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부터 시작된다

1993년 9월의 어느 날 저녁 무렵, 연변의 연길역. 북경에 소재한 대학에 입학한 나는 개학 마감일에 맞춰 북경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무려 34시간이나 소요, 그것도 침대석을 구하지 못하여 좌석에 앉아 꼬박 2박 3일을 가야만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연변에 와서 막일을 하던 남방 사람들의 귀향과 맞물려 나는 그들 속에 끼어 ‘비빔밥’이 되었다.

‘어, 이거 뭐지?’

북경에 도착하여 하도 몸이 근질거리기에 화장실을 찾아 입고 있던 티셔츠를 뒤집어보니 큼직한 이 한 마리가 나왔다. 샴푸, 비누 및 타 화학약품의 사용으로 80년대 중반부터 영영 사라진 줄로 알았던 이.

‘이놈, 여기가 뭐 동물원인줄로 아나?’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의 이야기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동물원’


나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곳을 ‘동물원’이라 부른다. 중국 최대의 북경동물원이 우리 대학에서 멀지 않았고, 또한 우리 대학은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집결해 있는 곳이니 그러한 이유로 이 이름이 붙어진 것 같다. 중국에서 최대 인구인 한족이 ‘소수민족’으로 불리는 그곳, 그곳이 바로 나의 모교 󰠏 중앙민족대학이다.

우리 대학은 대략 6,7천명의 재학생이 있는 종합대학으로 국가에서 소수민족 간부를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1950년에 북경에 특설한 대학이다. 우리 대학의 경우 예술학부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는데, 매년 중앙텔레비방송국(CCTV)에서 주최하는 ‘춘절만회’에 소수민족 복장을 입고 춤추는 애들이 거의 모두가 우리 대학 출신이라고 보아도 별로 무리는 없을 듯싶다.

우리 대학은 중국의 소수민족이 거의 모두가 있지만, 민족적 특징과 인원수 등에 근거하면 대개 ‘4대 민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각각 조선족, 몽고족, 위구르족, 티베트족이다. 중국에서 최대 소수민족인 쫭족은 비록 인구수가 천만 명 이상이라고 집계되지만, 언어 문화적 특징이 뚜렷하지 못하여 우리 학교 내에서 대(大) 민족으로 분류되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의 정책상 민족 통혼으로 출생한 자녀는 민족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소수민족 특혜를 받는 이들은 대개 허울만 소수민족이고 민족적 특징은 한족과 별반 다름이 없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 되어 있는 우리 대학에서 우리 소수민족 언어문학 계열의 경우,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으로 등록금이 거의 면제가 되고 월 생활비가 별도로 지급되기로 되어있다. 말 그대로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다.


그러나 100% 완벽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 학부는 몽골학과와 조선학과로 구성되었었는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우리 학과가 몽골학과보다 생활비가 2위안 정도 적게 지급된다는 것, 이유가 뭐냐고 알아보았더니 몽고족은 육식을 주로 하는 반면 우리 조선민족은 야채를 즐겨먹기에 고기를 먹는 그들에게 보조금이 조금 더 지급된다는 것이다.


참, 고기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데.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을 구별하듯 민족도 차별화하는 이곳, 그렇다면 ‘동물원’과 다를 바가 뭣일까?


 

하고 싶은 말


개학한 뒤 곧 한 달가량의 고된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6.4’사태 이후 한결 강화된 대학생들의 군사 훈련, 이는 무장경찰부대에서 직접 교관을 파견하여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다. 그때 북경대학의 동기 신입생들은 일 년간 군사학교에 가서 군사 훈련을 받는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얼마 안 되어 나는 앓아누웠다. 난생 처음 30여 시간을 기차에서 부대껴 온 노독의 여파도 있었고, 북경의 9월 폭염 속에서 내내 교내 운동장에서 행진 연습을 한 지겨움에 견딜 수가 없었던 ‘꾀병’도 일정 정도 작용했다

나는 교내의 병원에서 5일간 매일 4시간씩 링거를 맞았다. 인적이 별로 없이 조용한 대학병원 병실, 북경에 일가친척,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나에겐 찾아오는 이들이 없었다. 다만 우리 학급 담임이신 오 선생님이 다녀갔을 뿐이다. 그이는 당시 40대 초반의 여 선생님으로, 나중에 나를 문학 석사 연구생으로 받아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우리 학급 동학들은 문안을 오지 않았다. 하긴 초면으로 서로 변변한 인사도 못 나누었고, 그때 우리 학급은 반장도 없는 ‘무정부’ 상태에서 그 누가 선뜻 나설 입장이 못 됨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맘속으로 좀 서운했다.

10월 초, 고된 군사훈련이 끝나고 정상적인 수업이 시작될 무렵, 첫 학급 회의가 열렸다. 우선 학급 간부를 선거하였는데 고등학교 간부 경력도 없고 여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나로서 학급간부는 그림 속의 떡이었다. 그 다음 절차로 담임인 오 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말’ 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 내에 수필을 써내라고 하셨다. 언어문학학과이니 당연 제자들의 문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고, 겸사겸사 우리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먼 옛날 주(周)나라 때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민간의 노래를 수집하여 민심을 알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진솔하게 적었다. 고등학교에서 3년 간 분투하여 첫해에 대학에 입학한 기쁨과, 대학에 대해 가졌던 꿈들, 그러나 정작 대학에 입학하니 언제나 느껴야만 하는 외로움, ‘사랑은 베풀수록 커진다.’는 말을 인용하며 우리 모두 서로 베푸는 마음을 갖고 합심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개척하자는 희망을 적었다. 촌스럽지만 진실되고, 그 어떤 문학적인 수식어가 붙지 않은 글이었다.


나의 이 글이 오 선생님의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나중에 나의 이 글을 ‘모범작’으로 동학들 앞에서 읽었고, 동학들 간의 단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지우지은(知遇之恩), 이 글은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백두얼》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우리들은 민족의식을 모르고 성장한 세대이다. 유례없는 ‘문화대혁명’을 경험하면서 민족의식을 강조하던 사람들은 침묵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기 민족의 역사의식은 담박해져 갔다. 그 ‘덕분’으로 교원가정에서 태어났고 역사와 정치과목에서 언제나 1,2등을 다투던 나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별로 알지 못했었다. 북경에 와서야 민족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경에 와서 타 민족과 교섭하면서 민족의식을 새롭게 느꼈고, 타 지역의 조선족 동학들과 사귀면서 민족 내부 갈등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었다. 심양 출신의 한 동학이 우리가 서로 익숙해진 뒤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대학교에 올 때 나의 어머니가 연변에서 온 아이들과는 절대로 친구로 사귀지 말라고 하더라. 연변사람은 심성이 고약하다고.”


난생 처음 듣는 이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같은 민족임에도 지역적 감정이 이렇게 골 깊은 줄 몰랐고, 타 지역 조선족들에게 우리 연변조선족의 이미지가 이렇게 실추되어 있음은 정말 뜻밖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웅덩이를 흐리는 거야.”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지난 뒤, 그 친구는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연변 왕청(汪淸) 출신은 연변사람이 아니라는 웃지 못 할 결론을 내렸다.


92학급의 한 선배가 나를 찾았다. ‘북경시조선족대학생구락부’라는 조선족 대학생조직이 있는데 거기에서 반년에 한 기씩《백두얼》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한단다. “듣자니 너 문필이 좋다는데 네가 편집 직을 맡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물어왔다.

북경시조선족대학생구락부. 이 조직은 북경시 조선족 대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1992년에 설립된 조선족대학생조직으로 일년에 한번씩 “북경시조선족대학생운동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로《백두얼》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때 제2대 회장은 북경체육대학의 박씨였다.


나는 선뜻 수락하였다. 민족의식에 갓 눈뜨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기옅백두얼》편집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의식을 고취하고 싶었다.


