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친 땀방울도 닦을념을 않은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지는 급급히 좁다란 계단을 달아올라갔다. 당장 숨이라도 꼴—깍— 넘어갈것만 같았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 소설가 강영애 - 중국 길림거주
《은지야, 아직 멀었어?》

《나 지금 층계 올라가고 있는중이야, 선영아가씨. 금방 도착할거니까 조… 조금만 더— 기다려.》

바로 이때다. 누군가 웃층에서 급급히 층계를 내려오다가 면바로 층계를 올라가는 은지와 맞부딪쳤다.

《아이구!》

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한 하늘색의 편한 옷을 입은 웬 키 큰 남자가 거듭 사과하는 한편 아래층으로 달아내려갔다.

《왜 그러는거니? 은지야.》

선영이가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별일 아냐, 금방 웬 남자와 부딪쳤어.》

선영인 또 울기 시작했다.

《은지야, 나 이젠 살 생각 꼬물만치도 없어.》

《살 생각이 하나도 없다면야 당연 죽—어—도— 되는거지. 허나 제발 천천히 죽어라! 들었어? 이제 다 왔어. 나 만난후에 죽어 응? 죽은후에 나 찾지 말구.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

선영인 훌쩍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억이 막혀 고개를 젓던 은지는 또 삼층을 올라갔다.

밤하늘 별처럼 반짝거리던 커다란 두 눈이 퉁퉁 부어서 한일자로 되여버린 선영이가 은지의 세집앞에 쪼크리고 앉아있었다. 커다란 트렁크가 그곁에 높다라니 세워져 있었다.

은지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선영은 트렁크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이번에는 또 며칠 묵을 셈이냐?》

《김민재 그 인간 저— 세상 갈 때까—지—.》

《뭐… 뭐뭐? 너?》

은지의 죄꼬만 입은 최대한으로 커졌다.

(두고 봐, 이번엔 방세 톡톡히 받아낼거다.)

트렁크를 내려놓은 선영이는 은지가 건네준 화장지함을 그러안고선 털썩 쏘파에 주저앉았다.

《앗!》

《야옹 —》

비앙스가 쏘파에 놓여진 곰인형뒤에서 기여나오더니 마루판에 내려서서 기지개를 쭉 켰다.

너무 놀란 나머지 선영이는 그만 대사마저 깜빡 잊어버리고말았다.

《뭐… 뭐야? 이건 또 뭐야?》

은지는 방그레 웃으며 비앙스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뭐긴? 얜 비앙스라고 불러.》

《은지야, 너도 고양이 기르니?》

《내가 비앙스를 키울수 있는 정도였으면 좋겠다. 나 그럴 여유 없어.》

비앙스를 살펴보는 선영이에게 은지는 비앙스를 넘겨주었다.

《옆집에 사시는 신교수님이 기르는 고양이야. 교수님부부가 여행을 떠나시면서 나한테 잠깐 맡겨둔거야.》

《어머, 너 이런 일도 할줄 알어? 난 너가 소설 쓸줄밖에 모르는줄로 여겼는데. 나중에 애가 생기면 너한테 부탁하면 되겠구나.》

금방 해시시 웃는 선영이를 바라보면서 은지는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곤 랭장고에서 비앙스의 우유를 꺼냈다.

《괜찮아. 헌데 너 애 아빠가 저— 세상 간 다음에야 이 집 문밖 나선대며?》

선영은 금방 시들해지며 비앙스를 내려놓았다.

《요즘은 괜찮다 했는데. 그 자식이 본성은 못고쳐. 그저 놀음에만 탐하고…》

은지는 머리를 갸우뚱하고 마루 한가운데 못박힌듯 서서 선영이의 하소연을 골똘히 들어주었다. 가끔은 머리도 끄덕이기도 하면서.

(아이구, 주여! 또 시작입니다. 련애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가봅니다. 그저 자질구레한 일 가지고… 그나마 난 홀몸이여서 천만다행이구나.)

흡족한 마음으로 은지는 우유를 한모금 마셨다. 반시간이 흘렀다. 선영이의 하소연도 이젠 거의 막을 내리울 때가 되였다.

