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박사 저

나는 여기서, 오래 전에 썼던 “테라우치 문고와 나의 아버지"란 글에 덧 붙여 한가지 뜻 깊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그것은 선친께서 <테라우치 문고>의 반환과정을 통하여 선조의 유품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귀한 일이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더욱 가깝게 이해하게 된 선조 이암 선생의 독특한 민족역사관에 깊이 매료된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에 가셨다가 <테라우치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진귀한 자료들을 여러장 사진 찍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지 보름 후의 일이었다.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서울로 올라 가는길에 잠시 대구 본가를 들렸던 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 선친께서 대구에 살고 있는 막내 동생과 나를 당신의 좁은 서재로 불러 나란히 앉히신 다음, 일본에서 찍어오셨다는 사진들을 방바닥에 쭈욱 늘어놓으신 채로 그동안에 있었던 답사과정을 일장 훈시조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평소 조용하신 성품과는 달리 가끔 큰소리로 웃으시기까지 하시면서 의기양양하게 말씀을 이어 가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시면서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승률아! 너는 행촌 어른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나"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버지께서 그것 보란듯이 꾸짖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서가에서 누렇게 변색된 책 한권을 꺼내 내 코앞에 불쑥 내밀어 보이셨다.

표지에 ‘한국사의 원류, 주해(註解) 환단고기'라 적혀 있고, 그 밑에 ― 단군은 아시아를 통일했다. ― 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지은이는 김은수(金殷洙)라는 분이셨고, ‘기린원'이라는 출판사에서 1985년에 초판 발행한 역사물 번역서였다.

아버지께선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이렇게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너도 이젠 집안 종사 일에 좀 관심을 가져라. 학교 일 한답시고 중국으로 어디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선조들의 행적도 모르고서야 어떻게 남들 앞에 나서겠나. 이번에 학자들을 만나 봤더니, 행촌 어른에 대해서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들이 많더라.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모른다. 행촌 어른께선 글씨도 잘 쓰시고 고관대작을 지내신 분이셨지만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 책을 더 높이 평가하더라. 고조선에 대한 역사서로선 매우 귀한 사료가 된다고 하는구나. 애비 생각에도, 이 책은 두고두고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네가 먼저 읽고 나서 동생들도 다 읽히도록 해라"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하면 그때 들은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난생 처음으로 접한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의 이름도 생소했지만, 그보다도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편찬한 분이 나의 20대 선조 되시는 杏村 李嵒(이암) 선생이며, 또한 그의 현손인 一十堂 李陌(이맥)께서도 조부의 영향을 받아 ‘太白逸史’를 저술함으로써 한집안에서 대를 이어 고대 민족사 정립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아버지께서 주신 책을 받아들고 처음엔 좀 얼떨떨했으나,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격동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감을 느꼈다.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날 이후 나의 뇌리에는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는 고조선의 기원과 한민족 역사에 대한 자존의식을 단 한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고대사 기록의 진위를 논하기 이전에, 그 책에 녹아있는 웅휘한 민족정신과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위한 열망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내 마음에 차고 넘쳤다.

내가 지금 동북아시대를 표방하며 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에까지 이르는 신 실크로드의 새 길을 열어보고자 꿈꾸고 있는 것도 어쩌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잃어버린 고토를 찾아 가려고 하는 노력의 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이 길은 험하고 힘들겠지만 언젠가 우리 한민족 역사의 부흥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그날 ‘환단고기’를 처음 접했던 날, 책의 앞부분 몇 장을 뒤적거려 보는데 이 책을 지은 김은수 선생의 서문이 우선 눈에 띄었다. 나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사의 원류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이정표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 드리는 방법으로 그 서문을 전문 그대로 수록하기를 원한다.

“나는 한동안 이 책이 주는 충격에서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같은 냄새나는 책만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도 앞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얻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桓檀古記>는 우리가 檀君朝鮮이나 高句麗에 기대했던 요구량을 훨씬 뛰어넘어 비운의 역사속에 무참하게 매몰되어 버림받던 과거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할과 웅장한 모습을 정확한 전거와 뚜렷한 필치로 되살려 주고 있다.

桓雄과 檀君은 동아시아를 완전하게 통일하였으며 지구상에 인류 문화의 첫 등불을 밝혀 놓았던 것이다.

<桓檀古記>는 옹기그릇에 담아 땅속에 매장하여 日帝의 마수를 벗어나게 된 가장 소중한 역사책이다. 주로 渤海의 전적을 근거로 한 이 책은 고려 말엽의 충신 杏村 李嵒이 編著한 <檀君世紀>와 이조 中宗때에 撰修官을 지낸 一十堂 李陌이 撰한 <太白逸史>를 雲樵 桂延壽가 1898년에 合編著한 후, 거기에 다시 1911년에 신라사람 安含老의 <三聖記>와 고려사람 元董仲의 <三聖記> 그리고 范樟의 <北夫餘紀> 上下 및 <迦葉原夫餘紀>를 합편한 모두 5권으로 된 책이다.

1948년에는 필사본 초판이, 1979년에 재판이 나온바 있다. 雲樵는 이 책을 庚申年(1980년)이 되거든 공개하라고 하였다.

<桓檀古記>는 桓國, 倍達, 朝鮮, 夫餘, 高句麗, 渤海, 高麗 등의 활동상은 물론 정치, 철학, 종교, 문학, 문자, 음악, 고고학, 민속학 등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흉노와 몽고, 선비족의 기원을 명시하고 있는가 하면, 箕子朝鮮, 雲障, 滿潘汗, 衛滿, 漢四郡, 任那에 얽힌 허위 사실을 백일하에 들춰내고 있으며, 儒敎와 道敎 및 佛敎와 基督敎의 사상이 모두 우리의 三神思想에서 발원한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실로 우리 민족의 뿌리와 인류 문화의 근원을 밝혀 주는 책인 것이다.”

이승률 :  동북아공동체 연구회 회장.  연변과기대 부총장.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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