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애 와 업적


▶ 백야 김좌진장군은 어떤분인가?


아마도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왜군을 무찔렀다면 김좌진 장군은 우리네 현대사에 있어서 일본침략군을 무찔러 이 민족의 사기를 드높인 분이라 할 수 있다. 장군의 역사적 위치는 높고 높다.
우리 나라는 조선5백년 동안 문인만 우대하고 무인을 홀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되기를 싫어하고 심지어 수치스럽게까지 생각하였다. 요즘에 고시에 일생을 걸 듯이 조선시대 선비들은 문과시험에만 매달려 일생을 망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문약(文弱)에 빠진 나라에서 영웅이나 장군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본에서는 상무 정신을 길러 무강(武强)한 나라로 발전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또다시 강대국이 되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갔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이 사실을 모르거나 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 우리는 왜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해주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끝내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도 후손들에게 "너희는 절대 나와 같은 무인이 되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 나라에 장군이 나타날리 만무했고 영웅호걸인들 당쟁으로 인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영웅이란 무인이지 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이 기적적으로 나타났으니 이가 바로 백야 김좌진이었다. 불모의 땅 한국에 김좌진 장군이의 등장한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우리 민족은 또다시 영웅이여 나오라고 목매어 소리쳤다. 아무리 3찬민 민족이 소리높이 만세를 외쳐도 독립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 문인들은 열강의 동정에 호소하여 독립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자기 힘으로 쟁취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처럼 영웅을 필요로 할 때가 없었는데 마침내 김좌진(1889-1930)이란 이름의 장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김 장군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이었다. 홍성은 옛날부터 영웅이 많이 나타났던 곳이다. 고려시대의 최영(崔塋 1316-1388)장군이 태어 나셨고, 조선시대의 이순신(1545-1598)장군은 홍성에서 자라셨으니 김좌진 장군의 등장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홍성에 영웅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 보여 이웃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그 하나는 나이 불과 17세에 자기 집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준 일이다. 다른 하나는 80칸이나 되는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자기는 초가집으로 나가 산 일이었다. 김 좌진 장군의 집터는 지금도 홍성의 갈산 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는데 가서 물어보니 갈산고등하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묻고 싶다.

김 장군 자신은 어려서 서당 공부를 했고 16세에서 18세까지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 다른 정규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의 글씨는 다른 어느 문인보다 뛰어났고 학식 또한 높았다. 문무를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불과 19세에 「한성신보」라는 신문사의 이사가 되었고 오성학교 교감이 되었다. 그리고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하여 애국교육운동에 나섰다. 그러니 김좌진 장군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문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일 1910년의 망국이 없었다면 김좌진은 장군이 안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기둥은 기울고 있었다. 교육이나 언론만으로 나라를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무력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하였다. 무관학교를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2년 6개월(1911-1913)의 옥살이를 하여야만 하였다. 이때 김좌진은 사내 대장부에게 있어 실패란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志士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좌진은 이 같은 시를 짓고 뜻한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에 가입하여 북간도로 건너 간 것이다. 김좌진은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1918년 12월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군정부軍政府의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이 되었다. 마침내 김좌진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겠다는 필생의 숙원사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고 동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라는 이름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바꾸어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가 지원해 준 돈 1만원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 스스로 교장이 되었다.

1920년 9월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고 이어 일본침략군과 청산리에서 독립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이 때 홍범도 장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였으니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독립군은 북간도를 떠나 낯선 시베리아 땅으로 가야만 했다. 김좌진은 처음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과연 소련 공산당의 독립군 원조는 속임수였다.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무사하였으나 다른 많은 독립군은 소련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다시 간도 땅을 밟은 김좌진은 옛날 우리의 발해 수도였던 영고탑(발해진)에서 신민부新民府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하여 새로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웠다. 김좌진은 칠전팔기, 쓰러지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는 교포사회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주석主席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이란 자가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향년 41세. 아직도 많은 일을 남겨 둔 채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이처럼 억울하고 분한 일은 다시 없었다. 장군의 장례식은 그 곳 교포들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루어졌다. 우리 교포는 물론 중국사람들까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통해 했다. 광복 후 장군의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훈장 중장을 수여하였다.




