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부문(대상)-강갑중/미국

비둘기 한 쌍이 우리 집 발코니에 와서 어정거렸다. 녀석들은 우리를 자꾸 살피는 것 같더니 이내 모퉁이에다 둥지를 쳤다. 쌓인 눈 위에다 작은 나뭇가지 몇 개를 물어다 엉성하게 얽어 놓았다. 새의 둥지라기에는 너무 얇았다. 옆집 사람이 보고는 둥지를 내던져 버리고 비둘기들이 오지 못하게 쫓아야 된다고 말했다. 아무 데나 똥을 싸고 깃털을 빠뜨릴 것이며, 사람이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내어 밤잠을 못 자게 할 것이므로 이웃들이 불평할 것이라고 해 마음 쓰였다. 처음에 비둘기들이 조심스레 다가오던 것이 이미 여러 곳에서 배척당해 눈치를 보던 것이었다.

딴 동물들하고는 함께 지내면서, 다른 새도 아니고 평화의 새인데…….? 서운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둥지짓기를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에요. 더는 안 합니다.??둥지는 다 지었는데요.?

겨우 저렇게??

그러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퍽 반가워해 그냥 놓아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튿날 퇴근해 돌아오니 아파트 관리인이 비상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비둘기 둥지를 말끔히 쓸어내 버리고, 발코니의 바닥과 난간에 알 수 없는 끈끈이를 발라 놓고 갔다. 별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불편하고 보기에 흉했다.

비둘기가 사람들을 그다지도 성가시게 했나??

나는 작은 기대를 버렸다.

그런데 며칠 후 비둘기들은 다시 찾아와 그 자리에 둥지를 쳤다. 오래 쌓여 얼음(crest)이 된 위를 빨간 발목으로 걸어 다니면서 나뭇가지 몇 개 얽어 얄팍한 둥지를 틀기는 단 하루의 일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파트 관리인은 다시 쓸어내지 않았다. 아마 내가 자연보호운동가인가 조심스러웠던가 보다.

아직 이른 봄인데 며칠 동안 따스한 날이 빼죽하게 들더니, 계절을 착각한 비둘기들이 벌써 알을 낳았다.

저걸 어쩌면 좋겠니? 한파가 아직 몇 번 더 밀려올 텐데.?그러던 중 몰아닥친 무서운 추위 속에서 부화를 끝냈다. 세 마리의 빨간 새끼가 그 엉성한 둥지 안에서 버르적거렸다. 어릴 때 보았던 병아리들은 알 속에서 깃털이 나 있었고 부화가 끝나 몸이 마르면 그날로 보송보송했는데, 빨간 새끼 비둘기의 깃털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어미들은 부지런히 어린 새끼들을 돌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 가면서 그 경이로운 어린 생명의 강인한 자람을 지켜보았는데, 그 염려 또한 대단했다. 둥지에 솜털이라도 넣어 주고 싶었지만 어미들이 노여워할까 봐 삼갔다. 그것들의 몸은 서서히 잔털로 덮이고 색깔이 변하고 움직임이 달라지면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창 밖에서는 자연의 어김없는 약육강식이 거쳐 가 있었다. 새끼 두 마리는 흔적도 없고 하나는 죽어 버려져 있었다. 아이들의 고통은 무심해 보이는 어미 새들에 못지않았다. 그래도 어미들은 그 봄이 지나는 동안 거기서 두 배의 새끼를 더 얻어 내보냈다. 그 다음 해는 비둘기가 오지 않고 지나갔다.

작년에는 낯선 비둘기들이 들어와서 그렇게 다녀갔던 그것들처럼 자주 알을 낳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번의 것은 번번이 석회질 껍질이 없는 막으로만 싸인 무른 알을 낳았다. 그것들은 어미가 품으며 발로 굴릴 때 둥지 밖으로 밀려나와 터지거나 쥐들에게 먹혀 버렸다.

