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부문(우수상)-이상기/인도네시아

대학에서 다섯 해쯤 시간 강사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에 시간 강사 노릇을 해서 생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통과 의례. 그랬다. 그때 시간 강사는 대학에 자리를 잡는 통과 의례 정도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햇빛을 보지 않고 견뎠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다지 않는가. 칙칙한 고치의 껍질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무지개보다도 황홀한 나비가 날아 올랐다지 않던가. 그러니 내일을 위해 참고 견뎌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서른 살, 나이도 나이인 만큼 현재보다는 내일에 눈이 쏠려 있을 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고달프기만 한 강사 생활도 어느 정도는 참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수선하고, 바쁘기만 하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던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강사료를 받았다. 칠만 이천 원! 한 시간에 육천 원, 한 주에 네 시간이니 한 주 늦게 시작된 3월 강사료 칠만 이천 원은 그래도 내가 한 달 동안 게으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산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공휴일이 끼거나, 결강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한 돈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칠만 이천 원은 그 액수보다는 앞으로 내 자신이 대학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첫 단계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 돈은 한 달 동안의 교통비며 강의 준비 등으로 지출된 돈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으므로, 게다가 나중에 겪은 일이기는 하지만, 새로 좋은 책이 나왔다는 교수님의 말씀이라도 있으면 그나마도 빈 봉투가 되기 십상이었으므로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미래를 약속하는 상징성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도 그 돈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내 자신의 용돈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의 시간 강사 노릇은 아내의 살림살이와는 무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대학에서 처음 봉투를 받았다는 것만이 나를 들뜨고 흥분시켜 주었다.

첫 봉투는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상징성도 있다. 그래서 나도 남들처럼 선생님을 시작하면서 처음 받은 봉투를 내복과 함께 사다 드린 적이 있었다. 그래선지 대학에서 처음 받은 강사료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랬는데도 나는 첫 번째로 받은 대학 강사료를 선뜻 아버지에게 내놓지 못했다. 다음에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면, 아니, 떳떳하게 대학 교수가 되어 두툼한 봉투를 내어 놓으면 되려니 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 돈이 흔적도 없이 한 푼 두 푼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이 될는지 몰랐다. 어쨌든 난 시간 강사 노릇을 해서 받은 첫 봉투를 아버지께 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말씀조차 꺼내지 못했다.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빈 봉투만으로 어떻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설령 그 돈을 드렸다 하더라도 당신께서는 그 봉투를 그냥 자식에게 돌려주셨을 것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신 아버지가 그것을 당신을 위해 쓰실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는 그저 마음만 기쁘고, 술주정하기에 좋은 ?거리?가 하나쯤 더 늘어날 뿐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그래 놓고도 그 때문에 내 생활이 더 풍족했다고 할 수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서 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 몇 푼 안 되는 돈은 흔적도 남지 않았는데 뒤늦게 후회했을 때에는 빈 봉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꼭, 틀림없이, 기어이 봉투를 아버지께 드리리라고 수없이 다짐하곤 하였다.

이번에는 그 얼마 안 되는 것이나마 꼭 아버지께 드려야지, 드려야지?라고.

그러나, 그러나…….

그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대학 강사료가 든 봉투를 아버지께 드리지 못했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한 치 앞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사마귀를 노리는 참새, 뒤에서 운명의 신이 목덜미를 잡아채려고 다가오는 것은 모르고 저걸 어떻게 맛있게, 폼 나게 먹을까 생각하는 허깨비가 바로 나였음을. 하찮은 욕심 때문에 뒤늦게 후회나 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면 그것도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 전해에 췌장암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는 그후 단 일 년을 버티시다가 내가 대학에 막 출강을 하던 오월에 아예 파촉으로 자리를 옮겨 앉고 마셨기 때문이다.

