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조선인의 문화예술 및 의료위생, 체육

만주조선인의 문화예술은 천입초기부터 조선고유의 문화유산을 계승하여 이루어졌으며 30여 년의 개척과 반일투쟁가운데서 발전되어 자체의 특징을 소유하게 되었다.

제1절 조선인의 문학

1. 문학단체

청말, 문화계몽운동의 흥기와 더불어 계몽문학사단이 간도에서 육속 발족되었다. 1909년 연길에 《간도교육회》가 건립되었고 《월보》잡지가 창간되었다. 1914년, 연길, 용정 등 지역의 조선청년들이 《청년친목회》, 《대동협신회(大东协新会)》등 문화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청년》, 《대진》잡지를 꾸렸다. 1921년, 이한수(李汉洙)가 용정에 《신유시사新酉诗社)》를 꾸렸는데 성원은 11명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1925년 용정 대성중학교의 김시룡(金时龙)씨가 《문우회》를 내오고 종합성잡지《문우》를 창간했다. 1934년 용정영신중학교 이국복(李国福)의 창의에 의해 강경애를 고문으로 하는 북향호가 세워졌고 잡지 《북향》은 6기를 꾸려나갔다. 《북향회》는 조선인작가진을 형성하고 신인작가양성과 사실주의문학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9.18사변 후 많은 진보적 문학단체가 제취당하였다. 1945년 9월 《간도예문협회》가 건립되었고 동년 12월에 김유훈 등이 연길에서《동라(铜锣)문인동맹》을 발기하였다.

2. 구두문학

천입초기, 사회조건과 인쇄 ,출판 등 여러 가지 제한으로 인해 만주조선인문학은 구두문학을 위주로 했다. 구두문학의 주요형식은 민요, 민간이야기, 민담 등이 있다. 내용은 대부분이 이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반영하고 조선인의 총명과 지혜, 새 생활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 《진달렁, 《홍송과 인삼》, 《춘향과 이도령》, 《심청의 이야기》 등 이다.

1910년 이후에는 항일의 내용을 주제로 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이순신의 거북선》, 《의군분전》 등 작품들이 나왔다.

3. 소설

20년대 말, 30년대 초에 반일사상을 지닌 조선인작가 강경애, 최서해, 안수길 등은 간도에서 소설 창작에 집념했다.

강경애(1906-1944)는 1929-1931년, 1932-1934년 간도 용정에 체유하면서 소설을 썼다. 1929년 살길을 찾아 간도에 온 그녀는 용정일대에서 근 2년이나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또 직업이 없어 허덕이기도 했다. 이 시기 작품으로는 처녀작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1931), 단편소설《부자》, 《그 여자》 (1931-1932), 《채전》(1933), 《축구전》 (1933), 장편소설《인간문제》(1934), 중편소설《소금》(1934),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 등 이다. 그녀의 대표작《인간문제》는 1934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12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1949년 평양에서, 1992년 서울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중국과 소련에서도 50년대에 번역 출판되었다. 강경애는 25년 동안에 장편소설 2부, 중편소설 1부, 단편소설 20편, 평론, 수필 27편, 시 8편을 발표했다. 《인간문제》는 조선소설문학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용정에는 소설가 강경애가 있었다. 언제나 진실한 사상으로 착실하게 생활하여 나가는 씨는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이 한이다.

어린애가 없어서 탄식하지만 그 불건강 때문에 창작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어찌 씨 자신만의 한이랴》 (《문학풍토기), 간도편, 《인문평론) 1940.6)

1939년 고향 황해도로 돌아간 후 1944년 4월 26일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강경애는 작품응 내놓지 못했다.

강경애의 작품은 간도농촌사회의 모순을 심각히 반영함으로써 소설문학발전에 공헌하였다.

