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날 무렵은 벼농사를 하는 이곳 중국북방의 농촌이 제일 바쁜 철이었다. 망종전으로 종자를 밀어 넣어야 가을에 가서 쌀알이라도 건진다며 생산대장은 어뜩 새벽부터 마을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그러면 그것을 신호로 이집 저집의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좀 지나면 식사를 마친 일꾼들이 골목골목에서 빠져나와 마을 안 공터로 모여들곤 했다. 생산대장의 지휘 하에 하루 일거리를 분공 받은 일꾼들이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논으로 밭으로 밀려나간다. 당일 출근부를 기록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있었다. 그 사람을 우린 기공원이라고 불렀다. 기공원은 어떤 일에 누구누구가 참여했다는 기록을 해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본인과 확인대조를 하곤 했다. 기공원의 기록과 본인의 기록이 맞지 않아 싸우는 때가 늘 있었는데 보통 아낙네들과의 싸움이 더 잦았다. 옴니암니 따지기 좋아하는 아낙들이 한 점의 오차라도 허용하고 넘어가는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솜씨나 노동 표현에 따라 매 사람이 받는 보수는 저만큼 달랐다. 일솜씨가 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자기 집일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받는 대우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노농과 햇내기 일군이 받는 대우도 달랐고 여자와 남자가 받는 대우도 달랐다. 그렇게 1년 동안 누계된 공수는 연말에 가서 분홍으로 직결되어 계산됐다. 즉 1년 동안 일한 대가를 그동안 분양받아 먹은 양식 값을 감하고 나머지는 현찰로 받을 수 있었는데 힘깨나 쓰는 장정이 서넛은 있는 집이라야 고작 인민페로 천여원이 되나마나했다. 그럼에도 마을에서는 그런 집을 부잣집으로 쳐주며 ‘따랑후’라고 불렀다. 큰 부자라는 뜻인 이 호칭은 1년 동안 그 집 식구들이 어깨에 힘을 넣고 다닐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자식들이 성가하는데도 퍽 유리했다. 인격이 좀 모자라는 편이래도 그런 호칭이 당사자의 허물을 어지간히 덮어주는 방패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돈이란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그 사회 체제에 관계없이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는 물건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연말에 가서 1년 동안 일한 대가를 미루었다가 한꺼번에 타는 돈도 탐이 났지만 그보다도 나에게 더 요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을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의 추천 하에 대학으로 가는 것이었다. 마을당 한해에 단 한 명씩 차례지는 대학생 명액은 일자무식이래도 가정성분이 깨끗하고 사회표현이 좋은 선진형의 청년만을 그 후보로 삼았기에 나는 극력 군중위신을 수립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몸을 사릴 수가 없었다. 밭갈이부터 시작되는 농사일은 엄동설한까지 하루도 쉴 사이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쩌다 비가 내려 반나절이라도 쉴 때면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노동은 우리 생활의 전부였고 몸에 배여 고질이 되어 있었다. 뙤약볕 아래서 허리를 꼬부리고 하는 모내기나 김매기 일은 사람의 진액을 뽑는 일 같아도 한겨울 농토수리건설 노동에 비기면 그래도 그것은 신선놀음이었다. 침을 뱉으면 몇 초도 안 돼 얼음으로 변해버리는 이곳 북방의 한파 속에서 곡괭이를 휘둘러 언 땅을 까내여 목도채로 메어 나르는 일은 웬만한 인내력이 없으면 견뎌낼 수가 없는 험한 일이였다. 손을 놓고 서있으면 손가락이 곱아들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했기에 겨울철 일은 힘겹고도 지겨운 일이였다. 하루 노동이 끝나 집으로 돌아와 일에 지쳐 녹초가 된 몸을 아랫목에 누일 때마다 어떻게 하나 돌아오는 해의 대학생 후보 선거에서 꼭 추천을 받아야겠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어금니를 깨어 물곤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 월계관은 나에게 돌아오질 않았다. 내 앞에는 나보다 조건이 훨씬 우월한 사람이 셋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1호 후보는 성분이 좋은데다 마을의 빈하 중농대표를 지내는 김주임 네 큰딸이었고 2호 후보는 청년단 조직사업을 맡은 단지부 서기장이었으며 3호 후보는 모택동의 지시를 받들어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와 빈하 중농의 재교육을 받고 있는 하향지식 청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셋을 앞지르기 위해 처처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라고 은근히 귀띔을 해주곤 했지만 날고뛰는 재주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셋을 능가해 앞지를 수 있는 희망은 시종 보이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팔자를 탓하기도 했다. 뉘라서 김주임 집 딸처럼 고귀한 고농성분을 가진 권력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 말라고 했던가? 뉘라서 이런 시골구석에서 태어나라고 했던가? 학교 때의 공부 실력으로라면 앞선 세 사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공부성적순이 아니라 혈통이나 노동표현 따위의 순으로 정해지는 추천서열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장난이었다. 나는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개구리가 뛰어봤자 논두렁 안이라고 나는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그 어떤 세계를 꿈꾸지 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다. 대학생을 기층에서 추천해 보내는 추천제가 아니라 시험제로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당초 믿어지지가 않았다. 꿈만 같았다. 그것이 바로 1977년 겨울이었다. 마을 안의 모든 청년들이 들끓어댔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시험성적만 합격되면 대학생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지지리 궁벽한 시골과 힘이 드는 농촌생활을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이 되여 언제 어디다 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교과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만한 책이 한권도 없었다. 문화대혁명 후 회복된 첫 시험이라 시험대강도 없었고 시험범위도 없었다. 10년 동란 속에 본디 배운 게 얼마 없는 학생시절이었고 또한 손에서 책을 놓은 지가 언제였던가? 중학교 때 배우던 교과서를 찾아보았지만 그것들은 이미 불쏘시개가 아니면 뒷간의 휴지로 된지도 몇 년이 된 때였다.


나는 달랑 볼펜 한 자루만 들고 동네 청년들 속에 끼여 공사마을에 설치된 시험장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주 모르는 문제가 나온 것도 아니고 알 것 같으면서도 딱히는 모르는 그런 문제들이 나온 것이 사람을 더 안타깝게 했다. 얼마 후 시험성적이 나왔다. 전 공사적으로 내 성적은 앞자리 순위였으나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그해 전 공사적으로 두 명의 대학생이 배출되었다. 그들이 대학교로 떠나는 날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양푼만큼 큰 빨간 종이꽃을 선사했고 세납을 불고 징을 치며 축하해주었다.


대학시험에서는 탈락이 되였지만 성적이 괜찮은 점을 가상히 여겼던지 마을에서는 마을 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나를 배치해주었다. 학생 수는 불어나는 반면 교원 수가 모자라 향정부에서는 마을마다 자기절로 교원을 모집하고 월급을 지불하도록 지시했다. 그 덕에 더 이상 뙤약볕 아래서 모짐을 져 나르지 않아도 되었고 엄동설한에 들판으로 내 몰리어 곱아드는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언 땅을 파지 않아도 되었지만 내가 받는 보수는 전간 노동에 나선 일군 중 제일 낮은 등급대우인 8부 공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그해 평균 분홍고가 인민페로 1원이라면 정상적인 일군들이 하루보수로 1원을 받을 때 나는 그것보다 20전이 적은 80전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쳐야했다. 그나마 다달이 주는 월급제도 아니고 연말에 가서야 미루었다가 주는 연봉제였다. 그래도 어쨌거나 좋았다. 힘에 부치는 전간 일을 이탈했다는 안락감과 교학을 하는 외에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시간이 생겼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비상을 한 셈이었고 출세를 한 셈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부러운 눈매로 나를 쳐다보았고 내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님들은 은근히 질투도 보내왔다. 상급에서 조직하는 교원연수공부를 다녀오느라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논머리를 지나칠 때면 대부분 사람들은 밝은 미소를 보내주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농 삼아 시까스르는 소리도 주저 없이 던졌다.


“이봐, 구두신고 길을 걸으니 발이 안 시려서 좋겠네. 이 찬물에 들어와서 가래질 좀 허구가!”

