 포격 개시, 깜빠니야 적야습격으로 장고봉과 1키로메터 사이를 둔 서쪽의 사초봉고지를 점령했다. 쏘련군은 십여대의 비행기로 장고봉, 사초봉, 경흥, 고음 등 일제의 고지를 포격, 쏘련원동군 사령 블류헤르는 8월 6일 반격을 명령했다. 대패한 일제는 10일 모스크바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했고 이튿날엔 장고봉에서 현지교섭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은 장고봉의 산정을 기준으로 동서로 국경선이 철조망으로 처져있었다. 주둔군이 없는 로씨야측의 헐망한 망원초소는 벽에 페인트로 쓴 로어문자가 다른 나라임자극을 줄뿐이였다. 중국측 분계선엔 순라병들의 발길에 다져진 오솔길이 방화선등성이를 타고 구불구불 뻗어갔을뿐이다. 철조망도 가축의 월경을 막고 산짐승들의 침습을 막기 위한것일뿐, 포화에 시달렸던 옛 싸움터엔 고즈넉한 평화가 짙게 깔려있었다.

당시 전쟁을 목격한 옥천동의 김광익로인은 말한다.

<<쏘련비행기가 경흥을 폭격하려고 지붕우를 날아서 두만강을 건너갈 때면 비탈밭에 무성한 콩이 바람에 누웠다구요. 그때 비행기에서 쏜 중기 탄알깍지가 산과 들에 누렇게 덮여있었다우. 일본군의 한개 사단이 전멸을 당했다고 그래요. 장고봉밑에 있는 늪이 피로 물들었답니다. >>

피로 물들었다는 못을 이곳 사람들은 <<장고봉저수지>>라고 하는데 인공이 아닌 자연늪이였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봉우리와 봉우리를 련결짓는 산발이 병풍처럼 둘러싼 속에 생겨난 못은 샘물과 눈물과 비물로 이루어졌다는것이다. 못은 두개, <<큰 장귀>>라고 불리는 큰 못은 25만평방메터, <<작은 장귀>>라고 하는 작은 못은 8만평방메터이다. 수심은 16―17메터나 되지만 물이 어찌도 맑은지 물밑이 아른아른 들여다 보이는데 잉어, 초어, 붕어, 쏘가리가 물속에서 뛰놀고 손가락마디씩한 새우들이 무리지어 오갔다. 호수옆에 있는 자그마한 움집에서 살면서 호수를 관리하는 조씨는 호수밑에 일본군의 땅크가 있고 그때 죽은 일군의 시체가 고기밥이 돼서 못속의 고기들이 크고 살이 쪘다고 했다.

오우범씨는 <<장고봉저수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낚시로 떠올린 붕어를 초를 쳐서 술안주해서 점심들을 먹는데 갈매기 한마리가 십여메터 앞 호수에서 우리가 금방 따서 버린 고기밸을 쪼아먹었다. ―갈매기는 비둘기보다 좀 더 컸다. 풍만한 몸체는 회색을 띠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고운 색갈의 무늬가 혹간 지나가며 조화돼 갈매기는 더없이 아름다왔다. 게다가 부리끝에 빨간 점이 있어서 아가씨들의 연지 바른 입술을 련상시켰다.

―호수옆의 사초봉늪에 련꽃이 활짝 피여있는것도 무척 아름다왔다. 주먹만큼씩한 련꽃은 푸른 련꽃잎에 받쳐서 연분홍, 노란빛, 흰 얼굴을 귀엽게 자랑하며 하냥 웃고있었다. 낮이면 활짝 피였다가 저녁이면 봉오리를 짓고 이튿날 다시 해를 보고야 피는 련꽃은 수줍음을 타는 예쁜 아가씨를 방불케했다.

―호수의 서쪽은 모래산이였다. 풀 한포기 자라기 어려운 모래산은 순수한 사막지였다. 바다에서 날려온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모래산은 바람에 의해 부풀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는것이다.

류원무선생은 <<방천>>이라는 글에서 <<장고같이 생겼다고 장고봉, 산은 별로 높지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지만 남다른 모래산을 앞에 두고있어서인지 소나무, 가둑나무록음이 한결 싱싱하고 진하다. 사막을 방불케하는 하얀 모래톱, 금빛이 눈부신 모래산, 그것들 또한 푸른 산, 푸른 호수, 푸른 들판에 안겨있어서 더더구나 이채롭고 운치가 있다. 조물주의 조화가 어쩌면 이렇게 신통력이 있을가. >>라고 장고봉을 묘사했다.