안수길(1911-1977)은 조선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여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1926년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32-1933년 여름까지 용정 팔도구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5년부터 광복까지 용정에서 문학 활동을 벌렸다. 문학동인회《북향》의 창건에 힘썼으며 1937년 이후부터 《간도일보》, 《만선일보》기자로 지냈다. 재만조선인작가 소설집《싹트는 대지》(1941)출간을 위해 적잖은 노력을 했다. 광복 후 조선으로 나가 창작을 계속했다.

안수길의 작품으로는 단편 《적십자 병원장》, 창작집《북원》(1943), 장편 《북향보》, 단편 《장》이다. 안수길의 작품은 간도 조선이주민의 수난의 피눈물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놓은 역사기록이다. 특히 이주농민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제일 많다.
최서해(1901-1932)는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의 빈농가에서 태여났다. 보통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7년 동안 유랑생활에서 고난 많은 인생행로를 걸으면서 풍부한 생활경험을 쌓았다. 1923년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용정으로 들어왔다가 재차 귀국, 1923년 12월에 서울로 갔다.

최서해의 작품은 《고국》(1924), 《탈출기》, 《혈흔》, 《박돌의 죽음》, 《홍염》 등이 있다. 《 탈출기》는 초기무산계급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시기 향토작가로는 소설가 김창걸(1911-1992)씨가 있다. 1911년 12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여났으며 중국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용정 은진중학, 대성중학에서 공부했다. 다년간 홀몸으로 소련 연해주, 서울과 북관지방 등지로 방랑했다. 1934년 귀가하여 농사를 짓다가 교원, 점원, 사무원을 하였다. 대표작 《암야》, 《낙제》(1939), 《두 번째 고향》(1938), 《무빈골 전설》(1936), 《개아들》 (1943)등이 있다. 1936년부터 1943년 사이 단편소설 20여 편과 많은 시, 수필을 창작하였다. 광복 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소설, 희곡, 시조, 평론문장을 썼다. 그의 소설은 강렬한 민족감정이 흘러넘쳤다. 그는 중국조선인향토문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해방전쟁시기 김창호의 《그들의 길》, 송악의 《전선》 등 우수한 단편소설은 조선인이 참군, 참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전투생활을 묘사하였으며 많은 영웅형상을 부각했다.

이와 달리 한 부류의 작가는 일제가 수매한 반동적인 조선인문인이다. 소설 《벼》, 《방목》, 《밀림속의 여인》, 《4호실》 등은 《왕토락토》를 고취하면서 《만선 일체》의 식민지유론을 고취하는 기계로 되었다.

4. 시

이주초기, 시조와 한문시가 적지 않게 창작되었다. 당시의 우국지사, 진보적 인사들이 창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류화절(柳花节)》, 《장부사》, 《갑중검》, 《지사음》이 현존 하고 있다. 《월강곡》, 《기다림》 등 한문시는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하였다.

근대, 현대에 접어들어 많은 시가 창작되고 우수한 민족 시인들이 활약했다.

이욱(1907-1984)은 소련 울라지보스또크의 신안촌에서 태여났다. 1924년 《간도일보》 에 처녀작 《생명의 예물》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연변에서 비교적 일찍 발표된 자유서정시이다. 《척촉화》(1935), 《금붕어》(1937), 《혈흔에 핀 꽃》(1940), 《5월의 붉은 맘씨》(1944), 《북두성》(1944) 등 서정시가 있다. 이욱은 시집 《북두성》(1947), 《북륙의 서정》(1949)을 출판하였다. 그의 시는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암흑한 현실에 저항하고 미래에 대한 미학적 이상을 구가하였다.

윤해영(1909-1948?)은 1920년대 후반기에 용정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녕안, 신안진 등 지역에서 문화사업에 종사했다. 1930년 초부터 많은 시편을 내놓았는데 현존하는 것은 가사《선구자》(일명《용정의 노래),1932)와 《만주 시인집》에 수록된 서정시 《해란강》(1939), 《오랑캐노렁(1939), 《사계(四季)》(1942), 《발해고지》(1942) 등이 있다. 《선구자》는 창작된 후 (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라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윤동주(1917-1945)는 1917년 12월 30일 용정시 명동촌의 교원가정에서 태여났다. 1937년 명동중학교를 마쳤고 이듬해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42년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했다가 그해 10월 교도 도오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5년 2월 16일 일본에서 옥사했다.

