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자녀교육 체험수기>

꼭 작년 이맘때였다. 우리집 작은 아이가 중3이었는데 전북 부안에 있는 변산공동체에서 1주 동안의 체험학교를 마치는 날이었다. 공동체를 일구신 윤구병선생님도 오랜만에 뵐 겸 아이를 데리러 갔었는데 나를 만난 아들은 다짜고짜 고등학교 진학문제에 대해 중요한 결심을 했다면서 농업고등학교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껄껄 웃었다. 철없게만 보이던 아이가 가업을 잇겠다고 하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으랴만 변산공동체에서 뭘 보고 느꼈기에 농부가 되겠다고 할까 몹시 궁금하였다. 아이 말을 종합 해 보면 변산공동체의 열 가구 쯤 되는 식구들이 각자 자유로우면서도 협력노동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기계나 트럭은 공공의 재산으로 공유하고 개인적 삶의 영역은 서로 존중하며 보호되는 모습을 우리 아이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이해 한 것이다. 공공 소유와 개인 소유의 영역을 어떻게 구획하느냐 하는 것은 오랜 쟁투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한 역사적 과정은 모르지만, 변산공동체 1주일의 삶을 통해 우리 아이가 새로운 삶의 유형을 발견 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상사 작은학교’와 ‘마리학교’

  대안적인 공동체 생활을 우리 아이들이 처음 접한 것은 큰 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니 작은애는 유치원 다닐 때로 기억된다.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에 있는 야마기시공동체 유년 낙원촌에서 1주일 동안 지내게 되었다. 이미 야마기시 공동체의 주요한 과정을 다 끝내고 회원활동을 하고 있던 나는 우리 아이가 그곳에서 마음대로 가게, 마음대로 식당, 마음대로 놀이를 경험하면서 의식의 저 깊은 곳에 걸림 없는 자유로움이 자리하기를 바랐었다.

아니나 다를까 낙원촌을 갔다 온 아이들은 더 이상 과자와 아이스크림에 매이지 않게 되었다. 과자건 아이스크림이건 뭐든지 원하는 만큼 다 집어다 먹을 수 있는 체험은 스스로를 과자와 아이스크림에 얽매인 욕망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물론 다시 일상으로 회귀 하는 데는 한 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이때의 체험은 엄청난 충격으로 의식의 저변에 남게 되었으리라 본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익히고 서로 도우며 사는 법을 몸에 생활로 배이게 하는 것이 자식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 된다고 우리 부부는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큰 아이를 ‘실상사 작은학교’라는 이름의 대안 중학교에 보낼 때의 일이다. 2002년이었는데 그해부터 중학교과정이 의무교육이 시행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담임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며 걱정부터 했다. 정상적인 아이를 왜 그런데 보내냐는 것이었다.

인가도 안 난 중학교를 보내서 고등학교는 어쩌려고 그러냐는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무상교육인 정규 중학교를 마다하면 월 40여만 원이나 되는 교육비를 어떻게 감당 할 거냐는 경제적인 문제를 지적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 옳은 말이었고 그 때문에 안전한 제도권학교에 아이를 보내놓고 안도하는 많은 학부모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 아이나 우리 부부가 이런 선택을 후회 한 적은 없다. 그렇기에 둘째 아이도 대안중학교를 보냈고 이어, 고등학교도 둘 다 대안 고등학교를 갔다.

이유는 단 한가지다. 교실붕괴니 학교붕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부부는 지식보다 삶이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삶은 식의주 문제에서 시작된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라 하는 것 역시 옷 보다 먹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본 때문이다.

  책상보다 밥상이 먼저다.

  지리산 골짜기 산골마을의 3월은 추위가 살벌했다. ‘작은가정’이라 하여 농가를 빌려 남녀 학생 4-5명이 함께 생활했다. 요일별로 정해진 순번 따라 새벽 6시에 일어나 먼저 솥에 물을 데우고 그 물로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들어 스스로 밥상을 차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이를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과목으로 여겼다.