폐교

그렇게 내 인생길에 발판이자 전환점이 되여 주었던 고향마을 소학교가 얼마 전 폐교를 맞았다. 내가 교원으로 있을 때가 고향마을 학교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80여 호가 집거해 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에 학생 수가 근 200명 가까이 되였으니 한집에 학생이 평균 두셋은 있었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싶다. 학생 수만 아니라 교원 수도 나라 봉록을 타먹는 공비 교원에 나 같은 민영 교원까지 합쳐 열한 분이 계셨던 학교다. 정부에서 조달되는 교육경비가 태부족이여서 마을에서는 생땅 한 뙈기를 떼어 내여 학교에서 자기절로 농사를 지어 수입을 얻도록 선처해주었다. 그래서 농번기 때는 고급학년 학생들은 거의 매일오후 수업이 끝나면 학전노동에 투입되었다. 반면에 학비를 받지 않았다. 때문에 가장들도 별 의견이 없었다. 둘이 벌어 양식 값도 벌기 힘든 세월에 아이들의 학비까지 운운할 새가 없을 만큼 바쁘게 살던 때라 학교에서 아이들의 손을 좀 빌려 쓰고 학비를 탕감해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랄까 아무튼 일을 하다 애들이 손을 베고 다리에 생채기가 생기는 등 사고가 잇달아 생겼지만 지금처럼 걸고드는 학부형들은 한사람도 없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무렵까지 가을걷이가 끝나지 못할 만큼 다루는 논 면적은 많은 반면에 사람마다 내일처럼 헌걸차게 일들을 해주지 않아 생산대의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랬기에 학전농사는 어른들의 도움 한점 없이 완전히 열한명의 교원과 고급학년 학생들이 손수 지어야했다. 그래도 그때 학생들은 태생이 농촌 아이들이어서 농사일을 곧잘 했다. 논둑 만들기, 논바닥 고르기, 모 내기, 김 매기, 논두렁 깎기, 가을걷이, 그리고 가을이 끝나면 이삭줍기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이 참여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긁어모은 돈이 은을 내서 마을학교는 원근에서 보기 드문 학교로 급부상했다. 체육 기자재를 사다가 운동장에 비치시켰고 겨울에는 사생이 손수 펌프 물을 잣아 올려 빙장을 만들고 스케이트를 사다가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다른 한족 학교들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아이들 교육을 중히 여긴다.’, ‘조선 사람들은 체육에 능하다.’ 한족학교 사람들은 이렇게 치하를 하며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제비처럼 쌩쌩 달리며 얼음지치기를 하는 조선학교 아이들을 일부러 구경하러 오기도 했다.

몇 년 간의 농사수입으로 학교에서는 초가로 된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벽돌로 된 새 교수청사를 지어 올렸다. 그날 마을은 명절같이 들끓었었다. 사면팔방에서 모여온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새 집단부락에 첫 벽돌집을 지어놓고 마을 남녀노소가 흥겨운 잔치마당을 벌렸다. 마을 역사치고 이보다 더 신명나는 일이 어디에 있냐며 모두가 흥겨운 춤사위로 한바탕 어울려졌다. 우리민족은 흥을 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특이한 민족인가보다. 저마다 춤꾼이 되여 하루해가 다 가도록 그렇게 어울려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 학교가 폐교가 되였단다. 그동안 퇴직 연령에 든 교사는 퇴직을 하고 나처럼 상급학교로 전근이 된 교원은 뿔뿔이 떠나가고 부부교사만 달랑 남아 마을학교를 지키고 있던 것이 고갈되는 학생내원 때문에 현성에다 전현 각 마을에 널려있는 조선족 소학교를 몰아다 합병시키다보니 덩실하게 지어놓은 새 교수청사는 이제 텅 빈 절이 되였다. 그렇게 된 것을 마을에서는 또 이웃마을 한족부부에게 돈사로 팔아넘겼다. 마을엔 그 한족부부처럼 돼지를 키울 만큼의 힘을 가진 사람도 이젠 없다고 했다. 모두가 연해도시나 해외로 돈을 벌어 떠나가고 마을에는 걸음걸이마저 편치 않은 노인네들만 남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당금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으스스하고 괴괴하던 빈집이 그래도 그나마 돼지새끼들이라도 득실거리니 그쪽이 퍽 보기에 낫다고 했다. 촌장의 안내 하에 돈사로 변한 학교청사와 논밭으로 개답이 된 학교 운동장자리를 둘러보노라니 지나간 기왕지사가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지는데 아쉽게도 그 어디에서도 옛날의 번성했던 자취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큰어머니


‘한국바람’에 고향마을엔 이제 친척이라고는 큰어머님 한분밖에 계시지 않는다. 마을 초창기에 의사의 신분으로 이 마을에 접족을 한 큰아버지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살아온 큰어머님은 이제 큰아버지도 없는 마을에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옛날 그 터 그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내가 상급학교로 소환되기 전까지 그래도 고향엔 사촌형제들이 있었고 큰아버지도 생전이셨다. 큰아버지의 의술이 좋아 원근 한족사람들까지 먼 길을 걸어 큰아버지를 찾아오곤 했었는데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한평생 약으로 침으로 남의 병은 용케도 잘 고쳐주셨던 큰아버지는 뇌혈전 후유증으로 8년간 지병을 앓더니 드디어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큰아버지가 세상 뜨기 며칠 전 사촌들은 모두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갔다. 언제 숨이 질지 대중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마냥 지키고 있을 계제도 아니어서 일단 그렇게 떠나면 수일 내 돌아오지 못하는 출국길 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사촌들은 모두 그렇게 제 갈 길들을 떠나가 버렸다. 사촌들 대신 큰아버지의 골회를 마을 앞 강물에 띄워 보내며 나는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민초기엔 집이 없어 이웃 한족들의 행랑채에 세 들어 살기도 했고 후엔 남들보다 좀 기름진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난리 때는 투쟁대상이 되여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돌기도 했던 큰아버지의 인생은 나중에 그렇게 한줌의 재가루가 되여 강물 속으로 텀벙텀벙 가라앉아 버렸다. 그저 이렇게 끝나고 마는 생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나 싶었다.

큰어머니는 조선말은 물론 중국말에 더 능통한 분이시다. 식성이나 기질도 남자 같은 데가 많아서 술도 잘하고 성격도 남달리 활달하다. 예전에도 그랬었지만 고희를 넘긴 지금도 동네 안은 물론 인근 한족마을 사람들 속에서까지 그 인품과 위망이 상당하다. 한국바람이 불면서 너나없이 버리고 떠난 조선족들의 논밭들을 도급 맡아 마을로 밀고 들어오는 한족들이 많아지는 바람에 마을 안은 예전 우리끼리만 살 때처럼 조용하지 못하단다. 관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말이 다르다 보니 마을 안 대소사나 행사 때마다 골치 아픈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때마다 수완 좋고 활달한 큰어머님이 척 나서면 무난히 해결된다고 하니 큰어머님은 말 그대로 마을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해결사란다. 자식들 곁으로 따라가자고 아무리 권장을 해도 죽을 때까지 고향마을에서 살다가 조용히 죽을 테니 죽은 후에 와서 시신이나 수습해달라며 여자 같지 않은 호방한 웃음을 날리곤 하는 큰어머니. 떠나갈 사람은 다 떠나가고 학교마저 없어진 고향마을에 이제 큰어머님마저 안계시면 무슨 멋에 찾아갈까 싶다.

올해는 역사 이래 보기 드문 가뭄이 생긴다며 전에 조선족들이 다루던 논들이 모두 한전 밭으로 개답이 된다고 한다. 사람이 먹는 양식은 벌이가 안 되고 사료용 곡물가격이 올라가니 한족들이 도급 맡은 논들을 모두 한전 밭으로 만들고 옥수수 따위를 심는다며 야단법석이다. 그제날의 추억을 떠올려볼만한 곳 한곳 없이 고향은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길도 변했고 들도 변했고 집들도 변했고 사람들도 변해가고 있다. 모처럼 찾아간 김에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이집 저집 이웃으로 살던 집들을 찾아가 보아도 열에 일곱 집이 주인이 한족으로 바뀐 낯선 집들이였다.

통혼

한 달에 두 번 꼴로 나는 요청에 의해 결혼식 사회자로 결혼예식장에 출두하고 있다. 조선족 혼례에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한족들의 결혼식에도 요청되어 나가곤 하는데 결혼예식 순서는 한족이나 조선족이나 대동소이하다. 예전에는 완전히 달랐던 관습이 언제부턴가 거의 닮아가고 있는 꼴이다. 내가 장가를 갈 때 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의 결혼식은 최소한 3일 동안 시끌벅적한 나날 속에 번다하게 치러졌다. 동네아낙들이 모여들어 상감으로 쓸 강정이며 떡을 만들 때부터 동네 안 잔치는 사실상 시작이 되는 셈이었다. 지금처럼 분쇄기도 없었던 세월이라 아낙들이 떡감으로 쓸 떡쌀을 불려 놓으면 힘꼴깨나 쓴다는 동네 장정들이 모여들어 동넷집 절구통을 굴려 들이고 떡메를 휘둘러 떡가루를 빻기 시작한다. 쿵덕 쿵 더덕 맞절구질을 하는 남정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돋을 무렵이면 아낙들은 야채전을 붙이느라 야단에 법석을 떨고 콩나물을 다듬는 동네 할머님들의 손길도 바빠진다. 신부의 얼굴화장을 돕는 새각시 또래들은 집이 떠나갈듯 안방에서 낄낄 깔깔 기분을 돋우고 마당에선 동넷집 아이들이 쫓고 쫓기며 가댁질을 하기에 분주하다. 두부를 앗고 떡살로 골무떡에 꽃무늬까지 박아내면 잔치준비는 거의 완숙했다고 보아도 된다. 우리 이곳의 결혼풍속은 결혼 당사자 두 집이 당일에 되돌아올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동떨어져있는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랑은 당일로 신부를 제집으로 데려온다. 결혼예식은 대개 신부 집에서 치르는데 북선이 고향인 사람들은 신랑 집에서 치르는 습관이 있어서 같은 조선족이라 해도 가끔은 같지 않은 관습 때문에 분기가 생기기도 했다.