장고봉과 사초봉을 풍만한 녀인의 젖가슴이라고 하면 두 봉우리아래에 펼쳐진 벌은 미녀의 배허벅, 호수도 품고 기름진 들판과 소와 양떼가 흐르는 초지도 안은 풍요로운 이 벌을 사람들은 방천벌이라고 한다. 청나라 동치년간(同治年間)에 경흥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족들이 자리잡고 마을을 세웠을 당시 이곳은 버들방천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불려진 이름이 <<버들방천>>, <<휘우듬히 동남으로 뻗은 장고봉산발과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이 교차되면서 닭부리같은 등변삼각형을 이룬 방천땅이 로씨야와 조선땅에 쐐기를 박은것 같>>(류원무 <<방천>>에서)기도 하고 조선과 로씨야의 사이에 끼인 목을 방불케한다고 해서 <<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에서는 <<방천목(防川項)>>이라고 기재하기도 했다. 원래의 만족들이 지어 부른 이름은 헤무즈(黑木積), 들보리(野大麥)로 보리농사가 잘되였던 모양이였다. 1938년 당시 방천엔 62가구의 조선족들속에 4가구의 한족들이 끼살이를 했었지만 왕매춘(王梅春)은 지주였고 조선족 거의가 그의 소작농이였다고 하며 곡광화(曲光華)는 선주(船主)였고 호(胡)씨는 채소장사군, 팽희(彭喜), 팽균(彭均) 형제는 땅이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자작을 할수 있었단다. 1938년 장고봉사건이후 일제는 장고봉일대를 금지구역으로 봉하고 양관평, 회충원, 사초봉과 함께 방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광복이 나고 이태가 지나서 다시 꾸역꾸역 모여와 황페했던 마을을 재건하면서 <<버들방천>>, <<방천목>>에서 버들과 목을 빼고 마을 이름을 방천이라고 했다. 그런데 음역을 따른 한어표기가 <<防川>>, 변방의 산천이라는 뜻으로 되여버렸다.

방천은 마을 입구에 세운 돌에 새긴 글<<방천변쇄(防川邊)>>라고 했듯이 중국에서 최동단에 자리한 첫 마을이다. 5리길을 동으로 더 가면 왼손편은 로씨야의 무연한 뽀시예트초원과 하산호, 오른편은 두만강 너머 조선의 두만강시와 홍의리가 지척에 있어서 <<닭울음소리가 삼국에 울리고 개짖는 소리가 변강을 놀래(鷄鳴聞三國, 犬 三彊. )>>우는 고장이다. 현재의 인구는 66가구에 300여명, 한개 중대의 군부대가 마을에 주둔하고있다.

개혁개방이 된지가 십년세월이 넘었어도 방천은 예전의 농촌마을 모습 그대로였다. 30키로메터 상거에 있는 경신만 하더라도 도시분위기가 다분해 어딘가 거부감을 주었지만 방천은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고유의 민족문화를 볼수 있어서 여간 푸근한 기분이 아니였다. 두만강연안의 조선족마을에서도 방천에서 나는 우리 문화를 가장 집약적으로 볼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도시바람은 여기에도 불어와 처녀가 바닥이 나고 기회가 있으면 도시나 외국으로 돈벌러 가려는것이 마을사람들의 심정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는 도시문명으로 전이하면서 진통을 겪고있는것이였다.

북경대학 김경일(金京一 42세)교수가 북경 세미나에서 한 말이 뇌리를 쳤다.