나는 자신이 평소에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고 있는 조선족 원로작가 김학철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신자를 연변작가협회로, 김학철 선생님한테 전해 주십사 하고 편지를 썼다. 김학철, 의열단 출신인 그분은 후에 팔로군으로 뜻을 바꿨고, 태항산에서 항일하시다 다리에 부상을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에서 옥고를 당하신 분이다. 일본감옥에서 부상된 다리는 치료를 받지 못하여 절단하였다. 광복 후 남과 북에서 계시다 최종적으로 중국의 연변에 거주하신 그분, 그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미 발표작 장편소설《21세기의 신화》로 장기간의 옥고를 겪으셨다.

80년대부터 그이는 사회비판을 주제로 한 잡문[雜文]으로 많이 발표하였다. 잡문, 한국에서는 수필로 취급하고 그 역사적 연원을 찾아보면 패관문학에 속하는 문체일 것이나, 중국 현대문학에서의 잡문은 이와 다르다. 날카로운 사회 비판 정신과 사상 계몽을 접목시켜 잡문 문체를 새로운 경지로 이끈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노신, 중국의 잡문은 촌설살인의 미학이다.

거의 한 달이 될 무렵, 선생님한테서 답장이 왔다. 아니, 답장이라기보다 자신의 사적을 소개한 신문, 잡지의 내용을 스크랩하여 보내주신 것이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영웅 김학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선생님의 인생사를 조명하고 그이의 불굴의 투사 정신을 예찬하였으며, 그이의 문학적 성취를 서술하는 격식으로 된 짧은 글이었다. 오늘날에 생각해보면 좀 유치한 글이었다는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때 그 시기에 그분은 우리 민족 대학생들에게 강력히 알려야 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경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이며 ‘고려학회’ 초대 회장인 최응구 교수님을 인터뷰하여《연변여성》에 발표했다. 남북통일을 위하여 학술 영역에서 선행되어야 하는바 남과 북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중국조선족이라며 우리 민족의 역할을 강조하신 분이셨다.


우리 대학교 민족학 학부교수인 김병호 교수님을 인터뷰하여《민족단결》에 발표했다. 우리 대학에서 황유복 교수님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셨던 분, 일찍부터 ‘연변 위기론을 강조하시면서 해당 연구 성과를 중국어로 발표하시어 학계와 정부의 관심을 끄셨던 분이었다.

이를 통하여 나 자신도 우리 민족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참여 세대였다면, 90년대의 대학생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은 멀리하고 경제적 논리를 앞세워 실용을 추구하는 세대였다. 어느 한어 잡지에서 <80년대의 대학생과 90년대 대학생의 대화>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80년대의 대학생은 90년대 대학생들이 너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한다고 비평하면서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 가치의 상위 개념이 아닌가? 고 질문한다. 90년대 대학생은 적극적인 방어 논리를 펴면서 취직이라는 현실적인 미래를 대비하여 실용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고 반문한다. 그리고 형들이 추구한 정신적 가치는 결국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되었냐고 질문한다.

우리 민족 대학생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90북경아시안게임”과 92년 양국수교를 계기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고, 한국기업들의 대량적인 중국 진출로 조선족 대학생들의 취업이 폭이 넓어졌다. 경제적인 특수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에 따라온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 대학생 비율이 중국 1위이고 개명하고 충직하다던 정부의 신임이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는 인식으로 돌아섰고, 우리 대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차단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 민족의 대학생들에겐 물질이 상위 개념으로 설정되던 시대였다.


정신적 가치가 실추되던 그 시절, 우리《백두얼》의 외침은 가냘프기만 하였다.

《옹달샘》

95년, 우리 학과에서 문예지를 창간하기로 하였는데 나에게 책임편집을 맡으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한 학기에 한 기씩 내는 것으로 별로 부담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창간호, 이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가는 과정, 우선 학부지 명칭부터 정해야 했다. 명칭은 현상공모를 하기로 결정하고 공고를 냈지만, 마음에 딱 와 닿는 것이 없었다. 민족 담론을 주제로 한 거창한《백두얼》보다는 문학도들의 문예지로 색깔이 달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나는 생각했다.

문득 나는 옹달샘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심심산골,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옹달샘이 퐁퐁 솟아난다. 고달픈 산행에 지친 행자[行者]가 두 손으로 샘물을 받쳐 든다. 갈증에 목마른 입안으로 감로수가 들어간다. 어, 시원하다. 행자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계속 갈 길을 간다. 샘물도 계곡을 따라 졸졸 흘러간다. 그것이 시냇물이 되고 강물로 합류하며 나중에는 바다로 흘러든다. 무릇 큰 꿈은 작은 꿈으로 시작되고, 거창한 대의는 작은 뜻으로 발원한다. 그리고 옹달샘이라는 어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오케이, 편집부의 협의를 거쳐 명칭을 옹달샘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내가 제안한 명칭이어서 현상금은 지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필 <행자>를 썼다. ‘남남북녀’의 우리말을 빌어 남자는 남으로 남으로, 여자는 북으로 북으로 서로의 인생의 꿈을 찾아 가야만 하는 행자의 슬픈 이별을 담았다. 고등학교부터 서로를 애모하였지만 서로 다른 지역의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별을 맞이하는 사랑의 슬픔을 그렸다.

수필 <파랑새는 날아갔다>를 수정했다. 나 혼자의 학부지가 아닌 만큼 다른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했고, 비록 글은 안 되더라도 뜻만 새로우면 많이 뜯어고치더라도 등재하기로 하였다. 산업화의 충격으로 날로 피폐해지는 농촌, 우리 민족 총각들의 고민을 그린 한 여학생의 글이다. 여성을 상징하는 파랑새의 도시를 향한 꿈, 나는 그것을 옭아매려는 총각들한테 풀어주라고 권한다. 동아줄이 되어 꽁꽁 묶으려 들지 말고 분발하여 넓은 하늘이 되어 그들을 포옹하라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수필 <뻐꾸기는 철없이 운다>를 수정했다. 그때는 우리 민족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열풍이 불기 시작한 무렵, 단란하던 가족이 두 동강난 현실을 우려하면서 이 글을 수정했다.


문학은 내가 외부와 소통하는 길이었다. 컴맹인 나는 펜으로 글을 썼고 남의 글을 수정했다. 모든 원고가 완성된 후 우리는 책자로 만드는 작업에 힘을 합쳤다. 그때에는 컴퓨터가 보급되지 못하여 컴퓨터 입력자가 별도로 있었고, 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 등 컴퓨터 미술 작업자도 없어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미술편집도 새롭게 영입했다. 타이핑한 원고를 수정, 교정하고 초본을 만들고 거기에 그림을 넣고 다시 그것을 수정하는데 여럿이서 여러 번 밤을 샜다. 학부의 복사기가 과로로 작업을 못할 지경이 되었고, 수많은 초본들이 한 번 또 한 번 폐지로 처분되었다. 진통 끝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초본을 만들고 그것을 외부에 의뢰하여 백여 부 만들었다. 작업에 참여한 이는 5명 좌․우, 난산의 창간호였지만 그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에 피로는 잊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만든 창간호였기에, 반년 뒤 제2기는 별 어려움 없이 만들어냈다.

태권도


남자라면 뉘라 없이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것을 일러 음성양쇠(陰盛陽衰),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중국의 올림픽종목만 보더라도 대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금메달을 딴다. 문인들은 이를 일러 ‘중국남인결개(中國男人缺鈣, 중국남자들은 칼슘이 부족하다)’라는데 이를 동음이의어로 이해하면 ‘남인결개(男人缺概)’, 즉 남자는 기백, 용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된다.