▶ 선비의 고장 홍성


김좌진 장군의 짧은 41세 생애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장기(1889-1907) 둘째는 애국계몽활동기(1907-1910) 셋째는 항일독립투쟁기(1910- 1930)이다. 이 중에서 가장 분명치 않는 시기가 성장기와 애국계몽운동기이다. 김좌진의 성장기 행적을 보면 너무나 조숙하여 과연 사실인가 아닌가를 의심케 한다. 또한 김좌진을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홍성에서는 志山 金福漢(1860-1924)선생에게 배웠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애국계몽기에 대해서도 분명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는데 이 같은 자료상의 결함은 장군의 비극적인 최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1. 선비의 고장, 홍성

지금 홍성에 들어서면 먼저 김좌진 장군의 동상을 우러러 보게되고 홍주의사총을 참배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시내에 들어서면 조양문과 옛날 홍주군아 건물과 읍성이 손님을 반긴다. 이것만 보아도 홍성은 보기드문 역사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충남 홍성군에는 유명한 임존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 의병군이 신라와 당나라 침략군과 맞서 싸운 유서 깊은 역사 유적이다. 고려 때에 와서도 홍성은 몽고와 왜구의 침략군을 맞아 끈질기게 저항한 고장으로 유명하다. 고려말에 요동정벌을 주장한 최영(崔塋 1316-1388) 장군도 홍성 사람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명을 어기어 위화도회군을 감행했기 때문에 최영 장군은 우리 역사에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나 장군의 높은 기상은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홍성이 명실 공히 '호서의 거읍巨邑'으로 발전하는데 첫째 호남(전라도)에 버금가는 곡창지대로서 둘째 관북(평안도)에 못지 않은 군사 요지로서 한층 중시되기에 이른다. 지금도 의연하게 서있는 홍성의 조양문朝陽門 <신건기 designtimesp=14081>에는 "홍양성은 충주 53읍 중 가장 중요한 고을"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19세기말에 일제 침략이 있게 되자 제일 먼저 홍성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1860-1924),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1833-1906)이 한말 의병전쟁을 주도한 두 인물인데 모두 홍주 출신이다. 백야 김좌진은 바로 지산 김복한 선생에게 배웠다고 하니 홍성에서 김좌진 장군이 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홍성인인 작가 김동리金東里(1913-1995)선생은 "홍주인은 충청도를 대표한다"고까지 말한바 있다. 흔히 충청도를 양반의 고장이라 하는데 바로 홍성을 두고 말한 것이다. 홍성은 들이 넓어서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고 고루 모두가 양반인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선비 정신이 투철했던 것이다.




▶ 김좌진의 성장기


김좌진의 안동 김씨 가계를 보면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을 고집했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형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그의 11대 조부였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을 맞아 주화론을 폈던 최명길崔鳴吉(1586-1647)에 대항하여 끝까지 적과 싸워야한다고 주장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기상이 우리 민족사에 기리 남아 있는데 그 형인 김 상용은 아우인 김상헌보다 더한 강경파였다. 그는 서울에서 태자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가게 되었는데 강화성이 청군에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루南門樓에 저장해 두었던 화약 상자에 불을 붙여 자결, 순국한 분이었다. 김좌진의 핏줄에는 이런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반골 기질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집안 살림은 넉넉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아버지 밑에 자라지 못하는 아이를 흔히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손가락질하였다. 김좌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대신에 할머니가 아버지 못지 않게 손자를 엄하게 길렀다. 김좌진의 무서운 할머니는 손자에게 매일 꼭 한가지 해야할 일을 가르쳤다. 그것은 집안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다 종이를 붙여놓고 하루에 한번 반드시 주먹으로 치라는 것이었다. 어린 김좌진은 그 이유를 몰랐으나 그의 주먹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커서야 알게 되었다.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마을 아이들을 데리고 말타기. 활쏘기, 병정놀이를 하곤 했는데 그 때 반드시 김좌진이 대장노릇을 했고 김좌진이 대장기를 만들어 「억강부약抑强扶弱」(강자는 누르고 약자는 돕는다)이란 글을 썼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하루는 김좌진이 마을 어린이들과 같이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데 진짜 의병군이 나타났다. 때는 1895년 전국에 단발령이 선포되어 전국에 을미 의병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김좌진의 나이 겨우 여섯 살 때였다. 의병대장이 꼬마 병정들을 보고 묻기를 "너희들 가운데 누가 대장이냐"고 하였다. 그러자 "내가 대장이요."라고 김좌진이 나섰는데 깜찍하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쟁 놀음하기는 어르신네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를 깔보지 마시오"


