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

4. 무용
이 시기 전업무용예술단체는 없었다. 조선이민무용은 주요하게 민간무용이 주되는 위치에 있었다. 조선민간무용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바 19세기 후반기에 만주에 전수되었다. 20세기 30년대 경 간도의 조선이주민은 농악무, 탈춤, 학춤, 승무, 삼삼이춤 등을 추었다.

농악무 농촌에서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길닦이 혹은 경사가 있을 때면 마을 남녀노소들은 한자리에 모여 먼저 막골리를 마시고 흥김에 농악무를 춘다. 노동정서를 고무하거나 풍작을 경축하는 오락이다. 흥취 있는 것은 춤추는 남자의 머리에 쓰워진 상모이다. 악기는 꽹과리, 징, 소고, 장고, 나팔, 퉁소 등을 쓴다. 1938년 3월 25일 70세대 조선인이 안도 새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돈을 모아 조선에서 여러가지 악기, 옷, 상모 등을 사왔다. 새마을농민은 농악대를 꾸려 민족의 풍습에 따라 농악무를 추었다.

1943년, 신경에서 28개 민족이 참가한 문예경연이 있었다. 새마을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인대표단은 김평권을 단장으로 그번 경연에 참가하였으며 농악무가 동양민족무용공연종목 1등상을 탔다.

탈춤 조선 팔도에 널리 유행된 탈춤은 조선 고대 수렵춤과 전사춤에서 기원하였다. 이조말엽에 이르러 종류도 상당히 많아졌다. 조선이주민이 간도에 정착한 후 조선 각 지역의 주민들이 잡거하였기에 탈춤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바 각지의 탈춤의 우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중국인의 양걸춤의 정화까지 받아들여 간도의 특징이 두드러진 탈춤으로 되었다.

아박춤 아박이란 보드랍고 납작하게 간 상아쪼각 6개를 사슴가죽 끈으로 한 줄에 꿰여 색실로 술을 달아 만든 춤도구이다. 고조선민간에서 기원하였으며 고려시기에는 궁중춤으로 되었다. 조선이주민이 안도에 정착한 후 조선인마을에서 광범히 보급되여 대중이 즐기는 춤으로 되었다. 《동동》하는 장단에 맞추어 여성들은 참대가락 또는 나무가락을 아박으로 삼아 신나게 치며 단오절을 즐기였다. 아박춤은 1982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시기 도시 조선인문화권에서는 극장, 공회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무대무용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무용이 조선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28일에 도문극장이 준공되고 6월 14일에 훈춘공회당이 낙성되었으며 9월 6일에는 연길 간도극장이 낙성되었다. 이러한 장소를 이용한 조선인, 일본인들의 순회공연이 빈번히 찾아왔다.

1935년부터 전통무용의 대집성가로 이름 높았던 한성준은 중국 만주지구의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조택원은 1940년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도문극장에서, 6월 30일에는 신경 만철사원구락부에서 무용조곡 《춘향전》 6곡 외 몇 가지 무용을 공연하여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고 《만선일보》(1940년 7월 1일)은 보도하였다. 또 조선 악극단은 1940년 6월 18일부터 19일까지 목단강에서, 8월 3일부터 4일까지는 신경 풍난극장에서, 8월 5일부터 8일까지는 길림공회당에서, 6일에는 사평에서 음악, 노래, 무용, 연극작품을 공연하였다. 그 작품 속에는 최승희가 창작한 무용 《초립동》도 있었다. (《만선일보) 8월 8일 자)

1937년 여름, 반석현성의 고급조선인 예기관 명월관이 개업되고 그곳에서 가야금병창, 창극 등이 출연됨과 아울러 궁중무용도 출현되었다. 1940년대에 흑룡강성 계림, 목단강 등 지역에서 가야금병창이나 창극, 승무, 칼춤 등 춤과 노래가 출연되었으며 1942년 위만주국 성립 10돌 때 신경공회당에서 간도 안도현 명월구 《조선농악》이 공연되었으며 잡지역에 평론까지 실렸다.

이 시기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도 조선민족문화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1941년, 일본공연을 마치고 중국공연을 시작했을 때 10여 만 명 조선이주민이 살고 있는 목단강지역에서도 공연하였다. 이러한 공연은 광복전까지 매년 지속되었으며 안동, 봉천, 신경, 할빈, 치치하얼, 대련, 목단강, 길림, 도문 등 지역에서 진행되어 처음으로 완벽한 극장무용을 조선이주민에게 보여주었다.

5. 미술
20세기 20년대 유화가 간도에 들어왔고 당시 용정의 중학교미술교원은 모두 유화를 가르쳤다. 30년대에 이르러 서양문화를 접수하는 열조가 일었으며 많은 청년들이 출국하여 고학의 길을 걸었다. 이리하여 조선인화단에 예술가로서의 창작활동이 시작되었다.

한낙연(1898-1947)은 용정촌사람이다. 중국공산당 동북지구의 초기창시자의 한사람이며 《중국의 비카소》라고 평가 받고 있다. 1923년 상해서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 봄,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세우고 교장직을 맡았다. 1925년 봉천에 동북의 첫 중공당지부를 세웠다.