북경의 날씨를 보라. 외부인들이 북경의 악천후에 대해 익숙한 것은 봄가을의 황사와 여름날의 폭염이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나 또 있다. 20세기 90년대 북경에는 매년 4~5월이면 눈이 내렸다. 때 아닌 계절에 웬 눈이냐고? 그 이유가 따로 있다. 북경에서는 환경조성사업의 일환으로 50년대부터 도로 변에 백양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90년대에는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암컷 백양나무를 수컷에 비해 훨씬 많이 심었는데 그것이 봄이 되면 수정하느라고 하얀 솜을 날린다. 암컷 백양나무의 수량이 엄청 많다 보니 봄이면 그것들이 바람에 흩날려 눈꽃으로 되는 것이다.

나는 대남자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현실생활에서 남자들이 좀 더 분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북한에서 파견한 태권도 사범이 북경대학과 우리 대학에 격일로 태권도 학습반을 꾸렸다. 국제태권도연맹의 중량급 경기에서 연속 두 번이나 우승한 정 사범은 키가 훨씬 크고 몸집이 우람진 7단이었다.

나는 학습반에 등록하였다. 그때 우리 반에는 인근 북경외국어대학의 북한 유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북한에서도 뼈대가 있는 집안의 출신으로, 북경외국어대학에서 일정기간 타 소국의 언어들을 연수한 뒤 귀국하여 사상 교육을 받고 다시 해당국가의 북한대사관으로 파견된다고 한다. 북한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도 꽤 많아서 생활수준도 괜찮아 보였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냈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우리도 한국 책에서 독일에 있는 북한 유학생들이 국가 기념일이 되면 현지의 친구를 찾아서 위대한 지도자를 칭송하는 글을 부탁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음으로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대개 공인 1단이었지만 태권도 실력은 훌륭했다. 외부 행사에 태권도시범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면 주로 사범과 북한 유학생들로 팀을 꾸렸다.


태권도 과정은 기본기 훈련과 기본 틀 배우기, 맞서기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내가 태권도를 배우려 한것은 체력과 의지를 단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에 ‘단군틀’, ‘천지틀’ 등 품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범은 웅장한 체구의 사나이로 세심한 기술보다는 힘있는 실전 무술에 역점을 두고 가르쳤다. 아래에 태권도를 배우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1994년 8월 여름, 국제태권도연맹 최홍희 회장이 북경에 왔다. 모두들 북경대학 체육관에서 환영 모임을 가졌는데, 정작 실물을 보니 우리에게 ‘살아있는 전설’로 알려졌던 그이는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웅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세가 어느 정도 되어 보였지만 눈과 행동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 여러 제자들이 태권도 시범을 하였는데, 그이는 제자들의 시범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몸소 나섰다. 태권도의 진수가 무엇인지? 우리는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 ‘쫘악~’ 그이가 도복 아닌 양복 차림으로 나서다 보니 옆차기 동작 시범을 할 때 그만 바짓가랑이가 짜개졌던 것. 우리들은 감히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럭저럭 1년간 배웠고, 1단의 금방 아래급인 1급 붉은 띠를 두르게 되었다. 그 뒤 개인적인 사정으로 태권도 수련을 접게 되었다.

 

행운

북경 생활에 적응하기엔 4년이라는 대학 생활이 너무 짧았다. 고심 끝에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문적으로 실력을 더 쌓고 좀 더 완벽한 모습으로 사회 무대에 진출하리라 결심했다.


중국의 경우 대학원 입학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대학원 입시는 매년 1월경에 전국통일시험으로 치러졌고 성적은 3월에 발표, 합격여부는 4월에 알게 되며 입학통지서는 5월 중에 발부된다. 지도학생을 받으려는 교수는 미리 상부에 신청하여야 하였고, 보통 신청한 교수가 일인 당 1명씩 국비연구생을 받을 수 있었다. 국비연구생이란 국가에서 학비 등을 지원하고 연구생 당 숙소를 제공하고 매월 생활비 230위안 정도를 지급하는 학생이었는데 이는 학부생에 비하여 대략 3배가량 많았다. 국비연구생에 합격되지 못하면 자비연구생을 신청할 수 있는데 그 경우 학비가 엄청 많고 숙소 비용을 별도로 내야 하였으며, 생활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전국통일시험으로 치르는 입시는 2개 전공과목은 지도교수가 직접 출제하였고 외국어, 정치, 중국어는 전국 통일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치르려면 적어도 반년은 준비하여야 한다.


나는 담임인 오 선생님의 석사연구생에 응시했다. 그때 오 선생님은 금방 부교수로 승진하여 첫 석사연구생을 받으려 하던 참이었다. 나의 경쟁자도 세 명이 되었다.

힘든 공부가 시작되었다. 대학에 와서 한동안 놓은 입시 공부를 시작하자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기억력도 예전과 같지 않았고, 다른 동학들은 다 놀고 있는데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외로움, 그 모든 것을 모두 견뎌야 하는 힘든 공부였다.

3월에 성적이 발표되었고 4월 말에 국비생 합격자 명단이 나왔다. 나는 국비생 합격 점수선 안에는 들었지만 같은 지도교수에 지원한 다른 학생이 나보다 성적이 높았기에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오 선생님께서 자비생을 지원하라고 하셨지만, 자비생은 체면이 구겨지고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던 5월, 취업을 준비하던 나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미 합격한 다른 학부의 석사연구생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바람에 국비생 정액이 하나 남게 되어, ‘마당발’인 오 선생님의 노력으로 그 것이 나한테 배당된 것. 나는 기적적으로 대학원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인생은 때로는 대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때부터 동학들은 나를 ‘행운아’라 불렀다.

학부 졸업

4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빨리 흘렀다. 우리 동학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 진심으로 소통하기 시작할 무렵 졸업이 다가왔다. 우리 93학급은 좀 특이한 반급이었다. 모두가 개성이 강하다 보니 다른 학급에 비해 말썽이 많았고, 평소에는 서로가 화합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정작 일에 맞닥뜨리면 달랐다. 우리 반의 경우 남학생은 11명이었는데 축구경기가 있으면 전원이 출장해야 했다. 조선족언어문학학과 운동회 남자축구 종목에서 결승에 올라 남학생이 30명이나 되어 선수 자원이 넉넉한 우리 학과 소속의 2년제 전문대학 94학급을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로 꺾는 이변을 연출해냈다. 그뿐만 아니다. 평소에 우리 학급과 우리 대학 93학번의 타 학과 조선족학생들과 축구경기를 많이 가졌는데, 매번 우리가 졌었다. 나중에 우리를 깔본 그들은 내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우리가 1:0으로 이겼다. 그 뒤로부터 그들은 내기 시합을 하자는 엄두를 다시는 내지 못했다.

말썽 많던 우리 학급은 팀워크가 날이 갈수록 더 탄탄해져 비록 나중의 일이기도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1년에 2회 정도 학급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7월 초면 졸업한다. 97년 6월, 우리 93학급은 졸업을 앞두고 교외에 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행선지는 북경시 밀운현(密雲縣) 흑룡담(黑龍潭)로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동학 두 명이 이미 행선지를 탐사하고 민박을 예약하였다.

우리는 기차를 탔다. 2시간 뒤에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마중 나온 민박주인의 안내로 민박에 들어 짐을 풀었다. 저녁에는 산양을 잡아 양 구이를 해먹는단다. 양고기는 예전부터 북경사람들이 비교적 선호하는 육류이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개고기는 다르다. 예로부터 북경사람들은 개고기는 먹지 않았고 개가 죽으면 땅에 파묻었다 한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조선족, 한국인들이 북경에 대거 진출하면서 북경시의 개고기는 금값이 되었고, 북경 시내를 멀리 벗어나지 않으면 개를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어쩜 우리 민족이 평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북경개의 명운을 달리했다고 볼 수 있다. 하긴 그때 북경에 우리 조선족 인구만 6-7만을 헤아렸으니 그럴 법도 할 것이다.