윤동주는 1934년에 첫 서정시《삶과 죽음》을 썼으며 광명중학교시절에 천주교회에서 발간하는 《카톨릭소년》지역에 동주(童舟)란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 《비자루》, 《무얼 먹고 사나》를 발표했다. 1948년 1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서시》, 《돌어와 보는 밤》(1941), 《무서운 시간》(1941), 《슬픈 족속》(1938) 등이 있다.

윤동주는 독자적인 예술추구로 조선인시문학을 한결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시기 종합시집도 출판되었다. 《만주 시인집》(1941), 《재만조선인 시집》 (1943), 《태풍》(1947)이 망라된다.


5. 산문

1925년 용정《문우》잡지역에 김진택의 《제2고향옆이란 수필이 발표되었다. 1928-1930년 《민성보》에 일부 수필이 실렸고 1936년《북향》잡지에 《용정인상기》가 실렸다. 1939년에는 《재만조선인 수필선》이 출간되었다.


6. 가요

조선인의 전통가요는 노동인민 중에서 제일 먼저 전해졌으며 수량도 극히 많다. 내용 역시 풍부한바 인간감정세계의 방방곡곡에 그 선률이 미치게 되었다.

이주초기의 민요는 인민들의 생활과 사상감정, 념원을 담은 것이 주된다. 《북간도》, 《이사길》, 《신아리랑》 등은 생활의 실정과 불운의 신세를 개탄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수백 수의 항일가곡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항일가요는 전문적인 작가, 예술가들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항일투사의 집단적인 힘과 창조적 재능에 의해 창작되었다. 《총 동원갬, 《유격대행진곡》, 《민족 해방갬, 《부녀 해방갬, 《농민 혁명갬, 《연길 감옥갬, 《소년투사의 노렁 등은 모두 훌륭한 시가작품이다.

항일가요는 풍부하고 심오한 철리를 인민대중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고 알기쉬운 다양한 형식으로 일반화하였다. 항일가요는 조선민족의 전통적 악곡 을 현대적 악곡과 결합된 시가 형태로서 시적 운률과 음악적 성격이 정제되여 가창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가요는 수천만 백성을 항일의 최전선으로 불렀고 민족해방을 위한 피 흘리는 싸움터에서 불멸의 기발로 휘날렸다.



7. 극본

조선인 항일투사에 의하여 항일을 주제로 하는 극본이 창작되고 공연되었다. 특히 30년대 전반기에 극작품이 많이 창작, 공연되였는데 당시 공연된 작품으로는 《굶주린 사람들의 탄식》, 《굿과 약》, 《매혼》, 《춘보와 길남이》, 《이 원쑤를 갚으리》이다. 장막극 《혈해지창》, 《싸우는 밀림》, 《유언을 받들고》가 대표작이다.

극 《혈해지창》(2막3장, 까마귀 작)은 1937년 항일문예전사들의 집단창작이다. 이 극은 1937년 8월 14일(음력) 하루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통하여 30년대 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본질적인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극본은 중국인 송어머니와 그의 아들 왕평이 일본군에게 추격당한 부상 입은 조선인항일연군정찰병을 구하기 위하여 장렬히 희생 된 이야기를 통하여 두 민족 사이의 피로 맺은 우의를 구가하였다.


제2절 조선인의 예술

1. 예술단체

조선인의 예술단체는 1946년 초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연변에 《불꽃 극단》, 《길동군구 정치부 문공단》이 건립되었고 목단강에 《목단강민주연맹 문공단》 (후엔 《목단강시 문공단》으로 개명, 1949년 8월 할빈의 《송강성 로신 문공단》과 합병)이 세워졌다. 할빈에 《송강군구 8퇀 선전대》 (전신은 조선의용군3지대선전대)가 건립되었고 통화에 《요녕군구 이홍광지대 선전대》 등이 있게 되었다.