<<이민시기의 문화선택은 특정된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그 문화공간을 주로 농천에 두었으며 농촌문화를 기반으로, 복합적 요소를 내용으로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 문화과정에 객관적으로 보다 보수적이고 페쇄적인 문화선택이 이루어져 한면으로는 전통문화의 고수와 발전에 유리한 토대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제반 중국사회에 대한 적응능력이 강화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세찬 변혁속에서 자기 문화울타리가 허물어져가고 정합을 이루었던 제반 문화구조가 깨뜨려져가고있으며 그에 따른 새로운 적응을 각자 부동한 문화적 반응으로 보여주고있습니다. >>

방천에 주둔한 군부대 중대장은 특별히 병사를 파견하여 우리를 <<토자패(土字牌)>>까지 안내하게 했다. <<토자패>>가 세워진 장고봉산발의 코숭이에는 중국의 제일 동쪽의 <<중로조변경의 마지막 역>>으로 일컬으는 <<동방전초(東方前哨)>>가 있다. 7명의 군인이 밤낮으로 지켜서있는 초소의 망원루(望遠樓)앞 마당에는 국무총리 리붕과 국가주석 강택민이 쓴 제사를 돌에 새겨 세운 비석이 세워져있었다.

1991년 7월 8일 장령자에서 연변군분구 변방부대에 쓴 강택민주석의 제사는 <<동북의 전초를 지켜 중화의 위풍을 떨치라. (守東方前哨, 揚中華國威)>>는 내용이였다.

같은 해 8월 7일 방천에 시찰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리붕이 쓴 <<국경선상(國境線上>>이란 제목의 제사는 <<도문강은 동으로 흐르고/ 토자패앞에서 길이 끊겼네. /초소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니/ 다시 또한 옛일을 돌아보게 되네. (圖們江水向東流, 土字牌前路斷頭, 登上哨所見滄海, 旧事不堪再回首) >>이다.

망원초소의 맨 웃층에는 군용 망원경이 있다. 눈을 대고 바라보면 천여년전에는 발해의 땅이였고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훈춘관할구역이였던 울라지보스또크가 가물가물 보이고 발아래 뽀드깔나야시에 사는 로씨야인의 유난히 큰 코까지도 가려보인다. 그리고 지척으로 두만강물우에 가로놓인 조로국경철교의 남쪽켠 산비탈에 길게 늘어선 조선의 두만강시의 실골목까지도 보인다. 그리고 더욱 가슴 설레게 하는것은 15키로메터밖에서 푸른 물결 굼실대는 일본해에 떠있는 어선이 시야에 잡히는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로 천여메터 앞 철교에 반도 이르기전에 두만강은 중국의것이 아니다. 로씨야와 조선의 국경으로 된다.

중국땅에 서서 동시에 로씨야와 조선을 굽어보고 일본해를 바라보노라면 방천은 동북아 금삼각주를 장식한 하나의 눈부신 보석이라는 말에 갈채가 간다. 이같이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처하고있었음에도 오래동안 그것이 민족경제발전을 제약하는 주요한 요소로 되였다. 랭전시기 연변은 제국주의,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전초진지로 <군사변방>, <정치변방>측면이 강조될뿐이였다. >>(박승헌교수가 북경 세미나에서 한 발언)

작달막한 키에 동실한 얼굴을 가진 군인 정군(丁軍 19세)이 중대장의 파견을 받고 방천에서 온 군인을 대신하여 우리를 토자패께로 안내했다. 토자패는 망루에서 약 5백메터 동쪽에 있었다.

<<1886년 청나라 북양사 대신 오대징(吳大徵)이 짜리 로씨야 연해주성 성장인 빠라노브와 함께 이 토자패를 세웠답니다. 토자패는 흙 <토(土)>로 국토를 밝힌 국경경계비랍니다.―>>

1993년에 연길에서 참군하여 목단강에서 근무하다가 금방 이리로 왔다는 정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토자패>>에 깃든 치욕의 력사를 이야기했다.

1861년 중로쌍방이 체결한 <<우쑤리강으로부터 바다까지의 변계기문>>의 규정에 의하면 <<토자패>>는 <<두만강어구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세워져야 했다. 그러나 짜리로씨야측에서는 패말을 두만강어구에서 짜리로씨야수로 22리(23키로메터에 해당함) 떨어진 곳에 세움으로써 바다로 나가는 중국의 통로를 막아버렸다. 1885년 오대징일행이 청정부의 명을 받고 짜리로씨야와 담판을 진행, 오늘의 이 자리에 토자패를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그번 걸음에 국경선 돌패말과 국경표지를 고쳐세우고 흑정자지역과 두만강항행권을 되찾은 오대징은 <<룡호(龍虎)>>라는 제사를 썼는데 그것을 새긴 비석이 지금 훈춘시 공원 정자에 세워있다. 원래 도문시 량수진에서 동쪽으로 3. 5키로메터 되는 곳에 세워졌었다는 <<룡호석각>>은 1940년 길닦이를 하면서 길옆으로 밀렸다가 1986년에 훈춘시 차대구 북쪽 언덕에 한동안 세워있었다. 룡호란 뜻은 룡이 머리를 쳐들고있고 호랑이가 주시하고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룡이 서리고있고 호랑이가 걸터앉았다는 뜻으로 변강을 지킨다는 말이 된다.

