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박사의 퓨전로드맵]

세 번째 이야기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

지난 200년간, 한중일 삼국은 제각기 남들처럼 살았다. 담벼락을 높이 쌓아 올리고 각자의 색깔을 만들고 각자의 목소리만 높여가면서 살아왔다. 그 세월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와 미움을 키워 왔으며, 그만큼 멀어져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소통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이제 담을 허물어야 한다. 나를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중일 삼국은 이제 아시아의 허브이자 세계역사를 이끌어갈 아시아대륙시대의 삼두마차다.

아시아의 블랙홀, 중국의 비상

인류역사상 가장 앞선 선진국은 어느 나라일까. 미국?, 프랑스? 독일? 혹은 영국? 최근 100년간의 역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대답엔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미국이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대략 1700년대말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대답은 더욱 명료해진다. 그것은 역사속에 잠자고 있는 거인을 재발견하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모든 시대에 걸쳐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선진국 ― 그 해답의 주인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1820년 이전까지 중국은 세계 GDP의 33%정도를 차지하는 대국이었고 그 이전 2000년 동안 중국은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2세기까지는 서방세계의 1인당 GDP보다 높았으며 18세기까지는 세계 평균보다 더 높았다. 콜럼부스가 미국대륙을 발견했던 16세기 대 항해 시대에도 중국은 포르투칼이나 네덜란드보다 더 큰 규모의 조선(造船)기술을 갖춘 선박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략 1820년경부터 중국은 내전과 기근으로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청왕조의 부패와 민중의 극심한 빈곤,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내란과 소요 속에서 세계 최고의 대국 중국은 서서히 침몰해갔다. 이때가 중국으로선 진시황 통일 이후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 이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내전과 공산화를 거치느라 세계 3분의 1을 차지했던 경제규모가 불과 2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아에 허덕이는 11억 인구의 나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그 막대한 인구를 빈곤의 고통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지리한 공산혁명에 이어 수많은 지식인들을 암흑세계로 내 몰았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중국에 그 누구도 희망을 걸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중국엔 무서운 태풍이 불고 있다. 침몰해가던 거함 중국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중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빠른 경제성장, 그리고 최대의 인구를 가짐으로서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자존심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가고 있다.

그들의 자존심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주요 사회 경제 지표들이다. 중국은 지금 2조억불에 이르는 세계 최다외자유치국이며, 매해 두 자릿수의 초고속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13억이라는 세계 최대 인구와 전 세계 화교권과 홍콩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민족경제공동체 보유국이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구나 재작년 10월 15일에는 중국인들의 자신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성공적으로 우주탐사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일을 두고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이룬 쾌거’로 보고 있다. 중화민족 천년의 꿈이란 ‘항아(嫦娥)의 전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전설은 사약을 훔쳐 용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갔다는 미녀에 관한 전설로, 최초의 우주탐사 사건이 얼마나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는지 짐작케 한다. 한껏 고조된 자긍심을 반증하듯 중국항공우주국은 3년 안에 달 탐색선 항아 1호 발사계획을 발표했었다. 거기에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지금, 진시황의 중국통일이후 역사적으로 늘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패권주의적인 중화의 자존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충천해 있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은 1970년대 말,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그가 중국재건을 위해 채택한 것은 중화사상과 경제건설, 그 두 가지였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다. 흑묘백묘론이란, ‘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즉 사회주의건 시장경제건 중국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면 뭐든 좋은 것이며 그것을 채택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세계는 이러한 덩 샤오핑의 결정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가장 중국적인 선택이었다. 어떤 정치이데올로기가 지배를 하고 있건 중국인을 지배하는 사상은 실용적인 중화사상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덩 샤오핑은 일부 중국공산당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의 중요한 대 원칙인 계획경제를 버리고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중국 동남부지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 선전(深川)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세계 시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콩과 대만의 기업들 그리고 동남아에 있는 화교자본들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탄생했다.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이어 장쩌민의 국가발전 3대 지향론, 즉 현대화, 미래화, 세계화는 세계 시장질서 속에서 중국이 다시 한 번 세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특히 후진타오는 21세기형 리더로서 2010년까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해 선진생산력대표, 선진문화대표 그리고 폭넓은 인민이익대표 라는 이른 바 ‘3개 대표론’을 주창해 경제, 문화예술, 복지의 세계핵심분야의 선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후진타오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샤오 캉(小康:풍요한 수준의 삶)’, 즉, 인민 하나하나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관된 정책속에서 부패한 청나라 왕조와 오랜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중국의 민중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국민으로 변했다.

그 결과 30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공룡, 중국의 위협에 맞서 자국의 경제 챙기기에 골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국은 이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의 반열에 등극했고, 세계는 중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경제전문가 마틴 울프는 중국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으며, 이제 세계는 적당한 대응책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때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미국에게 있어 지금의 중국은 20세기 일본과 옛 소련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강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의 부상 이후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제가 위축되고 있으며 중국의 성장과 함께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아시아대륙에서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중국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지도국으로 부상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시보다는 후진타오가 더 환영받아 왔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최대 교역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또한 한반도에 끼친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지대하다. 많은 사람들이 북핵문제를 풀어가는 주도권이 미국과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막후에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중국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동북아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 전체를 역동적인 대륙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중심 진원지에 있는 중국은 국제 정치, 외교, 통상, 금융, 문화, 기술 등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신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당제국(大唐帝國)의 부활’ 또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의 재현’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켠에서는 뜨는 중국, 지는 미국이라는 시니컬한 비유도 흘러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중국의 부상과 함께 세계 질서의 중심이 아시아 대륙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즘 중국 네티즌들이 열심히 인터넷에 퍼 나르고 있는 이색적인 한 문장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내용인 즉 이렇다.

“1949년,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79년,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89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2009년,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해석이 필요없을 내용이다. 신(新)중국을 탄생시킨 사회주의 혁명, 중국의 개혁·개방,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60년의 중국 현대사를 중국·사회주의·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이 압권이다.

중앙일보 장세정 북경 특파원은 이런 중국 네티즌들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덩 샤오핑(鄧小平)의 도광양회(韜光養晦)시대를 지나 후진타오(胡錦濤)의 화평굴기(和平掘起) 시대가 무르익은 이때, 중국과 미국이 수교한지 만 30주년이 되는 올해 미국인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기를 오로지 중국만이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위신이 깍일대로 깍인 아메리카 제국이 ‘버락 오바마’라는 걸출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맞이했지만, 자부심이 넘쳐나는 부활중인 제국, 중국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한반도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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