이 말을 들은 의병대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 너희 대장기나 한번 보자. 무엇이라고 썼나" 하고 더 이상 나무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사건이 하나 발생하고 말았다. 의병들이 단발한 김석범을 발견한 것이다. 김석범은 김광호 선생의 조카로서 제 빨리 머리를 깎아 개화정책에 동조했던 것이다. 의병대장이 김석범을 보자 "이 아이를 잡아 처형하라"고 호령했다. 위기일발 바로 그 때 꼬마대장 김좌진이 나서드니 "이 사람은 내 형이요"하면서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물론 형도 아닌 남이었으나 김좌진은 이미 이 때부터 대장부 기질이 있어 자기 삶을 만드는데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단발령은 일제의 강압으로 단행된 것이어서 의병들이 머리 깎은 사람을 보면 모두 친일파로 몰아 처단했다. 김좌진이 김석범을 구명한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벌써 나라 형편이 수구守舊만으로는 안 된다. 개화開化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석범을 형이라 속여 그를 살려냈던 것이다. 김석범은 그 뒤 김좌진이 서울로 가고 없는 동안 감좌진을 대신하여 호명학교를 관리, 운용하는데 협력하였다.

김좌진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담력이 컸다. 어른들도 혀를 두를 정도로 대담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4살부터 서당 공부를 하였는데 송노암이라는 서당 선생이 툭 하면 회초리를 들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무서워서 떨기만 했는데 김좌진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김좌진은 선생이 읽고 있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란 책장 속에 "선생님은 죽습니다(先生死) 김좌진"이라 쓴 쪽지를 끼워 넣었다. 선생은 이 글을 보고 놀랐으며 김좌진이 쓴 글대로 얼마 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다음에 김광호金光浩 선생이 새로 부임하였다.

어느 날 김광호선생 인솔하에 소요암逍遙庵에 놀러 갔다. 암자 안에는 5백 나한羅漢상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김좌진이 그 중 하나를 내동댕이 쳐버렸다. 이것은 절에서는 큰 사건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드라도 용서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소요암의 주지 스님은 화내지 않고 어린 김좌진에게 "나중에 네가 크면 나한 님 하나를 사주어야 하네" 라고 하면서 용서하였다. 그러면서 스님은 미안해하는 김광호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애는 나중에 커서 반드시 영웅이 될 것입니다. 내 일찍이 이렇게 무서운 아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김좌진은 절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벌에 쏘여 자칫하면 죽을 번하였으니 불상을 훼손한 대가를 치른 셈이 되었다.

김좌진은 본래부터 체력이 강인하여 놀라운 괴력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몸까지 무척 날쌔어 동네 사람들이 그를 '비호'(나르는 호랑이)라 부를 정도였다. 김좌진이 10세 때 일인데 황소의 뿔을 쥐니까 황소가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이런 괴력의 소유자가 김좌진이었기 때문에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거기다 김좌진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숙했다.

김좌진이 12세 때 일이었다. 형인 김경진(21세)이 서울로 양자 가게 되어 차남인 김좌진이 가계를 맡게 되었다. 홍성에서도 이름난 부자 집이라 그 큰살림을 어린 김좌진이 과연 잘 맡아 갈지 의문스러웠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는 너무 조숙하여 어린이가 아니라 이미 어른이었던 것이다.

15세 되던 해였다. 당시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어린 김좌진이 해내고 말았으니 그가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한 것이다. 김좌진의 집안에는 50명이나 되는 노비가 있었다. 어느 날 김좌진은 집안의 모든 가족과 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푸짐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갑자기 노비 문서를 태워 " 당신들은 오늘부터 다 자유인이다"고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2천 석이나 되는 소출의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해 주었다. 이처럼 김좌진은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노비 해방과 토지개혁을 한꺼번에 해치웠던 것이다.