그때로부터 중국사람들은 대대손손 룡과 호랑이처럼 두려움없이 국토를 지켜왔다. 오늘 이 토자패의 위치를 지켜가고있는 정군한테 군생활이 고달프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는 따분하고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물은 자동차로 방천촌에서 길어오고 또 전기가 없어서 텔레비도 못본다는것이다. 해가 지면 반도체를 듣거나 초불아래에서 책을 본다는것이다. 이제 일년이 지나면 퇴대하는데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군인의 천직을 지켜 열심히 근무할것이라고 했다.

남향으로 22.3도각으로 세워진 토자패의 높이는 1. 44메터, 너비는 0. 5메터, 두께가 0. 22메터인데 정면에 <<토자패>>란 글자가 세로 새겨있고 그 오른쪽켠에 <<광서 12년 4월 립>>이라고 새겨있었다. 그리고 로씨야쪽면에는 로씨야 문자 <<T>>가 새겨져있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두만강을 따라 바다입구까지의 거리는 15키로메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땅이다.

1996년 여름 두번째로 방천에 갔을 때 나는 로씨야와 조선의 공동의 국경선이 시작되는 철교부근까지 유람선을 타고 갔다. 기름이 둥둥 뜬 강물은 콜타르빛이 났다. 무산광산에서 배출하는 돌가루 씻은 물이 두만강을 누런 황토빛으로 만들었다면 중국 룡정시 개산툰팔프공장, 도문시 석현종이공장의 페물이 직접 두만강을 오염시키고 또 룡정시 등 여러 도시의 공장에서 배출하는 페수에 오염된 해란강, 부르하통하 등 지류들이 두만강에 합류되면서 <<두만강 푸른 물>>은 <<두만강 기름물>>, <<두만강 흙탕물>>로 되였다. 그 물속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도 허리가 탈린 병신으로 변신, 석유내가 나서 도저히 먹을수 없게 되였다.

오염된 두만강물처럼 연변조선족은 세계화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이민시기 좁은 울타리안에서 맴돌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고있으며 두만강 물고기처럼 변신하여 석유내가 나도록 동화되여있다.

이제 방천에 년간 40만톤의 화물을 수송할수 있는 부두가 건설된다고 한다. 또 4백톤급 선박이 접안하는 항구로 발돋움한다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변의 경제발전은 의외로 빨리 진행될수도 있다. 심수나 해남도 못지 않게 인구류입이 급증할것이다.

유람선은 저만치 조로국경철교를 앞에 두고 머리를 돌렸다. 우리한테는 여전히 바다길은 막혀있었다. 동북아경제권의 중심지역으로 부상되여 민족경제도약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를 얻긴 했지만 일본해로 나아가는 통로가 개통되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바다길이 트이기전에는 연변은 지리적우세를 제대로 발휘할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오라지 않아 배길은 열릴것이다. 할아버지세대가 타고 강을 건너던 그런 쪽배가 아니라 먼 바다로 항행할수 있는 큰배가 저 철교를 지나 동해로 들어갈것이다. 두만처녀와 함께 가야총각이 가서 산다는 동해의 룡궁으로말이다.

그런데 그 배의 키는 누가 잡을것인가?!

암초를 헤치고 파도를 헤가르며 민족사회를 바른길로 인도해갈 그런 키잡이가 구경 누구일가?!

아, 두만강 푸른 물이 그립다.

손을 잠그면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하늘같이 맑은 두만강이 그립다.

그리고 노젓는 배사공이 아니라 키잡은 선장이 그립다.

두만강 푸른 물을 되찾아 이 땅에 생명수로 대여줄 선구자가 그립다.

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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