화톳불에 불을 지펴 양고기를 굽으며 민박주인은 “당신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고 물었다. 우리가 북조선, 한국을 말해줘도 민박주인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우리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옛날 일본군의 통역의 말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가 본 사람이 일본군을 위해 봉사한 통역이 조선인인지를 우리는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 일본군 통역 중에 우리 조선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 시기의 문헌에도 꽤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또한 동북지역의 우리 민족에 대한 비하적인 지칭인 ‘꼬리빵즈’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 민족을 욕하는 ‘꼬리빵즈’를 근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부의가 동북에 세운 소위 ‘만주국’ 시기에 일부 민족의 반역자들이 일본군의 위세를 앞세워 경찰 노릇을 하면서 경찰 몽둥이로 심하게 한족들을 구타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좀 고전적이고 우리 민족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고구려 백성들이 궐기하여 몽둥이로 당나라 군대를 두들겨 팼다는 뜻, 참말이지 정녕 나는 후자를 믿고 싶다.

밤에 파티를 즐기고 우리는 이튿날 흑룡담으로 향했다. 흑룡담은 산 위에 있었다. 북경 시내에는 산이 없다. 자금성 뒤의 경산은 중해, 남해 호수를 파면서 생긴 것이고, 이화원의 산도 역시 곤명호를 파면서 생겼다. 북경에서 산을 보려면 시내를 벗어나야 한다. 자, 이젠 진짜 산으로 간다.


입구 앞에는 밀운(密雲)저수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저수지와 더불어 역시 멋질 흑룡담 풍경을 나는 상상했다. 우리는 산에 올랐다. 코스는 졸졸 흐르는 냇물을 따라 올라가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비록 나무는 별로 자라지 않았지만 여름의 산은 푸르렀고 공기는 맑았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물놀이도 즐겼고, 흑룡담에 도착하면 꼭 풍경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거의 한 시간 정도 걸어서야 흑룡담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했던 바와 달리 흑룡담은 다만 바위 밑에 물이 고여 있는 자그마한 웅덩이였다. 검푸르게 보이는 것 봐서는 꽤 깊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전설 속의 흑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못이란 말인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작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가 올라오는 길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결과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 과정을 무시하였을 뿐.

몽고족과 티베트족 친구

1997년 9월,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부생과 달리 대학원생은 군사훈련이 없고, 숙소에 8명이 기숙하는 학부생과는 달리 대학원 숙소는 정원이 4명이며, 저녁 11시경이면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대학생 숙소와는 달리 24시간 전기가 공급된다. 즉 모든 면에서 대학 때의 조건과는 비교가 안 된다.


대학을 다닐 때 조선 언어 문학학과를 다니다 보니 숙소에는 모두 같은 민족 동학들이었고, 따라서 타 민족과는 별로 교제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입학하여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 대학의 조선족 대학원생 중 남자는 나 혼자뿐이었기에 타 민족과 같은 침실에 배정되어야 하였다. 우리 침실에는 나를 제외한 외 몽고족 두 명, 다른 회족 한 명이 들었다. 그 회족 친구는 어머니가 회족이고 아버지가 한족이기에 동화되어 한족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 몽고족 두 명과는 학부 때부터 같은 학부여서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색음파아이(色音巴雅爾)라는 친구는 나와 같은 93학번으로 학부에서 학생회 간부를 한 경력이 있었는데, 얼굴에 화기가 없이 늘 음침하였다. 다른 한 몽고족은 아일목찰(阿日木扎)로 나보다 한 학번 위인 92학번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사표를 내고 대학원시험을 보다 보니 대학원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 우리 대학원은 같은 해에 입학한 석사연구생들을 모두 합쳐 한 개 반으로 편성하여 박사연구생이 담임을 맡았다. 우리 97대학원반은 90여명의 대학원생으로 구성되어 그야말로 ‘민족 화합의 장’을 이루었다.

몽고족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중히 여기지 않아 마음 착한 선배인 아일목찰이 늘 색음파아이 한테 당하는 눈치였다. 곧고 바른 말을 잘하는 성격이어서 나는 ‘이 자식, 아무리 그래도 선배인데 예의는 갖춰야지’하는 생각으로 아일목찰을 도와 색음파아이를 면박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일목찰은 이에 감동을 받아 나를 가까이하게 되어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난 아일목찰을 보고 농담으로 “참 이상하다. 이거 역사가 잘못 기록된 거 아니야? 너희 몽고족들을 보니 도무지 칭키스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말이지. 아아, 원통하다. 우리의 고국 고려가 너희들한테 짓밟히다니. 안 되겠다. 우리 한번 맞짱 뜨자. 우리 조상들을 위해 복수해야겠다. 우리 태권도의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하니, 그 애는 킬킬 웃기만 한다. 워낙 심성이 착한 애여서 남한테 ‘아니’라는 말을 못하는 성격, 은연중 나는 그의 ‘보호자’로 되었다.

몽고족들은 보통 대학교에 와서야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데, 대학에 와서도 공부를 열심히 함으로 대학졸업 시에는 중학교부터 일본어를 배운 우리보다 실력이 더 나은 애들이 많았다. 일본인들도 유달리 몽골인을 좋아하였다. ‘가미카제(神风)’의 덕분으로 원나라 군대가 일본을 침범하지 못한 것과, 같은 몽골인종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내몽고에 여행가고 몽고인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일목찰의 친구 몇몇도 일본인과 교제가 있었고, 그 자신도 나중에 일본회사에 취직하고 일본인 애인을 두었다.

그때 옆방에는 니마찰서(尼馬扎西)라는 장족이 있었다. 장족이란 곧 티베트인을 이르는 말. 그 애의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장족들은 마음이 착했다. 비록 말은 얼마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는 티베트 문제에 대하여 담론하지 않는 것을 대방에 대한 예의로 간주하였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들의 일력은 우리와 달랐는데 일명 장력(藏曆)이라 한다. 그들의 설은 3월경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아침 7시경, 그 친구가 우리 침실로 들어와 꿈나라에 들어있는 우리를 모두 깨우고 “짜시더러(扎西德勒, 행운, 행복을 뜻하는 장족들의 인사말)” 하더니 맥주를 부어 맥주 컵을 돌리는 것이었다. 몇 년을 안 씻었는지 유리잔이 깨끗하지 않았다. 서장지역은 물이 귀해서 인간이 태어나면 단 세 번 목욕하는데, 그것은 각각 갓난아기 때, 시집 장가갈 때, 사망한 뒤이다. 결코 그들이 불결하다는 뜻은 아니다. 깨끗하거나 더럽다는 표현은 표상일 뿐 그것이 꼭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일례로 청정지역에서 온 그들은 북경에서 거주하려면 우선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만큼 북경은 오염이 심하고 공기가 안 좋다는 말,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인간들이다.

예의상 술을 단숨에 마셔야 했었는데, 굽을 내고 보니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그 친구는 참파(Tsamba)를 내 앞에 내밀었다. 참파란 서장지역에서 나는 보리를 가루 내어 우유에 버무리는 장족의 전통 음식인데 우리 민족의 미숫가루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른 점은 그들은 맨손으로 참파를 버무리고 맨손으로 집어먹는다. 먹기 싫었지만 먹는 시늉을 해야 했다. 괴로운 아침이었다.


행운은 쌍으로

1997년, 그 해는 유난히 운이 좋았다. 운이 좋게 국비생으로 대학원에 입학한 것을 제쳐놓더라도 신문에서 우연히 롯데 껌 현상광고를 보고 롯데 껌을 사서 종이껍질을 롯데에서 지정한 청도의 주소지로 보냈더니 3등 상에 걸려 100위안을 받게 되었는데, 세금 20위안을 공제하고 80위안을 수령했다.