결혼초례청은 신부 집 뜨락에 실탄자 따위로 병풍을 두르고 동네 집 멍석을 얻어다 뜰 한복판에 펴놓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종이 꽃 한 묶음이 곁들여지면 금상첨화다.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마을에 결혼예식을 구경하는 것은 일종의 향수이기도 했다. 영친 갔던 꽃수레가 마을 어귀에 나타나면 시댁 식구들이 마중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새색시가 앉은 꽃수레를 맞이하곤 했다. 결혼식 개식선포, 신랑신부 입장, 결혼 등기증 낭독, 결혼 예물교환, 주례사, 내빈축사, 양가 어른들의 인사말, 신랑답사 등 순으로 이어지는 결혼식은 반시간에서 한 시간까지 이어지기도 해서 볼거리가 제법 톡톡했다.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짓고 그 농사수입이 생긴 후에야 하다 보니 이곳 결혼식은 거의가 한겨울에 치러지곤 했는데 구경나온 구경꾼들은 추워서 이빨을 달달달달 맞쪼이면서도 신랑신부 퇴장이 있을 때까지 박수를 보내면서 지켜보곤 했다. 거기에다 내빈 축사를 나온 사람이 시조까지 읊조리며 폼을 내다보면 시간은 더욱 길어지곤 하는데 구경꾼들이 떨어야할 뿐만 아니라 신랑신부도 꼼짝없이 추위에 떨곤 했다. 그래도 그렇게 익살스레 늘어놓는 내빈 축사가 있으면 결혼예식은 딱딱하지 않고 웃을 일이 있어 재미도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음식질이 시작되는데 잔치 집 주위에 있는 이웃집까지 여러 칸 빌려야 할 만큼 동네 어른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먹고 마신다. 음식상은 지금처럼 한 끼를 먹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동네 청년들은 신랑신부를 데리고 자정 때까지 오락을 즐기곤 했다. 그때가 바로 신부의 인물이나 문화수준 그리고 노래와 춤 솜씨까지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동네아낙들과 청년들이 관중이 되여 제법 짝짜그르하다. 이튿날 아침엔 새색시가 준비해온 예단을 들고 시부모를 비롯한 시댁식구들에게 첫인사를 올리는 예식이 진행되는데 동네아낙들은 새색시가 갖추어온 예단품목이나 가짓수로 신부 쪽의 재력이나 성의를 저울질하며 며느리를 잘 봤소, 못 봤소, 하며 입방아들을 찧고 빻는다. 사흘 날은 신랑신부가 다시 시댁에서 챙겨주는 이바지 음식을 들고 친정 나들이를 떠나게 되고 친정 갔던 새색시가 이튿날 다시 시댁으로 귀가를 해야 결혼잔치가 그로서 드디어 막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결혼잔치는 전과 비길 때 너무나도 슴슴하게 끝이 난다. 떡메소리도 없고 전 부치는 기름 냄새도 없다. 동네아낙네들의 웃음소리도 없고 아이들의 가댁질 소리는 더구나 들을 수 없다. 모든 것을 결혼식 대행업체에 맡겨서 하다 보니 별도의 준비도 없이 정해진 날 정해진 곳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결혼식장으로 모여가면 그만이다. 결혼식장에서 예식이 끝나면 그 길로 미리 챙겨놓은 음식을 한 숟가락씩 떠먹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오면 그것으로 결혼잔치는 끝이다. 시끌벅적 흥아리도 없고 예전에는 있었던 모든 의식은 허례허식이라며 일축해버리다 보니 슴슴하다 못해 처량할 때도 많다. 연해도시에서 일을 하던 와중에 저희들끼리 눈이 맞아 동거까지 하다가 양가 부모님들에게는 통보 같은 결혼선포를 하다 보니 한 가족이 된다는 뜻 깊은 의식이 의무를 이행하는 겉치레 같아 보기에도 썩 좋지 않다.

그래도 새로 맞아들이는 신부나 신랑이 다 같은 조선족인 경우의 결혼식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한복이 있어 그나마 덜 서글프다. 요즘 내가 사회를 보는 결혼식 중 열에 서너 집은 한족며느리가 아니면 한족사위를 맞아들이는 결혼식이다. 따발총을 갈기듯 고막이 찢어지도록 폭죽이 터져 오르는 속에서 예식장 앞으로 굴러들어오는 승용차 안에는 정숙함이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행동거지가 대범한 한족신부가 앉아 있다. 어린애처럼 신랑에게 안겨 식장으로 들어와서는 시부모님 앞에 이르러서야 땅에 내려선다. 그리고 시부모님을 향해 허리도 아니고 고개만 까닥 움직이며 ‘마마’, ‘빠빠’하고 부른다. 좀 전까지 불러왔던 ‘아주머니’, ‘아저씨’란 호칭을 바꾸는 의식이다. 신랑의 어머니는 호칭을 바꿔 불러준 대가에 고마워하며 새며느리의 손에 빨간 종이에 싼 상당한 액수의 돈을 찔러주어야한다. 게다가 한족사람들은 딸을 시집보낼 때 딸을 키워준 대가로 사돈집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 챙기는 풍습이 있다. 그것을 ‘젖값’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조선족이라해도 한족며느리를 맞아들이려면 이런저런 명분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 된다. 깊이 찢겨져 올라가 허벅지까지 널름널름 보이는 새 며느리의 치마자락을 여며주는 시어머니의 얼굴에 민망함이 역연하다. 그래도 어쩌랴 아들이 데려온 며느릿감인데. 지금은 자식의 혼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며 참견을 하는 세월이 아니고 또한 참견을 한다해서 들어먹히는 세월도 아니니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한족이래도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연애 끝에 하는 결혼은 괜찮은 편이라 해야겠다. 조선족 처녀는 금싸락 같이 귀해진 요즘 아들을 총각귀신 만들기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쥐나 개나 하는 식으로 한족 처녀들을 데려다 암수의 짝 짜맞추듯 얼추 며느리를 봐야하는 집의 결혼예식은 사회를 봐주면서도 마음은 착잡해진다. 개혁개방과 한국나들이 바람에 생활수준은 질적으로 좋아졌다지만 피할 길 없이 맞게 된 타민족과의 통혼 바람은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현실로 되어 버렸다.

아들

올해로 스물한 살인 아들애는 사랑엔 국경이 없다던데 조선족 총각이 한족처녀에게 장가드는 일이 뭐가 그리 나쁘다고 번번이 그런 결혼식 사회를 봐주고 와서는 그렇게 개탄을 하냐고 나에게 질의를 하곤 한다. 타민족과의 통혼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아들애에게 들어 먹히도록 설명하자면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줘야하며 언제까지 얘기를 해야 할까 고민 중이다. 글쎄 타민족과의 통혼에 내가 왜 이다지 반감을 가지고 있고 이다지나 감상에 젖어있는 것일까? 나는 나로서 나의 선입견을 합리화할만한 이유 몇 개를 만들어보았다. 첫째, 문화가 다르고 관습이 다르다. 음식문화에서부터 같이 살아가는 가족 간에 있어야할 규범이나 예의가 너무 다르다. 특히 한족 아내들은 남편을 개떡같이 여기는 못난 데가 있는가 하면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많이 부족하다. 조선족은 남자들이 방안에 앉아있고 여자들만 주방에 서있는 다며 한족여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둘째, 언어가 다르고 사유방식도 다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감정소통도 잘 안 되고 감정소통이 잘 안 되니 괴리감이 생겨 한뉘를 같이 살아도 어울려지지 못한다. 셋째, 정서도 다르고 처세술도 다르다. 나의 친구 하나는 직업․환경상 한족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10여 년을 살고도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생활상 관념상 안 맞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족과 조선족 사이엔 다른 것이 너무나 많다. 그와 같은 다름 사이에 생겨있는 골짜기를 누가 매워야 할까? 매우려면 서로가 닮아야한다. 닮아 가면 괜찮겠지만 닮지 못하면 격돌할 것이다. 나는 장차 내 아들이 한족여자의 관습을 닮아 한족으로 동화 되어가는 꼴도 눈뜨고 볼 수 없고 그렇다고 한족 며느리더러 우리의 관습대로 살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그와 같은 모순 말고도 해결해야할 모순이 얼마나 많은데. 누군가 이제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닌 것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혈통을 중시하고 싶고 혈통을 고집하고 싶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한 말이 괜히 생긴 말일까?

