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사에 또 한 번 불행이 닥쳤다. 오늘 한국 헌정 사상 첫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자살이란 충격이 한국 사람은 물론, 700만 해외동포들과 세계민을 놀래 웠다. 가뜩이나 말썽 많은 한국정치의 후폭풍이 우려된다.

크리스천의 가치관으로 그의 충격적 사망을 동조하거나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믿는 사람은 자살을 동조하거나 제창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배반으로 본다. 그가 만약 어떠한 역경 풍파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자살이란 비극적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 사건에서 받을 교훈은 너무나 크다.
그의 유서엔(처음 발표 유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라고 고통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과거 전직 대통령들이 받은 액수에 비하면 적은 것은 분명한데, 자신이 평소 이야기했던 도덕성에 비춰 아마 강도 높은 검찰의 압박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한 학자의 말처럼“노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 이바지한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평가 받기도 전에 그와 같은 비극적인 결정을 했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말처럼” 그리고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이 직면하는 '비극'은 다른 대통령에게도 공통적인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깝다"는 논조도 설득력을 갖는다.

필자는 여기서 정치를 넘어 우리 동양문화권과 한민족의 열근성이 작용하기도 한다고 본다. 나라의 숨 쉬는 권력에서 오는 “뒤파도가 앞파도를 덮치는 끊임없는 순환”, 한때 조용히 왕관을 벗고 고향에 내려가 민초의 여생을 마감하겠다던 전 대통령이 오늘 비참한 시신으로 굳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 정치 풍토의 구조적 책임도 있다. 숨 쉬는 권력 앞에 더 벋치지 못할 모양이었다.

우리 민족의 가장 많이 부르고 자랑하는 “대표곡” “아리랑”이 생각난다. 이 아리랑의 노래 는 아래와 같이 크라이막스를 던지고 있다. “나를 버리고 떠나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리.”
노래의 앞뒤 문맥을 보아 분명이 사랑하던 사람끼리 사정이다. 그런데 갈라서면서 던진 분노, 분명히 보복적 사상을 반영한 열등의식의 발로로 얼룩진다. 우리 한민족의 대중은 물론 지도자들까지도 이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최근 년래 한류를 타고 쏟아내는 자랑 높은 한국역사 영화, 드라마들의 대부분 주제들도 파도처럼 뒤엎는 끊임없는 보복과 그로 인한 복수자의 승리묘사로 사회와 민족의 원을 달래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 문화에도 한 때 “눈은 눈으로 귀는 귀로…”의 복수의식의 팽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출현과 함께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바뀐다. 아가페적인 사랑과 용서로 보복의 낡은 율법사회의 막을 내리게 한다.

청교도와 기독교 문화로 출발한 미국 역사는 역대의 전직 대통령을 존중해 왔다. 미국동부에 가면 거연히 우뚝 솟은 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들과 전람관들이(비록 크고 작은 결함이 있더라도) 즐비하여 국민들이 역사기념, 지도자존중의 교육현장으로 되고 있다. 우리 한민족과 대한민국이 따라 배울 바라 생각된다.

독일 파시즘에 무고한 600만 혈육을 잃은 유대인들이 그 쓰라린 역사의 현장을 오늘 기념교육관으로 잘 차려 세세대대 보존하고 있다. 이보다 그들의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가 돋보인다. “쓰라린 역사에 보복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잊지 않는다!”는 철리로 개괄하고 있다.
우리 민족도 그리 할 수 없을까?

2009년 5월23일 오후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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