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가 중동을 떠나다

주 사우디 호주 대사관에서 1989년 3월 이민 비자를 받았다. 7월 27일까지 기술독립이민으로 입국하라는 조건이다. 아직까지 사우디 정부와 계약기간이 여전히 4개월 남짓 남았으므로 바쁘게 고국 서울에 돌아가 호주로 향하는 일정을 짜야 했다. 아직도 4개월이나 남아 마치 4년같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덥고 삭막한 사막의 생활을 살아온지가 10년 가까이 흘러 왔는데 막상 중동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려니 아쉬움이 앞선다. 이 병원은 수십 개국 나라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 중 한국 간호원들이 제일 많았고 그 이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간호원, 의사 합쳐서 천 명 정도의 의료진이 있는 2천동이나 되는 큰 종합 병원이었다.

내가 맡고 있는 직책은 maintenance 기술 인원 하청업자들을 관리 하는 일이었다.

이제 계약이 완료되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바쁜 나날이 되었다. 각 부서를 다니면서 인사를 하였다. 병원 원장이 송별식도 특별히 마련해 주시고 기술팀 및 한국 의료팀들도 내가 그곳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이임식을 마련해 주었다. 이별의 잔을 나누다 보니 먼저 아쉬움이 앞선다. 각국의 다른 문화 및 습관, 음식문화를 보고 익히고 같이 근무하면서 민족은 틀리지만 마음은 똑같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한국으로 향하여 보름동안 가산정리를 하고 호주로 가야 된다는 생각과 아내가 아프다는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한편 중동을 떠나게 되서 아쉬움과 시원섭섭함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한 많은 사막, 이곳에서 외로운 기러기는 영원히 떠난다고 동료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저녁 해질 무렵에 짐꾸러미를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어머님과의 이별

한국에 1년여 만에 돌아와 가족, 아내, 어머니와 상봉하니 무척 즐겁다. 아내를 보니 즐거운 마음이 한순간 사라진다. 아내의 희멀건 눈동자와 과대망상의 헛소리, 그리고 잠 못 자는 우울증 증상이 심한 상태다. 며칠사이 남편이 있어서 좀 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약을 먹어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사우디에서 이미 편지로 이민에 대한 준비사항을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에 현재 살고 있는 집을 파는 계약은 이미 되어 있었다. 아내는 아픈 상태이므로 아이들 학교 문제는 나 혼자 직접 방문하여 선생님들께 인사드리고 아울러 학교 성적 증명서를 만들었다. 딸과 아들은 같은 중학교 1학년과 2학년에 다녔는데 품성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데 이민 간다고 선생님들께서는 못내 아쉬워 하셨다. 아내와 같이 학교에 못 간 것이 동방예의지국에서 못내 서운했다.

짐은 최소로 줄여서 컨테이너 운송업체를 통하여 호주로 보내고 집을 팔은 잔금은 경비를 제외하고 호주 은행으로 송금했다. 아내가 병이 심한 상태라 이제 이민을 가느냐 못 가느냐의 귀로에 가슴을 조였다. 주어진 비자의 유효 기간으로 가지 아니 할 수도 없고, 어머님도 아픈 며느리 걱정, 아들 이민 후 어머님 자신의 거처 걱정으로 한숨만 쉬고 계신다. 어머님과 아픈 아내에게 말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태웠다. 차마 나는 말을 못하고…. 이제 직장도 그만두고 이민을 안간다면 어떻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 골똘히 해보았지만 도저히 궁리가 생기지 않는다. 이민가서 치료하자고 마음을 정하고 이삿짐을 쌌다. 어머님에게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리고, 어려운 준비를 일부러 서둘렀다.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누구한테 하소연 할 데도 없어 창가의 밤하늘만 쳐다보고 내가 만든 낸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이민 준비를 정한 기간 내에 바쁘게 하다보니 어느새 입국해야 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바쁜 나머지 먼 곳에 사는 친척들한테는 내려가서 인사도 못했다.

어머님 슬하에 4남 2녀, 나는 다섯 번째 아들로서 서울에만 두 누나가 있고 모두 부산에 살고 있다. 전화로만 인사하고 가까운 서울 누나를 불러 어머니와 온가족이 함께 최후의 송별 저녁 식사를 하였다.

 동네 이웃 사람들, 아들, 딸 친구들, 친지들한테 방문 인사를 하였더니, 이웃들은 우리가 호주로 간다는 것이 부러운 눈치였다. “이민해서 아내 병 잘 나수고, 자주 소식 전하며 잘살라”는 부탁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호주 오시면 꼭 들러주십시요.” 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왔다.

그 이튿날 싱가폴을 거쳐 1박을 하고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 표가 예약되었다. 아이들은 오랜 친구들이 이곳에 있어 호주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할머니와 이별하려니 마음이 아픈 듯 했다. 어머니께서 손녀, 손자를 어릴 때부터 계속 돌보아 왔기에 어머님과 나와의 이별도 이별이거니와 할머니와 손자들의 이별이 더 가슴 아프다. 아내는 내가 이끄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랐다. 너마저 떠나면 나는 어찌사냐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신다. 떠나는 나는 말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는 부산에 가시더라도 의지 할 곳이 없다. 그렇다고 이민비자에 부모는 포함시켜 주지 않으니 같이 갈수도 없다.

그래서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곳, 현재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따로 방을 얻으실 수 있도록 적지 않은 돈을 어머님께 챙겨 드리고 누나한테 상의하여 어머님 계실 방을 구하라고 누나한테 부탁 하였다. 생활비는 예전 중동에서 벌은 돈으로 사두었던 상가에서 나오는 월세로 어머님 생활비를 충당토록 하고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기로 예약을 했다. 누님과 어머님이 공항에 나오시겠다는 것을 전송을 뿌리치고 싱가폴을 거쳐 시드니로 향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어머니를 남기고 떠나가는 일이다. 그 이후 10년 동안 이민생활의 바쁜 핑계로 떠나온 고국 한번 가지 못하고 돌아가신 작은 형님의 딸 조카 시집 갈 때 한번 들려 왔으니 그 사이의 사연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다.

어머니께서는 그 후 호주를 방문하여 머물다 가셨는데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야간학교를 다니며 노력하는 아들이 너무나 측은하셨던지 지금도 그때에 이민 와서 살아온 이야기를 가끔 하시며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혼자서 건강하게 오셨다 가시곤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98세로 연로하시어 올 수는 없지만, 지금도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 느껴진다. 학자이신 집안에서 난 어머니께서 재산이란 논 두마지기 밖에 없는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께 시집오셔서 갖은 고생하시며 자식들 교육시키기 위하여 개나리봇짐 들고 도시로 향한 용감하신 어머니, 당신이 아니었던들 불효자인 내가 있을 수 있었겠는지?

민들레꽃처럼 소박하고 느긋한 어머니는 돈 한 푼만 생겨도 동네 어르신들을 불러 모으셨었다. “나 죽은 뒤에 돈 다 소용없다. 살아 있을때 나누어야 즐거운 법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지금까지도 집안 어르신, 자식, 손자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집안의 역사를 읊으시는 총기를 지니신 분. 요즈음 전화하면 “내 몸 걱정 말고 너희나 건강해라. 나는 와 안 죽노? 몇 년 전 큰 아들, 작은 아들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죄인이다. 내 걱정은 말고 너희들 걱정해라” 는 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설움에 눈시울이 뜨겁다. 어머님 부디 양로원에서 건강하시옵고 먼 길이지만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호주로 향한 이민


떠날 때 더운 여름이라 한국은 무더웠지만 중간 기착지인 싱가폴도 무더웠다. 이민을 향해 바쁘게 서울을 떠나 싱가폴에서 1박2일, 모처럼 가족들과의 오붓한 시간이다. 지나온 나날들의 헤어짐에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갖게 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행하게 됨을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공항 가까운 곳에 호텔을 얻어 짐을 맡기고 활기찬 마음으로 일가족 4명은 이것저것 쇼핑도 하고, 바닷가도 거닐며 레스토랑도 들렸다. 아이들도 모처럼 나온 외국이라 호기심에 찬 눈동자로 두리번거렸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기들 친구들과 어울려서 만화도 보고, 아니면 공부에 열중하든지 했을 것인데 오랜만에 갖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재미있게 가족들과 갖는 모처럼의 추억 있는 하루가 되었다. 호주로 가기 위해 저녁 늦게 출국을 서두르는데 이제 제2의 고향이 될 호주로 비행기 트랩을 밟고 오대양의 호주땅을 향하니 한편 좋기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떠오르기도 했다.

손에 들은 가방을 기내 위에 올리고 나란히 한 줄에 자동적으로 남편, 아내, 딸, 아들 순서로 앉았다. 아내가 우울증기가 약간 있지만 잘 자고 있다. 한시름 놓고 이제 호주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계획을 어림잡아 보기도 하고 어디에서 살까 시드니 아니면 켄버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내 나이 45세, 얼마나 중동생활에 지쳤길래 가족과 함께 있는 가정의 그리움, 어린 아들 딸의 교육문제가 중했길래 이러한 이민 생활을 해야 하나? 마음속으로 자괴감과 비애감이 접어들기도 했다. 이민의 목적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 그리고 아들 딸 교육시키는 농사, 이것이 나의 최고 농사꺼리라 생각한다.