그런 내 마음을 아들애는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민족문제가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다같이 잘 살면 그만이지.’ 그러면서 아들애는 외려 나를 캐캐묵은 관념에 얽매여 있다고 역설한다. 아들에겐 고국과 조국에 대한 개념도 모호하다. 아니, 모호하다기보다 그 단어의 개념에 전혀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과의 축구시합을 지켜보면서도 중국팀의 패전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야 임마 넌 누구편이냐?”하고 묻자 아들애는 오히려 그러는 내가 우습다는 듯이 빼꼼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편은 누구편? 스포츠는 이기고 지고의 아쉬움 외에 그 어떤 편파적 안목으로 대하면 안 되요. 나와 한올의 관계가 없는 팀도 지면 아쉽단 말이예요. 아쉬움 없는 멋진 스포츠만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는 아들애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아들애가 대범한 놈인지 내가 쪼잔한 놈인지 의아해진다. 너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해야 해. 그러면서 기어이 먼 길을 걸어야하는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학교로 보냈는데 아들애는 조선말보다 중국말을 더 잘한다. 어려운 말의 뜻풀이일수록 중국말로 해야 이해가 빠르니 아들애에게 있어서 조선말은 외국어나 다름없다. 조선말을 하라고 윽박지르면 호칭으로부터 술어에 이르기까지 가려 써야하는 조선말이 부담스럽고 시끄럽다며 간단한 중국말이 쓰기에 편해서 좋단다. 교과서에 나오는 중국역사는 정통했으리만큼 꿰뚫고 있으면서도 조선 역사는 교과서에 기재된 한두 장의 간단한 개요로 공부한 것뿐인 아들애가 가보지도 못한 고국과 나서 자란 중국을 구경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는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아내

2004년 5월 아내는 처외가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서 2년간 분식업 식당에서 홀써빙을 뛰다가 재작년 가을에 귀국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벚꽃이 피는 것과 단풍이 든 산구경만은 꼭 하고 오겠다던 아내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한 채 일에만 쫓기다 만기가 되여 돌아왔다. 한뉘 한족학교에서 한족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한족 사람들 속에 묻혀 교원사업을 해온 아내여서 한국에 갓 입국했을 때는 공무원들이 안내하는 공식적인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해 울음이 나올 지경으로 답답했다고 했다. 그래도 영악한데가 있어 험한 고비를 다 넘기고 얼마간 돈을 벌어갖고 온 것이 대견하고도 고맙다. 조선말도 많이 배워왔고 전엔 경험하지 못했던 생활도 해봤기에 총적으로 실보다 득이 큰 셈이다.

“한국 가서야 알았어요. 우리는 조선말을 하고 있지만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닌 그 두 짬 사이에 찡겨있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돈 많이 벌어서 내가 내 노릇하며 살아야지 누구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 그것부터 우린 생각을 고쳐야 되요. 혈육? 혈육도 돈이 있고 혈육이지 돈 없으면 다 무색해집디다.”


한국을 다녀온 후 아내가 입을 열었다하면하는 어록같은 감수의 말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짜증을 내던 어느 공무원의 흉내를 내는가 하면 음식배달을 간 자기의 손목을 뺏어 잡고 애인하자며 추근 대던 어떤 나그네의 추태를 새삼스레 들추어내며 비분해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나라에서 온 거지들이라며 비난하는 졸자들도 보았고 찾아가는 목적지까지 예의바르게 깎듯이 안내해 주는 고마운 분들도 보았단다. 지고지상의 대통령도 내여 놓고 험담할 수 있는 자유도 보았고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자고 있는, 자기보다도 더 가난한 길거리 노숙자도 보았단다. 천당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천당이 아니었고 어렸을 때 들은 공산당의 설법대로라면 지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지옥도 없더라고 말하는 아내. 귀여울 정도로 솔직한데도 있다. 그만큼 마음도 여리고 순진하다 못해 남에겐 어리숙하게 보일 정도인 아내는 이념 같은 문제까지 운운할 만큼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닌데 식당에서 같이 일하던 주방장과 6·25전쟁을 누가 먼저 벌렸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한참이나 얼굴을 붉히며 싸웠노라고 했다. 새삼스레 이제 그걸 따져서는 뭘하려 했는가고 묻자 괜히 우롱당한 기분이여서 고집 한번 세워본 것뿐이라고 했다. 빨간 천 한 조각에 눈이 가리여 하늘이 푸르고 땅이 검은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 살아왔던 우리세대가 아니었던가? 하물며 조선 사람은 혈통적으로 깨끗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민족임을 은근히 돋보이려고 한족사람들 앞에선 일거수일투족 잔잔한 일 하나에도 신경을 쓰던 아내였는데 이제 벌어온 돈 액수만큼 지니고 있던 자부심의 수위가 낮아진건 아닌지 근심이 되기도 한다.

매형

아내처럼 친척방문차 아주 눌러앉아 외화벌이를 해온 사람도 많지만 아직도 한 번도 한국나들이를 해보지 못한 무연고 동포는 더욱 많다. 아내처럼 한국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웃이나 동료들의 고생담을 자기 귀로 직접 듣고도 열에 열사람 모두가 하나같이 한국으로 나가지 못해 열병을 앓고 있다.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가산을 탕진해가면서도 한국행 꿈을 절대 저버리지 않고 저마다 몸부림을 하고 있다. 한 번 두 번의 실패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성공할 때까지 출구를 모색하는 그 모습들은 알을 쓸러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때들의 모습과 그처럼 방불하다. 내리 쏟아지는 물살을 헤가르며 이리저리 자맥질을 하다가도 아스라한 폭포를 만나면 겁 없이 사생결단 몸을 솟구쳐 생로를 찾는다. 거기엔 그들을 먹거리고 노리고 있는 악덕 브로커들이 아가리를 짝 벌리고 대기하고 있어도 말이다. 자칫하면 바로 그들의 입속으로 텀벙 뛰어들어 고스란히 그들의 먹이가 되어 뱃속의 귀한 알들까지 대방의 먹이로 처넣게 되는데도 그들의 목적지로 가려는 자세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들의 무모한 행동은 볼수록 안쓰럽다. 가난했던 과거가 있기에 부에 대한 열망도 집착에 가까우리만큼 집요하고 모질다. 자본주의를 적대시하고 부할 ‘부’자만 보아도 과민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돈맛을 알고 나니 그 누구보다도 돈에 집착하고 갈망한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에 빈대마저 남기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망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악덕 브로커들에게 피 같은 돈만 떼운 게 아니라 그렇게 당하고 멍청히 앉아있는 남편이 가장구실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이젠 그 아내들이 집을 나가 버리다나니 집 잃고 돈 잃고 가정까지 풍비박산이다. 한국바람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조선족 사회는 말 그대로 만신창이 되였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다행히 요즘 실무한국어 시험으로 출국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겨 오매불망 그리던 한국드림을 실현하는 사람도 요즘 부쩍 늘어났다. 초청장을 보내줄 친척도 없고 그렇다고 브로커들에게 들이밀 만한 밑천도 없어 한국꿈을 아주 싹 접고 있던 매형이 요즘 실무한국어능력시험을 보겠다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혈통은 조선 사람이지만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매형이 한국어시험을 보겠다고 덤비는 것은 이도 아니 난 아기가 콩밥그릇에 덮치는 격과 무어가 다른가? 윗누이가 매형과 혼담이 오갈 때 국영기업에서 일하는 문화간부라는 매형의 직업이 큰 후광이 되여 우리아버지의 입에서 결혼 수락도 빨리 떨어졌다. 월급도 그때 교원인 나의 월급보다 배나 많았고 이런저런 명분으로 주는 보너스도 짭짤했기에 신혼초기 매형네 경제형편은 남이 부러워할 만큼 윤택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국영기업들이 하나둘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속담에 큰집이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건만 한때는 그렇게 휘황하게 잘나가던 국가 1급 기업인 계전기 공장이 연속 부도가 나며 노동자들이 밥통을 잃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매형같이 문화 사업을 맡은 간부들부터 구조조정의 1호 대상이 되여 매달 200원의 최저 생활보조금을 받기로 하고 매형은 사직서를 썼다. 인민페 200원, 요즘 가격으로 입쌀 50키로그람 밖에 살 수 없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퇴직금을 들고 지금 매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한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군복무를 마친 후 한족 사람들 속에서 간부노릇을 하며 살아온 매형이 지천명에 이른 나이에 초등학생처럼 가로 늦게 “가갸거겨”하고 부르고 쓰며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엔 마음 편케만 비쳐지질 않는다. 중국말 속담에 30년은 강동쪽 30년은 강서쪽이란 말이 있다. 한때는 그렇게 보무당당하고 유망했던 매형의 인생길, 이제 그의 앞에 놓인 길은 무엇인가? 누군가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 올려고 전주곡을 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중국식 시장경제로 바뀌면서 사람들의 생활리듬이 다 깨졌다. 매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이제 살길이 좀 열렸으면 좋겠다.


김치

애초 실무한국어능력시험으로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이 전 조선족 사회에 파다히 퍼져나갔지만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선뜻 나서질 않았다. 웬 떡이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겠느냐면서 아무런 실리도 없는 허황한 짓거리일 것이니 괜스레 신청요금만 내던지지 말고 잠자코 지켜보자며 비아냥거리는 부류도 있었고 길고 짜른 건 대봐야 안다며 무작정 덤벼드는 부류도 있었다. 무식한자가 용감하다더니 앞뒤를 재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기름떡을 하사했다. 시험을 본 사람 중 절대 대부분 사람들이 정말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시작하자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하던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다. 김치매대에 줄느런히 서서 김치를 팔던 조선족 아줌마들이 다리가 성치 않은 이씨 아줌마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모두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았는지 땅으로 잦았는지 싹 사라져버렸다. 어디로 갔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시험공부 하러 떠났단다. 김치매대는 한족 아낙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김치 만드는 요령만도 하루 낮 하루 밤을 가르쳐주고 갔단다. 그래서 조선 사람도 아닌 사람들이 조선김치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겉모양을 봐서는 이씨 아줌마의 김치와 비슷비슷한 것 같았으나 그 맛은 각양각색이었다. 수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김치 종주권이 한족들에게로 서서히 이양되고 있었다. 김치 하나를 들고 수도 시장까지 짓쳐들어 갔던 조선족 아낙들이 바야흐로 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벼농사밖에 할 줄 몰랐던 조선족에게 있어서 김치는 반찬이었고 양식이었고 돈줄이었다. 김치를 팔아서 집을 장만한 사람도 있었을 만큼 김치는 우리의 생명이었고 효자종목이었고 그리고 우리얼굴을 대표하는 간판이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런 것도 아닌가보다.