그 뒤 어느 날 나는《축구보[足球報]》에서 레드불(紅牛, Red Bull) 음료 현상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레드불 캔음료 뚜껑을 그들이 지정한 곳으로 보내어 당첨되면 태국여행을 보내준단다.

1995년에 중국 시장에 진출한 태국의 레드불 음료회사는 그 시기 중국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었다. 1997년에 실행한 ‘레드불 음료 먹고 태국여행 가기’ 10개월에 한 달에 한번, 한번에 10명씩 추첨하여 모두 100명을 무료로 태국여행을 보내는 판촉활동이었다. 사실 레드불 음료는 캔 용량이 작은 반면 가격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쌌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가격이 한 통에 4.8위안이었는데 이 돈으로는 캔 콜라를 3병 살수 있었다.

이 음료를 사먹자니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같은 침실 애들을 보고 우스개로 ‘나 이제 레드불 음료를 먹고 태국에 여행 간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고도 돈이 아까워 그 음료를 사지 않았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 저녁, 졸업한 대학 동창들과 술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갈증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레드불이나 사먹자’고 작심하고 가게에 가서 레드불 음료를 사먹고, 그 이튿날에 우편으로 레드불 캔 음료 뚜껑을 그 회사에서 지정한 주소로 보냈다. 그리고 그 일을 감감 잊고 있었다.

대략 2개월이 지난 뒤,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내가 당첨되어 태국으로 여행 갈 수 있단다. 당첨된 사람들이 팀을 꾸려 가니 상세한 일정은 사후에 통보한단다.


이 일로 나는 ‘행운아’라는 별명은 대학원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우선 여권을 만들었다. 그때 중국에서 1998년에만 하더라도 여권은 공무 여권, 여행 여권, 개인 여권 등 3종으로 나누었는데 여행 여권의 경우 유효기는 일 년이고 일 년 내에 단 1회만 사용할 수 있었다. 개인 여권의 경우 유효기가 5년이어서 사용하기 편하지만 그때는 발급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어서 나는 북경시공안국에 가서 여행 여권을 신청하여 발급받았다.

1998년 4월, 나는 타 당첨자들과 함께 5박6일 일정으로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동남아 금융위기로 태국경제가 매우 어려웠고 중국 위안화의 가치는 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오후 5시경에 이륙한 비행기가 5시간 정도 날아 방콕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는 나의 첫 외국 나들이이자 난생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였다.

호텔에서 그날 밤을 지내고 이튿날부터 우리는 방콕 시내 구경을 했다. 현지가이드는 여자였는데 화교출신이라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태국은 불교국가로 태국의 젊은이들은 의무적으로 삭발하고 몇 년간 승려 생활을 한단다. 또한 태국에서 왕궁, 공원 관람은 무료라 한다.

4월의 태국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더웠다. 열대우림기후에 속하는 태국의 4월은 건조기인데, 서로의 몸에 물을 뿌려 몸을 적셔주는 ‘송크란’ 축제도 4월에 열린다. ‘송크란’은 중국어로 ‘泼水节’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운남 따이족들이 이 축제를 즐긴다. 우리 대학의 경우 따이족 학생들이 이날이면 민족 복장을 차려 입고 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마구 물을 뿌려대는데. 사실 4월에 이 축제를 즐기는 그들을 보고 좀 이해가 안 되었다. 중국은 더운 계절이 6~8월인데 말이다. 덥지도 않은 4월에 물을 맞고 좋아할 사람이 어데 있겠냐고, 참 이상한 민족이라고 가이드는 태국 토착민들은 게을러서 공무원 등 직을 선호하는데 반해 화교들은 고생에 잘 견디고 장사골이 터서 태국의 많은 부는 모두 화교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방콕에는 당인거리도 별도로 있었다.

첫날 점심식사가 끝나자 가이드는 ‘등소평 타임’이 됐다고 말했다. 뭔고 하니 예전에 등소평이 태국을 방문하였을 때 점심식사를 마친 후 꼭 짧은 시간이나마 잠을 잤었는데 오침 습관이 없는 태국인들은 이를 보고 ‘등소평 타임’이라고 불렀다 한다.

방콕에 있는 악어 사육장에 가봤다. 수만 마리의 악어가 사육되고 있었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세계 최대의 악어사육기지인데 전에 강택민 주석이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악어란 놈들은 게을렀는데 그들 중 하루 종일 입을 쩍 벌리고 가만히 있는 놈도 있었다.


며칠 뒤 우리는 방콕여행을 끝내고 관광버스틀 타고 4~5시간 달려 파티아 해변가로 갔다. 파티아는 미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인근 바다는 오염이 되어 바닷물이 좀 더러웠고 배를 타고 한 시간쯤 나가니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는 섬이 나타났다. 나는 수영에 익숙하지 못한지라 그냥 옅은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좀 지쳐서 백사장에 나와 앉아 있는데 웬 두 여자가 우리 일행한테 다가와 ‘사진을 찍지 않겠냐?’ 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들은 중국어로는 ‘仁妖(인요)’, 영어로는 ‘SHEMALE(쉬매일)’이라고 하는 인간들인데 나름대로 예쁘고 젖통도 있어 여자로 보이지만, 아래는 남자의 성기가 있음으로 ‘반은 여자, 반은 남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집 출신으로 돈을 벌려고 가슴수술을 하고 여성호르몬을 복용해야 하는데, 이 약으로 인하여 그들은 대체로 40여 살이 되면 죽는다고 한다. 돈이 좀 있으면 성전환수술을 할 수 있는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신분증에는 여전히 남자로 남기에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단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모든 태국인을 감동시켰다는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오래 전, 한 독일 신사가 태국에 관광 왔다가 한 예쁜 아가씨와 눈이 맞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독일신사는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르게 되었단다. 그러나 여자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에 미심쩍어 독일 신사가 알아본 결과 그는 성전환 수술을 한 남자였던 것.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독일 신사는 그날로 행장을 챙겨 귀국해버렸다. 그 ‘아가씨’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일 년 후, 독일신사는 그녀를 잊을 수 없어 다시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둘은 태국공항에서 열렬히 포옹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미담으로 한때 태국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10바트란다. 그들은 비키니 상태, 여러 사람이 모두 그들과 사진을 찍었고 나도 준비한 카메라로 타인한테 부탁하여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사진 찍으려 준비하는 과정에 브래지어를 푸는 바람에 그만 우리 둘의 사진은 나는 웃통을 벗고 아래에는 반바지만 입었고 그녀는 유방이 다 드러난 ‘음탕한 사진’으로 되었다. 이 사진은 나중에 북경에 돌아온 뒤 사진관에 가서 현상하면서 좀 말썽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황색사진’은 현상할 수 없는데, 이 쉬매일이 여자가 아니라고 설명하여서야 비로소 현상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진을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


저녁에는 쉬매일 공연을 관람하였다. 전문직 쉬매일은 모두 아름다웠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두 녹음된 것으로 그들은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여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왔기에 중국 노래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의 2시간 진행된 공연이 끝난 뒤 그들은 모두 줄지어 밖으로 나와 돈을 찍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보통 10바트를 주면 되였는데, 내가 같이 찍은 쉬매일은 나의 손을 잡아다 자기의 유방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섬광등이 번쩍했고 내가 10바트를 주니 그녀는 ‘NO’란다. 미처 그의 육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나마 부끄러워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 그만 어정쩡하게 100바트를 주고 말았다.


 

반미 시위

1999년 5월 8일, 중국 현대사에서 영원한 치욕으로 남을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군 폭격기가 미사일로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습격하여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대사관은 곧 그 소속국가의 신성불가침의 영토요, 대사관을 공격한다는 것은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음을 기본적인 외교 상식, 중국의 방송에서는 매일 피폭 관련 뉴스가 비중 있게 방송되었다.

