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제15회 실무한국어시험을 보고나서

"이 많은 사람 한국에 널리면 어떻게 될까?"

4월 19일 오후 2시, 길림대학부속중학교에서 실무한국어시험을 보게 되였다. 소학교 교원인지라 방문취업이 목적이 아니라 방문취업사증을 따놓으면 방학간에 한국에 드나들기 편케 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 20분이 좀 지나 시험장에 도착하니 학교마당은 시험치러 온 각지 조선족들로 바글바글하였다. 얼굴이 뙤약볕에 탄듯한 그들을 보는 순간 나는 우월감을 느꼈다.

시험장마당에서 나는 이전에 가르친 학생의 학부모도 만났는데 나보고 시험감독하러 왔느냐고 묻는다. 좀 부끄러웠다. 나때문에 그들이 한국에 갈 기회가 적어질가봐.

오후 1시 30분이 되여 나는 밀물처럼 밀려들어가는 인파속에 끼여 거의 밀리다싶이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많은 사람들이 다 한국에 널리면 어떻게 될가?》

《어떻게 누구나 다 한국에 가겠소?》 그들끼리 하는 말도 간간이 들려온다.

 촌티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시험장에

6층에 있는 시험장에 들어서니 촌티가 다분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앉아있다. 저도 몰래 가슴이 아파왔다. 한국에 가면 목돈을 벌수 있다는 꿈 하나로 그 많은 년세임에도 시험장에 온 그들이다.

또 젊은층들은 그래도 한국에 가면 중국에서 벌기보다 몇갑절 더 벌것이라는 확신감으로 시험장에 들어왔을것이다. 아마 누구나 다 시험만 치면 한국에 가 목돈을 벌수 있을거라고 생각할것이다.

오후 2시, 시험이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먼저 《보기》 시험을 쳤다. 시험감독선생이 시험지를 나누어주자마자 교실안은 사달이 나기 시작하였다. 20―30년만에 처음 쳐보는 시험인지라 수험증번호가 무엇인지, 어떻게 어디에 쓰는지 깜깜이다.

나는 원래 《싱거운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감독선생에게 이분들이 처음으로 시험을 치는거니까 앞에서 아예 설명을 해주라고 부탁했다.

감독선생은 길림대학의 석사연구생이였다. 감독선생이 한족인지라 한족말로 설명하니 연변사람 특히는 로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기실 그때 나는 내가 직접 앞에 나가서 설명해주고싶었지만 잘난척 하는것 같아보여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참았다.

물어보면 그냥 답안을 막 불러주고싶은 심정

《보기》시험은 60개 문제였다. 나한테는 식은죽 먹기였다. 앞에 앉은 아저씨, 옆에 앉은 매하구에서 온 할머니, 뒤에 앉은 훈춘에서 온 할머니, 그 뒤에 앉은 연변아줌마,  그 옆의 처녀애까지 누가 물어봐도 하나하나 답을 알려주었다. 아니 그냥 답을 막 불러주고싶은 심정이였다.

자식들이 모두 한국에 가있어서 그냥 구경삼아 한국에 가보려고 시험치러 왔다는 훈춘할머니는 시험치자니 손이 떨린단다. 내가 아예 돌아앉아 답을 보여드렸다. 틀린 문제가 있으면 고쳐주면서.

이 시각 나는 멀리 광주에까지 가서 시험을 보고있는 아버지가 어떻게 시험답안을 잘 쓰고있는지, 60세가 다 된 년세에 필을 쥔 손이 떨리지는 않는지 걱정되였다. 한국에 가보겠다고 그 먼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차를 타고 달려간 아버지, 그 뒤모습이 가슴아프게 안겨온다.

오후 3시 35분, 《듣기》시험이 시작되였다. 듣기문제는 30문제였다. 듣기는 록음기에서 한문제를 두번씩 읽는데 그 시간이 꽤 길었다. 여유가 있어 나는 듣기문제를 풀면서 동시에 그 뒤의 읽기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듣기 17, 18번 문제를 풀 때였다. 17, 18번부터는 한문제를 듣고 두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문제의 요구를 잘 듣지 않은 분들이 문제가 틀렸다고 야단을 친다.

감독선생은 나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맞다》고 하자 그냥 그대로 지나갔다.

듣기문제가 끝나자 나는 읽기 24개 문제도 다 풀었다. 남은 기초소양문제 6개 문제도 다 풀고나니 시간이 40분가량 남았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아예 첫문제부터 나의 답안을 베낀다.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 한국 가 수모 당할가봐 걱정

문제를 다 풀고 남은 시간동안 나는 무언가를 적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을것 같았다. 《한국에 가면 꼭 뭉치돈을 벌어오게 될가? 돈이 뭐길래 뻔히 고생길인줄 알면서도 가지 못해 아득바득할가.》

3년전, 나는 겨울방학을 타 한국에 가서 한달 반가량 머문적이 있다. 중국조선족이라고 던져오는 이상한 눈길들, 그래도 난 교원이라는 자부심으로 견딜수 있었다.

하지만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분들이 한국식영어를 우리 말처럼 많이 쓰는 한국에 간다면 어떤 수모를 당할것인지 생각하니 참 가슴이 아팠다.

오후 5시 5분 시험이 끝나 신분증을 돌려받고 나오려는데 뒤에 앉은 훈춘할머니는 운이 좋아 나를 만났단다. 옆에 앉은 매하구할머니도 감사하단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저녁밥을 사주겠단다. 내 덕분에 시험을 잘 치게 되였다면서.

나는 그저 그들에게《한국에 순조롭게 가서 돈을 많이 벌어오세요》라고  인사하면서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장밖에서 자기가 앉아온 뻐스를 찾아헤매는 조선족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한국행이 괜히 걱정된다. 자기가 앉아온 뻐스도 제꺽제꺽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어떻게 할런지...

길림신문/ 리옥희(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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