오월, 개망초, 싸리꽃이 산으로, 들로, 무성히, 무성히 피고, 미루나무, 참나무, 게으름뱅이 같은 대추나무, 감나무까지 여린 입술 같은 이파리를 오물거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기어이 그 슬프고 힘든 삶을 닫으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공연히 화내고 목청이나 돋우고 있을 때, 당신은 그렇게 쉽고 허무하게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어리석어라, 어리석어라. 이 말을 하는 것조차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또다시 오월은 심술쟁이마냥 가슴을 뒤집어 놓고 가는데, 나는 아버지 무덤 가까이에도 가지 못한 채 그저 먼 이역에서 안타까워만 한다. 아버지의 봉분 위로는 지금도 후회보다 서러운 하늘이 푸르게 푸르게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철쭉도, 개망초도, 싸리꽃도 내 어리석음을 비웃듯 더욱 무성히 피어 있을 것이다. 저수지의 물은 변함없이 설레고, 나무란 나무는 다시 삶의 함성을 기운차게 뽑아 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후회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서러움은 오월이 올 때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짙어 가는데.

아버지께서는 장가를 들인 못난 자식을 위해 버스를 서너 번씩이나 옮겨 타면서까지 무거운 쌀가마를 갖다주시느라 고생하셨다. 하기야 어디 쌀뿐이랴? 마늘이며 고추, 김장, 간장, 된장, 심지어는 고추장에 참기름까지. 그런 아버지께 죄송스러워 나는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쯤 일찍 정류장에 나갈 때가 많았다. 딴에는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먼저 오셔서 자식을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 두 시에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볼멘소리로 인사하는 자식을 아버지는 그저 웃으면서 이렇게 받으시는 거였다.

차가 빨리 와서 그랬지, 뭐. 한 시간쯤 됐을라나??

예? 한 시간이나요? 연락이라도 하시지.?

연락은 무슨 연락?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을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시작된 아버지의 짐 나르기 고생은 자식이 서른이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누구는 서른 살에 설 수 있었다는데, 그때까지 나는 어느 것으로도 설 수 없었으니.

그러나 그때는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바보? ?병신?이라며 입버릇처럼 자식을 야단하기는 하셨어도, 그 말이 자식에게 한 가장 가혹한 말일 정도로 따스하시던 아버지. 지금이라도 그 봉투를 드릴 수 있다면, 지금 다시 ?바보? ?병신? 소리를 듣더라도 내게는 그보다 그리운 목소리도 없을 것을.

췌장암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는 일 년 후 재발되어 다시 입원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다시 일 년 동안 길러 온 힘으로 덤벼드는 암덩이를 쫓아내실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우리 가족은 속절없이 암에게 지고, 의사에게서 ?객사시키고 싶지 않으면 퇴원하라?는 싸늘한 경고에 겁마저 먹고 서둘러 퇴원해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될 거면 진작 말해 줄 일이지.?

그래도 그렇게 의사가 무책임한 소리를 해도 되는 거야?? ?이제는 집에 가서 장례 준비나 하라고??

안타까움과 죄송스러움이 엉뚱한 말을 빌려 얼굴을 할퀴며 덤벼드는 것 같았다.

입원할 때보다 더욱 참담한 심정으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이제는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한다. 헛된 희망마저 빼앗기고 우리 가족은 택시를 대절하여 시골로 돌아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저 택시가 울퉁불퉁한 길을 덜컹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만 들릴 뿐. 그런 아버지에게 ?이젠 퇴원하랍니다. 집에 가서 치료하시면 된대요? 하고 거짓말을 했으니, 고개를 끄덕이시던 아버지께 죄송스런 마음이 울컥울컥 일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도 이미 아셨을 것이다. 자식의 말이 사실은 죽음을 준비하시라는 말임을.