《길동군 정치부 문공단》은 1947년 12월 연변전원공소 소속으로 되었다가 단기간의 준비를 거쳐 1948년 3월 16일 《연변지구전원공서 민족사무처 문공단》 (《연변문공단)으로 약칭)으로 설립되었으며 1953년 1월에는 연변가무단으로 개칭되었다. 편제는 93명이었다.


2. 희곡

조선민족예술에서 연극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1914년경 용정, 연길 등 지역에서 민권자유, 남녀평등과 자유 혼인을 주장하는 신파극 《새 가정》, 《미신타파》가 출연되었고 1925년경 《경숙이의 마지막》, 《야학으로 가는 길》 등이 훈춘일대에서 공연되었다. 1927년, 용정에 반과외적인 연극단체 《예우사》가 나타났고 이들은 무언극 《그렇다!》등 여러 편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20년대 조선인의 희곡은 전직 작가와 전업단체가 없었으나 대중들의 업여 출연으로 많은 관중을 갖고 있었다.
9.18사변 후, 동북항일유격근거지역에서는 연극창작과 연출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혈해지창》, 《4·6제》, 《싸우는 밀림》이 보다 대표적 의의를 가진다. 일제통치구에서는 《흰 독수리(白鹫)》, 《왕자호동(王子好童)》 등 연극이 공연되었다.

1945-1949년 연극은 더욱 활기를 띠였다. 간도에서 창작, 공연된 《승리 의 혈사》, 박노을의 장막극 《아침 해 솟았다.》와 《막다른 골목》, 고철의 《길》과 《꼬맹이의 참군》, 신활의 가극《인민무장은 일떠섰다.》와 장막극 《누가 죄인이냐?》, 그리고 장막극《토성》, 가극 《승리의 대 진군》 등이 있으며 이밖에 번역극 《애국자》와 《이완 꼬루비》가 있다. 목단강지구에서 출연된 것으로는 《밀림의 고백》, 《새 결의》, 《너?! 이 놈》, 가극 《그리 운 강남》, 비극 《안중근》, 정극 《전선》, 희극 《추석명절》, 풍자극 《인생안내》 등이 있고 통화에 주둔하고 있던 이홍광지대 선전대에서 창작, 공연한 《이홍광》과 가극 《폭파영웅 조성두》, 그리고 제3지대 문공대에서 공연한 《우리의 맹세》 등이 있다.

《승리의 혈사》는 1930년대 초, 일제가 간도의 많은 부락을 재더미로 만들고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해란강대혈안을 소재로 하였다. 1946년 겨울, 4일간 지속된 해란강청산대회 기간에 이스크라극단이 공연하였다. 이 극은 해방전쟁시기 조선민족 극문화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작품이다.

장막극《너?! 이 놈》은 해방 전과 해방 후 두 시대를 이어가면서 사회주의자 이동철 삼남매의 성장과정을 그렸다. 이 극은 해방직후 반간청산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1947년 4월, 목단강시조선인민주동맹 문공단에서 공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3. 음악

재만 조선인은 오랜 세월동안 조선에서 전해온 민요거나 계몽가요를 불렀다. 《월강곡》, 《요람곡》, 《달아, 달아》, 《아리랑》, 《농부갬 등이 널리 애창된 민요이다. 1954년 5월 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민가집이 출판되였는데 49수의 조선민요가 수록되었다. 1963년에는 180수의 가요를 수록한 《 민가집》이 정리, 출판되었다.