가을이면 한족들은 쏸채를 한 대 독씩 담그느라 분주할 때 조선 사람들은 김치를 담그느라 법석을 떨군 했다. 김치도 어디 한 두 가지 뿐 이었던가? 이웃들이 모여들어 거들어야 할 만큼 푸짐히 담근 김치는 겨울 내내 없어서는 안 되는 반찬이요, 양식이었다. 손이 큰 우리어머니는 해마다 겨우내 먹고도 남을 만큼 김치를 많이도 담그셨다. 그렇게 먹다 남은 김치는 버리지 않고 시오리 상거한 진거리로 내다 팔아 푼돈을 모으기도 했다. 애초 장사를 위해 담근 김치가 아니고 먹다 남은 것을 치워버리는 식으로 파는 터라 김치를 사러 오는 한족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이 더 많았다. 설을 쇠고 나서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만 파는 조선동네 김치를 진거리 사람들과 주위 한족동네 사람들은 은근히 기다리곤 했다. 지금처럼 비닐 봉지에다 담아주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간 볏짚오리로 통배추 김치의 허리를 질끈 동여 들려주어도 얼굴 찌푸리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는 살림살이에 보태셨다. 첫 해는 물 끓이는 전기주전자를 사왔고 두 번째 해에는 큰 양푼대접을 사들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전기다리미를 사왔다. 그런 재미에 동네아낙들은 겨끔내기로 김치를 여유있게 많이 담그기 시작했고 서로 남다른 손맛을 내려고 노력을 했으며 서로 많이 팔려고 자리다툼 같은 것도 하기가 일쑤였다.

그랬던 김치가 한국바람에 이제 한쪽으로 밀려났다. 밀려나서 한족아낙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1년 내내 동분서주 해봐야 한국 가서 서너 달 일한 대가만큼 밖에 안 되니 누군들 그 일을 계속 하려하겠는가? 집체로 농사를 짓던 인민공사가 끝나고 집체 공유 토지를 가가호호에 떼맡겨 개인농사를 시작한 첫 해 마을엔 만원호가 생겼다. 연수입이 인민페 만원을 넘긴 집을 가리켜 향에서는 ‘만원호’라고 칭송하며 치부하는 자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땅은 시골 사람들의 명줄이었고 유일한 밥줄이었으며 땅을 버린 삶은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그렇게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던 와중에 누군가 과감히 땅을 버리고 김치를 들고 진거리로 나갔고 다시 현소재지로 나갔으며 더 멀리는 수도인 북경의 골목으로까지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농경문화는 그때부터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조선족을 성장시킨 음식 김치가 이제 우리 손을 서서히 떠나가고 있다.


호도거리

중공 제 11기 3중전회가 폐막된 후 얼마 안 되여 우리 마을은 곧 호도거리 생산제로 들어갔다. 온 마을사람들이 생산대장의 지휘하에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누어먹던 세월이 종료된 것이다. 처음 마을사람들은 흥분해했고 그다음은 걱정과 불안에 잠기기도 했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땐 남의 지휘 하에 시키는 일만 수걱수걱하면 그만이었었지만 이제 호도거리를 하면 자기절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한다는 압박감에 기쁨 반 걱정 반 이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해 농사를 짓고 나니 그런 걱정은 괜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절대 대부분 사람들이 집체 때 보다 일을 쉽게 했고 적게 했으며 알뜰하게 했다. 그러나 생산소출은 집체 때와는 비교도 아니 될 만큼 높았다. 가을이 끝나 뜨락안으로 끌어들인 벼낟가리가 집채보다 더 컸고 탈곡기에서 쏟아지는 낟알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풍성했다. 가을걷이까지는 각자 가족단위로 자기 일을 해왔으나 탈곡철이 되자 온 마을이 단합이 되여 오늘은 이 집일을, 그리고 내일은 저 집일을 해주며 품앗이 노동에 동원되였고 일을 시킨 집들에서는 예전 결혼 잔치 집 못지않게 음식을 챙겨 품앗이 하러 온 일군들을 대접하며 한해의 작황을 총결하고 축하했다. 그때가 아마 중국 조선족 마을의 전성기였다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해 농사를 끝내고 현성 백화상점으로 달려가 난생 처음 보는 텔레비전들을 한 대씩 안아오기도 했고 경운기며 탈곡기며 정미기 같은 재산 늘이기에 투자하는 집들도 속속 늘어났다.

그러나 그 반대인 집들도 가끔 있었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땐 전간 노동에 하루도 빠짐없이 참가해서 연말에 분홍도 남보다 더 많이 타 쓰던 사람들이 웬 영문인지 일머리를 틀줄 몰라 농사철을 놓치는가 하면 살림살이에 구멍이 생겨 장리 돈을 꿔 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해 농사를 망치고 나면 웬만해서 다시 일어서지를 못하고 년년이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생활을 살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집체로 농사짓던 때를 그리워하며 호도거리를 부정하기도 했으나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호도거리야말로 영명한 결책이라며 기뻐했다.


우리 집도 한 핵타르 남짓한 논을 부여받고 논농사를 시작했는데 애초 마을사람들은 한뉘 교원사업만 해온 우리아버지가 논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을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학전을 다루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별로 우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해 우리 집 논농사는 작황이 괜찮았다. 벼를 수매하던 날 아버지는 향 공소점에 가서 14인치짜리 흑백텔레비전을 사왔다. 후에 색 텔레비전을 사들이면서 그 텔레비전은 고물처럼 곳간 궤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궤 속에만 박혀있던 것을 작년에 북조선 삼촌께서 가져갔는데 자기들은 그런 것도 없다며 못내 기뻐하는 눈치였다.

북한에서 온 손님

고향이 함경도인 우리는 북한에 친척들이 여러 집 있다. 아버지의 큰집이 있고 이모외할머니도 아직 생전이시며 작은 큰아버지의 맏아들과 큰 큰아버지의 외동딸도 다 그곳에 살고 있다. 형편이 닿으면 모두 도와드리고 싶지만 그 떨레가 하도 많아서 몸소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조금 도와줄 뿐 구태여 놀러 오십사하고 초청해 들일만큼 내 주머니사정은 여의치를 않다. 내가 한 회답편지를 빌미로 나에겐 삼촌뻘 되는 분이 지난 7월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구리빛 얼굴을 한 삼촌은 한뉘 살뺄 걱정은 안하셔도 될 만큼 몸이 몹시 강말라있었다. 삼촌이 북한에서 가져 온 것은 김일성장군의 초상마크와 마른 미역 한 박스와 들키면 목이 날아날 각오를 하고 바지허리춤 안단에 감추어가지고 온 사람 찾는 주소지였다. 북한 돈 천삼백 원을 주고 일부러 샀다는 김일성주석 마크를 삼촌은 나에게 선물로 내여 놓았다. 해변가에 살고 있는 덕에 그래도 아이들이 바지락 같은 것을 주어들여 생활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는 삼촌이 가져온 미역은 물에 불려보니 보관이 잘못되었던 탓인지 거의 썩어 문드러져있었다. 해변가에 살아서 그나마 해산물만은 마음대로 먹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기름이 없어 고기배가 바다로 출항을 못해 바다를 끼고 살아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삼촌이 생사를 무릎쓰고 감춰가지고 온 것은 후처가 데리고 들어온 의붓아들애의 할아버지, 즉 한국에 살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정흥염이라는 분의 주소였다. 찾는 당사자가 꽤 잘나가는 채소농장주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어떻게 하든 불쌍한 의붓아들애에게 핏줄을 찾아주어야겠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후에 ‘서울시 강서구 당화동 572-8호 기상관측소 북송아빠트’ 라고 쓰여 있는 그곳으로 편지를 띄워보았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답장이 왔다.


한 달간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마른 장작개비같이 말라있던 삼촌의 몸이 일기 시작했다. 복부가 앞으로 튀여 나오고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옷이며 기물이며 주는 대로 어느 한 가지 마다치 않고 받아 챙기는 삼촌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했다. 아들애가 타던 롤라스케이트를 내어 놓으며 가져가겠는가고 물었더니 평양시내의 아이들이나 탈수 있는 것을 이제 손주 녀석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되였다며 못내 기뻐하셨다. 여기저기서 모아온 헌옷가지들까지 합쳐 삼촌이 가져갈 물건이 자그만치 열세 짝이 장만 되였다. 된장이며 고추장 아울러 다 가져갔다는 이웃집 북한손님에 비기면 우리삼촌이 가져가는 것은 보잘것없었지만 신의주 세관까지 우송요금만도 인민페 600여 원이 나왔다.


“조국이 곤난하니 어쩌겠니? 이제 우리도 차차 좋아질거야.”


삼촌은 떠나면서 나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며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며칠 전에 삼촌 쪽에서 답장이 왔다. 중국에서 가져간 옷가지들을 깨끗이 씻어 가족들이 나누어 입기도 하고 많이는 팔기도 하는 덕에 살림에 큰 보탬이 되였고 동네에선 자기네를 중국집이라고 불러준단다. 그러면서 편지 뒷장에 덧붙인 말 한마디가 짠하다.