이런? 알을 낳으려면 알껍데기를 쪼아 먹어서 단단한 알을 낳아야지.?본디 무른 알도 낳는가? 사람들이 알껍데기를 흘리지 않고 쓰레기를 너무 모질게 치워 버리는 탓에 찾지 못한 것인가? 내 짐작의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난 알들은 모두가 희생되고 말았다.

사람에게나 자연계에나 본능을 타고나는 게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 작용은 실로 섬세하고 미묘하다. 예쁘고 단단하고 제각기 특이한 색깔에 유별난 무늬로 알을 짓는 새들이나, 알을 암컷은 굵직하고 수컷은 갸름하게 낳는 것도, 새끼를 그 속에 담아내는 번식의 본능 속에는 포함되어 있다. 나는 조가비나 달걀껍질을 갈아서 놓아 주면서도 그것이 어떤 질병에서 오는 것이라면 어쩌나 하고 안쓰러웠다. 내 도움은 보람이 없었다. 어미 비둘기들은 내 성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무른 알을 낳다가 떠나갔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L공원 옆을 지나다가 번쩍 한 가닥의 단서가 잡혀 차를 멈추고 지켜보았다. 비둘기 모이를 들고 풀밭으로 나가는 부러운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며칠 동안 그곳에 가서 지켜보니 길이 든 비둘기들은 때를 맞춰 찾아와 있다가 그 할머니가 나오면 벌떼마냥 모여들었다. 할머니의 얼굴이나 모이통을 기억하여 분간하는지, 할머니가 항상 같은 옷을 입는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음성을 기억하는지 알 수 없으나 부럽고 신기했다. 비둘기들은 할머니가 나타나자마자 모여와서 그의 손과 팔목, 어깨, 머리 위에까지 올라앉기도 하고 뿌려준 모이를 바닥으로 내려앉아 쪼면서 한 그릇의 곡식을 금방 먹어치우고 흩어졌다. 이 분이 아니면 아무나 먹이를 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비둘기들의 식단에 우려를 가졌다. 그것은 어린 비둘기들을 위한 사료가 아닌가 하고.

미시간 호수 북안(北岸)에 있는 호반도시에서였다. 아침에 일어나 호숫가로 무심히 산책을 나가니 먹이를 얻어먹으려는 백조와 거위들이 날개를 펴고 모여들었다. 헤엄을 치지 않고 물갈퀴를 펴 물 위를 달려왔다. 새들의 날갯짓과 물보라가 호수를 덮어 한 동안 물 위에 장관을 이루었다.

이 많은 새들을 무엇으로 다 대접하지??

하루 종일 고기잡이로 보낼 것이니 안심하세요.?

하기야 그 많은 새들이 호수에 모여와 사는 것은 먹고살 만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그냥 돌아가는 모습에 사람의 마음은 민망해졌다. 그런데 물가에는 군데군데 묘한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담당자 외에는 새들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됨?

담당자? 이 넓은 호수 위의 새들을 누가 다 챙겨??

새들이 떼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는데, 흑인들 소행이었다고 합니다.?종종 나쁜 것을 섞어 주어 떼죽음을 시킨 사례가 있어서라는 구실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날 아침의 기억이 떠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연을 보호하는 일은 자연의 흐름을 묘한 이유로 부숴 가기도 한다. 비둘기들도 타고난 구미대로 포식하고, 운동하고, 시에스타를 즐기고, 짝짓기를 하고. 그러는 여러 가지 기능들이 조금씩 퇴화되어 가겠지. 비둘기들은 관광지에서 얻어먹고만 자라고, 제 새끼 낳을 알조차 변변히 지어내지 못하고.?L공원의 그 고마운 식사는 어린 비둘기를 위한 것이지 어미를 위한 배합사료는 아니라는 우려가 나를 점점 깊숙이 차지했다. 나의 단서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만들어 주는 병폐. 비둘기 가슴팍에 튀어나온 멀떠구니를 만져보면 곡식 먹는 조류는 모래가 주물러진다. 풀잎이나 애벌레도 먹고, 모래도 삼키며, 엄마 새는 조가비도 골고루…….