20세기 초에 간도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종교는 찬송가를 통하여 대량적으로 구라파음악을 접촉하게 되었다. 김선목이 지도한 용정동산예배당합창단은 조선인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20년대에 접어들어 중학교를 기반으로 하여 많은 음악사업자들이 신근한 노력으로 작곡, 성악, 기악 등 여러면에서 민족적인 토대가 닦아졌다. 1920년대 중기부터 조선민족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극영(1903.9.6-1988.11.15)은 조선현대음악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일본 도꾜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소년합창단을 조직하였고 《반달》 등 많은 노래를 작곡하여 조선아동음악창작의 선구자 역활을 하였다. 1926년,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와 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윤극영 100곡집》(등사본)을 출판했다. 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년밖에 지탱하지 못했다. 1947년 고향 서울로 돌아갔다.

황병덕은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대 초에 용정 광명여자고등학교 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음악인재를 양성하였다.

허흥순은 1938년에 서울 이화전문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용정 명신여자고등학교에서 피아노연주를 널리 보급했다.

최남은 1943년에 서울 이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용정 광명여자고등학교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간도의 성악예술발전에 기여하였다.

김광희는 일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30년대 초부터 용정에서 많은 바이올린연주가를 양성하였으며 자신의 독주회도 열었다.

30년대부터 40년대 초에는 조선인전문예술단체가 없었지만 각 중학교와 교회당에 취주악대가 보편적으로 조직되었다.

박창해는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 관악기를 배웠으며 40년대 초 용정 은진중학교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관악대를 꾸려 연변의 취주악발전에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문하연(1909.3.14-1987.5.17)은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30년대 중기부터 해방직후까지 간도에 있으면서 용정 대성중학교 음악교원, 간도사도학교 교장직을 맡고 재만조선인 음악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용정 대성중학교에서 취주악대와 하모니카대를 조직하였는데 하모니카대는 각 성부를 구전하게 갖춘 악대였다. 문하연은 자기의 독창회도 열었으며 《두만강 배사공》 등 가요도 작곡하였다.

그땐 전문적인 조선인악단은 없었으나 1943년에 건립된 과외악단인 간도 방송국방송 악단(허세록 지휘)과 《협화 청년악대》( 허세록 지휘)가 경상적으로 활동하였다.

작곡가 조두남은 흑룡강성과 간도일대에서 과외악대를 조직하고 가극《에밀레종》을 창작, 공연하였으며 《선구자》 등 우수한 가요도 작곡하였다.

김선문은 30년대 말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용정동산예배당의 피아노반주자로 있었고 그 후 명신여자고등학교에서 취주악대를 지도하였다.

그 시기 재능있는 조선민족연주가들도 있었다. 위만주국 신경교향악단의 제1 바이올린연주원 김동진(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생), 할빈교향악단의 첼로연주원 김인수 (일본 나까노음악학교 졸업생) 등은 저명한 연주가였다.

동시기 조선인음악의 한개 뚜렷한 분야는 항일가요이다. 항일가요는 항일 근거지음악이 주체를 이루고 있다. 당시 애창되였던 의병가요, 계몽가요, 신민요, 동요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른 항일가요들이 많았다. 동요《고드름》 (윤극영 곡)에 새 가사를 붙인 《여성 해방갬를 그 일예로 들 수 있다. 《유격대행진곡》, 《총 동원갬,《결사전갬, 《의회 주권갬가 항일가요의 주체를 이룬다.

해방전쟁시기에 허세록, 박우, 고자성, 정진옥 등이 음악창작과 악대건설, 공연활동에서 골간으로 작용했다.

허세록(1916.9.8(음력)-2000.)소련 연해주 니꼴쓰크 우쑤리스키에서 태여났다. 1930년 용정에 이주 온 후 선후하여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1937년 문하연의 건의하에 서울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며 홍란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간도예문협회, 동라문인동맹, 중쏘한문화협회 등 조직의 음악부장직을 담당하였다. 주요작품은 《베짜기 노렁, 취악곡 《승리행진곡》 등이 있다. 간도조선민족음악은 헤세록이 등장해서야 자체의 걸출한 선구자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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