중국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며칠, 북경은 조용했다. 중국 정부에서 미국에 군사보복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다가 나중에 무력보복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하고 대중을 동원하기로 하였다는 방침은 후에 들은 말.

며칠 뒤, 북경대학 학생 및 일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북경주재 미대사관에 가서 항의, 시위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6·4’ 이후 중국에서는 학생 데모를 신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집회, 시위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지방정부에 가서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였고, 5월 말 6월경이면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사상교육을 진행하고 학교 출입 시에 학생증을 검사하는 등. 조치를 취하여 외부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때문에 자발적인 시위란 표현 그대로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잘 모르지만 정부에서도 이번 반미시위가 도를 넘을 경우 자칫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까 노심초사 했을 것이다.

곧 우리도 학교 측으로부터 북경주재 미국대사관에 가서 항의 시위하니 참석하기 바란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국의 도발 행위에 분노하고 있음에도 시위할 엄두를 못 냈던 우리들, ‘6·4’의 영향으로 우리 90년대 대학생들은 정치적 행위 표출 면에서 자제를 요구 받는 삶을 살아왔다. 내일은 어쩌면 인생에 단 한번밖에 있을지도 모를 시위가 있다. 멋진 모습의 한 장면을 출현하여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리라!


이튿날 오전, 나는 부근의 가게에 가서 8위안 주고 흰색 티 한 장 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먹 잉크를 찾아 붓으로 앞면에는 ‘미제 타도’를, 뒷면에는 ‘클린턴, 발정이 나기로 아무 곳에나 ×을 집어넣어? 콱 잘라 치울라.’라는 내용을 중국어로 적었다. 마침 그때에는 클린턴이 루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이 들통 나 곤욕을 치르던 시기였는데, 나는 미제의 길쭉한 미사일의 형체를 클린턴의 ×에 비유한 것이다. 동학들은 너나없이 재미있다고 웃어댔다. 한 친구가 나한테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유감이라면 앞면만 나와서 뒷면의 내용은 남들에게 영영 증명할 길 없다는 점.

우리는 전용버스로 미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교문 밖 도로에 길게 늘어선 것을 보니 우리 대학에서 동원된 버스만 하여도 수십 대는 될 것 같았다. 듣자니 다른 대학들도 모두 시위하러 간단다. 우리 대학은 북경시내의 서쪽인 해전구에 위치하였고, 미 대사관은 대사관 집결지인 조양구에 위치하고 있어 버스를 타고도 거의 40~50분 가야한다.


버스는 대사관 구역에 좀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앞에 줄지어선 버스가 너무 많아서 더 앞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하였다. 그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엄청 많았다. 미대사관 부근에 가보니 중국의 무장경찰들이 손에 손 잡고 네 겹으로 대사관을 에워싸서 시위대의 대사관 접근을 막았고, 대문가에는 적어도 여덟 겹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시위노선은 사전에 엄격히 규정되어 미 대사관을 반 바퀴 도는 거리로 제한되었고, 일단 앞으로 걸어 나가면 뒤로 후퇴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또한 몰려드는 인파가 너무 많아서 후퇴하고 싶어도 후퇴할 길 없었다. 사람들은 한껏 ‘미제 타도’를 외쳤고 돌멩이를 들어 미대사관에 던지는 이들도 많았다. 한 사람이 먼저 던지니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흥분되어 던지게 된 것이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선동하면 만 사람이 호응하는 것, 이것이 곧 평화 시위가 폭력시위로 바뀌게 되는 원인이다. “잘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돌멩이를 던져 미대사관 건물을 맞히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상한 것은 타국 대사관들과는 달리 미대사관의 건물은 담장에서도 꽤 먼 거리에 위치하여있다는 점. 미대사관 유리창으로 한 사람이 얼굴이 빠끔히얼굴을 내밀었다. “우와!” 시위자들이 고함을 지르니 그 얼굴은 곧장 사라졌다.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때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미대사관 대문가를 지나던 시위대가 무작정 밀며 무장경찰들의 방어벽을 뚫고 내부로 진입하려 시도한 것, 처음 네 겹은 삽시간에 뚫렸지만 두 번째 방어벽에 막혀버렸다. 이어 무장경찰 증원 병력이 속속 도착하면서 시위대는 뒤로 밀리게 되었다. 시위대 조직자들은 인파를 앞으로 인도하였고, 그들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사람들은 뒤에서 밀려오는 인파에 밀려 결국 앞으로 밀려나갔다.


우리는 미대사관을 반 바퀴 돌아 사전에 지정된 노선을 따라 나오게 되었다. 길을 따라 나오는데 마침 쿠바대사관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문가에 책상과 걸상을 놓고 음료수 등을 준비하여 우리 시위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미제 타도!’, ‘우리는 형제!’이라는 중국어로 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우리를 실어왔던 버스들은 다른 학생들을 실으러 갔으니 숙소는 각자가 알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돌아가란다. 나 참! 위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하얀 티만 입고 왔는데.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나의 등뒤에 적힌 글을 보고 킥킥 웃고 있었다.



결혼 수속 대행

한국과 수교한 후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한국 방문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90년대 초반에 발생한 ‘가짜 초청장 사건’! 많은 조선족마을을 황폐화되었다고 조선족 언론매체들은 전한다. 동삼환(東三環)에 위치한 국제무역센터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하루에도 수백 명의 조선족 동포들이 비자를 받으러 줄을 섰는데, 대부분 초청장이 가짜로 판정되어 브로커들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 초청장을 산 이들은 하루 사이에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90년대 후반은 조선족 여성들의 한국결혼이 유행되던 시절. 그 시기 나에겐 대학을 졸업하고 주중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취직한 대학 동창이 몇 명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중학교 때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던 여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제결혼 하려고 수속하러 북경에 오는데 초행길이어서 기차역으로 직접 마중 나올 수 없느냐?’는 전화였다.

예의상 거절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분을 픽업하였고 내가 잘 알고 있는 학교 부근의 여인숙에서 숙박하게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결국 결혼수속에 대한 말을 꺼내게 되었는데, 나는 마침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아는 동창생이 있어, 내일 선생님을 영사부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오전, 우리는 버스를 타고 북삼환 대로를 따라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향했다. 그때 한국대사관은 국제무역센터로부터 이전하여 량마교(亮馬橋)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 위치하여 있었고, 대사관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영사부가 있었다. 영사부에 도착하여 보니 대기하고 있는 여자들만 어림짐작으로 이백은 되어 보였다. 영사부의 규정상 오전에만 접수하기에 빨리 끝내야 하였다.


나는 동창한테 연락하여 여선생님과 함께 영사부로 들어갔고 그 수속을 돕는 과정에 많은 내부 사정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들과의 국제결혼 수속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상 영사부에서 요청하는 서류를 제대로 준비하여 제출하고 나중에 미비한 서류는 영사부의 요구에 근거하여 보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것은, 보충하여야 할 서류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퇴짜 맞으면 그냥 퇴짜 맞은 서류를 보충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이미 문제없던 서류, 예하면 공증서 등이 유효기를 넘겨버려 다시 모든 서류를 새로 준비하여 하는 점이었다. 하여 결혼수속을 하려면 1년 씩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선생님은 연변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필요한 서류는 우편물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그 뒤 한 달도 채 안 걸려 나는 동창생의 도움으로 서류를 1회 보충하고 간단히 수속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별수 없이 어정쩡하게 결혼수속을 도와줬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우리 민족의 여성들에 대한 실망감, 민족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 그리고 민족에 대한 공부를 한 녀석이 어찌 이런 일을 했나 하는 자괴감!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떻게 되어 이 일이 소문이 나서 한 초등학교 시절의 동창생이 찾아왔다. 도와주기 싫었지만 연락 없이 찾아온 그녀를 보고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와주기 전에 분명 잘라 말했다.

“이젠 그 누구도 이런 일로 날 찾지 마라!”


