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동 동포 밀집지역 살기 좋은 곳 만들겠다"
자비로 제복·무전기 갖춰 순찰이후 범죄 부쩍 줄어

지난달 31일 오후 9시쯤, '포자포(包子鋪·만두집)', '구육탕(狗肉湯·보신탕)' 등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서울 대림동의 한 상가 거리에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 11명이 번쩍이는 붉은색 경광봉(警光棒)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이 입은 점퍼 가슴팍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사내들이 향한 곳은 영등포경찰서 대림지구대. 김우정(57) 경감이 "제복이 멋지다"며 반겨 맞았다. 김 경감은 "시끄럽게 떠드는 취객이 있으면 잘 말해서 집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범죄현장을 목격하면 꼭 지구대에 연락해 주세요. 방범대는 사법권이 없으니 위력을 과시해선 안 됩니다."

이들은 30~40대 중국동포 24명으로 구성된 '대림동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이다. 작년 9월 중국동포 6명으로 출발했다. 지금은 회원이 24명이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 밤 9시부터 자정까지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대림동 일대를 순찰한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에서 순찰활동을 하는‘대림동 중국동포 자율방범대’대원들은“중국동포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싶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오학봉, 김봉규, 이군철 대장, 태룡, 방홍권 대원.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의 외국인 자율방범대는 서울 영등포·구로·금천, 충남 천안, 경기 안산, 제주 방범대 등 6개다. 이 가운데 가장 활동이 활발한 곳이 '대림동(영등포)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이다.

대림동은 인력소개업소가 몰려 있고 집값이 싼 다세대주택이 많다. 전체 주민(6만8013명) 다섯명 중 한명(21%·1만4380명)이 중국인과 중국 국적 동포들이다.

가난한 외지인이 북적대는 동네는 어디나 그렇듯이 대림동도 크고 작은 범죄가 많은 편이다. 작년 한해 동안 대림동에서 형사 입건된 외국인 피의자는 220명이다. 같은 기간 서울 전역에서 입건된 외국인 피의자(4447명) 20명 중 1명이 대림동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동포 자율방범대가 결성되면서 차츰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1대 방범대장을 지낸 중국동포 이림빈(39)씨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문을 들은 중국동포들이 스스로 대원이 되겠다고 찾아왔다.

김우정 경감은 "방범대 활동과 경찰의 단속 덕분에 범죄 발생 건수가 작년보다 30%쯤 줄었다"며 "중국인이나 중국동포들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 말리는 데도 방범대가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방범대원 24명은 딱 한명만 빼고 전부 중국동포다. 유일한 한국인 방범대원인 이주헌(48)씨는 2003년 건설 현장에서 만난 중국동포(42)와 결혼한 뒤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2006년 중국동포 100여명이 뭉친 '한마음 축구회'를 만들어 매주 한국인 축구팀들과 친선 경기를 벌이고 있다.

그는 "대림동에 사는 중국동포가 늘어날수록 원래 살던 한국인 주민들의 시선은 더 싸늘해지고 있다"며 "축구회 멤버인 이림빈씨와 함께 '축구만 할 게 아니라 거리로 나서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중국 음식 식재료 도매상, 식당 배달원, 일당 6만원짜리 막일꾼 등 어렵게 먹고사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과 시간을 보태 방범대의 모양새를 갖췄다. 66㎡(20평)짜리 양꼬치 가게를 하는 이림빈씨가 52만원을 들여 방범대 제복을 마련했고,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이군철(42)씨가 108만원을 털어 무전기 4대를 장만했다. 방범대원끼리 휴대전화로 연락하다 보니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왔던 것이다.

방범대의 주요 임무는 취객을 안전하게 귀가시키고 주민들 시비를 말리는 일이다. 31일 밤 11시쯤 한 주유소 앞 도로에서 허름한 양복을 입은 30대 남자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었다. 대원들이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된다"고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 일어난 남자는 "깜빡 잠이 들었다"며 비틀비틀 어딘가로 걸어갔다. 방범대원 하임봉(31)씨는 "한국에 돈을 벌러 온 동포들이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자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대림동 상인들은 한국인, 중국인 할 것 없이 방범대의 활동을 반기고 있었다. 15년째 대림동 중앙시장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해온 한국인 김영순(여·40)씨는 "술에 취한 중국동포들이 노상 방뇨를 하거나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아 밤길을 다닐 때면 겁이 났는데 요즘은 방범대가 순찰을 도니까 안심이 된다"고 했다.

양꼬치 가게를 하는 중국동포 안명호(59)씨는 "경찰이 순찰을 다니면 정식으로 외국인등록을 한 중국동포들까지 발길을 끊는다"며 "방범대가 나선 뒤로 장사도 잘되고 행패 부리는 사람도 줄었다"고 했다. 방범대원 김봉규(30)씨는 "같은 중국동포 식당 주인들이 '좋은 일 하고 있다'고 격려해줄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방범대의 주축인 이림빈씨는 12년 전 경기도 안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오른손을 기계에 잃었다. 그는 "한국인들을 싸잡아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며 "결국 이해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방범대 활동이 그 시작이다.

대림동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은 다음달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단결을 위해 '한마음 체육대회'를 열 계획이다. 한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용인민속촌으로 단체 여행도 떠날 참이다. 지역 노인복지관에서 자원 봉사할 계획도 세워 놨다.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45)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 밀집 지역이 많이 생기면서 '게토(ghetto·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을 일컫는 말로 빈민가를 뜻한다)'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며 "자율방범대 활동은 외국인들이 직접 자신들이 사는 동네를 살기 좋은 곳으로 가꾸려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대림역 앞에서 중국동포들로 구성된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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