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1909년 10월26일 아침 9시30분쯤,객차에서 내려 외교 사절단이 도열한 쪽으로 향하던 일본의 거물 정객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을 맞고 쓰러졌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올해 그를 위해 꼭 달성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에게 장군이란 호칭을 붙이는 일,다른 하나는 그의 동양평화론을 선양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저격 직후 러시아군에 잡힌 뒤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져 관동도독부 산하의 여순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여기서 일본 검사에 의해 11월4일부터 12월26일까지 11차에 걸쳐 신문을 받고 이듬해 2월7일 여순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자신은 대한의군(大韓義軍)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저격하였다고 네 차례나 거듭 밝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적용할 법은 대한제국, 대일본제국, 대청제국의 어느 법이 아니라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제정한 육전(陸戰)의 포로에 관한 국제법이라고 외쳤다. 검사가 너의 최고 지휘관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도 김두성, 이범윤 등의 이름을 댔다.

포로에 관한 법은 9조에 의용군도 교전자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정당하였다. 일본 정부의 수뇌부는 현장 뒷조사에서 그의 진술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지만 이를 모두 감추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일본 정부가 그간 서방 열강들을 상대로 구축한 기반이 와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 세계에 대해 한국인들은 일본의 보호를 받기를 바란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았다. 안중근의 진술이 그대로 알려진다면 공든 탑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저격을 잘못된 애국심이 범한 무모한 살인행위로 판결을 내릴 것을 법원에 지시했고, 판사는 그대로 극형을 언도하여 3월26일에 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은 1908년에 처음 의병장으로서 300명가량의 대원을 이끌고 연추에서 두만강을 넘어 들어와 일본군과 교전하여 50명가량의 포로를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그는 평화회의가 정한 포로에 관한 법을 준수하여 심문을 마친 뒤, 포로를 수용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석방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 실천행위를 근거로 자신에게 적용할 법이 국제법이란 것을 거침없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석방 조치는 자신의 부대원 150여명을 잃는 비극을 초래했다. 돌아간 일본 병사들이 지휘부에 그의 부대 위치를 알려 주는 바람에 역습을 받아 20여명밖에 살아남지 못하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이 일로 자결을 결심하고 있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대한의군의 사령부가 이토 저격을 위한 특파대 구성을 결정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지원하여 3명의 보조원을 배당받아 '하얼빈 대첩'의 전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후 그에게 붙여진 의사란 호칭이다. 이 호칭의 첫 출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사건 3~4년 뒤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사란 호칭은 개인행위를 부각하는 단어여서 본의 아니게 일본 정부의 단독 살인범 규정을 도와주는 결과를 빚고 있다. 그에게 붙여질 마땅한 호칭은 그가 법정에서 여러 차례 주장한 대로 장군이어야 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근 5개월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3편의 글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 <안응칠 역사>(안중근 자서전) <동양평화론> 등이 그것이다. 첫째,둘째는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유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둔 글들이다.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 우리를 크게 놀라게 하는 것은 <동양평화론>이다. 그는 러시아가 동양을 지배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본 명치정부와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대안에서는 전혀 달랐다. 이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일본이 맹주가 된 협력관계에서 동아시아 평화가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그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으로 만든 것으로 볼 때 그것은 침략의 야욕을 감추는 허울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일본이 전리품으로 얻은 여순 대련을 중국에 돌려주고 여순에 한 · 중 · 일 3국의 동양평화회의체를 설치하고 산하에 3국 공용의 화폐를 발행하여 경제공동체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3국의 주요 도시에 이 은행의 지점들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면 서양 열강의 경제 침탈을 막아 진정한 동양평화가 얻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3국에서 성공하면 태국, 월남, 인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확대할 것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1909년 그 시점에 초국가적 지역경제공동체의 구상은 세계 어느 누구도 거론한 적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안중근을 이런 놀라운 창의의 세계로 인도하였던가. 그가 포로에 관한 법을 거론한 것으로 보면 서양의 신지식에 대한 이해 수준이 만만치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신지식의 기반 위에 그를 창의의 세계로 이끈 것은 당시 조국이 겪던 고초와 역경이 아니었던가 싶다.

책봉조공체제의 중심이던 중국이 국제법의 신질서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든가, 러일전쟁 중에 일본이 자기네 제일 은행권을 한국에 강제로 유통시켜 국가 재정을 일거에 탈취하려하는 불법무도한 현실이 그로 하여금 정의의 이상세계를 꿈꾸게 한 것이 아닐까.

이 소중한 역사가 한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류평화 실현의 역군을 꿈꾸게 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국경제 /  동북아공동체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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