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부문(가작)-진경자/독일

무심히 드리워진 커튼 틈 사이로 상현달의 여린 빛이 서가 옆에 걸린 작은 사진틀을 훑고 지나가는 것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어둠이 겹겹이 쌓인 창가에 성경책이 한 권 펼쳐져 있고 책 위로 침엽수의 초록잎이 진한 송진 냄새를 머금고 놓여 있는 그 주위로 세 개의 빨간 초에서는 노란 불꽃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붉은색 바탕의 카드 맨 위에는 God is always with you(하나님이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신다)라는 영롱한 영문 글자가 금색으로 빛나는 그림 카드가 나를 반긴다. 고국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인 성탄 카드의 얼굴이다.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12월, 어머니가 보내 주신 성탄 카드였다. 문방구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카드였지만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은 카드 속에 꼼꼼히 눌러 쓴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처음으로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는 필적에 너무 감동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에서부터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 떠나는 날까지 모든 서류는 아버지가 처리하셨고 지금까지 보내 주신 그 많은 편지도 아버지께서 써서 보내 주셨다.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어머니가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글씨를 쓸 줄 아는지, 그것조차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해 겨울 밤, 문중 일로 아버지가 며칠간 집을 떠나 있자 그 긴 겨울밤을 혼자 지내시기가 매우 허전했던지 아버지가 평소 즐겨 보던 신소설 장한몽을 꺼내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어머니가 한글을 읽을 줄 알고 있다는 것만 생각했지 한글로 의사 표시를 할만큼 편지를 쓸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가끔 국제전화를 걸어 메아리쳐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머니는 늘 얘야, 전화비 많이 나오니 이만 하자. 하시며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으셨다. 이렇듯 잠시도 잊은 적이 없는 어머니가 손수 성탄 카드를 골라 이국 땅에 살고 있는 딸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낸 것이다. 나는 이 카드를 애지중지 사진틀에 넣어 내가 늘 바라볼 수 있는 서가 옆 벽에 걸어 놓았다. 해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이 성탄 카드를 꺼내놓고 다시 읽으며 어머니의 정을 각별히 그리워하곤 했다.

사랑하는 딸에게
금년도다가고새해가도라오는구나
올해에지나간모든시련다떨쳐버리고얼마안나문새해를마지하여첫째너의건강과조흔일만잇기를간절이바랄뿐이다세월이빨으기도하지.
중략
할말은태산도모자라지만엇지다쓸수가업구나이글을생전에처음써지윤이와네아버지둘이보고한참세시서우섯다너도우서다오
1988102월 엄마가

옛날 한글을 언문이라 일컬었던 그 시대의 문장을 보는 듯 어머니의 성탄 카드는 받침이나 어휘는 물론 띄어 쓰기도 없는 깨알같은 글씨가 촘촘히 모두 한 자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새해라고 쓰실 때 ㅅ과 ㅎ 밑에다 점을 꾹 찍으셨다. 카드를 쓰시다 보니 하시고 싶었던 말씀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좁은 지면 양쪽 위 아래로 1,2,3,4 번호를 붙여가며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이어 쓰셨다. 어머니의 성탄 카드를 어루만지며 읽고 있노라면 가물거리는 촛불 너머로 검버섯 핀 어머니 얼굴이 아른거린다.

흔히 세월에 속고 산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뜻을 이해 못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의 참뜻을 알 것 같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 별 다를 바 없이 지나가는 나날이지만 달력의 마지막 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이상하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허탈감에 무력해지고 무엇에 쫓기듯이 공연히 허둥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나 정초에 세웠던 꿈과 계획들이 미진한 모습으로 남은 채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길가에 오가는 많은 인파들도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될 12월에 들어서면 여느 때보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저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들일까?