어느새 시드니 새벽에 도착. 아무도 마중하는 이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했다. 초창기 직장 동기 집 세븐 힐에 숙소를 정하고 켄버라에 있는 외사촌 누이 집에 머물면서 직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그곳에서 2주일동안 숙식을 하였다. 매형에게 인사도 하고 앞으로의 방향, 직장 문제도 상의 할겸, 조카들도 우리 아들·딸과 비슷한 나이로 잘 어울렸다. 조카들은 한글을 모른다. 매형은 40년 전에 이곳에 왔는데 호주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글이 필요 없었는지 우리 식구들이 한글을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는 글로 가르쳐 주었더니 재미있게 배운다. 그 와중에 이러한 일화가 있었다. 한번은 어디 갔다 집에 아무도 없길래 조카 줄리아 한테 너의 어머니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더니 ‘엄마, 삼촌 주으러 갔다(Pick up)”고 한다. 무슨 말인가 의아하여 물었더니 영어로 pick up이라고 한다. 그때야 무슨 말인가 하고 이해를 하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이 있어 당장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다. 아이들이 잘 어울려 교육환경도 좋고 새로운 도시라서인지 조용하고 농촌에 온 기분 같았다. 그러나 내 처지엔 이민 온 사람이 조용하게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으나 직장을 구할 수 없었고 시드니에서 정착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를 한 대사서 아내와 의논하여 외사촌이 있는 가까운 시드니로 향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전 이민 영어학교에 한 달간 캔버라에서 다니기로 했기 때문에 그곳에 두고 나와 아내는 봇짐을 싸고 시드니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운전면허도 호주 면허로 바꾸고 호주의 생활상도 어느 정도 정보를 얻었다. 한 달 후 시드니에 도착하여 셋집을 얻고 직장을 찾을 준비를 하기 위하여 이것저것 정보를 얻었다. 날씨도 캔버라보다 시드니가 따뜻하고 사람들이 많아 어딘가 훈기가 감도는 환경이기도 했다. 세계의 3대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시드니라는 말을 초등학교 지리시간에 널리 익히 들어 알고는 있지만 이곳저곳 둘러볼 시간과 여유도 없다. 집을 얻고 한 달이 다 되어서 아이들을 시드니로 데려와야 한다는 강박감에 바쁜 하루하루였다.

캔버라에 있는 외사촌 누나, 매형한테 작별을 하고 시드니 10월의 봄에 Pagewood에 정착 하게 되었다. 같은 Unit 옆집에 영빈이네 식구, 한국 사람이 살았는데 온지가 1년이 되어 내가 온 몇 개월 후 호주는 인구가 적어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미국으로 이민을 훌쩍 가버렸다. 만나서 정들자 이별이다. 모처럼 고국 사람과의 이곳에서의 처음 인연이었는데 아쉬운 작별만 남기고 떠났다. 호주가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더 좋은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어떤 생활이 더 낳은 것인지? 물질인지, 행복인지…. 2개가 모두 충족되면 더 낳겠지만 행복하게 산다는데 의미를 두어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중심을 바로 잡았다.

사랑하는 아들, 딸 푸른 소나무처럼 커다오


딸 현지, 아들 대열이를 이민 영어 학교로 입학시켰다. 막바로 중학교 1학년, 2학년을 넣어주지 않으니까 6개월 교육을 받고 Parramatta 지역으로 옮겼다. 우리 집도 옆집에 영빈이가 미국으로 다시 이민 간 후 Lidcombe 쪽으로 집을 사서 우리 식구도 거처를 옮겼다. 정부에서 모처럼 첫 집을 샀다고 만 불을 지원해 주었다. 나는 혹시 다른데 보낼 돈을 우리 집으로 잘못 왔나 싶어 눈을 의심했다. 정부에서 보내온 편지가 아무리 읽어보아도 받는 사람이 내 이름이다. 그래서 매형에게 물었더니 처음 집사는 사람은 이사집 경비로 준다고 한다. 복지시설이 잘 된 나라이구나 하고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놀랐다. 길을 물으면 버스를 정차하고 길을 안내 해주는 버스 운전수들, 차가 고장이 나서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무엇을 도와줄 것이 없느냐며 자기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주는 사람들 등등…. 사람들이 순박하고 너무나 친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감사함에 세금을 거짓말하지 않고 신고를 꼬박 꼬박 잘하고 있다. 또한 길을 가다가도 타인이 도움을 요청하면 차에서 내려 돕는다. 이곳은 시내와 위성도시 파라마타 중간이고 기찻길의 삼각지라서 교통이 좋았다. 한인 성당도 가까이 있어 아이들의 인성교육도 좋으리라 판단되었다. 초원의 넓은 운동장이 옆에 있고 수영장, 정구장, 슈퍼마켓, 철도, 버스 정거정도 가까이 있어 우리 생활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덕성교육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딸은 인성교육에서 덕성은 제대로 되었으되 개성이 부족한 것 같고 아들은 교양이 부족한 면이 보여, 아내가 잘 보살피고는 있지만 그러한 면을 면밀히 관찰하고 아이들과 서로 대화하여 고치기도 한다. 부모로써 모범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에서 책을 펴놓고 아이들에게 일찍 일어나도록 독촉을 하기도 한다. 잔디를 깎을 때는 각자에게 분배하여 아들은 깎고 나는 갈꾸리로 끌고 딸은 잔디를 쓰레기통에 담고 그리고 아내는 잡풀을 뽑았다.

딸과 아들은 같은 학교 파라마타에 있는 필립고등학교에 다녀서 학교를 방문 시 선생님들께서 학생들 성적 및 행동 발달 사항 등을 대개 알려준다. 아들은 교양이 부족한 듯하지만 공부는 자기학교에서 120명중 일등이란다. 딸은 중간보다는 좋은 편이고 품성은 좋다고 한다. 아들은 특이한 보험 통계전문(Actuary)과에 입학하였고 딸은 간호과에 입학하였다. 그래서 딸한테 너는 나이팅게일이 되려고 하느냐 농담 섞인 진담도 하였다. 방학 동안에 아들한테 두 달간 아버지가 하는 건설 일을 시켰다. 부모의 하는 일과 삶도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배관작업이었는데 마루 밑도 기어들어가도록 하고, 엎드려 용접도 하고, 천장 밑도 올라가 설비 배관 및 용접하는데 도왔다. 외국인 공사도 하고 교포 한국인 공사도 하였다. 일이 어렵다는 것과 밤늦게까지 하니 고되다는 것과 공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된다는 공기개념도 알렸다.

 

한 번은 아들이 대학 2학년 시절 다른 과에 전과하겠다고 저녁 식사 후에 느닷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불러 앉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자기반 같은 과 학생이 20명이 맨 처음 같이 공부를 했는데 지금 11명만 남았다, 그래서 공부도 어렵고 다른 과로 전과하겠다고 한다. 나는 확고한 다짐을 받기 위해 물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네가 좋아해서 갔느냐? 아버지가 현재 네가 다니는 그 과에 가라고 했느냐?

아들의 대답이 자기가 좋아서 입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너는 초지일관 처음의 생각으로 끝까지 가야 되지 않느냐? 아버지인 나는 공과대학 쪽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공과 쪽으로 나왔으니 기술 쪽이 직업 찾기도 쉽고 호주는 기술 천국이며 기술이 대접받는 사회라 하지 않느냐, 너는 창의력도 있으니까. 그랬더니 공과는 싫고 굳이 다른 과로 전과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나도 단단히 확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굳어 그렇다면 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내 비지니스 하는 건설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아들의 말이 나는 공부를 좋아하기 때문에 건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아예 그만두라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결국은 다시 처음 다녔던 자기가 선택한 과로 되돌아 유급 없이 무사히 보험통계전문과(Actuary)를 좋은 학점으로 그곳을 졸업하고 지금은 좋은 직장과 연봉도 꽤 높게 받고 있다. 한국인의 소나무 정신과 대나무 같은 기상을 가짐에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때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나. 물론 전과해서 더 잘될 수도 못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30대 젊은이로 호주 최고의 연봉을 받고 있으니 잘 되었다고 보아야 되지 않을까?

 

고달픈 삶

 

사우디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아롱거리고 오대양 남쪽 호주를 향한 것이 엊그제 같이 머리에 맴도는데 지상낙원이라는 나라에 왔다는 생각이 어느새 떠나고 매일 매일 삶의 준비와 도전의 시간이었다. 기술영어 코스 3개월, 직장구하기, 여전히 남은 백호주의 텃세. 영어권 나라에서는 고국에서의 학력과 경력도 별 소용이 없어, 다시 기술학교(TAFE)에 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 동시에 직장도 얻게 되었는데 학교는 밤에 다니며 바쁜 이민 생활을 했다. 4년이 지난 후 늦깍이로 50대에 본래의 직업인 건설계통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나마 고용인에서 고용주가 된 희망찬 마음으로 주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업무에 치중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다친 몸으로도 개미 같이 일했다. 생계유지와 바쁜 일과 업무에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1993년도 처음으로 집수리 공사를 하였다. 시드니에 사는 외사촌 누나 매형의 집이었는데, 내가 건설 일을 하는 것을 알고 원가로 계약을 했다. 그러나 매형은 시방서에 기재된 그 이상의 기구를 원했고 정문 앞에 유럽식 데코레이션을 옛날과 똑같이 원했다. 70년 된 오래된 집이라 데코레이션 아치를 구하지 못하여 특수제작을 했기 때문에 사양과 맞지 않는 부분에 추가 금액을 요구하였더니 법원에 거꾸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내용은 모든 것이 사양대로 안 되었다고 그때부터 얼티기를 잡았다. 나는 이민 온 후 처음 공사 작품이므로 정성을 다 쏟아 돈이 들어가더라도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막무가내다. 사양대로 안 되므로 배상금액을 계약금액 만치 청구하였다. 처음 당하는 일이고 처음 법원에 가는 일이라 내심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못다 한 일들을 빨리 서둘러 완공을 하기 위해 자재를 사러가다 차에 치여 몇 바퀴 뒹굴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팔과 어깨 부분, 머리 부분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었다. 교통사고가 불행 중 다행이라 조상님께, 하느님께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팠지만 겨우 걸을 수 있어 그 다음날로 아픔을 무릎 쓰고 직접 일은 못하였지만 인부들한테 일을 시켰다. 그때 85살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이곳에 잠시 동안 한국에서 오셔서 중재까지 해주셨다. 어머님의 조카 되는 분께 “법원까지 갈 일이 무엇이 있느냐” 하시면서 법원 소송을 취하하라고 했으나 매형은 코방귀도 안 뀌었다. 어머님께서도 공사 마무리 및 청소를 돕기 위해서 쉬지도 못하셔서 병만 얻어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법원의 판결은 공사계약자가 일을 더 했으니 돈을 더 지불하라는 판결로 끝났다. 친척들과의 공사거래에서 어머님의 마음고생에 가슴이 아팠고, 이민 후 첫 건설공사에서 나는 큰 경험을 얻는 단련의 장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요일은 온 식구가 플레밍톤 시장에 들러 일주일 분의 부식을 준비했다. 저녁에는 상점마다 문을 닫아 아무것도 살 수 없었고 식구가 많은 집은 대개 냉장고가 2개나 되었으나 우리 집은 1개였다.