과보호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문제를 남긴다. 멀쩡한 생체의 생활 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그 짓이다. 애완동물들이 겪는 불행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미국에서는 인간사회에도 수많은 본능상실자들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동성애도 그 한가지다. 무어라 불리든 그들의 특징은 결혼 적령기가 됐는데도 이성과 결혼하기를 두려워하고, 동성끼리 부부처럼 사는 것이다. 차라리 독신으로 굳세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본능의 잡아당김을 거슬러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그걸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일찍부터 길든 나약한 낭비벽이 그들에게 처자를 부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과보호와 이기주의로 자란 결과 자신이 없는, 퇴화된 삶의 한 모형 같다.

비둘기들이 다시 찾아와 둥지를 치기 시작했다. 또 산란을 하겠다는 의도로 짐작된다. 나는 애초부터 그 어미의 식성을 장악하러 들었다. 헌데 콩이든 밀이든 내가 사다 준 모이는 입도 대지 않았다. 엄연히 ?야생조류 먹이?라고 사온 봉지 속의 먹이에도 관심조차 없다. 내가 바수어 준 알껍데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날 한 기록영화가 보여준 비키니 섬의 거북이처럼 어떤 오염이 된 것인가? 그 거북이들은 알을 낳은 후 바다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잃어 섬 안으로만 기어가다가 열사(熱砂) 위에서 말라죽었다. 핵실험 때문으로 ?방향감각 상실?이 그 원인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 말은 줏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

우리 집 어미 비둘기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누군가가 주는 알곡으로 배가 불러 버려서 석회질 섭취를 못 한 것일까. 어떤 이유로 본능의 한 자락이 잘려 나가 버린 것일까. 비둘기의 본능을 손상시킨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디선가 몹쓸 것을 먹고 있는 건 아닐까. 더욱이 어미 비둘기 자신은 내가 피상적으로 우려하는 것보다 더한 어떤 아픔까지 수반되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것은 태곳적부터의 내림이며, 그렇게라도 비둘기들이 대를 이어 오는 것으로 마음을 놓아야 될 것인가도 모르겠다.

아침의 일기예보에서는 고공의 오존층이 뚫려 날이 퍽 덥겠다고 전하더니, 과연 더운 봄날을 보냈다. 가지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무릅쓰고 피워 낸 새잎〔嫩葉〕들이 하루 사이에도 부쩍 자란 느낌이다. 저 성급한 잎들은 며칠 후 다시 한파가 휩쓸고 나면, 모두 얼어죽어 땅 위에 널리고, 나무들은 부랴부랴 다음 눈〔芽〕을 피워 살아 나갈 것이다.

이곳의 신나무(maple)들은 한국에서처럼 가지 끝에 원추형의 눈 하나씩을 달고 겨울을 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철퇴의 끝처럼 기이한 모습으로 생긴 오돌토돌한 새 눈의 덩어리를 달고 겨울을 난다. 해마다 봄이 오면 변덕이 혹심한 대륙성 기후 날씨에 웃자라던 잎과 순이 다 지고도 다시 피어날 여분의 순을 달고 있도록 나무의 생김새마저 바꿔 놓은 것이다. 미국인들이 필수품처럼 쓰는 ?살아남는다(survive)?는 말은 이런 자연현상과 그들의 개척사 속에서 채택된 것인데, 순진한 우리 이민은 그렇게 정착해 왔다.

수많은 동포들이 미국을 수더분한 나라로만 알고 들어서서 뒤집히고 뒤집히며 살아남은 이들이라 생각되니, 자연의 기이한 현상도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되나. 문득 박목월 선생님의 시 한 편이 가슴에 찬다.

...산새는 산새라서 잎수풀 둥지 안에 알을 낳는다. 알락달락 알록진 산새 알. ……산새 알은 달콤하고 향긋한 풀꽃 냄새, 이슬 냄새. …… 산새알은 산새알이라서 머리꼭지에 빨강 댕기를 드린 산새가 된다.

―〈물새알 산새알〉 중에서

내 고국 산새들의 순박한 삶을 귀띔해 줄 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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