“그 후에도 쏘련 소식은 없니? 의붓아들이지만 피붙이를 찾아주고 싶구나!”

한국친척을 찾는다면 검문에 걸릴까봐 구태여 쏘련이라고 말을 바꾼 그 지혜가 안쓰럽다. 혈육을 찾는데 왜서 아직도 ‘쏘련’은 되고 ‘한국’은 안 될까?

한족 사람들 속에서

남들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잘도 들락거리는 한국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장인과 장모님이 한국국적 소지자이시니 힘을 좀 들이면 친척방문을 빌미로 못갈 곳도 아니지만 아직 여건상 그럴 계제가 못된다. 첫째, 아내 대신 아들애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야하기에 집을 비울 수 없고 둘째, 나의 교원직업을 누구처럼 중도이폐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향촌 소학교의 민영교원으로부터 시 교육국 산하의 교원 연수부 교사로 발전되기까지 나는 민족교육을 위한 길에서 옆도 보지 않고 내처 한우물만 파왔다. 뒤늦게 그에 걸맞는 자격증을 따고 학식을 쌓기 위해 나는 장장 7년이란 긴 세월 통신대 공부를 견지해왔다. 통신대 공부가 끝나기도 전에 중국교육계에 직급제도가 실시 되였다. 사업을 시작한 연한과 근간의 사업 업적 그리고 소지한 학력에 의해 좌우지되는 현재 중국교육계의 직급제도는 그 직함에 따라 받는 월급도 다르다. 지금 나의 직함은 고급교원이다. 그런데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배꼽에 가시가 든다고 내가 고급교원 직함을 딴 그해부터 명분만 고급교원이고 고급교원이 받아야할 월급대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 고급직함을 소지한 교원이 예산을 초과해 재정적으로 감당하기에 곤란해서 경제적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유의 고급직함을 소지한 노교원들이 본직을 퇴직하고 교직을 나가야 그 수효만큼 아래 사람을 충당하는 명액제가 실시된 것이다. 현재 우리학교에는 나처럼 직함은 땄지만 그에 상응한 경제적 대우를 향수하지 못하고 있는 교원이 여럿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퇴직할 교원의 수효만 세고 있다.


내 앞순위에 있던 교원들이 드디어 해결이 나고 고대하고 고대하던 내 차례가 왔나싶었는데 어느 날 한족 교원실의 왕소령이 문뜩 나를 찾아왔다. 바로 내 다음 순위 후보인 그녀는 서열상으로는 자기가 나의 다음 순위이지만 올해 본교로 조달되는 고급교원 경제 대우권은 자기가 가져야겠다고 에두르지도 않고 직설했다. 그 이유는 올해에 본교로 조달될 명액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을 자기가 빽을 써서 사적으로 얻어 온 것이기에 나더러 순위를 양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족이 아닌 조선족 교원이란 것 빼고 사업 연한으로 따지나 사업 실적으로 따지나 어느 모로 보아도 내가 그녀 다음 순위로 따돌려야할 이유가 없는데 무조건 자기에게 넘기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학교지도부의 사업 업적 평점에서도 내가 더 높은 점수를 보유하고 있는데 왜서 내가 물러서야한단 말인가? 나는 교장사무실문을 노크했다. 일의 자초지종을 물으며 그 불합리성을 역설했더니 교장이란 자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남이 사적인 경로로 얻어온 밥그릇을 넘보지 말고 물러서라는 것이었다. 얻어온 밥그릇이라니? 그렇다면 왕씨가 정말로 자기의 개인관계로 당초에 없는 명액을 만들어 왔단 말인가? 일교지장이 그렇다고 하는데야 믿지 않을 수도 없었으나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관심하고 지켜보는 일도 일개인의 사리사욕에 의해 사사로이 좌우지될 만큼 중국교육계가 무원칙하단 말인가?

아시다시피 중국 사람들의 뒷문거래 수단은 세인이 놀랄지경으로 야비하고 음험하고 그리고 창궐하다. 부패척결을 표방한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 기세는 누그러드는 대신 더더욱 노골적이고 더더욱 일반화 되어있다. 중국의 일반 백성들은 이젠 그런 현상에 웬만한 면역력이 생겨 별로 게의치도 않고 놀라지도 않는 눈치다. 빽이 있는 놈은 잘살고 빽이 없는 놈은 내처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간다. 어떻게 긁어모은 돈인지 월급수준 이상의 돈 치례를 하고 다니는 왕씨가 경제적으로 딸려서 빽을 못쓸리는 없다. 뻔뻔스레 자기의 이유를 역설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아쉬움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꼴이 서글퍼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전교 교원대회에서 교장은 공공연히 올해 명액은 왕씨가 사적으로 얻어 온 것이기에 파격적으로 왕씨에게 돌리며 순위를 양보한 나의 배포(?)를 한바탕 공치사하는 것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 치하가 오히려 내 얼굴에 모닥불이 되여 들씌워졌다. 사람을 이렇게 우롱해도 된단 말인가? 원칙을 무시하고 양심을 팔고라도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우직스런 족속들 속에서 내가 여태 함께 일을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회의장이 잠시 술렁이는 것 같더니 그것도 잠깐 이였다. 한족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일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시치미를 떼고 모르쇠를 놓거나 수수방관하는 고약한 내면이 있다. 아니 다음번의 화가 나에게로 돌아온다 해도 금번의 화만 내 발등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이기적이고 협애한 면이 있다. 멀리로는 2차대전 때 두 명의 일본 군인이 십여 명의 중국 사람을 한 집안에 가두어놓고 하나하나 끌어내어 목을 쳐 죽여도 그 많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당하기만 할뿐 어느 한사람도 대항해 나서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있고 가까이로는 백주에 길거리에서 망나니들이 여자 하나를 윤간을 하는데도 누구하나 나서서 말리기는커녕 멀거니 서서 구경을 했다는 얘기가 요즘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내가 그 다음번 차례에 목을 잘리우게 생겼어도 이번에 잘리우지 않으면 참을 수 있고 욕을 보는 여자가 내 여자 내 동생 내 딸이 아니기에 참을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참을성은 수천 년 봉건통치에 짓눌려서 생성된 것이라고 보기보다 피 속에 그런 참을성을 가지고 태어난 민족이라고 본다. 이런 민족기질이 부패를 권장하는 주요 요인으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부조리를 보고는 절대 참지 못하는 우리 조선사람 특유의 성정은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것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은 그러는 우리를 보고 ‘쓸데없는 일에 삐치기 좋아 한다’며 뒤에서 쑥덕거린다. 자기 이익과 관여되면 쓸데 있는 일이고 자기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일’로 보는 그 사유방식이 바로 우리 조선 사람과 한족 사람이 제일 크게 다른 점이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의 인맥문화는 참말로 대단하다. 아무렴 ‘친구 하나 생기면 길 하나가 더 생긴다’ 는 속담도 생겼을까? 중국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맥을 얼마나 중요시하는가는 아래의 례에서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명문 대학생을 많이 배출해 내는 원근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시 중점 고등학교에 공부성적은 밑바닥인 한 학생이 거금을 내지르고 입학하기를 소원해서 그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여나도 졸업 후 대학문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기어이 입학을 요구하는 저의가 무엇인가고 물으니 장래를 위한 투자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신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도 같은 학급을 다닌 다른 학생들은 분명 명문대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명문대를 나오면 분명 높은 관직에 오를 사람들인데 그때면 함께 한 교실에서 공부한 자기를 홀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과 인맥을 쌓으면 그들 못지않은 실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역설을 했다. 투자치고는 참말로 황당한 투자설 같지만 중국에서는 가능한 설계도이다. 중국 사람들은 인맥 중에서도 동창생이란 관계를 특별히 중히 여기고 보존하려 애쓴다. 그들 사이에는 법과 질서와 원칙은 발붙일 틈이 없다. 그 바람에 법제는 흐지부지하고 원칙은 지키는 사람이 더 가소로워 보이고 그걸 비판하는 사람이 타격을 받고 손해를 본다. 그런 인맥 때문에 죄가 있어도 벌할 수 없고 법이 있어도 지켜지질 않는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인맥관계는 법과 질서와 원칙을 꽁꽁 얽어매어 덕이 없어도 매도되지 않고 죄가 있어도 벌할 수 없으며 법이 있어도 행해지지 못하는 관행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습게도 나와 왕소령의 일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누군가 왕씨가 사사로이 인맥관계를 이용하여 명액을 발권 받았다는 내용의 닉명신을 시교육국 관계부문으로 올려 보냈단다. 분명 이번일의 부정당성에 대하여 비분해한 사람이 나 본인 말고도 또 한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족들 속에도 그런 사상과 그런 담량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여 주기도 했다. 교장이 나를 찾았다. 분명 순위를 내여 주는데 동의를 하고는 왜 익명성을 썼냐고, 이번 기회를 넘기면 다음 해는 당신 차례인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 왜 방간을 놓았느냐는 태도였다. 확실히 인맥으로 만들어진 명액이라면 빽이 없는 내가 빼앗아 올수도 없는 일이니 왕씨가 가지든 말든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속해야할 몫인데. 나는 그 내면에 있는 시비를 알고 싶었다. 결국 시교육국에서 조사단이 내려와 조사한데 의하면 왕씨가 남의 학교로 넘어갈 명액을 사사로이 빼내온 것임이 판명 났다. 그래서 왕씨도 나도 그 명액을 누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일은 한 단락 끝이 나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기회는 그렇게 두 사람 모두에게 모두 아쉬움으로 남아버렸다. 한족동료들은 아마 아직도 내가 그 익명성의 주인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난 괜찮다. 나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같이 분노해준 동지가 있다는 사실은 한족사람들 속에도 정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며 양심을 어기고 사리사욕으로 원칙을 어기고 도덕이 부패한 짓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왕씨같은 일당들이 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떳떳하고 시종 마음이 편하다.