 

플레밍천 시장 보기

 

플레밍턴 시장은 주말에만 청과물과 수산물을 파는, 말하자면 시드니 농수산물 센터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싸기도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청과, 수산물을 한 곳에 살 수 있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다민족 문화권이 한데 어울려있는 왁자지껄한 시장판의 이민자들의 활기찬 모습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바쁜 와중에도 빼놓지 않고 이곳을 찾게 된다. 돗데기 시장 같아 서민층에 어울리는 것이, 쇼핑과 함께 낭만도 느낄 수 있다하면 어폐일까.

이곳 생활이 주급 생활이다 보니 보통 일주일 분의 부식을 한꺼번에 사게 된다. 현재는 아들․딸들이 다 출가하여 두 식구인데도 몇 해 전 네 식구일 때나 장을 보는 양은 똑같다. 오히려 현재 더 많은 양을 사게 된다. 회사 사무실 직원이 늘다 보니 자연히 사는 양이 느는가 보다. 어쨌든 아내를 돕기 위할 겸 쇼핑도 즐길 겸 꿩 먹고 알 먹기로 주말 장을 간다.

주말에 열리는 시드니 플레밍턴 시장은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꽉꽉 차서 돗데기 시장 같았는데 요즘은 덜한 것 같다. 여느 때와 같이 야채 가게를 거쳐 과일가게, 그리고 마지막에 생선 가게를 거치곤 한다.

시드니의 봄인 9, 10, 11월엔 딸기, 체리가 많이 나고 여름인 12, 1, 2월엔 수박, 망고, 멜론, 리치, 바나나, 아보카도, 파파야, 파인애플, 복숭아와 자두(채소류로는 오이와 풋고추가 제철이다)등 다양한 과일이 나와 과일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가을(3, 4, 5월)에는 사과, 밤, 감, 배를 맛 볼 수 있고, 겨울(6, 7, 8월)에는 만다린, 오렌지 등이 주종을 이룬다. 요즘은 대부분 사철 과일과 채소를 살 수 있지만, 역시 제철 과일에 비해 영양적인 면이나 가격적으로 우수하지 않다.

하루는 멀찌감치 지나는데 6살쯤 된 어린아이가 ‘9달라 9달라’ 하고 있는 목소리를 다하여 외치면서 오렌지를 팔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얼마짜리인데 ‘9달라’로 파는가! 다른 데는 15달러, 12달러인데 조그마한 아이가 왜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서 파는가? 싸기도 하고, 그 어린애가 파는 그 외침이 하도 씩씩해서 안쓰러운 마음에 무조건 귤 한 박스를 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농촌 Golburn 근처에서 이른 아침 3시 30분에 출발하여 온다고 한다. 자기 아버지는 옆 저쪽에서 팔고 있었다. 아이가 소리치고 있는 동안에 시선이 집중되어 내가 사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모여들어 많이들 사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몇 군데라도 값을 물어보고 사는데, 군중 심리인지 그 아이의 씩씩한 목소리에 끌렸는지 후딱 사버렸다. 아내는 다른 장을 보고 있었는데 그 근처 다른데서 귤 1 박스를 12 달러에 사 들고 왔다. 한 박스만 살 것을 두 박스를 사게 돼버린 것이다. 아내는 자기한테 의논도 안하고 왜 샀느냐고 궁시렁 댔다. 나는 오히려 싸게 살 것을 비싸게 샀다고 투덜댔다. 하기야 내가 아내와 의논도 안하고 무턱대고 산 것은 값을 떠나 잘못은 잘못이다. 비싼 것은 그만한 값을 할 테니깐. 바쁘다 보니 시비할 겨를도 없이 과일 박스를 어깨에 메고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해 유유히 갔다. 무거웠지만 또 좋아하는 오징어 생선 가게도 못 들렸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저 어린아이가 아버지 따라 일찍 그 먼 곳에서 아버지를 돕기 위하여 새벽잠도 설치고 온 효심에 안쓰럽고 대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 본성의 발동인지 모르겠다.

나무에 새싹이 움트는 듯한 어린 아이를 보면 봄비에 생기 오르듯 활기차고 생생한 모습이 이민생활에 새삼 살아가는 삶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업무 이야기


어느덧, 벌써 이민 20년의 세월이 강물같이 흘렀다. 어떤 때는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때도 있었는가 하면, 공사대금을 못 받아 트럭 문고리를 붙잡고 수백 미터를 끌려간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때론 소비자는 계약에도 없는 데, 일을 서비스로 더 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은 값을 내놓고 제일 좋은 물품들을 요구하는 사람, 돈을 주지 않는 사람, 대수롭지 않은 일에 흠집을 잡으며 돈을 주지 않는 사람. 그러다 못해 법정까지 소송를 제기하는 사람 등등….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이민해서 이렇게까지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는가, 안 할 수는 없는가, 때로는 참담한 마음과 비정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공정거래 재판소도 몇 번 들락거렸는데 들릴 때 마다 소가 도살장을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변호사를 쓰지 않아도 재판은 공정하였다. 돈을 못 받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총 40년의 직장 및 비지니스, 인생의 삶을 이미 동서고금을 통해 익혀들어 알지만 실제로 부딪쳐 보면 고되고 어려운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까지 잘 버티어 왔다. 이민이 도전의 시작일진데, 삶을 헤쳐 나간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 하루대로 충실한 삶을 살고 내일은 앞으로의 희망찬 나날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았기에 이렇듯 잘 견디어 올 수 있었다.

2000년대는 바쁜 와중에도 호주한인건설협회 단체장을 8년 하느라 무척 바쁜 나날이었다. 기술 무자격자, 한국에서 갓 온 사람들 취직, 라이센스 취득, 한인 건설인들의 위상을 호주에 알리는 일, 회원들의 친목 및 체육대회, 회원 확장, 공사 정보 등의 많은 업무가 회장의 일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워킹비자를 가진 사람들의 이민을 돕는 일, 비자가 만기된 상태에서 이민을 돕는 일, 워킹비자가 없는 사람의 이민을 돕기 위해 법정에 갔던 일들. 한편 무면허업자의 불법 광고 및 피해사항들에 대한 조치, 불법 면허자 및 무면허 업자들이 마치 박힌 주춧돌을 뽑듯 상도의가 없는 사람들의 정화 등 반목과 질시에 가슴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처음 8명의 회원에서 현제 200여개의 회사가 호주한인건설협회에 가입하였으니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 건설개발 프로젝트를 하기 위한 건설공제조합도 세우고 더욱더 이곳의 많은 건설인들이 모이는 단체가 되었다. 어느 나라이든, 건설업 및 부동산의 부가가치는 다시 부언할 필요도 없지만 생면부지의 타국, 이민사회에서 비지니스를 할 수 있는 것은 건설업 기술이 유리하다. 많은 기술과 경력 그리고 해외경력을 가졌음에도 이민 초기에는 위축되고 두려움이 앞서서 이곳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건설업자 및 다른 직종의 기술자를 독려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한 기술력과 뛰어난 손재주들을 이곳에서 인정받아 가고 있다. 물론 회원들의 희생과 봉사 및 협조의 힘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오늘의 한인 건설인들의 보람을 느끼겠는가? 교민사회 속의 호주한인건설협회, 호주사회 속의 호주한인건설협회로 발돋움 되고 있다. 호주의 이민이 앞으로는 대양주 속의 그리고 세계 속의 호주한인건설협회를 꿈꾸며….