책상을 차리기에 앞서 밥상부터 차리는 학교였다.

축제 때는 대안 생리대 만들기 시간이 있었고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 생리대를 같이 만들었다. 면 생리대가 마당 빨랫줄에 깃발처럼 펄럭이면 남학생들은 그 밑으로 오갔다. 여성성에 대한 교육이 이렇게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학부모들은 여러 통로로 삶을 공유했다. 학교의 최고 의사결정은 식구총회라고 불리는 단위에서 했다.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식구총회의 구성원이었다. 한 학년이 열 세명 내외였으니 식구총회가 열리면 30여명에서 50여명이 모였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소신 있는 분들이었다.

학부모는 의무적으로 학교에 나와야 하는 날들이 많다. 우선 작은가정에 한 학기에 두어 번은 1주일씩 나와서 학생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작은가정회의, 학년별 회의, 건축과 재정과 문화 등의 각종 소위원회 회의 등등.

학생보다도 학부모들이 먼 길을 오가느라 고달프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을 익히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누구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 해 볼 겨를을 갖기 힘든 게 사실이다.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시대적 흐름을 읽고 안목을 넓히기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자식을 대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안학교의 학부모가 되면서는 늘 배우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 학교 운영 자체가 그렇다. 매 학기마다 교사/학부모 연수가 2박3일로 진행되어 교육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찬을 하게 된다.

학부모 공부모임도 만들고, 방학 때는 학부모회 주관으로 4박5일의 공동연수를 하기도 했다. 마음공부도 하고 교육이론을 놓고 토론도 한다. 모두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여 부모노릇을 바로 하자는 취지다.

  아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자

  나름대로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 다들 주장이 견고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그러면서도 대개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조화를 이루고 이견의 접점을 찾아내는 현실적인 지혜들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쉽게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었고 오랫동안 논란을 거듭하는 것도 있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토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논란거리조차 되지 않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시험이라는 것이 학생들에게 학습동기를 부여한다는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얼마나 엉터리논리인지 다 안다는 것이 된다.

작은 아이가 다닌 대안중학교에서도 시험을 전혀 안치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험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순위를 가리게 된다. 몇 십 개의 문제를 놓고서 풀고, 못 풀고를 가지고 우열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갖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소질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사람은 누구나 실력과 능력이 점수로 차별화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어린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도리어 더 큰 시험의 폐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사람을 볼 때 늘 1등과 꼴찌가 있는 것으로 세상을 단순화 할 위험이 있다. 시험이 없는 학교는 세상 사람은 1등과 꼴찌로 차별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자꾸 하다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 잘 할 때와 못 할 때가 있을 뿐이라는 가치관을 아이들이 갖게 된다고 본다.

  스스로 정한 것이라야 잘 지킨다.

  학교 교칙을 학생들이 만든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은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고 학생들은 세상이 자기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학교에서는 대부분 학생들이 교칙제정 등 학생들에게 관련되는 중요한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한다.

믿고 그만한 대접을 해 주면 아이들은 또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법이다. 작은 아이가 다니던 대안중학교는 ‘마리학교’라고 하는 곳인데 신입생 면접관으로 재학생이 참여한다. 신입생과 신입생 학부모가 이제 갓 중 2의 면접관 앞에서 면접을 보는 것이다.

큰 애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알려 준적이 있다. 그 충격은 자기 삶의 큰 기둥이 바뀌는 체험이었다고 했다.