《어머!》

은지가 갑자기 새된 소리를 지르면 왼손에 쥐여진 빈 우유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쩌냐? 비앙스의 우유를 내가 그만 다 마셔버렸잖아.》

 

2


이튿날 오후, 은지는 우체국에 들려 잡지사에서 보내온 원고료를 찾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맥없이 문어구에 서있는 김민재가 눈에 띄였다.

《안 갈거야. 절대 안 돌아갈거야!》

선영이의 고함소리와 함께 문이 《쾅!》닫혔다.

김이 다 새여버린 김민재가 저으기 측은해났다.

《하필이면 왜 오늘 왔어? 쟤가 화가 잔뜩 나있는걸 불보듯 뻔히 알면서…》

《나도 영이 성질 뻔히 알아. 헌데 친구와 약속했어. 저녁에 꼭 여자친구 데리고 가겠다구…》

《다음날로 미루면 되는걸 가지고…》

《래일 그 친구가 카나다로 떠나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중에 다시 이곳으로 안돌아올지도 몰라.》

《나중에라도 그 친구한테 해석하면 될거 아냐.》

《내가 여자친구 데리고 간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너무 쪽 팔리잖아.》

(쪽이 팔리면 팔렸지, 나와 무슨 상관인데. 정말이지, 여하튼 남자들이 허영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어떡하지? 오, 맞다맞어! 은지야, 너가 영이 대신 가주면 안될가?》

희미해지던 민재의 두 눈이 금방 별처럼 반짝이였다.

《뭐… 뭐?》

돌연적인 민재의 말에 깜짝 놀란 은지는 억이 막혀 말이 다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안돼, 절대 안돼!》

《은지야, 어쩌냐? 제발 부탁한다. 너가 영이 절친한 친구라는걸 내가 잘 알아. 넌 이해심도 제일 많고 제일 신중하고 의리도 제일 잘 지키는 사람이잖니? 딱 한번만. 응? 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민재의 그 몇마디 《제일》이란 말에 은지는 조금은 흔들렸다.

《되는거지? 은지야, 빨리 가자!》

《이제 오후 2시야, 아저씨. 저녁식사시간 되려면 아직두 멀었어. 왜 그리 서둘러?》

민재는 못마땅한 눈길로 은지의 옷맵시를 훑어보았다.

《실은 친구한테 늘 내 여자친구는 숙녀라고 말했었거든.》

《숙녀?》

《가자, 빨리! 일단 옷부터 바꾸자.》

민재는 은지의 손을 잡고선 무조건 앞으로 내달렸다.

(세상에, 이번엔 숙녀로 단장해야 하는거야?)

은지는 달리는 한편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아, 신이여!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3


저녁 7시 레스토랑이다.

민재와 어깨 나란히 앉은 은지는 조금은 어색했다. 이렇게 정중한 좌석은 필경은 처음이니까. 오전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하던 은지의 긴 파마머리는 차분한 스타일로 바뀌여졌다. 최소한 은지의 머리속에서는 결혼할 때에야만 입을수 있는 하얀 원피스도 입고 굽 높은 뾰족 구두도 신었다. 허나 아주 불행한 일은 레스토랑으로 걸어오는 길에 오후에 금방 산 구두의 왼쪽굽이 벌써 끊어져버린것이다.

민재는 그의 카나다국적 친구와 포옹하고나서 은지를 소개시켰다.

《채아가씨, 민재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부드럽고 현숙한 여성분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뵈니 실로 과언이 아니라는걸 느꼈어요. 영광입니다!》

안경친구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나서 아주 례절스레 말을 하였다.

(뭐? 채선영이 부드러워? 채선영이 현숙하다구?)

은지는 하마트면 입안에 물고있던 음식물을 내뱉을번 했다.

《듣자니 채아가씨는 유치원에서 애들을 가르치신다면서요?》

은지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린애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채아가씨는 어떻게 처사하십니까?》

안경친구는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설득시킬겁니다.》

(채선영이라면 언녕 뺨을 찰싹 올려 붙였을건데.)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재설득시킬겁니다.》

(선영은 또 한매 때렸을거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요?》

《당연 또 설득시켜야 합니다.》

은지는 안경친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따 이 친구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은거야? 이제 한번만 더 물으면 뺨 한대 선사할거다.)

