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것처럼 툭툭 꺾어지는 투박한 사투리의 매력
토속어를 잘 구사하는 소설가 최국철은 하천을 주름잡는 싱싱한 가물치 같았다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훈춘 토종' 소설가 최국철(왼쪽) 선생과 함께 한 '경상도 청송산 토종'인 필자.
토종이나 자연산이 환영받는 시대가 왔다. 사람의 얼굴도, 생선회도 자연산이 그만큼 귀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오래된 우리의 토종 같은 순수 자연산의 얼굴을 만났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십여 년 전 해운대 추리문학관에서였다. 당시 연변작가들의 모국 방문이 러시를 이룰 때였다. 지금은 몸이 불편한 소설가 김승옥 선생이 연변에서도 소외된 작가들을 찾아내 모국 방문을 주선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풋풋했다. 아무런 가식이 없는 자연 상태의 활기 넘치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정말 우리의 온 하천을 주름잡는 한 마리 싱싱한 가물치를 연상케 했다. 문정희 시인이 읊었던가. 요새는 가물치처럼 싱싱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다고.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시인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던 가물치 같은 사내가 바로 연변에서 훈춘 사투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소설가 최국철이다. 그를 지난 여름 연길에서 다시 만났다. 그를 보면서 가물치를 생각한 것은 '누어치'라는 독특한 훈춘 토속어 때문이었다. 아니, 말씨뿐 아니라 몸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이 어딘가 낯이 익어보였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이나 서울 쪽 사람들을 봤을 때의 낯설음과 대비되었다.

그것도 말씨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나의 느낌은 다분히 인종학적이다. 원래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는 문화 언어 쪽으로 본다면 같은 종족이다. 우선 말투가 비슷하다. 노래 가락도 비슷하다. 몇 번씩 꺾고 떠는 이른바 '메나리' 가락 같다. 지금은 한 민족의 전통 문양이 되어버린 색동 문양이 사실 이쪽 지방의 문양이다. 그렇고 보면 고대 대륙으로부터 반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동해안으로 따라 남하한 같은 종족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아무튼 누어치라는 사투리 때문에 낯익음과 토종의 이미지가 쉽게 튕겨져 나왔다. 훈춘 누어치는 함경도 사투리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하다는 경흥과 온성 사람들의 말투가 섞여 형성된 것으로 연변의 여느 지역 말씨보다 개성이 강하다. 이를테면 '화투를 치자'를 '화투를 티자'라 하고, 정개를 덩개로, 심지어 제주도 사투리를 살짝 닮은 듯한 어디어디 '갔다옵서예'라는 어투도 있다. 본디 함경도 사투리가 투박한 편인데 훈춘 누어치는 훨씬 투박하다. 마른나무 가지를 꺾는 것처럼 툭툭 꺾어지는 투박한 것이 훈춘 누어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누어치의 뜻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대로 살아옴'이란 뜻이 있는 누업에 명사형 치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함경북도 온성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양수진 출신이다. 훈춘은 연변에서도 변방 시골이다. 그는 연변문단에서 진정한 촌놈, 아니 순 토종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시골에서 청년사업부터 사법조리를 거쳐 도문시 문련 주석까지 오로지 그 순수 토종의 힘이 빚어낸 누어치의 힘이 발휘했다 할 수 있다.

'서서 와도 되지만 서서 가면 안 된다.'

'어떻게 가야 하는가?'

반드시 누워가란다. 그를 만나면 코가 부러지도록 술을 마시고 정말 택시에 쓰러져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님을 대접하는 최국철의 그 시골 인심은 역시 우리네 옛 사나이 인심일 것이다. 점점 줄어져가는 그 사나이의 인심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는 진정한 가물치 같은 사나이인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훈춘은 삼국의 국경지대여서 정치적으로는 러시아, 일본, 중국의 지배를 받았거나 받고 있지만 실제 그곳의 주인은 대대로 살아옴이란 뜻의 누어치처럼 진정한 누어치, 곧 만주족(여진족)과 조선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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