수도자의 길로 떠난 딸


이민 오자 집을 Lidcombe으로 옮긴 후 성당이 나의 집 1.5Km 내외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성당에 식구들과 함께 빠지지 않고 나갔다. 아들․딸은 이곳에서 중등학교 2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젊은 30대 시절 나는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아내는 부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 회사 복장이 누른색이었는데 처녀들한테는 산업의 역군이라 꽤 인기가 있었고 아내도 부산시 가까이 있어서 꽤나 괜찮은 학교근무로 직장이 좋았다. 친지의 소개로 맞선을 보아 결혼해서 1년 만에 부산에서 딸을 낳았다. 그 다음해 나의 직장 따라 아내는 포항에서 근무하였는데 포항 바닷가 회사 사택에서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의 직장 따라 서울에서는 내곡동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내는 딸이나 아들을 평범한 가정교육을 시켰고 근면, 성실과 의롭게 살자라는 집의 가훈아래 덕성을 중하게 여겨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이민 온 후 일요일마다 열심히 성당에 간 것이 딸에게는 수도의 길이 된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졸업 후 병원에 2년 근무한 후 느닷없이 수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더니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위에 놓지 않겠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싶다며 굳이 그길로 가겠다고 결심이 서 있었다. 아내는 말렸다. 나도 말렸다. 아내가 병들어 있는데 딸조차 수도자의 길로 가면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말렸다. 둘째 날 아침을 먹지 않아 방을 노크하고 깨웠더니 아무 대답도 없다. 침대 옆 책상에 (마르코 4장 21절)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위에 놓지 않겠느냐?’를 큰 글씨로 적어 놓고는 깨우니 이불을 더 뒤집어쓰고는 묵묵부답이다. 어찌 할 수가 없어 딸을 흔들어 깨워서 식사라도 하라고 하고는 방을 나왔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아 단단하게 마음자세가 섰구나 하여 아내와 의논해서 딸이 좋아하는 길로 보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부모의 마음은 아팠다. 얼마 안 있으면 시집보낼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특히 아내는 마음이 더 아팠다. 아내는 밥도 몇 끼 굶고 잠도 잘 자지 않았다. 아내가 안쓰럽다. 나는 아내를 달랠 욕심으로 더 좋은 자기 길로 가는데 서러워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자고 제의를 했다. 나 역시 마음이 아팠는데, 아내의 마음은 어머니로서 더 많이 아팠으리라 생각하고 몇 일간 그대로 두었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딸에게 물었다. 언제 입교하느냐? 물었더니 “이틀 있으면 간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라고 말하고는 나는 아무 말 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해주었다.

무엇 준비할 것 없느냐? 물었더니 아무것도 준비 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틀 후 시드니 공항에서 성당에서 나온 친구, 수녀님들, 성당 사목회에서 나와 자기 친구인 아놀드, 양 엘리자벳(딸의 본래 이름) 두 사람이 이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도자의 길로 떠난다. 친구가 있어서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혼자 떠나면 마음이 얼마나 더 아팠을까? 생각을 해본다. 호주에서 중학교 2학년에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 병원 근무 2년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수도자의 길로 영원히 떠났다. 가족 이민의 목표가 가족과 더불어 아이들의 교육, 삶의 보람된 가치를 찾으러 온 것인데 벌써 성장하여 부모의 길, 자식의 길로 가야할 때가 온 것이구나! 다가오는 숙명으로 생각했는데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아내가 흐느껴 울었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감내 할 수가 없어 손수건으로 훔쳐 닦았다. 아내한테 기쁘게 보내자고 어께를 두드리고는 뒤돌아서서 흐르는 눈물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딸의 가는 길에 빛과 소금이 되어 달라고 하느님께 빌어 주자고 걸어가면서 기도 했다. 진실한 사랑은 떠나보내 주는 것이라고….

딸이 떠난 그해 1999년 1월 호주는 더운 여름 날씨였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라고 뉴스에서 전한다. 떠난 지 6개월이 되어 딸한테 편지가 왔다.


아빠 엄마께 그리고 동생에게…

아빠, 엄마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아빠와 엄마 모두 건강하시겠지요? 두 분께서 보내주신 기쁜 소식의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아빠가 보내준 자매님들을 위한 편지를 보고 수녀님, 자매님 모두 기뻐했어요. 저도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또 존경스러워요.

엄마 편지를 받고 엄마가 다시 건강하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쁘고 주님께 감사했어요. 두 분께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여기는 여름이라 더운데. 산이 바로 건물 뒤에 있어서 수녀원은 시내에 비해서는 그래도 시원한 편이에요.

5월 6일은 면회 날이었는데 삼촌, 숙모, 지성, 큰어머니 네 분이 모두 오셔서 너무나 즐거웠어요. 큰어머니께서도 수녀원이 너무 경치도 좋고 또 자매님들도 즐거워 보인다고 좋아하셨어요. 면회를 와주셔서 고마웠구요. 맛있는 점심도 싸오셨어요.

이제 벌써 6월의 마지막 날이 왔네요. 이번 99년의 반도 다 지나갔어요. 많은 생활의 변화가 있었지만 어느 해보다 뜻 깊고 보람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없는 자리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믿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참, 봉고차 사신 것 축하드려요

With love 딸 현지 올림

 

 잠시 생각해 봅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욕망과 집착은 눈빛을 흐리게 합니다.

사람은 욕망을 채움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내주는’ 사람으로 인간다워집니다.

맑고 아름다운 눈,

진실하고 너그러운 마음,

은근하고 끈기있는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보다 더 필요합니다.

 

보고 싶은 대열이에게


대열아! 안녕! 잘 지내고 있니?

정말 보고 싶다.

넌 아마 지금쯤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있겠지? 학교생활은 어때? Timmy와 똘이는 잘있겠지? 난 여기에서 기쁘고 또 즐겁게 지내고 있어. 그리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여기에 계신 수녀님들과 자매님들은 모두 정말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비록 집과 떨어져 있지만 또 엄마, 아빠, 너와 떨어져 있지만 여기에서 정착해서 같이 입회한 자매들은 친언니와 동생 삼아 지내려고 해.

이렇게 너랑 떨어져 있으니 너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너를 좀 더 잘해주고 이해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줘. 원래 너의 일에는 열심이고 확실하니 걱정 안하구, 언제나 하루하루가 기쁘고 즐겁기를 바래.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길 빌며 always….

아빠 엄마한테 난 비록 효도도 못했지만 못다 한 효도, 기도로 조금이라도 덮으려고 노력할게. 따뜻한 한 마디라도 더 해드릴걸 하고 후회가 된다.

대열아, 언제나 너의 생각하면 그리움으로 밀려오는구나. 네가 했던 싱거운 소리들이 내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항상 강하고, 또 감기 몸살 조심해라. 그럼 이만 줄인다. 그럼 안녕!

+찬미 예수

1999. 3. 6.

 

누나가

편지를 받고나니 한편 마음이 가볍다. 답장도 보냈다.

 

<사랑하는 딸에게>

네가 보내준 정성스런 편지 엄마, 아빠는 잘 읽어 보았단다. 어느 해보다 뜻 깊고 보람된 한해였다니 엄마, 아빠는 기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곳 훈련 수녀님들 모두 다 무사하신지? 안부 전하려무나. 어느덧 네가 떠난 지도 벌써 6개월이 되었으니 세월은 참 폭포수와 같이 빠르구나. 계절도 바뀌어 이곳 호주는 겨울이라 어느 때보다 비바람과 태풍이 심하단다. 너의 어머님 건강하고 너의 아버지도 강건체라 감기도 못 달라드는가 보구나. 그러나 너의 동생은 감기가 연중행사이다.

집안 걱정은 염려하지 말려무나. 이곳에는 조카 은실이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서 할머님 오시고 큰 고모님도 오셨단다. 우리 식구도 모두 멜버른에 2박 3일 갔다 왔단다.

이곳 새 수녀님들 모두 건강 하시단다. 너의 이야기도 많이 하는가 보드라. 너의 어머니는 앞집에 젊은 한국 부부가 이사를 와서 재미있게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일요일이면 성당, 봉사, 그리고 레지오 활동, 풍물놀이로 하루가 바쁘게 지나고 있단다. 그러니 이곳은 걱정하지 말려무나.

그곳은 무더운 여름이라 특히 광주는 더 더울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내는데 아무 탈 없는지?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몸 건강하고, 희생과 봉사로 심신을 갈고 닦는데 이상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가 최선을 다하여 후회 없는 나날이 되기를 빌겠다. 주님의 가호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시간상 이만 줄인다. 그곳 동료 수녀님들의 건강도 아울러 빈다.

1999. 07. 26.

시드니에서 엄마, 아빠로부터

슬픈 모성애


이민 온 후 석 달째 되던 날 아침에 직업을 구하기 위해 어떤 회사에 인터뷰하러 갔다 온 사이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딸과 아들한테 물어도 학교 갔다와서 인지 오히려 어머니를 찾고 있다고 나한테 묻고 있다. 아프니까 바람쐬러 쇼핑이나 갔겠지?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저녁 해가 져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호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기에 길을 못 찾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 9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밤 10시가 되어도, 11시, 12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혹시나 Cooge에 있는 형님 집에 연락을 했다. 이리저리 아는 데는 모두 연락을 해보았으나 허탕 이었다. 할 수 없이 시드니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캔버라에 있는 매형 집에 전화했더니 호주 전국 및 공항에까지 신고하였다. 혹시나 한국에 되돌아 갔지나 않나 해서 처가 집에 전화 할 수는 없고 누나 집에 전화를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누나는 어리둥절해 한다. 잠도 오지 않고 기다림에 초조하다. 괜히 이민 왔나? 이민 와서 며칠 안 되어 아내를 잃는 불상사가? 처가 집에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나?…. 노심초사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틀이 지났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레드펀 공원 근처 경찰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이름이 박××이냐고 물었더니 한국인이고 이름이 같다고 경찰이 답했다. Cooge에 있는 외사촌 형님에게 자초지중을 말하고 레드펀 경찰서를 향해 차를 몰고 아내를 데리러 갔다. 경찰서에 도착해 담당 경찰관에게 어떻게 발견했느냐고 물었다. 경찰서 담당이 지역을 순찰하는데 아내가 경찰서를 묻더라고 한다. 아내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세수도 안하고 빵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단번에 느낌이 배가 얼마나 고팠겠나? 그리고 잠도 못자고 공원에 있었다니 불량배한테 지갑이나 떨리고 상처나 입지나 않았나? 그러나 무엇보다 아내를 찾아서 말 할 수 없이 무척 기뻤다.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하고 딸더러 도우라고 하고는 나는 점심식사를 차렸다. 아내는 배가 고팠는지 식사를 잘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내에게 물어보니, 정신이 좀 돌아와서 경찰서에 가서 집 찾는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불을 깔아 우선 아내를 재웠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정신과의사가 왕림하여 진단을 하고 약처방을 하였다. 주기적으로 2주에 한 번씩 의사가 왔다. 몇 달이 지나자 아내는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고, 몇 달이 지난 후 리드콤에 이사 온 이후 나도 직장을 가졌고 아내는 국민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TAFE학교에 다녔다. 영어 공부도 하고 주말이면 한글학교 교사도 하고 나와 함께 성당도 다니며 가사일도 잘하고 평상시와 같이 아들․딸을 잘 보살폈다. 직장을 갖기 위해 자기 소개서도 만들고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행복한 나의 집에 대한 글도 썼다.