마작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한족 사람들 속에서 일을 하며 볼라니 왕소령처럼 맡은바 업무는 뒷전이고 마작이나 놀면서 사회교제와 인맥관계 만들기에만 신경을 도사리는 철면피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업무능력은 밑바닥이지만 친분을 쌓고 인맥을 늘이는 수완은 고단수다. 아무리 구조조정을 한다 해도 그들은 그런 관계망을 통해 절대 밀려나지 않는다. 대신 빽이 없고 아부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들이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만다. 중국 사람들은 전국 인민이 다 마작을 놀 줄 안다. 남자도 놀고 여자도 놀고 늙은이도 놀고 젊은이도 논다. 집안에서도 노는가 하면 직장에서도 놀고 실내에서만 노는가 하면 길거리 골목에서도 논다. 여하튼 넷만 모였다하면 마작판을 펼치는데 말 그대로 로소동락이다. 136개나 되는 마작 쪽을 다 가지고 노는 방법이 있는가하면 그중의 일부를 빼버리고 나머지쪽만 가지고 노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지방에 따라 노는 방법도 모두 안이하지만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진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이다. 마작쪽을 네 몫으로 나누어 무져 놓고 매 사람이 13쪽씩 나누어 가진 다음 순서대로 돌아가며 남은 무지에서 한 장 씩 빼내어 자기 손 안에 있는 쪽과 한 쪽씩 엇바꾸어 가며 조합을 이루어 가는데 누가 먼저 끝내면 이긴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진 것이다. 세 사람이 지고 한 사람이 이기기에 한번 이겨도 들어오는 돈은 제법 톡톡하다. 일부러 져주는 방법으로 뇌물을 줄 수도 있다. 셋이서 짜고 들면 남은 한사람을 거지로 만드는 것도 순식간이고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대방에게 져주면서 대방을 흐뭇하게 만들어놓고 이때다 싶을 때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킨다.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을 술친구라고 한다면 함께 마작을 놀아주는 사람은 마작 친구라고 한다. 마작에 인이 박히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때시걱도 잊고 놀기에 아낙들이 배우면 가정이 파탄되고 남정들이 놀면 기둥뿌리를 뽑는게 바로 마작이다. 시간이 아까워 밥도 안 시켜먹고 밤에 낮을 이어 노는 게 마작이다. 그래서 머리 잘 굴리는 사람이 마작꾼들을 대상으로 돈벌이를 벌렸다. 마작을 놀 장소를 제공해주고 밥을 만들어 먹여주고 커피까지 풀어 대령시키고는 마작꾼 매 사람에게서 봉사비에 장소비까지 받는다. 그들이 버는 하루수입은 웬만한 월급쟁이 뺨칠 정도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그렇게 마작판을 만들어주고 돈을 버는 수단이 요즘 이곳 사람들 속에서 제일 잘나가는 장사업종이다.


물론 조선족들도 이젠 마작을 잘 한다. 옛날엔 술좌석이 파하면 춤을 추고 노래 부르며 몸으로 흥을 풀며 즐기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마작을 시작하더니 이젠 중국사람 물렀거라 할 정도로 고단수들이 되였다. 아직 마작에 입문하지 못한 나를 두고 그들은 그렇게 재미있는 마작도 안 놀고 무슨 멋에 사느냐고 묻곤 한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냐고 되물었더니 예전에 놀던 화투놀이가 푸성귀 맛이라면 마작놀이는 잘 구워진 삼겹살을 먹는 맛이라고 했다.


이상한 사람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 한족마을에도 가끔 조선족이 한두 집씩 섞여 사는 동네가 있었다. 한족들은 수전 농사를 지을 줄 몰랐기에 조선 사람들을 청해다가 특별대우를 해주며 기술자로 중용하곤 했다. 집체로 일을 하고 가을에 가서 똑같이 나누어 먹던 때라 작황의 여하를 불문하고 가을이 되면 한족 사람들은 저녁마다 부대를 하나씩 들고 곡식 훔치러 들판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옥수수 이삭이며 콩단이며 낮에 금방 베여 세워두었던 벼단 아울러 안 가져 오는 것이 없었는데 한마을에 사는 조선사람 보고 같이 훔치러 가자고 권장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래서야 되겠냐?”며 아니 가겠다고 했더니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하며 자기 쪽에서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더란다.

개인영농이 시작된 후에는 그와 같이 내여 놓고 훔치는 현상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아직도 이곳 한족들은 ‘가져가기’ 행각을 그리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다. 내가 출근하는 길가 유보도에는 원래 긴 벤치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1년도 못가 그 자취마저 간곳없이 사라졌다. 하룻밤 자고나면 벤치를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있고 또 하룻밤 자고나면 나무 오리대가 뜯겨나가 있고 또 하루 밤 자고나면 다리를 이룬 쇠붙이마저 나무 꺾듯 꺾어가 버린다. 소풍 나온 노인네들이 다리쉼하기에 안성맞춤하던 벤치가 그렇게 야금야금 다 뜯겨나가 이젠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였는데도 추궁하는 사람도 없다. 임자가 있는 물건도 눈길 한번 돌리는 사이 도적을 맞는 판이니 공공장소에 비치된 임자 없는 시설물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고철 값이 오르면서 철로 된 것이 남아나질 않는다. 아파트 벽체에 붙은 낙수 물통도 뜯어가고 고압선 철제 기둥에 박힌 나사못들도 다 뽑아다 폐철로 팔아먹는다. 그뿐인가 하면 길거리 하수도 두껑마저 남기지 않고 뜯어내여 팔아치워 이 시내의 하수도 뚜껑은 저만큼 소코뚜레 꿰듯 와이어 줄로 묶어두어야 한다.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고 나 개인의 잇속만 채우는 이런 비도덕적인 현상이 언제가야 근절될는지 모를 일이다. 체면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중국 사람들의 이와 같은 습성은 수난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누적된 고질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재해가 잦은 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자기로서 자기지책을 찾아야했던 생활방식의 누습이 이젠 앙금처럼 피 속에 남아 버린 것이 아닐까? 사회적 복지가 부진하고 빈부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는 상황에서 가진 것 없고 권력 없고 능력 없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적질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리 없다.


스승


오늘날까지 한족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같이 사업을 해오면서 나는 그들의 몸에서 많은 결점을 발견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반 한족적인 것은 아니다. 사골국은 끓일수록 진한 국물이 우러나듯이 알고 보면 한족사람은 깊이 사귈수록 진국인 데가 있다. 남에게서 하나를 받으면 으례 하나를 되돌려 준다. 남에게서 입은 덕은 꼭 갚는 것이 한족이고 남의 결점을 내여 놓고 폄하하지 않는다. 쉽게 남을 폄하지 않는 그 점은 우점이기도 하고 결점이 되기도 한다. 조선족은 남의 흉을 보기 좋아한다. 이것도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다. 남의 흉을 말 할 수 있기에 자기는 그런 흉잡힐 일을 좀해서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족들은 좀해서 남을 폄하지 않기에 자기가 하는 일이 남에게서 폄 받을 일인가 아닌가를 우려할 필요가 없고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된다. 조선 사람은 체면을 중히 여기지만 한족들은 체면보다 체면을 내동댕이치면서라도 내실을 다진다. 겉으로 보기엔 얼른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개인적으로 일단 가까워만지면 또 화롯불처럼 뜨끈하고 한번 사귄 사람은 좀처럼 내치지 않는 것이 한족들이다. 우리 조선 사람을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라고 하면 한족사람들은 늦게 끓어오르고 끓었다하면 좀해서 식지 않는 돌솥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나에게는 한족이지만 사람 좋은 스승이 한 분 계셨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끌려 다니며 투쟁을 당하기도 했던 사람인데 후에 알고 보니 지니고 있는 재간이 많았고 박식한 분이셨다. 사춘기 때부터 나에게도 황홀한 꿈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바이올린수가 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멋진 양복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서양 사람들을 본 후부터 나는 바이올린수를 동경했다. 그러나 당시 바이올린은 파는 곳도 없었고 그것을 배워줄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곁에 없었다. 한족 중학교로 전학해서 공부하면서 볼라니 물리과를 담당한 사씨 성을 가진 선생님이 가끔 바이올린 캐스를 매고 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처럼 반가웠다. 나는 염체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그 선생님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독서무용론이 쇄도하고 교원에게 교원대접을 잘 하지 않던 세월에 자기를 깎듯이 공경하는 학생에게 감동을 먹었는지 그분은 흔쾌히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만 나면 그분의 교무실로 찾아갔고 어떤 때는 아주 사재까지 찾아가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기도 했다. 지법으로 부터 악보를 보는 법까지 체계적으로는 아니었으나 나는 바이올린 연주법을 학비도 내지 않고 공으로 배웠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그의 성의가 고마워 나는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하면 잊지 않고 가져다주곤 했다. 엿이며 떡이며 김치며 하여간 한족들이 먹어볼 수 없는 우리음식들을 그분은 아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콩고물을 입힌 찰떡이었다. 그런 것을 가져다 줄때마다 그분은 정말로 감격해했다. 그 외에도 그분은 손재주가 좋았는데 어느 날은 바이올린을 배우러 간 나에게 바이올린 대신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신비하게 말했다. 영화는 영화관에 가야 볼 수 있는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켜보니 상자처럼 생긴 것을 펼쳐놓고 전기코드를 꽂는 것이었다. 순간 16절지 크기의 유리면에 그림이 언뜰언뜰 나타나고 라디오처럼 말까지 새어나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텔레비전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구경했다. 어디서 주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새것은 아닌 중고품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박래품이 아니었나싶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머리에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아이디어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입에서는 들어도 아리송한 말들이 많이 흘러나왔다.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더라면 필시 인재로 쓰였을 그런 분들이 그때 아쉽게도 많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재간과 지식을 갖고 있던 그분은 몇 년 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나에겐 참으로 좋은 스승이었는데.