김좌진은 16세 때 처음으로 상경하게 되는데 부인 오씨가 한사코 함께 간다고 해서 부인을 가마에 태워 서울로 떠났다. 그 때 이야기다. 서울 가자면 대호지大湖池라는 큰 호수 가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 곳은 자고로 도둑이 많기로 유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산적들이 나타나더니 가마에 탄 오씨 부인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가마를 매고 가던 교군꾼들은 겁에 질려 저항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한 발작 늦게 도착한 김좌진이 말을 타고 달려 왔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김좌진이 도적을 번쩍 들어 땅에 내던져버렸다. 이 괴력에 놀란 산적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김좌진을 바라보았고 땅에 떨어진 산적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좌진이 이렇게 소리 쳤다.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냐. 나라가 망해간다고 하는데 할 일이 없어서 불한당 노릇을 한단 말이냐. 내 너희 소행으로 보아서는 모조리 박살을 낼 것이로되 너희도 나와 한 핏줄을 이어받은 배달의 자손이니 용서하기로 한다. 양심이 있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돌려 동족을 괴롭히지 말고 옳은 길을 가거라. 그리고 저기 죽은 놈은 장례식이나 치뤄 주라"


고 하면서 돈을 던져 주었다. 그런데 이때 도적들 가운데 김좌진에게 감화를 받아 뒷날 광복단(光復團)이라는 독립운동 비밀결사에서 김좌진과 같이 일한 사람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 온 김좌진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에는 육군무관학교(삼청동) 육군유년학교(종로 4가) 그리고 육군연성학교(경복궁 동편의 육군통합병원 자리) 등이 있었는데 김좌진이 입학한 학교는 육군무관학교였다. 이 학교는 1896년에 설립된 2년 제 초급 무관양성학교였다. 과목은 응용작업, 술과, 기술 등이었다. 이 학교에는 뒤에 함께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노백린(盧伯麟)이 '호랑이 교관'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이 무관학교에 입학한 해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해여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서울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의 서울은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의 열풍으로 달아올랐던 때였다. 그래서 김좌진은 그 영향을 받아 교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가 사업이라 확신하였다.



▶ 김좌진과 애국계몽운동


1907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좌진은 다시 향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랄 일을 해냈다. 이 때 김좌진의 나이 겨우 18세였는데 호명학교(湖明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호명학교라는 교명은 '호서湖西 지방(충청도)를 밝게 한다 즉 개화한다'는 뜻이었다. 충청도는 양반의 고장으로 가장 보수적인 지방이었다. 그런 충청도를 18세 소년이 개명하겠다고 나섰으니 대견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교사를 짓자니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김좌진은 자기 집을 학교교사로 삼고 자신은 협소한 집으로 이사해 갔다. 다행히 김좌진의 집은 커서 90칸이나 되었다. 그 때 90칸이라면 일반 민가로서는 가장 큰 저택이었다. 그는 그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집을 학교 교사로 쓰인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인재의 육성에 이 정도의 고생이 따르니 않고서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 살리는 길은 오로지 교육입국에 있다고 믿습니다."


1908년 19세 때 다시 상경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중구 가회동嘉會洞 막바지 취운정翠雲亭 부근에 있는 초가삼간이었다. 그후 1910년 나라가 망하기까지 약 2년 동안 서울의 여러 애국지사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함께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먼저 김좌진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신학문 교육운동을 벌였다. 기호흥학회는 1908년 초 서북학회, 관동학회, 교남학회 등과 같이 충청, 평안, 강원, 영남 등 지방별로 애국교육운동을 벌인 단체로서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양성하고 서울에 학생을 유학시키는 등의 사업을 벌였고 월보를 발행하여 대중운동을 펴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김좌진이 한성신보漢城申報 이사에 임하고 대한협회에 가입,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교육운동에 나섰다. 서울의 오성학교는 평양의 오산학교, 간도 용정의 명동학교와 같이 이 시기의 뛰어난 사립학교였다. 오성학교는 또 장도빈(1888-1963), 황의돈(1887-1964) 같은 역사학자가 재직했던 학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으로서는 이 같은 소극적이고 먼 장내를 보고 눈앞의 국난을 외면하는 운동은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사실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지경, 아니 이미 망한 상태인데도 단순한 언론이나 교육 같은 소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을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력으로 일제침략자를 몰아내야 한다고 믿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4월초 극비리에 결성되었는데 주동 인물은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1930)는 이름난 실력양성론자였다. 먼 훗날을 내다보자고 주장하는 온건파 독립운동자, 한국의 간디였다. 신민회라는 이름도 그가 지었다고 하는데 창건위원 속에는 안창호 이외에도 양기탁(1871-1938), 전덕기(1875-1914), 이동휘(1873-1935), 이동녕(1869-1940), 이갑(1877-1917), 유동열(1877- ?) 등 적극적인 독립전쟁파 인물들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대로 신민회의 성격이 단순한 애국계몽운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노선에 불만은 표시하는 인사가 늘어나서 신민회도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강화되어 갔다.