안경친구는 아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중국아가씨들이 인내성이 있습니다. 나중에 귀국해서 마누라를 찾겠습니다.》

은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실 웃었다.

(친구, 참 미안한 말이지만 태평양건너에서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나 한껏 들으셔.)

저녁식사는 은지의 가짜여자친구의 연극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안경친구는 이튿날 아침비행기라며 식사가 끝난 뒤에 얼른 돌아갔다. 민재는 친구를 호텔까지 바래준다며 따라나서고 은지는 다른 약속이 있다는 핑게로 레스토랑에서 떨어졌다.

볼 일? 따라나서지 않은 리유는 당연 높이가 달라진 그 구두때문이였다.

안경친구를 뒤따라가던 민재가 잽싸게 몸을 돌려 은지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은지가 진상을 숨겨준데에 대한 감격때문에, 은지가 연극을 잘 꾸면준데에 대한 감사겠지.

두 사람이 문어구에서 사라지자 은지는 후 — 하고 긴 숨을 크게 내쉬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바로 신경이 확 풀어지는 시각에 아이스크림 한덩이가 은지의 새하얀 원피스우에 뚤렁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은지의 뒤켠에서 빈 쟁반을 손에 들은 한 남자가 걸어나오며 말을 했다. 그 아이스크림의 주인이였다.

 

4


《아저씨, 어찌된 영문이예요?》

화가 잔뜩 난 은지는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실은 아가씨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엡 절대 고의는 아니였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은지는 화장지로 원피스를 닦았다.

《아저씨, 이 원피스 — 나 결혼 때 다시 입을 원피스란 말이예요. 아, 진짜…》

《결혼 때 이 원피스 입으신 — 다구요?》

남자의 눈은 의혹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입은거라구요. 집에 돌아가서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결혼할 때 다시 꺼내입는다구요. 아셨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남자는 뒤더수기만 긁적이였다.

(물론 모를 일이지. 바보같은 사람아! 나 평소엔 반소매츄리닝에 청바지, 끌신 신구 다닌다구. 어쩌다가 이런 이쁜 원피스 생겼는데. 어쩜 신도 고장나고 원피스까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은지의 거동에 당황해난 남자는 은지의 곁에 서서 물었다.

은지는 알록달록해진 원피스만 내려다보았다.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걸상에 털썩 주저앉은 은지의 시야에 구두가 들어왔다.

《어차피 이 원피스는 이 모양 된거구 이거나 도와주세요.》

허리 굽혀 오른쪽구두를 들어 그 남자 손에 넘겨주었다. 남자는 두 눈이 휘둥그래서 은지를 쳐다보았다.

《저 도와 이걸 해결해주세요.》

은지는 아직 남아있는 굽을 가리키며 손으로 끊는 시늉을 했다.

경황실색한 남자는 변태적인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한듯 뚫어져라 은지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막무가내인듯 이미 굽이 끊어져버린 구두를 신은 왼발을 들어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영문을 알아챈 남자는 굽이 성성한 구두를 들고 은지의 맞은 편에 앉았다. 1분이란 시간을 거쳐서야 남자는 그 굽을 해결했다. 은지는 만족스레 그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일어나서 몇발자국 걸어보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 받은 보수는 모두가 물거품이 되여버렸다니까. 가짜 여자친구배역해서 얻은 구두와 원피스를 나중에 결혼 때… 후 —》

은지는 안타까와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가짜 여자친구라구요?》

남자는 호기심에 잔뜩 찬 어조로 조심스레 물었다.

《네. 금방 간 그 남잔 제 친구의 남자친구예요. 어제 제 친구가 남자친구하구 심하게 다퉜어요. 헌데 그 친구의 남자친구의 친구가 꼭 제 친구 만나보겠다고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제가 친구를 대신해서 친구의 남자친구의 친구를 만났어요.》

얼음우에 표주박 밀치듯 말을 끝낸 은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셨어요?》

《아뇨, 아직 모르겠어요.》

남자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못알아들으셨다구요?》

이번에 두 눈이 휘둥그래진 사람은 은지였다.

《예. 아직 못알아들었어요.》

남자도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소털같은 세월에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지는 숙녀답게 부드럽게 웃었다.

《잠깐만요, 아가씨.》

은지는 멈춰섰다.