고향집 강경에는 90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다. 부모님을 뵈러 고국에 갈 때마다 나는 한 가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간다. 승용차를 렌트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도 사 드리고 온천장에도 모시고 가서 즐겁게 여행을 하고 오리라. 자동차 면허증도 국제면허증으로 바꾸고 만반 준비를 하고 귀국한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막상 한국에 가면 이 사정 저 이유로 여태까지 미루다가 그 간절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월만 훌쩍 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인천 신공항에 내리고 보면 마음이 바뀐다. 한 치의 공간도 없으리 만큼 빼곡하니 줄을 이은 자동차의 행렬 속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만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관광버스를 이용한 여행 계획을 동생한테 부탁하여 여행사를 알아보라 했더니 아버지가 극구 반대를 하시는 바람에 그마저 실행을 못했다. 어머니 근력으로는 장시간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여행을 포기하고 인근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즐겨하시는 음식을 사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모님이 한 나이라도 젊어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을 때에는 내 형편이 넉넉지 못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해로 미뤘고 다시 그 소망을 이루어 보려고 했으나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고 어머니 아버지의 기력은 날로 쇠약해져 결국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와 통화하고 난 후 지난 달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만사 젖혀놓고 휴가를 받아 귀국했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훈훈하게 맴돌던 집안 공기가 지난 해와 달랐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거리는 초록색 철제 대문을 밀고 마당에 들어서자 음습한 냉기가 내려 깔린 듯 우선 답답했다. 귀국하기 앞서 언니한테 들어서 짐작은 했으나 이토록 심각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마루에 깎아 놓은 듯 멍하니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병원에서 보아 오던 치매 노인의 아픔이 현실로 다가왔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임자, 지윤 에미가 왔구만, 알아보겠어?
한 해 사이에 등이 더 휘어진 아버지가 푸석푸석한 어머니의 쪽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니, 독일에 사는 둘째 딸 경자가 왔어요.
서울에서부터 동행한 언니가 쪼글쪼글한 어머니 손을 꼬옥 감싸며 말했다.
뭐시라구 경자가 죽었다구? 아이구 불쌍도 혀라, 지 새끼들은 어쩌라구 먼저 갔다냐. 선상님 안 그래유, 쯔쯔.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가 비죽비죽 금방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가슴이 막혀 왔다. 어머니의 의식은 지금 어디쯤을 헤매고 계시는 것일까?
어머니! 저, 경자예요 어머니!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오른 어머니 얼굴에 뺨을 비비며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어머니와 나의 볼을 타고 내려 적셔도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식을 만나도 희로애락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나는 말없이 끌어안았다.
밥 줘, 나 배고파! 밥이나 줘.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나를 붙잡고 보챘다.
상 물린 지가 반 시간도 안 됐는디 또 밥 타령이여? 아버지의 탄식이 무겁게 이어졌다. 인자하고 따뜻하던 표정은 간 곳이 없고 어머니는 먹을 것밖에 모르는 철없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육신은 여위고 얼굴에 검버섯이 무성해도 분명 어머니의 그 모습이며 말소리 또한 명경같이 맑은 목소리 그대로지만 정신을 놓아 버린 어머니는 황량한 빈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병원에서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린 환자들을 가끔 보아왔다. 보호자가 없는 노인 환자나 보호자가 있다 해도 치매에 걸린 노인을 대부분의 이 곳 사람들은 매정하게 양로원으로 보낸다. 내가 일하고 있는 부인과 병동에도 치매에 걸린 부인병 노인 환자가 어쩌다 입원한다. 어느 환자는 한밤중에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고 화사한 옷차림으로 입원실 문을 나서려는 것을 만류하느라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다. 남의 일처럼 보아왔던 것이 내 어머니가 치매로 고통을 받고 있다니, 나는 자식도 몰라보는 어머니를 앞에 놓고 가슴이 미어졌다. 한 번만이라도 본정신으로 돌아와 나를 알아보는 어머니와 다정한 눈길이라도 주고받고 싶었으나 야속하리만큼 한 달간의 휴가를 보내고 서울행 특급열차를 타러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았다. 남의 나라에서 치매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도와 주고 시중을 들어 주면서 어머니가 이토록 처참하니 망가지도록 모르고 지냈다니 불효 막심한 내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겨우 초등학교에 갓입학한 딸을 친정에 맡기고 작은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할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고 겁 없이 독일로 휭하니 떠나와 딸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붙들 때까지 귀국을 못하고 독일에 주저앉고 말았다. 매달 딸애 학비라고 알량한 돈 얼마씩 보낸 것이 고작이었으나 어머니는 자신의 박복으로 인해 딸이 외국에서 고생한다며 가슴 아파하셨고 푸념 한 마디 없이 손녀를 훌륭히 키워 주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손녀 도시락을 준비하시고 어미없이 자란다고 행여 손녀딸 기죽을까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는 등 배 아파 낳은 나보다 더욱 반듯하게 키워 주셨는데 나는 겨우 매달 보내드리는 학비와 용돈이 전부였다. 내가 보내는 돈을 일정했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돈의 값어치는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궁색한 티를 보이지 않으셨다. 지금 어머니가 처한 눈앞의 참혹한 현상이 내가 너무 마음 고생을 끼쳐드려 일어난 일 같아 깨지고 부서지는 마음의 고통을 안고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릴 때까지 울면서 왔다.

상현의 달 그림자가 잠깐 훑고 간 창 너머로 잿빛 어둠이 짙게 묻어 왔다.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펑펑 내릴 것 같다. 이럴 때는 유난히 조용하다. 눈은 세상 온갖 소리를 다독여 가슴에 포근히 안고 잠재우듯 대지를 뒤덮는다. 창문 틈새로 매캐한 나무 타는 냄새가 졸음을 몰고 왔다. 어느 집 벽난로에 나무 불을 지피고 도란도란 나누는 사랑 이야기가 묻어 올 것같이 너무 조용한 정적을 응급 구급차의 요란한 경적이 깨뜨리고 지나갔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0082-41-745-XXXX 지금 한국 시간은 새벽녘, 발신음이 길게 이어졌다.
여보시유. 한참만에 느릿한 아버지 음성이 힘없이 들려왔다.
아버지! 저예요, 독일 경자예요. 어머니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그려, 그러잖어두 연락하려고 했는디. 네 어미 아마 금년 넴기기 힘들 것 같다아. 요 며칠 불시로 네가 보고 싶다고 얼매나 떼를 쓰는지 모른다. 다녀간 지 얼매 안 돼서 또 오기가 힘들지. 얘야?
울컥 울음이 솟구쳐 올랐다. 금년을 넘기기 어렵다니, 눈앞이 캄캄해 왔다.
어둠 저 너머에 어머니의 숨소리가 나를 부르고 이를 쫓아가는 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슬픔을 다독여 잠재우고 날이 밝으면 어머니 곁을 향해 가리라.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성탄 카드 안에 남아 있는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리라. 유리창에 부딪치는 눈발이 차츰차츰 굵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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