한 달 전보다 훨씬 가벼워지신 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들어섰다. 안방 마루에는 먼지가 자욱이 앉아 있었다. 봄기운조차 시들한 것 같았다. 아버지를 마루에 내려 드렸다. 아버지는 마룻바닥에 앉으시면서도 신음 소리를 내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르시던 아버지.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시다가 고통에 주저앉은 마루에서 나는 아버지가 여든세 해 동안 변함없는 벗이었던 이 세상과 작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 평화로운 모습, 그 여유 있는 모습을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뵌 적이 없다. 그때 반짝이며 재잘거리던 미루나무며 강물, 풀꽃들과 바람, 서쪽 하늘로 서둘러 마중오던 노을까지. 아버지는 그들을 환한 미소조차 지으며 바라보고 계셨다. 고통에 절로 신음 소리를 흘리시던 아버지가 저렇게 의연히 세상의 손을 잡고 작별하실 수가 있다니.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일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저 미루나무와 작별의 말을 나눌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미루나무 잎에 부딪친 푸른 바람과 조각조각 부서진 햇살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광경은 눈물보다 아름다웠다고 나는 지금도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곤 한다.

방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나날이 더 큰 고통을 만나고 계셨다. 더 자주 약을 드셨고 몸은 놀랄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뼈와 가죽만 남기고 세상으로부터 받으신 것을 날마다 푸른 하늘로 띄워 보내시는 것 같았다. 방문을 열면 푸른 오월이 높은 옥타브의 소리로 생명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스스로를 세상에 돌려주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의 피부는 이미 노랗다 못해 갈색으로 변해 가는데 밖은 그야말로 오월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뽐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자연은 이렇게 서로 다른 준비를 하느라 서로에게 눈짓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이 과연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아니디아(인도어로 무상하다는 뜻)?라는 말이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사월에 방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당신 힘으로는 끝내 그 한 뼘밖에 안 되는 방문의 턱을 넘어 나오지 못하셨다. 허무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 앞에 이렇게 무력한 존재일까? 아버지를 모시고 당신의 유택을 찾아가는데,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에 어울리려고 했던 것일까? 세상은 온통 꽃구름 밭이었다. 싸리꽃은 무더기 무더기 흰 불꽃이 되어 빛나고, 개망초며 철쭉은 골짜기에 소란스런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이 쓸쓸해서 자연은 이렇게 화려한 꽃길을 마련해 둔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 가시는 길과 꽃 잔치가 대비가 되어서였는지, 마지막 자연의 배려가 고마워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이승에서 고생만 하신 아버지는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 계절 오월에 아예 자연 속으로 집을 옮기고 마신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도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셨다. 아버지 문상을 와서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던 두 사람.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놀림이나 받던, 나보다 두 살이 많던 병주는 장가도 가지 못하고, 다 커서도 늙은 어머니의 걱정거리였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나흘 만에 그도 갑자기 세상을 버린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버지와 연관시켰다.

?불쌍한 인간 그냥 남겨 두고 가시기가 뭣해서 데리고 가셨구먼.? ?그래도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신 분은 그 양반이니께.? 그런 뒷말이 오갔다. 또 한 분은 친구의 어머니였는데, 이상하게도 우는 소리가 상주인 내 가슴을 움켜잡기라도 하듯 처절했다. 그러더니 병주가 세상을 뜬 이틀 만에 서둘러 세상을 버리셨다.

저를 두고 왜 가셨어요.?

푸념하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았는데 모자라는 자식을 기르느라 마음 고생이 많으시던 분을 고생 덜하라고 아버지가 데려가셨다는 거였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참 따뜻하신 분이었으니께.?

지금도 사람들의 그 말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치레로만 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저 곳에 가셔서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로 남아계신 것은 아닐까? 그렇기를, 그렇게 살고나 계시기를.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떠난 사람이 어찌 ?천상 시인?이라던 ?천상병?뿐이랴? ?청산~리 벽계~수야~?밖에 부르시는 것이 없었어도 자식에게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시던 아버지, 당신이 바로 천상 시인이었던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자식에게 화나고, 세상이 버겁다고 느낄 때마다 내 자신을 꾸짖듯, 타이르듯 지껄여 보는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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