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각성 (Awakening)

 

첫 번째이야기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중국의 변방지역인 “연변”과 “동북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한분의 크리스챤 지도자를 만나면서 부터이다.

그 분을 만나고 그 분과 함께 연변과학기술대학 운영을 위해 만18년이라는 세월을 동고동락 해 오는 동안에 나는 자연스럽게 동북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연변”과 “동북아”를 기반으로 하여 아시아 존에 새로운 희망의 역사(“동북아공동체사회”)가 펼쳐지기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 그때그때 마다 부닥쳐온 국제 정세의 사안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연우포럼(한민족 칼럼공동체)」에 기고하기 시작한 것이 동북아시대에 대한 비전을 수록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

    ▲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이승률 회장
이런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하는 걸까.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종류의 이상한 사람을 한 분 만나게 됐다. 그 때가 1990년 10월 초, 북경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주로 골프장 건설공사를 맡아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앞으로 중국 골프장 사업이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업허가를 얻기 위해 중국을 오가곤 했었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곤 북경과 상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 뿐 이었다. 아직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 중국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교 전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선점효과가 있을 것 같아 주변 건설업자들과 컨소시엄을 만들기로 하고, 이 사업의 대표가 되어 매월 칭다오(靑島)시를 방문해 중국측 관리들과 협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국제관광개발지역 내 골프장으로 허가 난 땅을 적정가격으로 매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제협상경험이 전혀 없는 칭다오시 관계자들이 일방적으로 값을 터무니없이 부르며 배짱을 내미는 통에 협상은 전혀 진전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한 끝에 당시 중국 양상곤 국가주석의 아들 양소명이란 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나러 베이징의 한 호텔로 올라갔을 때 나는 다른 또 한분의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분이었기에 그에게 먼저 말씀을 하시라 양보를 하고 옆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나는 그가 무슨 일로 이 실력자를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내심으로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경청을 했다. 이윽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귀만 곤두세운 채 그의 곁에 약간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얘기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내가 이제껏 세상가운데서 부대끼며 만났던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히 나와 같은 공간 안에 있었고 내 눈앞에 존재하면서도 오늘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원래는 한국 출신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20년 넘게 생활하는 동안, 대학교수도 됐고 또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을 한 편입니다. 그 후 1986년도에 중국사회과학원 초빙 교수로 북경에 와있는 동안, 우리 동족들이 사는 연길, 길림, 장춘, 하얼빈 지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보니 조선족들이 그들의 고유한 말과 글은 지키고 있지만 고등교육기관이 없어서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와서 연길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고 하니, 당신 부친께서 국가권력자이시므로 내가 하는 일을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중국에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투자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에 선진교육을 전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중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분야의 교육을 통해서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어서 대학을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선생께서 나를 한번 도와주세요”

그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에 버려진 조선족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애와 이제껏 살아오면서 쌓은 학식과 재산을 가져다가 황량한 중국 동북 땅에 대학을 세우려고 중국지도자를 설득하러 온 사람이었다.

나는 중국에 골프장을 지어 돈 벌 기회를 얻고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존재감이 허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꿈꾸는 미래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꿈이 없었다. 그 점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을 비참하게 느껴지도록 까지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그 순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자아에게 물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거센 폭풍우처럼 마음을 뒤흔들었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 나는 잠시 내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2주후에 서울에 출장오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제발로 찾아갔다. 그래, 그가 꿈꾸는 미래를 나도 한번 믿어보기로 하자. 그 미래를 내 꿈 삼자. 그의 손발이 되고 그의 도움이 되고 아예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버리자. 오늘은 일단 접어두고 내일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먼저 바라보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를 만나 그와 함께 일할 것을 먼저 제의해보자.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 내 모두를 던져도 좋다고 느껴지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 셋, 베이징의 그 어수선했던 호텔에서 느낀 감동이 그때뿐만 아니라 그 후 지금까지도 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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