당초에 신민회가 조직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1907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자 그 맥을 잇기 위해 겉으로 대한협회가 다시 조직되었으나 이미 일제에 은밀히 매수된 단체였다. 그래서 신민회가 진정한 의미의 대한자강회 후신으로 결성된 비밀단체였다.

대한자강회라고 할 때의 자강自强이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교육을 진작하고 식산殖産을 흥업하여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국민들의 조국 정신(자주 정신)을 길러야 하며 밖으로부터는 문명과 학술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신민회 안에서는 나라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시국에 있어서 더 이상 교육이나 산업만 가지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군사력을 길러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는 인사가 많이 나타났다. 7인 창건위원 가운데 이동휘, 유동열 같은 사람은 특히 무투파武鬪派에 속했다. 젊은 김좌진 또한 정통 무장투쟁파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강의 다른 한 가지 뜻은 군사적 자강이었다. 김좌진도 자강의 뜻을 군사적인 자강 없이 진정한 자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즉 그 나라가 무강武强해야 스스로 강하다 할 수 있지 문약文弱하고서야 강한 나라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5백년 동안 문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두 번 다시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라도 군사력을 길러야 한다. 독립군을 길러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요원을 길러야 한다. 군사 요원을 기르기 위해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 건너의 간도 땅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고 교육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을 것이다."


이 회의를 청도회의靑島會議라 하는데 그 결과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뒤 신민회보다 더 강경한 비밀결사가 국내에 조직되었으니 곧 대한광복단이었다.


▶ 김좌진과 대한광복단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1919년의 3.1운동이 있기까지 일제는 사상유례 없는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이 10년간을 일제의 무단통치기(일명 헌병경찰정치)라고 하는데 일종의 계엄령 치하의 공포 정치였다. 일체의 결사와 집회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말았다. 입과 귀를 막고 손발까지 묶어버린 것이다. 실로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는 암흑시대였다. 1백 리마다 감옥이요 3인 중 한 명이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는 3천리 강산을 감옥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일제의 이 같은 통치가 얼마나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나라 밖의 국제 정세를 보면 곧 알 수 있는 것이다. 국외에서는 이 10년 동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1911년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이어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또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1918년에는 세계대전이 끝나 민족자결의 대원칙에 따라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와 같이 1910년대는 세계정세의 대전환기였다. 그런데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마치 노예국가와 같이 다루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강행하였으니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악명 높은 포르투갈식의 식민통치를 조선에 적용 이 겨레를 쇠사슬에 묶어 철창 속에 가두었고 산과 들 그리고 식량까지 모두 빼앗아 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비밀결사 운동을 벌였으니 국외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군자금을 거두어 이들 독립군을 지원하였다.

김좌진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기로 하고 족질인 김종근을 찾아갔다가 경찰에 잡혀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김좌진이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 것이 1913년 9월이었다. 이 때 김좌진이 지은 시가 있다.


"사나이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구차하게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릴 것이다.
(男兒失手難容地 志士潤生更待時)"


김좌진이 감옥에서 나온 뒤 불요불굴의 의지를 시로서 나타낸 것이다. 김좌진이 감옥에서 나온 이듬해 제1차 세게 대전이 일어났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는 두 개의 큰 지하단체가 극비리에 조직되었다. 무단통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광복운동을 계속한 사람들의 주류는 과거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신구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조직한 단체는 두 개였는데 그 하나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였고 다른 하나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었다. 앞의 독립의군부는 1906년 최익현과 함께 호남에서 궐기했던 임병찬林炳贊이 주도하였고 대한광복단은 1908년 서울탈환작전을 지휘했던 왕산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 주도하는 경상북도의 의병들의 비밀단체였다.
김좌진이 가입한 단체는 후자, 즉 대한광복단이었다. 이 단체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채기중蔡基中(1873-1921)의 「광복단」과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박상진朴尙鎭(1884-1921)의 「조선국권회복단」이 연합한 단체였다. 즉 1915년 음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합회의를 열어 발족된 비밀군사단체였다.