《여자친구로 가장하셨다구요? 그렇다면 저도 한번 도와주실수 없을가요? 저는 더 후한 보수 드릴테니까요. 이런 원피스 아가씨가 원하시는대로 얼마든지 사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괜히 격동되여 말했다.

(세상에,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이 남자가 뭐 내가 결혼을 몇번이나 하려는 사람으로 착각하나보구나.)

구두굽이 다 없어진게 다행이지 은지는 하마트면 뒤로 훌렁 넘어갈번 했다.

 

5


이튿날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은지는 눈도 채 뜨지 못한채 문을 열었다.

《은지씨, 나 비앙스 데려가려구.》

신교수 사모님이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야옹 — 》

은지가 말하기도전에 비앙스는 좋아라고 뛰여나갔다.

《오, 나의 보배둥이!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신교수 사모님에게 안긴 비앙스는 자기 머리를 신교수 사모님의 목에 대고 부드럽게 비벼댔다.

《은지씨, 정말 너무 고마워.》

신교수 사모님은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은지씨 같은 며느리 보면 너무 좋겠다.》

은지의 눈에서 하마트면 금성이 튕길번했다.

(어디에서 어딘데?)

《우리 아들은 참, 집으로 그렇게 돌아오래두 내켜하지 않는다니까. 걔더러 정말 은지씨 한번 만나게 할 필요가 있다구. 난 말이야, 은지씨 같은 아가씨가 너무 맘에 들어.》

《별 말씀요. 사모님, 고작 비앙스 며칠 보살핀것뿐인데요 뭘.》

은지는 방그레 웃으면서 겸손하게 말했다.

(다음엔 아들을 나한테 며칠 부탁하지 않으실거죠? 다행히 집에 돌아오지 않지. 주여, 감사드립니다!)

신교수 사모님을 바래고나서 돌아서던 잡옷차림을 한 선영이가 침실문에 기대여 서있는것을 보았다.

《와 — 송은지씨, 찾아와서까지 중매를 하시는구려!》

《채선영동지, 당신의 언행을 주의하세요. 지금 난 주인마누라입니다.》

은지는 자못 엄숙하게 자신의 립장을 발표했다.

《얘, 너 대체 남자친구 있냐? 없냐?》

또 시작이다.

《물론 남 — 성 — 친구 있 — 지 — 롱!》

은지의 동문서답이다.

《너 꼭 무슨 꿍꿍이 있어. 너 엊저녁 늦게 돌아오는걸 나 다 알거든.》

선영인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때문에 은지는 엊저녁 아이스크림남자의 녀자친구역을 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생각났다. 두달후에 그 남자의 량친부모 만나는 일이다. 부모가 아들에게 결혼하라 지나치게 닥달을 하시는통에 이런 대책을 세운거란다.

두 달 이후에 아이스크림남자 부모의 심사를 영접하기 위해 은지는 이 두달안에 반드시 그 남자의 모든 자료들을 익숙히 해야 했다. 두 로인의 물음에 완벽하게 대답해야 하니까. 물론 그 대가에 지불되는 보수가 있었다. 결혼 때 입을 원피스가 아니라 주말마다 하건다스를 대접받는거였다. 돌이켜보니 저도 몰래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쩜 이렇게 멋진 보수를 생각해냈을가?)

《신인석.》

은지에게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던 그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뭐라구? 너 금방 뭐라 말했니?》

선영이가 막 달려오면서 물었다.

《내가 뭘? 내가 무어라고 말했냐? 착각하지 마. 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든.》

은지는 막 식탁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6

사흘이 지났다.

김민재와 채선영은 언제 그랬느냐싶게 아무런 일도 없었던것처럼 이내 좋아졌다. 둘은 손에 손 잡고서 트렁크를 졸졸 끌고 나갔다.

《다음번에는 제발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하고 두 손 모아 바라나이다!》

웃음꽃을 활짝 피우는 그들 둘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한 은지의 말이다.

(두 시간후엔 첫번째 보수 — 하건다스 먹으러 가야지.)

신인석은 벌써 레스토랑에서 은지를 대기하고있었다.

《송은지씨, 저 기다린지 꽤 오래되는데요.》

인석이 얼른 웨이터에게 손짓을 하자 기다리고있었듯이 웨이터는 얼른 하건다스를 올렸다.