1931년 빠리미술학원에 입학하였으며 1936년 서안사변 후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선 에 올랐다. 항일전쟁이 승리후 감숙성 돈황 및 신강지구에서 《비단의 길》예술고고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1943-1947년 란주, 우룸치, 서안 등 지역에서 20여 차 개인그림전시회를 가졌다.

한낙연의 작품은 수채사생이 많다. 색채가 명쾌하고 지방풍토와 인정미가 농후하며 짙은 생활의 숨결이 흘러넘친다. 200여 폭의 작품이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신룡검(1916-1948)은 조선 강원도 원산시 명석동에서 태여났다. 1937년 8월 도꾜 무사 시미술학교에서 유화를 학습했다. 1943년 10월 목단강인쇄공장에서 미술설계를 하였다. 1946년 목단강공민회관에서 제1차미술전람회를 열었는데 조선역사를 반응한 작품 20폭을 내놓았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신흥미술협회》가 창립되었으며 신룡검은 조직자의 한 사람이다. 1947년 목단강시열사탑의 설계와 조각동상, 부각의 제작을 완성했다.

석희만은 1914년 8월 20일, 함경북도 무산시에서 출생, 명동중학교, 동흥중학교를 거쳐 1935년 지금의 일본미술대학에 진입하였다. 1940년 신자연파미술가협회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1939년 7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개인전람을 열었다. 석희만의 작품은《도문시의 교외풍경》,《용정남강리교회당》,《와세다대학 소묘풍경》,《연길거리》 등이 있다.

제3절 재만조선인의 신문, 잡지, 출판, 발행 및 기타

1. 신문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조선인 보인사는 남만과 간도에서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갖은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간도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고 남만 유하현 삼원포에서 1916년 6월에 발행한 《한족신보》(조선문)가 있었다.

1928년 1월, 《민성보》가 정식으로 발행되었다. 신문사는 용정촌 신안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 령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보무위원회》이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사장으로, 방지함(용정 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었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 4개 면으로 된 일보이다. 그중 1, 2 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좌우였지만 조선인속에서 영향이 컸다.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으며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하는 진보적신문이다. 1932년 9월에 일제의 엄중한 파괴로 정간되었다.
9.18사변후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꾸려진 신문들은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에 발간되었다.

《양도전선》은 동장영(童长荣)이 주필을 맡고 1932년 하반년 중공동만특위에서 연길현 지신향 송림동에서 꾸렸다. 이밖에 연길현에 꾸려진 조선문신문은 《동만주보》, 《청년투쟁》, 《농민운동》, 《노력자의 생명》, 《소년선봉》, 《대중신문》, 《전투 종성》이 있고 화룡현에서 꾸려진 조선문신문은 《전투소식》, 《해방전선》, 《반제 전선》, 《적기신문》이 있다. 이외에 1930년대 중공동만특위의 지도 밑에 간도에서 발간된 신문은 또 《동만민주보》, 《전투일보》 등이 있다.
9.18사변후 조선공산주의자들도 진보적 신문을 발간했다. 《서광》은 1937년 5월 3일에 창간된 항일부대기관지이다. 《종소리》는 항일부대가 마당거우밀영에서 군정훈련을 하던 시기인 1937년 12월 27일에 창간된 대내주간신문이다. 《철혈》은 1939년 항일부대의 돈화원정나날에 창간된 반일청년동맹기관지이다. 이런 신문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소개하고 조선혁명의 노선과 방침을 해설하였으며 민족해방투쟁과 반일민족통일 전선을 선전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전과를 보도했다.

9.18사변 후 일제와 위만주국에서도 반동신문을 발간했다.
《만몽일보》는 1934년 8월 25일, 신경에서 창간되었다. 이사장에 이경재, 상담역 (고문)에 이상협, 편집국장에 김우평이었다. 이 신문은 순 조선문으로 발간되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창간한 신문으로서 연길, 용정에 분사가 있었다.
《만선일보》는 1937년 5월 5일 《만몽일보》를 개제발간한 2절지 4개면 일간지 이다. 사장에 이용석, 편지국장에 렴상섭이었다. 이 신문은 일제와 위만주국의 대변인으로서 광복 전 만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조선문신문의 하나였다. 서울과 도꾜에 지국을 두었다.

《재만조선인통신》은 1930년대에 발간된 신문이다. 《동아대동》을 공공연하게 찬양하면서 일제의 죄행을 변호해 나섰다.
《간도협화보》는 1940년경 위만주국 간도성협화회본부에서 조선인협화회 회원을 대상해 꾸린 8절지 2개면 부정기간행물이다. 주필은 윤벽남이었다.
광복 후, 간도지방에는 중공기관지의 신문들이 출간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연변민주대동맹에서 한문과 조선문으로 《연변민보》를 창간하였다. 1946년 5월 길동군구 정치부에서는 연길에서 조선문《길동일보》를 간행했다. 1948년 4월 1일, 중공연변지위 기관지인 《연변일보》조선문이 연길에서 발행되었다.