 


󰠏자기 소개서󰠏

 

저는 한국에서 7년 6개월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임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저학년 (1, 2, 3학년)을 배정 받았으며 어린이들의 실력 향상 및 인성 발달에 조금이나마 이바지 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이제 호주에 사는 한인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글 지도와 국어, 산수 교육을 맡아서 열심히 해볼까 합니다. 저의 가족들은 1989년 7월 22일 호주에 남편의 기술이민(Engeneer)으로 첫 발을 디뎠습니다. 딸은 대학 1학년, 아들은 고등학교 12학년에 재학 중에 있습니다. 남편은 직장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호주에 와서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도 있고 하여 교사로서 또 다시 재도전하고 싶습니다. 모르는 것이나 잊어버린 것은 다시 배워서 의욕을 가지고 성의껏 해보려 합니다.

 


‘행복한 나의 집’

(죽은 아내가 영어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

나의 집은 XX Platform St. Lidcombe에 사는데 좀 낡은 집이지만 아늑하고 전철역과 버스역 그리고 다양한 가게들이 있어 좋다. 친구들, 남편의 친구, 아들의 친구가 와 있어 좋고 개와 고양이가 살고 있어 좋다. 개의 이름은 똘이인데 똘똘하다고 똘이로 이름 짓고 고양이는 멍청하고 티미하다고 티미로 이름을 지었다. 고양이 티미는 차 밑에서 자다가 차가 가는 줄 모르고 꼬리를 치어 동물 병원에 가서 꼬리를 잘랐다. 그래서 꼬리가 없는 고양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고양이를 싫어하지만 우리 집 식구라서 나는 좋아한다.

 

 우리 집은 천장이 높은 3.2m라서 남편은 이 공간을 좋아한다. 응접실에서 TV를 보기도 하고 집 뒤에 바비큐를 할 수 있는 넓은 뜰이 있어 좋다. 그러나 새집과 좋은 부엌이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언젠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어야지 “새로운 집 그리고 좋은 부엌”. 마음 깊이 약속을 그려본다.

이민 온지 십년이 되던 해 1999년 2월에 딸이 수도의 길로 간 이후 서서히 아내의 병세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8월 달이 되어 호주는 겨울이 되었고 아침저녁 영상 5-6°C이다. 방학이라 아들은 집에 있었고 나는 일에 바빠서 저녁 5시에 집에 돌아왔다.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아들한테 물어보니 아침 10시에 본다이에 갔다 온다고 나갔다고 한다. 근래에 아팠으므로 가슴이 덜컹했다. 요즈음 혼자 출입이 없었으니까. 저녁을 해놓고 하마 올까 밤 9시까지 기다렸다. 외사촌 형님 집, 친구 집, 자주 가는 외국인 친구 집을 모두 수소문 했으나 허탕이었다. 밤 10시에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행여나 올까 싶어 정문 앞 불을 켜놓고 아들과 함께 밤새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직장도 못가고 그 다음날 기다렸다. 아침 10시 큐라롱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급히 오라고 신발과 핸드백을 찾았다고. 그래서 찾았다는 희망의 말에 나와 외사촌 형님과 함께 급히 경찰서로 향했더니 경찰 담당이 비보를 전했다. 바닷가 와래인 비치에서 파도에 쓸려있는 시체를 동네 사람이 신고 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시체를 임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본인이 맞는지를 확인하라고 한다. 형님과 나는 시체에 덮인 보를 보고 “당신이 어떻게 이러한 죽음을 하다니….” 억장이 무너지듯이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쳐 울었다. 형님도 같이 울었다. 경찰이 보를 덮고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하는 말도 잊은체… 잘 살아 보겠다고 한 이민이었는데, 이제 옛날보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고 아들은 대학교 졸업반이고 딸은 수녀의 삶을 택했지만 어려운 삶을 벗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죽다니, 인생의 허무한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서 3일장으로 8월 29일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레지오장으로 많은 4백 명의 조문객이 왔다. 한국에서 처갓집 식구들, 처제와 처남도 왔다. 감사의 글을 교포신문에도 올리고 성당에서 일일이 만나는 대로 감사의 말을 대신했다. 딸은 교육기간 중 임시휴가를 5일 받고 준비가 늦어 한국을 출발하여 이곳에 늦게 도착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방에서 딸과 함께 많이 울었다. 딸이 떠나감으로 병이 악화되어 이렇게 죽음이 되었다고 부모로서 말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렸다. 이곳 동네 사람들도 호주 사람들이지만 마음 아프다고 위로의 말을 쏟았다. 49세로 인생의 꽃을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운명한 것에 마음이 더 아팠다.

처갓집에서 큰처남과 작은 처제가 시체가 있었던 그곳 바닷가에 가 보자고 조른다. 그곳은 너무 멀어 가보지 못하고 그 바다가 접한 가까운 바닷가 본다이 비치로 갔다. 작은 처제가 쌓였던 말들을 토해냈다.

“형부는 언니를 맨날 고생만 시키고 중동으로 한국에서는 지방으로. 결국엔 이민 와서는 죽게까지 만들었으니 형부가 언니를 죽였다.”며 소리쳐 운다. 동생으로서 말인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도 더 가슴이 아파 하늘을 나르고 있는 바다 갈매기만 쳐다보았다.

“처제와 처남한테 할 말이 없다. 와주어서 고맙다. 너의 언니, 너의 누이가 없더라도 마음만은 변치말자”고 말했다.

그 이튿날 처제, 처남이 나오지 말라 하는 것을 공항까지 마중 보내고 다음날 딸은 한국으로 떠나보냈다. 언제 만날지는 모르지만 모두 가슴에 큰 상처만 안고 떠났다.

 

이별의 노래(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가곡이 읊조려진다.

기러기 울어대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떠나간 후 12월에 가까워 딸한테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아빠께

비록 엄마는 계시지 않지만 하늘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며 뜻 깊고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새해 되시기를 빌어요. 2000년을 맞이하는 새해에는 더욱 풍성한 은총으로 나눔과 베품이 함께 하고 가족 간에는 많은 사랑과 기도 있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저에게 베풀어 주시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빠 알죠?

제가 아빠 무지 무지 사랑하는 거!

매일 매일, 하루의 일과 속에서 아빠를 위해 기도 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1999. 12. 17.

수녀원에서 현지가

외로움은 사라지고

이제 모든 삶에 목표를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던 것이 허무해졌다. 언제나 주님을 향해 믿음과 신의로서 최선을 다해 살은 것이 이렇게 밖에 되지 않는가. 원망도 해보았지만 이 시련의 극복으로 더욱더 단련과 희망으로 위기를 기회로 더욱더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더욱 더 굳건히 하며 주일날 성당에 나갔다.

딸과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나와 약속한 ‘좌절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살자’고 외쳤던 언약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윤동주 <서시>를 기억하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있으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기가 바뀌는 새천년이 된다고 관광객이 많은 시드니는 벌써부터 요란하다. 내 마음은 아내가 간 후 쓸쓸하고 허전한 크리스마스와 세모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충격과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외사촌 형님이 가사와 비지니스를 얼마동안 돌보아 주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아팠다. 이렇게 비애와 허탈 속에 있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부동의 몸과 마음이다. 빨리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채찍해 보기도 한다. 부부의 험난한 세파를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살아왔던 그 인연의 끈이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겨 잊혀지지 않는 것을….

 

형님이 이집의 가사도 문제이지만 산사람도 죽고 비지니스도 죽겠다며 빨리 재혼을 하라고 독촉이다. 성당에 다니는 한 친구가 아직도 한창인데 혼자 살아서 되겠느냐? 고 일요일 성당에 갈 때 마다 나의 일같이 안달이다. 그래서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보자고 했더니, 시간이 지나면 끝나니 기회가 될 때 만나보라는 이야기 이다. 성실한 노처녀가 있다고. 또 어떤 다른 자매님이 나보고 좋은 사람 있다고 중신하겠다고 한다. 나이가 오십 중 반인데 나같은 사람한테 누가 오겠느냐고 반신반의 하였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앞으로 그나마 몇십 년이 더 남았고 당장 나와 아들 밥, 빨래, 청소, 가사가 더 바쁘다. 그렇다고 아침저녁으로 밥을 사먹을 수도 없고.

 

그러던 중 딸한테 편지가 왔다. 엄마 없는 빈자리를 채우라는… 그리고 10월 달에 휴가를 온다고 했다.


아빠.

 

감사드립니다.

 

엄마 안 계신 빈자리가 허전하시겠지만 아빠의 강한 모습에 저도 힘이 납니다.

 

건강하세요. 그리고 좋은 분 만나시면, 엄마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분이 계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그럼 10월에 뵈어요.