김좌진이 가입한 광복단의 조직을 보면 박상진이 총사령, 이석대李奭大가 부사령이라는 군대식 이름을 부쳤으며 창설 직후 부사령 이석대와 김좌진을 간도로 파견하여 독립군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석대가 애석하게 전사하자 1917년 김좌진이 대한광복단 부사령직을 맡았다. 이때 김좌진의 나이 28세였으니 젊고 젊은 청년기였다.

대한광복단은 당초 계획하기를 국내에 100개 지부를 두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여 군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처럼 일제히 혁명을 일으켜 대한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광복단원 2백명의 서약서를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비장한 각오로 가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한의 독립된 국권을 광복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바친다. 만일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자자손손에 걸쳐 원수 일본을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내기까지 한 마음으로 진력할 것을 서약한다."


대한광복단의 투쟁방법도 신민회 같이 온건한 것이 아니었다. 단원들의 행동강령은 한 마디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이었다. 뒷날 김원봉金元鳳(1898-1958)의 의열단義烈團(일명 義血團)처럼 무서운 항일 단체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안창호의 신민회 성격과는 천양지차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 포 고 문 -
우리 4천년 종사는 잿더미가 되고 우리 2천만 동포는 노예가 되었다. 일제의 학정이 날로 가중되고 있는 이 때에 조국을 회복하려 함이 본회의 설립 취지이다.
동포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우리를 후원하라. 각 자산가는 미리 저축하였다가 본회의 요구에 따라 의연하기를 바란다. 만약 본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본회의 요구에 불응할 때에는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이다.



이 고지서를 받고 돈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제에 밀고하는 친일 부호가 있어 마침내 이들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광복단이 처단한 부호는 다음과 같다.

장승원張承遠(경상북도 구미)
박용하朴容夏(충청남도 아산)
양재학梁在學(전라남도 보성)
서도현徐道賢(전라남도 낙안)



이와 같이 대한광복단은 1917년을 기해 무서운 의열 단체로 변신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이듬해인 1918년 박상진, 채기중 등 광복단 수뇌부가 일제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순국하였다. 김좌진은 다행히 압록강을 건너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고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김좌진과 무오독립선언


1917년 겨울 어느 날, 김좌진은 늙으신 어머님 앞에 엎드려 고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 잘 갔다 오라"고 하시었다. 압록강 철교를 눈물을 머금고 건넌 김좌진은 곧바로 서간도西間島로 달려갔다. 당시의 창가로 「깊이 생각」이란 노래가 있다.

- 깊이 생각 -
슬프도다 민족들아 우리 신세 슬프구나 / 세계만국 살펴보니 자유활동 다 하건마는 / 우리 민족 무삼 죄로 이 지경에 빠졌는가 / 날고기는 짐승들도 몸담을 곳 다 있건마는 / 우리들은 간 곳마다 몸 부칠 곳 없고 보니 / 가련하다 이 신세를 어이하면 좋단 말인가. / 사랑한다 청년들아 아무 염려하지 말고 / 너의 마음을 안심하여 앞의 길을 내다 보라 / 등뒤에는 범 따르고 발 뿌리에 태산준령 / 낙심하여 쓸데없다 아니 갈 길 못되나니 / 죽을 지경 당한 민족 분발 심을 뽐내어서 / 태산준령 헤친 후에 탄탄 대로 행해가세



당시 압록강을 건너가던 사람들은 모두가 이 노래 가사와 같이 생각하면서 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노래 「청년의 의무」의 가사와 같이 기어이 조국을 되찾고 말 것이라는 각오를 다짐했을 것이다.