(언제 도착하는지도 알고있었나보구나.)

《신선생님, 저는 기특한 학생이 아닙니다. 벌써부터 보수를 지불하시고 제가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때 가서 어떡하시려구 그러십니까?》

《은지씨한테 전 신심이 가득한걸요.》

《제가 하건다스 한입 먹을 때마다 저에게 정보를 한가지씩 알려주세요.》

은지는 방긋 웃어보이고는 하건다스 한덩이를 입안에 홀랑 넣었다.

《첫번째, 오늘부턴 저를 인석이라고 불러주세요. 지금부턴 은지씨의 남자친구니까요.》

삼키려던 하건다스가 목구멍으로 다시 튀여나오는걸 참느라고 은지는 무등 애를 썼다.

《나이는 27살, 쌍자자리. 혈형은 O형.》

《그러세요? 저 차례네요. 나이는 24살, 천평자리. 혈형은 A형.》

《직업은 컴퓨터유희 설계사.》

은지는 왼손을 내밀면서 신인석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정말 반갑습니다! 호흡이 너무 맞네요. 둘 다 거짓을 꾸며서 돈을 버는 직업입니다.》

《정말이세요?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상급과 련계를 달게 되였으니 말입니다.》

인석은 은지의 손을 꾹 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글쎄요, 신동무, 상급에서 당신의 생명안전때문에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모릅니다!》

《조직에 감사드립니다. 은지령도님의 뜨거운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완전히 엉망이였다!

 

7


보름동안 인석과 만날 때마다 장난을 피면할수가 없는 일이였다. 허나 은지는 인석에 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 례를 들면 O형, 쌍자자리라는것, 어떤 류형의  련애유희를 설계한다는것, 한가할 때 음악 듣길 제일 즐긴다는것, 휴일이 길어질 때는 먼 곳으로 려행을 떠나기 좋아한다는것, 반듯한 정장보다는 편한 옷을 즐겨 입는다는것, 매운 음식을 즐겨먹는다는것, 김범수의 노래 즐겨듣는다는것, 오재민이 나훈아 모창하는것을 즐겨듣는다는것…

인석이 새로 설계한 컴퓨터유희를 제일 먼저 노는 사람은 언제나 은지였다. 새 유희에 대한 은지의 평가를 알고싶어하는 인석이니까.

한주일이 지났다.

《어때? 그 유희 재미있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안타까이 대답을 기다리는 인석에게 은지는 대답을 할 대신 하건다스를 한덩이 입안에 홀랑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바로 이때 한 녀인이 네댓살 되여보이는 딸애를 혼자 옆좌석에 앉혀놓더니 카운터로 과일쥬스 사러 갔다.

《괜찮죠. 물론 괜찮죠.》

은지는 목을 뒤로 한껏 젖히며 말했다.

《어느것이 제일 재미있어?》

《돈 버는게 너무 쉬워서요.》

은지는 고개를 갸웃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첫번째 결혼에서 남편이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소방시설을 팔아버린다. 남편은 불쌍하게도 화재로 목숨을 잃고 나는 눈깜빡할새에 20만원이란 유산을 얻는다. 두번째 결혼에서 남편이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 수영장에 놓여있는 사다리를 깜쪽같이 치워버린다. 기진맥진한 남편이 올라오려고 아등바등하다가 목숨을 잃고 나는 또 잠간새에 20만원의 유산을 얻는다. 세번째 결혼에서 아예 남편을 새까만 지하실에 가둬놓고 굶겨죽인다…》

갑자기 옆좌석에 앉아있던 녀자애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왜 그러니? 유리야.》

애 엄마가 잽싸게 달려왔다.

《두려워. 엄마, 너무 두려워…》

그 녀자애는 쿨쩍이는 한편 은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마치 은지가 동화이야기에 나오는 할머니로 변장한 승냥이기라도 한듯. 녀인은 애를 안고 가버렸다.

은지는 그 녀인의 뒤모습에 눈을 박더니 막무가내라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더 말하고싶은거야?》

인석은 은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끝내는게 좋을것 같은데? 은지씨가 더 얘기하시면 아마 이 레스토랑 사장님도 입원하셔야 할것 같아서 말이야.》

 

8


한달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은지와 인석은 서로에게 얼마만큼 익숙해가고 있었다.