 

현지 드림


그래서 딸과 아들과 상의를 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를 채워도 괜찮으냐고 그래서 12월에 직장에 다니는 노처녀를 선보았다. 인품이 있고 정직해 보였다. 혼자 살아서인지 쓸쓸하게도 보였다. 이만하면 가사와 비지니스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새사람을 맞이하기 위하여 부엌 그리고 내부 집수리도 깨끗이 했다. 2000년 2월 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딸, 아들, 친지들, 회사 직원 동네 사람들,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이제는 지인들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냐고 칭찬이 자자하다. 매일 남편이 비지니스 가는데 마다 운전하고 같이 다닌다고 동네 사람들이 샘을 낸다. 나도 마음에 힘이 솟구친다.

 

몇 달 후 어머님 및 친지들에게 인사도 드릴 겸 한국으로 향했다. 어머님 찾아뵙고 큰절 올리고 아버지 산소도 보고 친지들과 모두 인사하였다. 새아내한테 주님의 은총을 많이 달라고 기도 속에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 차례로 새 아내의 친척집, 언니, 조카들 집도 방문하고 새 아내의 아버님, 어머님 묘소도 찾았다. 술 한 잔과 과일을 놓고 ‘살아서는 못 뵈었지만 사위된 이 사람보다 따님께 건강과 복 많이 주십시오.’라고 큰절을 했다. 하늘도 화창한 날씨였고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다. 딸이 있는 수녀 교육원도 들렀다. 슬픔의 1999년도는 가고 환희의 2000년도 새 천년, 그대로 소망의 해이기도 했다. 돌아간 아내한테도 살아서 못다 한 소원 새사람한테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제 새해의 생각도 기쁘게 살고 행동도 바뀌고, 행동이 바꿔야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보다 실천하려고 노력해 본다.

 

 아들의 출가

 

 2005년도 7월 겨울 안정을 되찾아 평상시와 같이 다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예전 포항제철에 다녔던 친구 이군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번 한국에 갔을 때 만나고 처음 전화다.

 

“오래간만이다” “어쩐 일이냐” 서로 인사와 안부를 물었다. 자기 딸이 컴퓨터 회사 호주 지점에 근무한다고 알려주었다. 포항에 있을 때 어린아이이었는데 벌써 그렇게 컸느냐고 이야기하고 하숙집 전화와 회사 전화번호를 알아 그 이후 시간이 있는 주말에 점심 식사하자고 친구 딸한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토요일에 시간이 있다기에 점심식사를 준비하여 아들에게 데리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아내가 친구의 딸이라고 특별히 맛있는 요리를 해서 솜씨를 발휘했고 온 식구들이 같이 먹었다. 모처럼 친구 딸도 해외 생활에서 혼자 하숙하였는데, 고국과 부모생각에 외로웠을 것이라 생각되어 여러 가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도란도란 재미있게 놀고 갔다.

 

그 이후 자주 우리 집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난 후 하루는 아들이 밤중에 허겁지겁 아버지 어머니에게 달려왔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느냐? 고 물었더니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홍두께 같은 소리를 하길 래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결혼 상대가 누구냐고 아들한테 물었더니 우리 집에 놀러오는 친구 딸과 결혼 하겠다고 한다. 나는 친구 딸을 고국에 있을 때 너무 잘 알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볼 것도 없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9월 달 결혼식을 시키는데, 친구의 원대로 결혼식을 한국의 성당에서 행하고 호주에서 피로연을 하기로 정했다. 결혼식 때 나와 아내, 딸, 부산에 있는 친척들도 서울에 와서 모두 축하해 주었다. 모처럼 만의 친척들의 만남이었다. 큰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친척들이 와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아들 결혼식 피로연에 기쁜 마음으로 다음 글을 썼다.

<결혼 피로연>

 

 결혼식을 마치고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면 이래저래 많은 연회장의 장면을 본다. 특히 사회자의 능력과 언변에 다양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오늘은 신랑 ◯◯◯와 신부 ◯◯◯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신랑의 친구인 듯한 사회자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멘트를 시작한다. 이어 “오늘은 무슨 날이지요?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 그 집안을 통일하려면 무엇이 잘 되어야 되지요?” 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리고나서 사회자의 소개말과 신랑 신부 부모님들의 인사말로 1막이 시작된다.

 

식사는 보통 뷔폐식으로 친척이나 지인들이 있는 테이블에 같이 앉게 된다. 만약 자리가 지정 되어 있으면 정한대로 앉아 식사를 하며 옆 사람과의 인사와 담소로 시간을 가지며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자가 재차 묻는다. “오늘은 무슨 날이지요?” 하는 질문에 토요일이라고 한 하객 손님이 답변했더니 틀렸다고 하며, 오늘은 새로 탄생하는 새로운 신랑 신부의 날이라고 한다. 또 오늘 새로 탄생하는 신부와 시어머니 그리고 시누이의 궁합이 일치하면 그 집안을 통일할 수 있다는 사회자의 유모 섞인 답변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 질문은 나로 하여금 옛날 우리 가족 형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조용했던 6남매 집안에 큰 형수가 들어옴으로 인해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가 상처 입었던 가슴 아픈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큰 형과 큰 형수의 불화가 결국 우리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불협화음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여자는 네 가지 덕의 아름다움 즉, 부덕 부용 부언 부공 이 있어야 한다고 명심보감에서 말 했던가.

옛날 중국의 후 한말 삼국 시대에 위․촉․오를 통일한 유비, 관우, 장비의 궁합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회자의 말이 과연 맞는 얘기 같다. 유비의 덕, 관우의 충성과 의리 그리고 장비의 용맹함이 한데 잘 어울려 어지러웠던 사회를 통합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삼국 통일은 결코 어느 한 사람만의 힘이라고는 볼 수 없기에, 그래서 그 의미는 더 커진다.

 

궁합이 맞아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해 결혼식에서 서약한데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신의를 지키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서로 자라온 환경이 틀리고 따라서 개성이 틀리니 생각이 같을 수야 있겠느냐만, 매 순간 상대방의 입장에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내 가정을 되돌아보는 이 순간 행복에 겨워진다. 그 이유는 며느리와 내 아내의 관계가 좋은데다, 딸은 이미 출타 했어 시누이와 며느리의 관계가 줄어졌으니 집안 통일이 더 한층 쉬어진 때문이리라. 그리고 행복한 느낌만큼 시아버지인 내가, 아내뿐만 아니라 며느리를 더더욱 사랑으로 아껴줘야 될 것이다. 나로 인하여 집안 통일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가족의 일원으로서 화합에 나부터 솔선수범하리라는 맹세 글을 써서 일기장에 꽂아 두었다.

 

딸은 하느님과 결혼하고, 아들도 이제 결혼 했으니 부모의 임무도 다 한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하다. 피로연을 마치고 돌아간 아내의 묘소에 며느리와 함께 참배하였다. “살아생전 아들을 키우느라고 고생했다”고 묘소에서 인사했다. 그리고 새아내한테 복 많이 주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죽은 아내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가족 모두가 주님께 빌었다. 아들과 며느리한테는 건강과 행복의 은총이 충만하라고 기도했다.

 

보람된 삶

 


나에게는 설한풍이었던 1999년도 겨울을 앓고 이제 녹음이 우거진 2000년도 호주의 한여름이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아 모든 것을 원 위치로 자리매김하였다. 새 아내가 들어 온 후 집이 활기가 차고, 새 기운이 움튼다. 예전에는 아내가 아파 온가족이 활기찬 날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어머니라 잘 부르고 따르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보다 아내와 먼저 상의를 하는 것을 보면 아들이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강물 같이 흘러 십년이 가까워 온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선인들이 말하지 않았든가. 아내한테 임자와 장돌뱅이라는 별명을 지어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주었다.


<임자와 장돌뱅이인 아내>

 

 나는 내 아내를 임자라고 부른다. 결혼을 늦게 한 탓이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때 고어에서 사랑하는 님을 임자라고 부르던 생각이 뇌리에 맴돌아 이쁘다는 뜻으로 높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긋한 부름 같기도 해서이다. 서로가 좋아서 결혼한 아내를 사랑 안 할리 없겠는가. 마는 때로는 아내의 옹고집 때문에 어딘가 좀 미워할 때도 있다. 이러한 때는 아예 장돌뱅이 임자라는 별명을 부른다. 같이 한평생을 살다 보면 꼭 마음이 같을 수야 있겠느냐 마는 때로는 바다의 돛단배가 작고 큰 파도를 넘어 등대가 있는 목적지까지 앞으로 나아가듯이 부부의 일생도 그러한 것이리라….

요즘 이상스레 화를 내고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도리머리를 젖고, 이마에 꿀밤을 주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 그래도 아내는 여전히 예쁘고 조용한 임자의 모습으로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나, 나는 우리 집 입구에 놓인 덤프트럭을 보면 귀신에게 홀린 듯 아내를 생각한다. 얼마 전 장돌뱅이인 아내가 도로 찾아온 것이다. 나에게 주는 충격은 큰 선물을 받은 것만큼이나 컸다. 도둑맞은 트럭을 찾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못 찾는 차를 아내가 찾아 줌으로써 그 충격은 실상 컸다. 어쩌면 수수께끼같은 여인임에도.