세비로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의상에 무척 신경을 썼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서양 사람들이 입는 세비로가 입고 싶어 안달을 떨었다. 흰 샤쓰에 넥타이를 매고 깃을 한껏 젖힌 세비로를 받쳐 입은 맵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차림새로 내 눈에 비쳐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중국 사람들은 누구도 세비로를 입지 않았다. 일색으로 중산복이 아니면 군복이 고작이었다. 어디가서 세비로를 만들어 입을 순 없을까? 나는 진거리에 있는 복장점을 일일이 찾아가 세비로를 만들 줄 아냐고 물었다. 그러나 어느 한 집도 만들 줄 안다는 집이 없었다. 모두가 도리머리를 저으며 오히려 남은 입지도 않는 그런 옷에 그렇게 집착을 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적극적으로 수소문한 끝에 북조선 평양에는 세비로가 있다는 사실을 귀동냥해 듣게 되였다. 마침 마을에는 북조선 출입을 하는 여인이 한 분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다음번 행차 땐 잊지 말고 꼭 세비로 한 벌을 사다달라고 애걸하다시피 부탁을 했다. 얼마 후 그 여인은 또 북조선을 다녀왔고 과연 나의 부탁대로 세비로를 두견지 얻어왔다. 북조선에서는 그런 것을 파는 게 아니라 군관인 자기 오빠가 나라로부터 분배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 품이며 길이며 어쩌구러 내 몸에 딱 들어맞아 나는 마을에서 맨 먼저 세비로를 입은 멋쟁이 총각이 되였다. 그것이 1978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일이다.


지금 나에겐 양복과 넥타이가 여러 벌 있다. 그러나 그때 입었던 세비로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년에 북조선에 계시는 삼촌께서 친척방문차 놀러오셨다. 돌아갈 때 양복 한 벌을 맞추어 드렸더니 집으로 돌아가서 곧 치르게 되는 환갑연에 입겠다며 기어이 입지 않고 짐짝에다 정히 넣어가셨다. 그런데 환갑연때 찍은 사진을 보내 온 걸보니 그 양복대신 중국 사람들처럼 중산복 차림이었고 윗호주머니 뚜껑엔 장군님의 초상 마크가 꽂혀있었다. 그곳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어 혼자 먼저 입으려니 쑥스럽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옛날엔 우리 쪽으로 보내 줄 수 있었을 만큼 가지고 있던 옷마저 무언중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드린 사진기로 찍었다는 가족사진 속에 있는 모든 식구들의 얼굴들은 채굴을 하다 나온 사람들처럼 거머죽죽하였고 그 옷매무시하며 옆으로 비껴든 집안 살림형편은 이곳의 가장 궁핍한 시골 한족들 형편보다도 못하면 못했지 나은 데가 없어보였다. 삶은 살수록 나아져야 마땅한 게 아닌가? 있었던 것도 없어지는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그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짓고 태어난 사람들일까?


셋방살이

아내와 결혼해서 아들애가 열 살을 먹도록 우린 쭉 셋방살이를 했다. 스팀이 있는 집은 방세가 비싸서 아내와 나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남의 집 행랑채를 얻었다. 아내 혼자 들어서면 꽉 차는 정주칸 하나에 세 식구가 누우면 딱 맞는 구들 하나가 전부인 셋집은 창고로 지었던 집을 비워서 세를 낸 집이라 바람벽이 두텁지 않아 엄동설한에는 온 집안에 성애가 들어왔고 정주에 놓은 물독에는 자고나면 살얼음이 낄 정도로 추웠다. 그래서 구들에 불을 처때는 것으로 냉기를 막는 수밖에 없었는데 저녁에 자리를 펴고 누우면 이부자리 밑은 요가 탈 정도로 지글지글 끓어올랐지만 이불 밖으로 내놓은 얼굴은 추워서 입김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밤이면 아들애는 늘 방한모를 씌워서 재우곤 했다. 그 바람에 아들애는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시내에서 맨 먼저 지어올린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우린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물려준 유산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아파트 생활은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내 평생에 저런 집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아파트는 고사하고 단층집이래도 내 이름으로 된 따뜻한 집 한 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갈마들었다.

1996년 가을 시 교육국에서는 전시 교육계통 가속만이 들 수 있는 아파트를 짓는다는 공문을 냈다. 집을 지어놓고 분양하는 것이 아니고 살 의향이 있는 개인은 먼저 자금을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120여 가구가 들 수 있는 7층짜리 아파트를 짓는데 층수에 따라 가격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남들은 어디서 어떤 경로로 구했는지 저마다 선불금을 가져다 바치고 층수를 고르느라 즐거운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격으로 그러는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 서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제일 싼 것이라 해도 7만원 돈이 있어야 엄두를 내 볼 수 있었고 거기다 집안 장식까지 하려면 적어도 2,3만원은 더 있어야 했다. 중국에서 짓는 집들은 실내 장식을 일절 하지 않아 개인이 다시 자기 구미대로 장식을 해야 한다. 나와 아내의 월급을 한 푼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저금을 해도 5년이란 시간이 걸려야 모을 수 있는 거금이여서 부럽기는 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족들은 달랐다. 우리가 이밥에 고기반찬을 먹을 때 그들은 마른 빵이나 옥수수 죽 따위로 애태우며 돈을 악착같이 모은다. 중국 사람들의 외형만 보고서는 그 사람의 경제수준을 짐작하기가 힘들다. 입지 않고 먹지 않고 그렇게 돈을 모았다가 아들딸들을 장가보내고 집을 사주는 것이 그들의 평생 분투목표이고 살아가는 이유이고 락이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기에 관건적인 시각엔 모두 돈뭉치를 끄집어 낼 수 있는데 그 돈뭉치도 은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안 구석이 아니면 덮고 자는 헌 누더기 이불이 아니면 베고 자던 베개통에서 나온다. 우리의 사유로는 생각 할 수도 없는 일들을 이곳 한족사람들은 해낸다. 그러나 우린 그들처럼 근검하지 못하다. 그러니 남들이 집을 살때 우리는 그러는 그들을 그저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아쉽지만 부득이 그렇게 귀 막고 눈감고 보지 않고 살려고 작심하는 우리에게 삶은 짓궂은 장난을 걸어왔다. 뜬금없이 우리가 세들어 사는 집이 갑자기 철거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시 공안계통에서 가속사택을 짓는데 이듬해 봄 안으로 몽땅 집을 비우라는 통보문이 날아왔다. 주인집 가장 앞으로 날아온 통보문은 협상의 여지는 꼬물만치도 없는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보상은 쳐주긴 쳐준다는데 따져보니 그 돈으로는 다른 곳에 가서 지금 살고 있는 집만한 걸 사기엔 어림도 없는 어처구니도 없는 값이었다. 그해 겨울을 주인집에서는 어디 가서 다시 집을 사야하나 하고 고민했고 우리는 이제 또 어디 가서 셋집을 얻어야 하나 근심하며 그렇게 걱정 속에 보냈다. 해토가 되자 공안제복을 입은 자들이 안 나간다고, 못 나간다고 버티는 사람들을 무작정 끌어냈고 중장비가 들이닥치며 종이 성냥갑 부수듯 게딱지같은 집들을 짓뭉개버리기 시작했다. 권력이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일장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시위나 언론집회는 자유라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쓰여 있긴 하지만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중국 사람들이 시위 하는 것을 종래로 보지 못했다. 그렇게 무력으로 들이대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8대 조상까지 거들어 욕을 즉살나게 퍼부으면서도 날이 저물자 결국은 어디론가 다 이삿짐을 싣고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장에게 그저 이렇게 쫓겨나고 말거냐고 물었더니 그럼 어쩌느냐?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닌가? 싸울 대상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공안국 사람들인데 중국에서는 자고로 일개인이 칼자루 쥔 사람을 이겨낸 선례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방도를 빨리 구하는 것이 우선책이라고 했다. 겨뤄보지도 않고 지고 이김을 손금 보듯 훤히 내다보고 있는 주인장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한족사람들의 참을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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