- 청년의 의무 -

청년들아 청년들아 신 대한국 청년들아
4천년 조국 정신 갖기 위하여 죽고 삶을 같이하자 맹약이로다.
후렴) 대한제국 청년들아 우리 원수 누군가 언제든지 잊을 소냐 피를 흘려 갚고야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이다. 정확히 말해서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란 곳으로 간 것이다. 이곳에는 이상룡 일가와 이회영·이시영 형제가 건설한 독립군 기지가 있었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로 구분되는데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 북간도는 두만강 대안으로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한다. 김좌진은 먼저 서간도를 둘러본 것이다.
서간도의 삼원보에는 유명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에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요 고향이 충남 홍성인 이세영李世永이 교장으로 있었다. 김좌진의 선배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김좌진은 발길을 북간도 길림성으로 돌렸다. 그 곳에서는 애국지사들이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온 세계에 발표하려하고 있었다. 이것이 곧 1918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일명 무오戊午독립선언서)였다.


슬프다.
일본의 武褻이여!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이념은 동양평화의 정신에 있었는데 이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대한독립선언문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 독립정신의 핵심은 최익현이 말한 삼화정신三和精神과 안중근이 제창한 동양삼국평화東洋三國平和의 정신이었는데 대한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위의 구절은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1918년 11월, 조소앙의 글)는 그 뒤에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1919년 2월 8일, 이광수의 글)이나 서울에서 발표한 3.1독립선언서(1919년 3월 1일 최남선의 글)보다 앞서서 발표된 선언문으로 매우 중요한 선언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 글 내용이 완전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일제 침략자를 몰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독립선언문은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털끝 만한 권리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고 우리강토의 한치 땅도 이민족이 점령할 수 없으며 한 사람의 한국인도 이민족의 간섭을 받을 의무가 없다. 우리 국토는 완전한 한국인의 한국 땅이다. 궐기하라 독립군아.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세계)를 바르게 하라. 한번 죽음은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니 남의 노예가 되어 짐승 같은 일생을 누가 바라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가 다 부활하는 것이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


이와 같이 대한독립선언문에는 독립전쟁에 의한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간도의 독립군 정신을 가장 잘 들어낸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인사는 김교헌金敎獻, 긴동삼金東三, 조소앙趙素昻, 여준呂準, 박은식朴殷植, 이상룡李相龍, 이동영李東寧, 신채호申采浩, 김좌진金佐鎭, 이승만李承晩, 서일등 39명의 해외 독립운동자가 망라되어 있었다.



▶ 김좌진과 북로군정서


그런데 어느 날 북간도에서 김좌진을 찾아 온 밀사가 있었으니 서일徐一(1881-1921) 장군이 보낸 것이다. 서일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귀의,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김좌진과 서일, 두 장군의 만남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라는 우리 나라 근대사상 가장 큰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일 장군의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이천이었다. 열 일곱 살(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경성의 함일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1세(1902년)에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 이듬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때 나이 30세였으니 김좌진보다는 8세 위였다. 그 뒤 대종교를 포교하면서 북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보내준 군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1,5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일은 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우수한 교관을 물색하던 중 김좌진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두 장군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일 없이 김좌진이 없고 김좌진 없이 서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일의 「군정부」란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하여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동시에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짝을 이루어 간도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백취 현천묵白醉 玄天默( ? -1928), 김좌진은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먼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장교 양성에 힘썼다. 이로써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와 버금가는 사관양성소를 운영하여 1920년 6월 첫 졸업생을 냈던 것이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는 이미 1911년에 제1기 졸업생을 냈고 1920년 8월까지 3,500명이나 되는 졸업생을 내고 있어 단연 앞서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에 영입된 일본군 육사출신 지청천, 김경천 과 중국 운남육군 강무학교 출신의 이범석李範錫( 1900-1972)이 초빙되어 교관으로 활동하기까지는 사관학교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했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주요간부


총사령관 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대종교 육군무관학교
참모장 이장녕 (1881-1933) 충남 천안 대종교 육군무관학교
참모부장 나중소 (1866-1928) 경기 고양 대종교 육군무관학교·일본 육사
참모 정인철 ( ? )
사령관 부관 박영희 (1896-1930) 충남 부여 신흥무관학교
연성대장 이범석 (1900-1972) 서울 대종교 중국 운남성 육군강무학교
연성대 종군대장 이민화 (1898-1923)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주요간부
소 장 김좌진
교수부장 나중소
교 관 이장녕, 이범석,김규식, 최상운, 이천을, 윤창현, 전성호,
강승경, 강필립, 김관, 마츠커델, 김홍국.
학도단장 박영희
제1학도대장 최준형, 서리 오상세.