 

호주 이민생활에다 평생 건설업을 하다 보니 아내가 하는 일은 광범위 하다. 운전도 해주고 목적지 길을 잘 찾아 주고 삼시 세끼며 간식까지 잘 챙겨주고, 깨끗이 집안 청소도 잘 하고 출가한 아이들 또한 잘 챙겨주는 현모양처인 아내이다. 가끔씩 아내가 ‘임자, 임자’ 불러도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서 몇 시간 있다 돌아 올 땐, 내가 ‘어디 갔다 왔느냐?’ 고 물으면 시장보고 왔다고 한다. 내가 오늘은 어디 간다고 일하는 스케줄을 이야기해 주었는데도 말없이 혼자 갔다 왔다니 화가 치밀 수밖에 없다. 그 이후로부터 내 맘에 흡족하지 못할 때는 장돌뱅이라는 별명으로 아내를 부르곤 했다. 혼자 시장을 볼 때 심술이 나서 내가 그 별명을 붙인 것이다.

 

 저번에는 남편이 성당 교육으로 4일간 떠나는데 부부동반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했으나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핑계로 문지방에 얼굴만 힐끗 보여주고는 이내 자취를 감춰 버렸던 아내였다. 원래 아내와 같이 가기로 되어 있는 교육 일정이었는데 가기 싫어하던 아내의 고집으로 나 혼자 가게 된 것이다. 고집이 세어 때로는 애교가 툭수바리 같은 아내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4일간이나 떨어져 살아야 하는 남편을 그처럼 소홀하게, 그렇게 묵묵하게 떠나보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서글픔이 가슴 언저리에 매워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여인들처럼 와락 품에 안기며 헤픈 눈물을 쏟아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꼭 그렇게는 아니어도, 자기가 못 가는 죄를 대신해서라도 떠나는 남편의 속이 좀 풀리게 미안해하고 서운해 하는 어떤 눈치만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아내는 왕고집으로, 떠나는 남편이 인사도 하기 전에 몰인정하게 몸을 돌려 문을 닫아 버렸다. 그 뒤의 사연이란 남편이 돌아와 물으면 알겠지만 그럴 땐 묻지도 않았다.

지나간 일들을 들추어서 무엇 하리. 한마디로 때론 재미가 썩 적은 여자다. 그럴 바엔 차라리 서로 편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걸고 들어도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대개 남자들이란 사업이나 인간관계에서 여의치 못하면 흔히 마누라의 위안과 부드러움에 잠기고 싶어 한다. 하루 일에 지쳐 힘겹게 돌아오는 남편한테 살랑살랑 달려와서 옷을 받아주고 “오늘 하루 수고 하셨는지요?” 라며 부드러운 말 한마디, 그런 것들에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거듭 거듭 그려보던 나였다. 그런데 어쩌면 아내는 내가 그리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처럼 때로는 옹고집만 피우는 장돌뱅이로만 취급했던 아내가 숨 가쁘게 겁에 질린 듯 전화를 했다. ‘얼마 전에 집 앞에 세워 두었던 잊어버린 트럭이 여기 있다’ 며 빨리 오라고 하는 전갈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한지가 2주가 넘도록 못 찾은 차를 그것도 먼 곳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마음을 진정하라고 전해주고 경찰서에 알리고 부리나케 그 곳으로 달려갔다. 도둑이 다시 다른 데로 끌로 갈 지 모르니 기다리자는 말도 오고 가고, 또 차 안을 보니 키도 꽂혀 있었다. 도둑을 잡고 싶은 마음에 올까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드디어 신고 받았던 경찰이 나타나 확인 후 바로 끌고 가라는 지시를 했다. 트럭은 찾았으나 트럭에 싣고 있었던 굴착차는 찾지 못했다. 트럭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굴착 차는 다행히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다시 샀다. 좌우간 말끔히 2주 만에 원상 복귀이다. 사업에 지장을 초래할 뻔 했는데 찾았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때부터 나는 쓸 만한 장돌뱅이라고 별명을 아예 다시 붙여 버렸다.

‘오늘은 어디로 가느냐?’ 물으면 아내는 “쇼핑하러 간다.” 라고 한다. 장돌뱅이짓 하러 가느냐고 되물으면, 아내는 빙긋이 웃는다. 싫지 않은 모양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동안 수 십 명의 직원들을 쓰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경우는 직원의 비자에 관련된 경우이다. 비자가 완료된 직원을 고용하면 회사는 정부에 페널티를 물고 일하는 사람은 불법체류자 수용소로 압송되어 자기 본국으로 추방되기까지 한다. 호주에서는 합법적인 비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

그 중 어떤 직원한테는 회사에서 비자 스폰서를 해주었는데 비자 기간이 다 되어 영주권을 신청하라고 미리부터 일러두었는데, 본인의 자격미달과 영어점수를 따지 못해 조건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일도 안 나오고 마음을 잡지 못해 매일 같이 술만 먹고 돌아다니다 비자 만기 이틀 전에 찾아와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되든 안 되는 해보자는 생각과 딱한 마음에 부랴부랴 서류를 만들어 이민성에 제출하고, 가슴조이며 소식을 기다렸는데 답이 오기를 서류 접수가 늦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통지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직원과 그들의 가족 및 어린아이를 보아서 이대로는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사유를 만리장성같이 쓰고, 구구절절 나열하여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급송으로 이민성으로 보냈다. 이 사람이 이민을 꼭 해야 할 이유로는 호주에서 7년 이상 일한 사람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환경과 새 직업을 찾기가 어렵고, 그이가 없으면 공사 업무에 많은 지장이 있고, 우리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둥, 그 직원이 없으면 회사를 운영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는 둥 이러한 내용으로 이민 장관한테 선처를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이민성으로부터 기다려 보라는 답은 왔지만 일은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잠시 머물 수 있는 비자도 나왔지만,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에 큰 지장이 있으니 회사로서는 일을 시키지 않고 직원만을 위해 생활비를 줄 수는 없고, 무엇보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기한도 없었으므로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후 법원에 소송하여 이민 수속을 다시 추진하여 법원을 들락날락하면서 이민이 확정되던 날 이민이 이루어진 본인도 기쁘지만, 나와 내 아내도 기뻐 눈물을 쏟았다. 지금은 우리 회사를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하지만, 그래도 이웃에서 마음잡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더 없는 보람을 느낀다.

 

 이곳 시드니는 주위가 모두 바닷가라서 하루의 일과를 일찍 마칠 때나 주말에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낭만을 즐기기도 하고 가끔 블루 마운틴에 기암절벽을 등산하기도 한다. 여기에 쓴 마루부라 마혼풀은 너무나 아름다운 바닷가 천해의 풀장이라 글로 나타내어 보았다.

 

<마루부라 마혼풀(Mahon Pool)>

시드니 남단 마루부라 해변 북동쪽으로 500m 거슬러 올라가면 잭 베니 공원 아래쪽에 자연적인 천해의 해수욕장, 마혼풀(Mahon pool)이 마루부라 만(Maroubra Bay)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더울 때 수영을 하기 위해 간 곳이었는데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함께, 친구 친척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는다.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해수욕도 하고, 유년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겨움이 있어서 이기도 하다.

나의 유년을 여물게 한 고국 부산 광안리 바닷가, 그곳은 어릴 적 놀이터이기도 하고 그 시절 꿈과 희망을 키웠던 곳,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그리운 곳이다. 넓은 해변의 모래 백사장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스럽게 좋아라 하고 한없이 뜀박질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지치면 친구들과 펴져 앉아 모래성을 쌓기도 하고, 모래 우물을 파기도 하고, 모래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 중 재미나는 일은 타이어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어 물에 뜨는 것으로 사용하여 파도를 타는 것이었다. 파도에 따라 울렁거리기도 하고 출렁거리면서 양팔을 노 저어 깊숙한 곳 까지 신나게 간다. 굵은 실에 사과를 꿰어서 염주 묶듯이 메어 목에 걸고 배가 고플 때마다 베어 먹으면서 겁 없이 가다 보면 큰 파도에 곤두박질쳐 물먹고 허우적거렸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머니는 내게 큰 파도가 칠 때 바다에 가면 바다 귀신에 홀려간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셨다. 그 후 어느 태풍 때 큰 파도를 타던 해수욕객 몇 명이 죽고 난 후 바다가 두려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때 방학이나 공휴일에는 바닷가에 수영하러 가는 것이 일과였다.

이곳 시드니 마혼풀(Mahon Pool)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삼면이 용암바위로 이루어진 자연풀장이다. 동쪽에는 바닷가의 화강암 바위 절벽과 층층으로 된 신이 빚어놓은 바위가 해변을 따라 앞쪽으로 넓게 나열돼있고 서쪽으로는 태곳적 빚어놓은 촛대바위가 풍화작용에 시달려 겹겹이 쌓아놓은 조개 모습 같다. 앞쪽으로는 용암이 흘린 바위에 거북 바윗돌을 엎고 부처님 좌상같이 파도에 버티고 앉아 있다. 부닥친 파도는 분수처럼 품으며 쏟아 버리는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수같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면 바다에 어울려진 교향 합창 연주곡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이 넓고 오묘한 대자연의 소리를 듣노라면 바다가 어머니요 고향이었으면 소망한다. 파도와 갈매기가 어울려 너울너울 춤추며 모든 이를 손짓하는 아름다운 풀장, 앞쪽 가까운 곳에 밀려오는 도레미파솔 파도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곤하고 일상에 찌든 온몸을 씻기도 하고 떠나온 고향의 향수도 언제나 낭만으로 씻어주며 풀장은 우리를 포근히 안아준다. 한 폭의 그림으로, 파도소리, 바람 소리, 소금 냄새로 바다는 잔잔한 자장가를 불러준다. 넓고 넓은 광활한 바다, 그 중에도 출렁거리는 파도, 수십만 마리의 물고기가 번쩍이며 비늘을 세우고 달려왔다가 되돌아오기도 한 싱싱한 푸른 비늘들의 경주. 언제나 보아도 같은 모양으로 왔다가 사라지고, 때로는 태풍이 칠 때는 노도와 같은 모양으로 왔다가 잠시 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조용한 푸른 파도. 하루 중 어떤 때는 푸른색, 검푸른 색, 남색이었다가, 어느 날 먹구름이 몰려올 때면 검은 회칠한 색깔로 변하고, 저녁노을에는 붉게 화장한 아름다운 여인의 색깔로 변장 한다. 소금냄새인가 하면, 해초 냄새, 상쾌한 특유의 바다 냄새와 변화무쌍한 색깔의 파도로 우리의 오감을 즐겁게 해준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 여정의 삶이 파도와 같이 마치 크고 작은 변화무쌍한 파도와 같다. 즐거웠던 유년시절, 학창시절의 어려운 아르바이트, 군대 생활과 직장 생활, 중동사막을 해매며 해외에서 살아온 10년의 삶, 호주 이민 20년의 생활…. 무엇을 위하여 살았던 것인지… 결혼한 아들의 떠남, 딸이 수도자로서의 구도의 길을 떠났던 이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수평선 너머 파도를 보며 인생의 삶을 반추한다.

