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신문 류일석 기자>

4월20일, 룡정시 지신진 룡남촌으로 비보가 전해졌다. 방취자로 한국에 간지 1년 4개월밖에 안된 이 촌 제4촌민소조의 한금옥(54세) 녀성이 세상을 떠났다는것이였다.

《그렇게 가지 말라는데 왜 갔느냐?》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남편은 땅을 치며 넉두리를 했다. 몇년전에 여러 가지 병으로 로동능력을 상실하고 눈병까지 들어 앞못보는 남편의 애절한 모습에 이웃들도 눈물을 쏟았다. 

한금옥, 생활에 대한 집념이 강한 평범한 조선족농민이다.그녀는 한국행 전에도 심장병과 갑상선 등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시름시름 끊지 않는 병으로 농촌일도 항상 버겁기만 했다. 허나 자신의 두 손으로 궁핍한 집안살림을 춰세우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는 그녀의 소박한 념원과 집념은 그녀로 하여금 한국행을 택하게 했다. 어쩌면 제일 큰 희망이기도 했고 남들이 다 가는 한국행에 대한 승부욕이기도 했다. 

동떨어진 농촌에서 정보에 눈이 어둡고 아는 사람이 적을수밖에 없었던 탓에 한금옥녀성은 비행기표까지 포함해도 몇천원이면 될수 있었던 한국 방문취업제수속을 3만원이라는 거금으로 브로커들에게 의거했다.

털면 먼지밖에 없는 살림에 비장한 결심을 내린 그녀는 동분서주하며 2푼리자를 주기로 하고 그녀의 가정엔 천문수자나 다름없는  3만원이란 거금을  고리대로 맡았다. 그녀는 브로커들에게 이끌려 북경에 가 2개월동안 필요도 없는 《한국어강습》이라는 고행까지 치르면서 그가 일생을 건 한국행을 겨우 이루게 되였다.

한국행, 이는 한금옥녀성이 가문을 일구려는 꿈의 전부였고 유일한 길이였다. 잔병에 시름시름 앓음이 끝이 없었던 한금옥녀성은 이을 악물고 악착스레 돈을 벌었다. 가냘픈 몸으로 한국서 중환자의 병간호로 월 100만(한화)원을 받으며1년동안 뼈돈을 벌어 고리대 3만원의 본전과 리자를 겨우 물었다 한다. 

3만원의 빚을 다 물자 이제부턴 앓는 남편의 치료비도 벌고  과년한 딸애를 시집도 보내고 오래동안 벼르고 벼르던 집도 새로 짓고... 좋은 꿈들을 전화로 남편과 같이 많이 꾸었다 한다.  빚을 다 문 이제부터가 돈벌기의 시작이였으니 말이다.

헌데 겨우 4개월동안 돈버는 재미를 맛볼가 했는데 그녀는 안타깝게도 쓰러지고말았다. 참고 견디던 갑상선 심장마비, 급성페결핵 등 병들이 고된 로동으로 극한에 다달아 끝내는 쓰러지고말았던것이다. 쓸어질 때까지 그녀는 돈버는 현장에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3일만에 그녀는 한마디 말을 남겼다 한다.

《집으로 가고싶다. 집에 가게 해달라.》

허나 그녀의 이 말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일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입원 3일만에 영영 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4월 23일, 이 날은 고향까지 돌아올수 없게 된 한금옥녀성의 유체를 한국에서 화장하는 날이다.  오후 5시경 고인의 유체조차 보지 못한 남편과 자식들은 한국의 화장시간에 맞추어 유상을 밥상에 놓고 집안에서 고별식과 장례식을 간단히 치를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막내딸은 한국에 갈 경비가 없어 못가고 맏사위가 한국에서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다 한다.    《가지 말라고 애원했건만 왜 갔누!!》

남편의 처절한 넉두리는 많은 이웃들의 가슴을 허볐다 이젠 빚을 다 물었으니 한해만 더 벌고 오겠다던 안해였단다. 

한금옥녀성의 죽음에 마을 이웃들 모두 남일같지 않게 슬퍼하고있다.  그녀의 죽음은 지난해 이 마을의 다른 한 농민의 죽음을 이은 한국에서의 두번째 불상사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1개 농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명 혹은 두명씩 한국에 가 있는 현황이다. . 

그만큼 이 마을 농민들은 한국행의 덕도 많은 반면 한국행을 통한 고뇌도 이어지고있다.

앓는 몸으로 한국으로 떠난 안해를 원망도 많이 하면서도 또 소박한 꿈도 많이 꿔온 실명한 남편에겐 안해의 죽음소식이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다.  가지 말라고 그토록 애원했건만 끝내 가더니 이젠 영영 가버린 안해가 안스럽고 불쌍하기만 한 남편이다.

정말로 앓는 몸으로라도 한국행을 해야만 유일한 삶의 출로였던지, 실명되고 로동력을 상실한 남편은 또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금옥녀성의 죽움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있다.

방취자 엄마를 대신하려 했건만

이날, 장례식에서 이제 엄마없이 앞못보는 병약한 아버지와 어떻게 살겠느냐는 동네 사람들의 위로의 말에 올해 29살이고 미혼인 한금옥농민의 둘째 딸은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잘 모시기 위해서라도 방취자 엄마를 대신하여 일하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 해당 부문에 한국입국신청을 했지만 불가능하다면서 아직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방취제에 실오리같은 꿈을 묻고있었다. 그러면서 일찍 20살 미만에 한국 연수를 가서 IMF를 겪다나니 돈도 별로 벌지 못했고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나중엔 불법체류딱지가 붙은채 한국에서의 강제추방을 당한 때문인지 한국진출이 어렵게 되였다고 하면서도 한국에 꿀단지가 묻혀있는지 그냥 방취자꿈에 부풀어있었다.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갔지만 무작정 돈은커녕 결과적으로 죽으러 한국에 간 엄마를 따르려는 과년한 한 농촌처녀의 꿈만이 아닌  방취자꿈은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금후 한시기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을거라는 지성인들의 고견이 있고 또 한국 갔다가 한줌의 재가 된 가슴아픈 일이 있는 이 촌민소조 농민들이 계속 방취자꿈에서 해탈되지 않는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보면 방취제에 의한 한국진출은 치부의 길인것만은 틀림없다는게 이 동네 늙은이들의 안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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