그 뒤 이런저런 청탁이 들어왔지만 나는 동창생이 영사부의 일을 그만두었다는 핑계로 모두 거절하였다.




문학, 새로운 세계를 보다

 

나의 전공은 중국조선족문학연구이다. 우리 중국에서 정착한 문학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나의 주 전공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는 만큼 중국문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 실정, 나에게 이 분야에서 시야를 넓혀준 선생님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우리 대학 중문학부의 래성강(來成剛) 선생님. 그는 자신의 지도학생과 함께 1년 간 나에게 90년대 중국문학에 대하여 가르쳤다. 우스개도 잘하시어 ‘행복(중국어로 幸福)이란 무엇이냐? 성(性, 중국어에서 幸과 동음인 XING으로 발음)이 있어야 하느니, 성생활이 없으면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농담도 하신다.


 


그는 북경 평론계에서 꽤 유명한 평론가였다. 문화중심인 북경에서 작가들은 새 작품을 출판할 경우 그 책을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유명한 평론가 몇 분을 모시고 작품 토론회를 열어 해당 작품을 평하고 그 평가 글을 많은 신문 매체에 등재하여 홍보했다. 그이는 매번 신작에 대한 평가를 하셨는데 이로부터 책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다른 한 분은 북경대학 한국어학과 위욱승 선생님이다. 한족 분인데 북한에 유학하여 한국문학을 전공하신 분이다. 그이는 한국 모 재단의 지원으로 자신의 학술성과를 취합하여《위욱승문집(韋旭昇文集)》 (총 6권) 내셨는데 우리 대학에서 조선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교정 작업을 도와주기를 희망하셔서 내가 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이의 중국어로 된 한국문학 학술 성과와《옥루몽》,《구운몽》 등 한국고전 번역서를 꼼꼼히 읽으면서 한국고전에 대하여 흥취를 가지게 되었다.

사족 : 10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한국의 모 대학에서 한국 고전문학 박사과정을 다니고, 한국의 문학을 중국어로 번역, 출판하는 번역가가 되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번역과 출판에서 시야를 넓혀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추락사고

1999년 가을, 졸업을 반년 앞둔 시점, 번민의 계절이다.


한적한 밤이면 나와 몽고족 친구 아일목찰은 늘 4층에 있는 넓은 옥상으로 올라와 맥주를 마셨다. 내년에는 졸업인데 취직도 걱정이고 졸업논문을 쓰는데도 시름겹다. 우리의 숙소는 3층에 위치하였는데 숙소에는 큼직한 가방 하나를 비치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언제나 빈 맥주병이 10개 정도 들어있었다. 그때 북경에서는 맥주를 살 때에는 맥주 값 외 개당 0.50위안씩 보증금을 예치하고 빈 맥주병을 가게에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그것이 시끄러워 아예 우리는 아예 보증금을 찾지 않고 맥주 사러 갈 때마다 빈 병을 들고 가서 맥주병을 바꿔왔다.


우리는 옥상 베란다 위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다. 4층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곤 하였는데, 나는 가끔 여기에서 추락하면 어떻게 될까? 부질없는 생각을 가져볼 때가 있었다.


우리 둘만 친했고 색음파아이와는 놀지 않았다. 그러는 그가 안쓰러워 간혹 같이 술을 먹기는 하였으나, 그 녀석의 술버릇이 안 좋았기에 그와는 언제나 불편한 자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저녁, 우리는 또 옥상에 나왔다. 그날은 색음파아이의 생일이었다. 우리가 외식하여 축하해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밤늦게야 숙소로 들어왔다. 별수 없이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고, 그가 대학원의 몽고족 후배들 몇을 더 불러 자리를 마련하였다. 타민족은 나 하나.

술을 마시며 두루 얘기를 나누다 밤이 깊어졌다. 자리를 파하려는 와중에 색음파아이와 한 몽고족 후배가 시비가 붙었다. 몽골말로 뭐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말려도 둘은 통 듣지 않았다. 그 고약한 몽고족 후배가 이는 제네 몽고족 내부 일이니 나는 관계 말고 돌아가 잠이나 자란다. 에라, 피곤한 족속들.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아일목찰과 끌고 침실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의 다급한 노크와 고함소리에 우리는 잠을 깼고 문을 열어보니 그 고약한 몽고족 후배였다. 그는 울먹울먹한 소리로 다급하게 색음파아이가 3층 베란다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뭐? 얼추 들어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급히 1층으로 달아내려 가보니, 색음파아이가 일층 콘크리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붙어있었다.

우리는 그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우리 대학의 지정병원인 적수담(积水潭)병원으로 이송하란다. 적수담병원,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노사(老舍)가 문화대혁명시기에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들어 자결한 호수-태평호(太平湖) 바로 병원 뒤에 있다.


천만다행으로 색음파아이는 별로 다치지 않았다. 3층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하였음에도 왼팔 뼈만 부러졌으니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지만 그것은 잠시뿐, 이 사건으로 일으켰을 파동과 나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료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들은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징계함으로 주범에 대한 죄를 경감시키려 할 것은 분명했다. 그 주범이야말로 그들이 인정하는 공산당원 간부이고 모범학생이니 당연 학교 측에서 보호하려 할 것이고, 또한 대학원 실무 책임자가 몽고족이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징계 수위가 결정되었다. 나 그리고 아일목찰, 색음파아이, 몽골 후배는 모두 똑같은 경고 처분이란다. 이상한 것은 그가 공산당원임에도 당 차원의 징계가 없었다는 점. 선심 쓰듯 그들은 이는 학교차원의 징계이고 그나마 졸업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징계가 풀리기에 우리한테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문서에는 기록이 되지 않으니 개인의 역사에는 오점으로 남지 않는단다.

그러나 같은 징계임에도 개인에게 미치는 결코 영향은 같지 않았다. 아일목찰과 색음파아이는 모두 학부 때의 예비 당원, 대학원 시절에는 당원으로 되었으니 영향이 없었지만, 대학원에 와서야 공무원에 뜻을 두고 입당지원서를 바친 나로서 대학원 졸업 때에는 예비 당원으로 될 수 있는 기회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이었고 당적을 보류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나는 대학원 중국 공청단 97학년 조직위원으로 그 시점에 예비 당원 인준을 앞두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입당이 영영 물 건너 간 것이다.


공산당에 특별히 집착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정치과목을 잘한 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은 나름대로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굳이 입당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문학을 하려면 폭넓게 다른 사상들을 포섭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대학원에 입학한 후 생각이 좀 달라졌다. 공무원이 되려면 거의 필수인 조건, 입당!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초원에서 토끼 한 마리가 이리떼한테 갈가리 찢겨 죽는 장면이 떠오르며 나는 쫙 식은땀을 흘렸다.


한번쯤 꽃으로 살고 싶다!


중국의 석사 정규과정은 3년, 곧 졸업이다. 그 사이에 논문 <노신과 김학철 잡문에 대한 비교>를《조선학》에 발표하였고, 또 반년 간 노력하여 석사학위논문을 완성했다. 평소 우리 민족의 이민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온 나는 조선족 작가 리근전의《고난의 년대》(80년대 창작)와 최홍일의《눈물 젖은 두만강》(90년대 창작)을 비교하여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만주지역 이주, 정착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뿌리 찾기’노력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졌다.