‘인생은 자아실현을 위한 분투․노력 과정이요, 가치창조를 위한 각고면려의 도정이자 목표달성을 위한 악전고투의 도장이다.’ 라고 누가 말하였던가.

나는 언제나 청운의 푸른 바다이기를 꿈꾼다. 지금 나이가 이순의 나이인데도 하루의 삶이 시달리고 힘이 들 때, 유달리 고국의 어머님이 그립고 아들․딸들이 보고 싶고, 옛 친구가 그리울 때, 나는 오늘도 변화무쌍한 파도를 만나러 그리고 포말되어 부서지는 천해의 아름다운 마혼 풀장으로 향한다. 님의 떠나보냄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며 망망대해를 향하여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를 읊으며 다정하고 즐거웠던 그 곳을 회상하며 이곳 부서지는 파도를 부여안고 기억 속의 노래를 오늘도 힘차게 부른다. 비가 오나 강풍이 불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시드니 마혼풀을 사랑하고 싶다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나포레타나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 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마루부라 마혼풀로!(이 귀절은 이역)”

마혼풀에 갔다 왔더니 딸의 편지가 왔다. 얼마 전 파푸아 뉴기아 수녀님이 호주를 들러 한국의 딸 있는 곳으로 간다기에 바닷가를 잠깐 구경 시켜 드리고, 딸에게 마혼풀 글을 써서 보낸 편지와 답장이다.

 

<××× 수녀에게>

이곳 수녀님의 인편이 있어 몇 자 적는다. 무르익은 봄 날씨에 아무 별고 없는지? 그곳 종애반 수녀님 모두 건강하신지? 이곳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하고, 그곳 대열이, 며느리 정주도 건강하단다. 제주도에서 광주로 기후와 날씨의 변화로 건강에는 지장이 없겠지? 몸 건강과 정신의 건강도 튼튼하기를 바란다. 마음은 언제나 사랑하는 딸 ◯◯에게 있지만, 이곳 하루하루의 일과와 사업에 여념이 없다보니 제대로 편지, 그리고 이메일도 못 보내고 있단다. 이곳 직원들도 많이 늘다보니, 아버지는 바쁜 나날을 보낸단다. 엊그제 한국나이로 65세 생일을 직원들 그리고 이곳 너의 어머니 친척들과 함께 뷔페식당에서 “축 Happy Birthday”가 있었단다. 가족 아들, 딸들은 호주를 떠나 있어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했음을…. 식사할 때 꼼짝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나는 산다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나 보다. 몇 일 전 성소 가족, 파푸아에서 휴가 오신 수녀님을 뵙고, 그리고 이곳 세분 수녀님들 (◯◯◯ 원장, ◯◯◯ 수녀님, ◯◯◯ 수녀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마루부라, 라파로스, 센트럴 파크 바닷가를 돌면서 생활의 이야기도 하고, 반나절동안 수녀님들과 뜻있는 시간을 보냈단다. 김×× 수녀님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이××의 어머니, 아버지는 식사만 하시고 바쁜 일이 있어 가고….

내가 너무 세상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여 종신 선언하는데 번뇌를 주지 않았는지? 딸 수녀님한테 못 할 이야기가 없으니 이해 바란다. 수녀님 편에 이곳 사진과 내가 쓴 수필 한편을 보내니 시간이 있을 때 보기를 바란다. 오늘 즐겁고 하루하루가 보람된 삶이되기를 바란다.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거듭 바란다. 그곳 종애반에 계신 모든 수녀님들께 영육간의 평안하시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럼 안녕, 만날 때까지.

 

 From Mother & Father

 

2008. 04. 13.

 

 To. 아버지, 어머니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께서 보내주신(아◯◯◯ 수녀님을 통해) 사진과 비타민, 그리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글은 이곳 지도 수녀님에게도 보여드렸는데 아버지의 삶 안의 소중하고, 아름답고, 멋진 무수한 역사가 녹아있는 것을 느끼실 수 있었다며 감사드린다고 하셨어요.

또한 저도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할 숙제가 있다고요. 모든 수녀님들이 호주에 다녀가면 아버지 어머니를 뵙고 나서, 너무나 좋으시고 꼼꼼하게 챙겨 주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 저도 자랑스럽고 좋은 면을 많이 담고 싶은데 아직 젊어서인지 삶의 깊이가 부족해서인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를 많이 사랑해주는 자매들과 수녀님들안에서 배워 나가며 또 기도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 어린이 날이라 쉼의 시간을 가졌고 전에 있던 본당 신자들이 찾아와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매일 1시간씩 걸으면서 6월에 있을 국내 도보, 성지 순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도 하게 되고 건강도 더 좋아 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수영하러 오늘도 바닷가를 찾으셨겠지요? 아버지의 고향이 바다라 그런지 저도 바다와 참 인연이 많은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2학년 친구와 함께 고리 원자력 발전소 근처 바닷가를 걷던 시절이고 수녀원에 가게 된 동기도 바닷가에 친구랑(옛날 칼 Carl 기억나실지 모르겠네요.) 수영 갔다가 빠져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다가 살려주시면 수녀원에 가겠다고 약속 후 결심하게 되었지요. 또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죽음도 바닷가 에서였고 제가 이곳 한국에 와서도 목포, 제주 바다 옆에서 살게 되는 것을 보면 바다는 저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 아버지, 어머니와 제가 함께 바다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바다의 평화에 도취되기도 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 잊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아버지 어머니 말씀대로 하루하루가 보람되고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 갈수 있는 좋은 준비기간이 되도록 계속 기도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그리고 그곳 직원들과 식구들, 친척들, 특히 이모님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2008. 5. 5.

 

딸◯◯◯ 수녀 올림

 


답장을 읽고 딸이 왜 수도자로 갔는지 아버지인 나도 처음 알았다. 바닷가에 친구와 수영 갔다가 빠져서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살려주면 수도자의 길로 가겠다. 약속한 그 인연을 감사하게 살아가는 마음,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겠다는 인연을 중하게 여기는 딸의 가련한 생각에 가슴이 시리어 온다. 자기의 길을 꾸준히 그리고 잘 가 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 길이 사랑하는 딸의 보람된 일이기 때문엡. “나의 길(My way)” 프랑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떠오른다.

 

끝없는 도전

 

오늘도 끝없이 목표를 향하여 삶을 추구한다. 사업과 협회의 발전은 개인의 발전이며, 사회와 국가의 발전인 동시에 나아가 교민의 발전이다. 언어 소통을 기준으로 한 신의, 성실과 책임을 바탕으로 기술의 노력이 최고의 비법이다. 비영어권에 속하는 이민자는 특히 언어 소통이 문제다. 부단한 노력 없이는 뭇 사람들의 군중 속에서 낙오되기가 십상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이민의 땅 이곳, 다문화, 관습, 언어를 이해하며 질서를 따라야 한다. 고국 한국의 70년대 80년대 때에 독일에 파견 된 광부, 간호사, 월남의 파병으로 인한 건설인력 수출, 동남아, 중동의 건설 공사 수출, 각국 해외로 뻗어가는 한인 배달민족의 기상이 호주에도 접목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우수한 기질, 뛰어난 손재주, 이것이 나를 현재 건설인으로, 건설협회를 있게 한 1세대의 바탕이다. 이민의 땅, 기회의 당 호주에서 앞으로 1.5세대, 2세대, 그 다음 후세 세대들에게 옛 모델에 신형 모델인 지식 (기술)을 합치면 얼마나 좋은 최신형 세계 모델이 이곳 교포 건설인에게 나올까 기대해본다.

 

 내가 현재 경영하는 SY 회사가 20년 동안 커지면서 직원들도 이제 많이 늘고 매출액도 수백 만 불로 늘었다. 큰 프로젝트도 소화할 능력이 있는 건실한 중소기업 회사로 발전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그나마 인정받는 회사가 된 것이다. 호주한인건설협회 단체도 처음 몇 명의 인원이 모여 시작했지만 지금은 시드니에서는 상호 협력하는 큰 단체가 되었다. 아울러 교포 우수 건설인상도 제정했고, 건설공제 조합도 설립되어 청약금도 늘어가고 있다.

 

 인생은 자아실현, 가치창조, 목표 달성을 위한 도장이 아니겠느냐?.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인생은 연극이다.” 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하지 않았나. 누가 주연이 되며 누가 조연이 되느냐 이다. 한편 조연도 노력에 따라 주연이 될 수 있다 라고 본다. 주연은 주연대로 조연은 조연대로 최선을 다한 사람이 인생의 월계관을 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라고 본다. 용기를 잃지 않고 목표를 세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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