국어시간이었다고 한다. 글쓰기 시간인데 아이들이 아무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글 쓰라고 하고는 아무 말이 없어서다. 침묵을 깨고 우리 아이가 어떤 글을 쓰라는 거냐고, 주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도리어 놀라면서 “맘대로 쓰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글을 못 쓰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몇 장을 쓰냐고. 원고지 몇 매 분량으로 쓰냐고 물었는데 역시 선생님은 “맘대로 쓰시면 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번도 맘대로 해 본적이 없고 누군가가 이미 정해 놓은 대로 살아 온 아이들이기에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여덟 살이 되면 초등학교 들어가는 것도 어른들이 정해 놓은 것이고 담임도 학생들이 고른 것이 아니다. 45분 수업하면 15분 쉬는 것도, 국어시간 끝나면 산수책 펴 놓고 국어공부의 맥을 끊어버리 게 하는 것도 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것들이었다.

작은 아이가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을 때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자주 어울려 놀다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었다.

자기가 중학교 가서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호기심에 뭐가 바뀐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랑 놀다가 한 친구가 발 밑에 지나가는 개미를 괜히 부벼 죽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친구를 밀었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놀랐다는 것이다.

모기도 때려잡지 못하게 하고 쫒게 하는 학교에서의 생명존중 생활이 어느새 몸에 밴 자기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보니 그게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앎의 기본은 먼저 자기를 아는 것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지극히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작은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하는 명상수련을 다녀와서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은 자기 처지를 바로 알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 뭘 하고 있는지 항상 자각하라는 엄청난 말이다.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이 말을 작은 아이 학교에서 하는 간화선 수련을 다녀와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논리와 이성에 선행하는 직관을 깨우치는 학습이 바로 명상수련이다. 합리적 사고와 논리적 이치를 깨우치되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 참선공부다. 공부 중에서 가장 큰 공부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집중적으로 하게한다.

논리로서 닥아 갈 수 없는 세계가 엄청나게 많다. 직관과 감성의 세계는 이성의 세계를 이루는 밑바탕이다. 이런 앎은 제도권 학교 어디에서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마리학교에서 학부모로서 직접 접촉한 드넓은 앎의 세계는 학생들과 똑 같다. 간화선, 물수련, 동학수련, 위빠사나 수련, 북미원주민 성년식 수련, 장틀수련, 선화 그리기 등이다.

학생들의 수련시간에 학부모들도 함께 한다. 덕분에 어린 아이들의 세계를 밀착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자식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언성을 높이면서 서로 외면하는 시기가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다.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기회들이 대안학교 학부모 생활을 하다보면 무수히 주어진다. 남의 아이들을 자식처럼 품고 지내야 하는 생활관 생활과 공동수련시간이 그런 때이다.

  ‘풀무학교’와 ‘한빛학교’

  고등학교 역시 둘 다 대안학교로 갔다.

역시 언젠가 물어 봤었다.

대안학교를 가서 후회하거나 실망한 적 없었냐고 물었는데 둘 다 당연히 대안학교 가는 것으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던 게 사실이다. 고등학교는 큰 아이는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 갔고 작은 아이는 담양에 있는 ‘한빛고등학교’에 갔다. 대안학교가 일반학교하고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더니 뭐든지 대화로 다 해결한다는 것, 선생이나 학생이나 다 똑 같은 사람으로 만나다는 것, 자율적이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학교라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학교라는 것 등을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안학교 다니는 것은 좋지만 어차피 사회에 나와야 할 텐데 적응을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냐고 한다.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중화된 가치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 사람이 말하는 ‘적응’이라 필경 경쟁하고 앞서는 것을 말하는 것 일 텐데 모든 상대를 경쟁자로 대하면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사회현실을 걱정 하면서도 그 대열에서 탈락할 까봐 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랑 같이 사흘간 부안 핵 폐기장 찬반 주민투표에 자원봉사자로 갔었다. 트럭을 타고 부안 전역을 다니며 포스터도 붙이고 투표소와 개표소에서 안내 일을 했었다.

그 부안을 중 3이 되어 다시 가서 변산공동체 체험학습을 했던 것이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아이는 당시의 부안 모습을 거의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교육은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의식의 저 밑바닥에 체험으로 만들어지는 좋은 기운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의 원기소가 될 것이고 스스로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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