졸업이다. 무엇을 할까? 나는 오랫동안 고민, 또 고민했다. 인생이란 단 한번밖에 없는 것, 여태껏 책 속에만 파묻혀 살아온 나는 사회에 진출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었다. 젊은이란 이름으로 대학과 대학원에 도전하였듯이, 겁 없이 사회에도 도전하고 싶어졌다. 내가 배운 지식, 그것으로 전공에 맞는 직장에 취직하면 앞날은 훤히 보인다.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일매일 반복하는 일상 업무, 바깥 세계를 꿈꾸면서도 먹기도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쉬운 계륵 같은 기득권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고단한 삶, 그런 삶을 살기엔 자신이 너무 젊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대학원의 마지막 글로 <한번쯤 꽃으로 살고 싶다!>를 발표했다. 사랑의 열병에 앓던 시절이다. 한번 화사하게 피었다가 금방 시들어지는 꽃보다는 영원을 꿈꾸는 푸르싱싱 소나무로 되고 싶었던 나였다. 은근히 꽃을 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너의 아름다움은 한낱 꽃에 비할 바가 아니며 꽃이 시들 때면 내 맘이 더 아플 거라.’고 절대로 꽃만은 선물할 수 없다던 나, 그녀가 영원히 곁을 떠날 때에야 꽃을 선물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인생의 미는 영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끈함에 있다고, 젊음도 한 계절뿐이라고, 단조로운 영원의 지속보다 화끈하게 불타는 한때의 젊음, 정녕 한 계절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으로 살고 싶어졌다. 아니, 그렇게 살려고 나는 결심한다.

 

첫 직장

북경에서 직장을 찾는 것은 대체로 지인의 소개거나 한국인들이 무료로 발간하는 광고지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취직 광고를 내니 연락 오는 회사가 몇이 되었다. 그러나 면접 심사에서는 번번이 미역국을 먹었다. 왜? 문학 석사라는 학력은 업무에 도움이 되지 못한 반면 월급에 대한 요구가 대학생보다 높을 것이라 회사에서는 판단하고 있었고, 사실 나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더라도 석사라는 자가 컴맹에 회사 근무 경험이 전무하니 내가 사장일지라도 대학졸업생을 고용하여 새로 가르치며 쓰지 나 같은 사람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대학 교육은 사회의 실수요와 이탈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북경시 교외에 위치한 한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반도체연구소인데 한국말을 아는 이가 필요하니 올 의향이 있냐는 문의 전화였다. 취직에 굶주렸던 나로서 죽이고 밥이고 가릴 처지가 못되었다.


그들이 알려준 주소대로 면접 보러 창평구 사하진(沙河鎭)에 있는 반도체연구소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져 있었다. 연구소 소장이라는 분이 직접 면접을 보았는데 그 방법이 참으로 독특했다. 그는 창평구 지도를 내 앞에 펼쳐놓더니 자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한국성(韓國城)’ 하이테크과학기술복합단지 프로젝트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보통 면접이라면 면접자가 간단히 자사에 대해 설명하고 구직자의 정황에 대해 캐묻기 마련인데, 이번 면접은 이상하게도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직감은 이곳의 월급이 적을 것! 과연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 한국의 반도체회사와 합작하여 현재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는데 통역이 필요하단다. 이미 통역 2명을 중국연수생과 함께 한국에 보내어 연수를 받게 하는데 그들이 돌아오면 제 2기 연수생 통역으로 나를 보내주고, 당장은 월급이 적지만 곧 합작공장이 설립되면 그때부터 합작기업에서 비교적 높은 월급 표준에 근거하여 월급을 주기에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렴, 잘나가는 반도체회사의 월급이 적겠냐고. 그는 장담했다.

나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직장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 새로 탄생하는 회사에서 한국 측에서 파견한 총경리의 통역으로 일하는 것도 별로 나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첫 직장이다. 소중한 경험을 쌓은 곳이지만 근무 조건은 그야말로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이곳 사하진은 북경시와 명 십삼릉(十三陵)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또한 팔달령(八達嶺) 만리장성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다. 명나라 황제가 선조의 묘소에 제를 지내러 갈 때 면 의례 자금성에서 가마를 타고 나서는데, 가마꾼들이 걷는 걸음에도 법도가 있어 반드시 그날 저녁 무렵에 이곳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기로 되어 있다. 이 지역도 나름대로 유명한 고장. 바로 이곳에서 중국의 익태그룹이 도산 위기에 놓인 국영반도체연구소를 인수하여 한국기업의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성’건설이라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합자회사 북경반도체회사는 익태그룹과 그가 인수한 반도체연구소, 한국의 동양그룹과 그의 자회사인 동양반도체회사 및 이 합작을 성사시킨 한국의 컨설팅회사 모두 5개 투자 측이 있는 복잡한 투자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공장 건설 시기에는 내부 문제가 적었다. 이 회사에 워낙 동양반도체에서 총경리, 즉 대표이사를 남 부장이라는 기술부장을 발령 내려 계획하고 있었는데, 결국 모기업인 동양그룹에서 강압적으로 반도체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정 본부장을 총경리로 파견하였고, 동양반도체에서는 별수 없이 남 부장을 이사로 승진시켜 부총경리로 파견하였다. 그러니 남 이사가 반도체에 대하여 모르는 정 총경리한테 불만이 있을 것은 분명한 일. 공장을 새로 건설하며 워낙 한국으로부터 수입하여야 할 장비가 많았기에 초기에 남 이사는 한국에 체류하며 장비구매업무를 전담하였고, 정 총경리는 북경반도체회사에 와서 공장 건설을 감독하고 중국 현지에서 구입하여야 할 장비들을 구매하는 업무를 책임졌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장비도 꽤 되었고 협상에서 여러 업체의 경쟁을 유도하여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도입하다 보니 상대하는 업체도 꽤 많았다. 하루에 협상 테이블에 앉는 업체만도 서너 개가 되었고, 통역을 통한 협상이다 보니 한 업체와 협상하는 데만 보통 두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공장 건설도 예상보다 느리게 진행되었고 투자 측의 투자자금이 제때에 조달되지 못하여 장비의 구매 대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하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게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또한 한국에 발주를 낸 장비들도 계획보다 늦게 선적되어 생산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공장이 가동되었다. 남 이사도 중국으로 왔고, 익태그룹에서 파견한 재무총감과 연구소에서 파견한 영업 부총경리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각자의 이익을 대표한 이들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1) 시장 문제: 한때 호황을 누리던 국제반도체시장이 공장이 준설되던 2000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제품 가격이 폭락하여 공장이 가동된 후 한국에서 원자재를 100% 수입하여 제품을 전량 수출하는 OEM방식으로는 전혀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때문에 원자재의 현지 조달과 중국 내수시장의 개척이 급선무로 떠올랐고 이로 인하여 중국 측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2) 기술 문제: 보통 신규 생산 장비는 가동 뒤 약 반년 간의 셋업(SET UP)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많은 생산 장비는 생산업체에서 기술자를 3~4번씩이나 파견하여 정비하게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생산을 할 수 없었기에 이는 여러 측의 오해와 불신을 야기했다.

(3) 자금 문제: 경영자금이 부족하여 투자 측에서 증자를 해야 하였는데, 그것이 잘 안 되어 총경리가 매일 재무 총감을 찾아 회사 운영자금을 해결하라고 들볶았다. 통역인 나만 중간에 끼여 ‘미운 털’이 되는 셈.


(4) 통관 문제: 우리 회사는 별로 무게가 안 가는 부품은 인편이거나 혹 DHL 등 국제 특송을 이용하였는데, 이중에는 꽤 가격이 있는 물품도 있었다. 이런 비싼 물품들은 세관의 규정에 의하여 세금을 내고 통관하여야 하였는바, 우리 회사 측에서 세금을 적게 내려고 가격을 시세보다 퍽 적게 신고하다 보니 수차 재신고하여야 통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발생하다 보니 우리 회사는 중국 세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었고 조금 의심 가는 물품은 가차 없이 ‘통관 통지서’가 날아왔다.


어려운 회사, 힘든 업무였다. 회사의 현실도, 미래도 암담했다. 한국으로 2차 연수생들을 파견하려던 계획이 비록 초청장까지 받았으나 공장이 곧 가동됨으로 취소, 합자기업에서 적용하려던 고임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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