북만에서도 이 시기 조성문 신문이 발간되였는데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신문으로는 《신민일보》, 《인민신보》, 《전투보》, 《민주일보》, 《동북어린이신문》이었다.
《신민일보》는 1946년 5월에 창간된 할빈시민주연맹기관지였다. 주필에 박진용이였고 8절지 2면으로 되었다.
《인민신보》는 1945년 10월 16일에 창간된 목단강시조선인민주동맹기관지이다. 사장에 이홍렬이였고 매일 8절지 2면으로 발간되었다.
《전투보》(1947.3 창간), 《만주일보》(1948.4.1 창간)는 조선의용군 제3군지대 정치처에서 발간한 신문이다.
이 시기의 신문들은 사회주의사상과 신민주주의 이론을 선전하고 대중을 조직, 동원하는 면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2. 잡지

조선문잡지는 신문과 함께 발전을 보았다. 1920년대초 동북에 《학우보》, 《새벽달 》 등 조선문잡지가 출판되었다. 이런 잡지는 대중을 각성시키는데 기여를 하였다.
9.18사변후 간도에서 진보적 경향을 보여준 문학잡지가 발간되었다.
《북향》은 1935년 10월 용정에서 창간된 문학월간잡지로서 문학단체인 《북향회》에서 꾸리였다.
《카톨릭소년》은 1936년 2월에 용정에서 창간된 전도성격을 띤 아동문학월간지이다. 천주교교회에서 꾸린 것으로서 사장은 백화동이고 주필은 황덕영이었다. 이 잡지는 천주교를 선전하는 글과 사진, 동요, 동시, 아동소설 등을 실었다.
《북향》, 《카톨릭소년》은 당시 조선인작가들에게 지면을 마련해조고 조선인 문학사적 흐름을 이어주는데 일정한 역활을 놀았다.

9.18사변후 조선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진보적 경향을 띤 잡지들이 꾸려졌다.
《3.1월간》은 1936년 12월 1일 조선조국광복회 기관지로 창간된 대중 정치이론 월간잡지이다. 이 잡지는 항일부대와 장백지구에는 물론 조선에도 보급, 침투되여 당시 조선문 신문간행물가운데서 주목을 끌었다.
《화전민》은 1937년 1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항일전쟁시기 유격근거지역에는 《레닌의 기발》, 《서광》, 《붉은기》 등 항일사상이 농후한 잡지, 책자가 발행되었다. 해방전쟁시기에는 문예잡지 《불꽃》 (1946.1-1946.5), 종합잡지《신건설》(1946.1-1946.5), 종합잡지《민주》(1946.12), 월간잡지《대중》(1948.3-1948.8,주필 이욱), 월간잡지《연변문화》(1948.10-1949.4)가 간도에서 출간 되었다. 이 시기 흑룡강성에서 출간된 조선문 잡지는 《건설》, 《신청년》, 《사회과학연구통신강좌》, 《교육통신》 등이 있다.

《건설》잡지는 1946년 5월 1일에 창간된 목단강시조선인민주동맹 선전부에서 발간한 종합잡지로서 문학작품이 많이 실렸다. 책임편집은 김례삼이었다.
《신청년》은 목단강시 조선인민주동맹 청년부의 기관지로서 1946년초에 창간된 등사물월간잡지이다.
《사회과학연구통신강좌》는 목단강시사회과학연구소의 김약실이 책임지고 발간하였다.
《교육통신》은 1948년 12월 1일에 할빈에서 창간되여 동북범위에서 발행되었다. 교육간행물로서는 첫 잡지이다.

3. 출판발행 및 기타
1945년 전 간도지구에는 출판기구가 없었다. 일부 인쇄소에서 몇 가지 출판물을 출판했을뿐이며 그 부수도 매우 적었다. 1947년 3월 24일 연변교육출판사가 정식으로 간판을 걸었다. 출판사의 취지는 《동북조선인의 문화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문 교재, 잡지와 기타 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1945년전 간도에는 작은 서점이 몇 집 있었을뿐 다수 서점은 문방구와 잡화를 겸하여 팔았다. 간도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서점은 1946년에 선 인민서점이다. 1947년 6월 동북서점으로 개칭되었고 1948년에는 연변교육출판사의 소속으로 된 《대중서족 이 연길시에 설립되었다. 1949년에 연길, 왕청, 훈춘 등 지역에 신화서점이 섰다.
일제시기 연길에는 50여 명의 종업원을 가진 일제관변측의 방송국- 연길방송국이 하나 있었는데 로어, 일어, 중국어로 방송했다. 해방초기에 연길신화방송국을 세우고 조선말방송으로 개칭하고 중앙방송국의 뉴스보도를 중계방송하는외 전부 조선말로 방송하였다. 1949년에 연변인민방송국이 정식 설립되었다.

1947년초 연안의 《신화사방송국》이 목단강에 옮겨왔다. 그해 6월부터 신화사 방송국에서 조선말방송을 시작하였다. 편집 겸 방송원으로 처음엔 《인민일보》의 기자 림영춘이 맡았고 후엔 임효원이 맡았다. 1948년 9월 경, 신화사방송국이 목단강을 떠나자 조선말방송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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