김좌진은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대포 소리 울리는데 / 온 누리 밝아오니 / 청구(한국) 옛 나라에도 / 물색이 새로우리
산영山營 달 아래 / 칼을 가는 나그네 / 철채鐵寨 바람 앞에 / 말먹이며 서 있네

중천에 휘날리는 깃발 / 천리에 닿는 듯 / 동하는 군악 소리 / 멀리도 퍼져가네

섶에 누워 쓸개 빨며 / 십년을 벼르던 마음 / 현해탄을 건너가서 / 원수를 무찌르세나



8동의 병영으로 구성된 사관양성소 건물은 울창한 수풀 속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다. 학생은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청년을 모집하여 6개월간 속성과정으로 가르쳐 졸업 시켰다.
교육과목은 정신교육· 역사(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사와 한일 관계사)·군사학· 술과(병기 조작법과 부대지휘 운영법)· 체조· 호령법 등 다섯 과목이었고 군사훈련은 대한제국 국군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군사훈련을 위해서 두 개의 연병장이 마련되었으며 사격연습 때에는 일본군의 모형을 세워 놓고 표적으로 삼았다.


김좌진 장군은 또 다음과 같은 한시를 남겼다.


칼 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임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刀頭風勁關山月 劒末霜寒故國心 三千槿域倭何事 不斷腥塵一掃尋)



이렇게 해서 1920년 6월 6일 6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각각 대대·중대·소대김좌진과 대한광복단로 편성하였다. 일개 소대는 50 명이었고 2개 소대를 합해서 1개 중대(100 명), 4개 중대가 1개 대대(400 명)가 되었다. 병사들은 노란 색 모자를 쓰고 백색 복장에 태극 휘장을 달았다. 얼핏 보아 일본군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이렇게 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총을 매어보기란 나라가 망한 지 10년만의 일이요 대한제국 국군이 해산 당한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비록 낯선 이국 땅에서의 일이었지만 일제와 맞서서 싸울 것을 생각하면 감격의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처럼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은 사관양성소 졸업생 6백 명을 기간 요원으로 하여 총 병력 1천1백 명에 달했으며 무기는 소총 8백정, 기관총 4정, 대포 수류탄 2천 발. 우마차 20량 등에 이르렀다.

북간도 일대에는 북로군정서 이외에도 신민단·군무도독부·광복단·국민회·의군부 등 모두 6개 단체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 여러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연합하는 문제가 절실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 5월 3일 제1차 통일회의를 비롯하여 2차 3차 회의가 열리었고 그 결과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모든 군사단체가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북간도뿐만 아니라 노령연해주의 독립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실로 어려운 일을 해 낸 것이었다. 통합된 독립군의 편성을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을 동도군정서東道軍政署,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을 동도도독부東道都督府, 그리고 서상열이 이끄는 노령 연해주의 독립군을 동도파견부東道派遣府.이라 했다. 이렇게 크게 셋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 김좌진과 신민부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김좌진은 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소련공산당의 수작이 의심스러워 부하 몇 명을 대리고 몰래 흑룡강을 건너 중국에 와 있었다. 그러나 경신참변으로 황폐 할대로 황폐한 동포사회에서 옛날과 같은 독립군을 재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군이 정착한 곳은 발해진 영고탑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독립군을 재건하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즉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한 것이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 맡았고 김좌진은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을 맡았다. 김좌진은 소속 독립군을 5 개 대대로 편성하고 역시 독립군 간부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정말 팔전구기 절대로 굴하지 않는 김좌진 정신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7년 신민부 본부가 일경의 기습을 받아 간부 12명이 체포당하는 일이 발생. 이듬해 해체하는 비운을 맞았다. 김좌진 장군은 그 뒤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여 모든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웬 일인가. 1930년 1월 24일(음력1929년 12월 25일) 오후2시 북만주 중동선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에서 박상실朴尙實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박상실의 배후에는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장군의 나이 겨우 41세 , 아직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을 많이 남겨두고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선생의 장례식은 전례 없이 성대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재만 동포의 슬픔은 두 말할 것도 없었고 중국인들까지도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들은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고려인의 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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