어느 하루, 인석은 은지를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로 데리고 갔다.

《인석씨, 중학교 다닐적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았던 여학생 없었어?》

둘은 제각기 바지궤춤에 양손을 찌른채 운동장을 거닐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은지가 소리 높여 말했다.

《사모한 여학생은 없었어도 다투었던 여학생은 있었지?》

《실은 그 때 나 키도 작구 체구도 작았지. 옆자리 여학생은 책상에 <3.8>선을 쫙 그어놓구선 내가 조금이라도 제쪽으로 넘었다싶으면 나를 때리곤 했어. 꽤 많이 얻어맞은 기억이 나.》

《음 — 그때 내게 업수임을 당했던 그 바보같은 자가 바로 너였구나! 하하 —》

은지쪽에서 먼저 농담을 걸어왔다.

《예전 나를 업신여긴 장본인이 은지학생이였구나!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손 한번 잡아봅시다, 삼팔선학생!》

《이쯤이면 아주 똑똑하게 알려준거 아냐? 나 삼년이란 세월 너한테 당했었잖아. 오늘 내가 그 빚을 톡톡히 받아내고야말겠어.》

인석이 팔소매를 둥둥 걷어올리자 은지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꼬리 빳빳이 도망쳤다.

《사람 살 — 려 — 요 — !》

둘은 이렇게 점점 익숙해졌다.

 

9


한달하고도 25일이 지났다.

인석이 느닷없이 은지네 세집 문어구에 불쑥 나타났다.

《어머, 인석씨?》

은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 나야. 우리 부모님이 오늘 너에게 저녁 사주겠대.》

인석이 말투도 이젠 점점 은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뭐? 인석씨 부모님들 며칠후에 이리로 오신다면서.》

《아냐, 바로 여기에 있어. 그리구 지금 당장 너 만나겠대.》

《뭐?》

은지는 점점 이해가 안갔다.

《바보! 우리 부모 여직 이 옆집에 살고있었어.》

《인석씨, 지금 신교수님부부 얘기하는건 아니겠지?》

《미안한데 바로 신교수부부야.》

순간 은지는 자욱한 안개속을 헤매는것 같은 느낌이였다. 은지와 마주 선 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부모님들 나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너를 칭찬하셨어. 너 같은 처녀를 안해로 맞아들이라고. 아마 인연이 되려구 그랬겠지. 맨처음은 그 날 급히 계단을 내려가다가 면바로 너와 부딪쳤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은 그 날 저녁 또 레스토랑에서 다시 너를 만난거야. 한번쯤은 연극속의 주인공이 되고싶어서 시작한거야.》

《헌데 인석씨는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게 되였어?》

《너의 옷차림이라든가 너의 외모특징이라든가 너의 행동거지를 내가 얼음우에 표주박 밀듯 줄줄 외울수 있을정도로 나앞에서 부모님들이 얘기하셨으니까.》

예까지 말을 한 인석은 은지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은지야, 부모님들의 말씀이 천만지당하다는걸 느끼게 되였어. 정말로.》

인석은 부드럽게 은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주말마다 하건다스 한끼씩 먹는 일 장기적으로 계약하면 어떨가?》

은지는 실눈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인석을 한식경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만에야 굳은 결심을 내린 은지는 또박또박 얘기했다.

《나 — 찬성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인석의 얼굴은 금방 굳어졌다.

《이— 이유가 대체 뭔데? 은지야.》

《이유가 뭔가구?》

은지는 두눈을 내리깔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는 바로 한주일에 하건다스 한끼가 부족해서. 혹 두끼로 고치면 안될가?》

《뭐?》

인석의 입은 그의 혈형과 같은 상태로 되였다.

《은지아가씨, 살 오르는거 두렵지 않나부지?》

《아니, 절대루. 허리가 지금의 두배로 늘어나면 인석씨가 나 안을 엄두도 내지 못할테니까!》

《헤헤 — 그래도 난 두렵지 않아. 살 얼마든지 올려 제발. 어떻게든 난 널 안을수가 있으니까.》

인석의 웃음소리와 함께 은지의 발은 어느새 지면을 떠났다.

세상은 즐거운 웃음속에서 돌고 돌고 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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