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앙인민방송국 이미란 기자

해설: 라지오 다큐멘터리 <산동처녀 서울유학기> 편집 이미란, 해설 고려대학교 유학생 주옥.

▲ 저자 이미란 기자
지하철역

<다음역은 안암(고대병원앞)역 입니다. 내리실문은 오른쪽 입니다. (영어로 다시 한번) 출입문 열립니다.>

지하철소음-

해 설: 이제는 익숙해진 지하철 안내 말이 중국인 유학생 왕보하에게 이곳이 고향 산동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서울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서울 구석구석을 연결하고 있는 지하철이 왕보하에게는 새롭기만 했다.

왕보하: “제가 서울에 온지 5년이 되는기간 안암역은 수없이 오고간 역이얘요. 서울에는 교통이 발달해서 지하철 9호선까지 있어요. 어디에 가려고해도 아주 편리해요. 도시가 발전하는 기본적인 상징이 교통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어디에 가려고해도 교통이 편리해서 서울이 좋아요. 제가 언제 졸업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가장 잊지 못 할것이 바로 지하철일 것 같아요. 서울도 중국못지 않게 정이 들었어요.”

해 설: 글로벌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재중한국인 백만명 시대를 맞이했고 한국은 재한 중국인 60만명, 그중 유학생 6만명으로 두 나라는 화합과 공존을 이루어 가고 있다.

2009년 현재 중국과 한국 두 나라는 상대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각각 거주 외국인 총수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명문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고려대학교 박사 과정 마지막 논문심사를 앞두고 있는 왕보하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중국으로 돌아가 교단에 서게 될 꿈을 꾸고 있다

배경음악—

해 설: 중국 산동성 제성시 상주진 동성양촌. 찐빵(mantou)에 생파와 오이를 짜짱에 찍어 즐겨먹는 농촌 마을이 한족인 왕보하가 나서자란 고향이다.

왕보하의 집에서 가문의 몇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그리고 사돈에 팔촌까지 캐도, 그 근방 촌과 진에서는 유학생이라고는 한명도 없다. 왕보하가 고향 마을의 첫 유학생이자 첫 박사생이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고 동성양촌에서 봉황이 나온 셈이다. 왕보하는 가문의 자랑이자 동성양촌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왕보하: “90년대 중국에서 한국드라마를 많이 보았어요. 드라마에서 한국의 여자들이 말하는것이 너무 예쁘고 경치도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마음 먹었고 또 한국으로 유학하러 왔어요.”

해 설: 지난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한후 두나라는 수십년동안 얼어붙은 장벽을 깨고 서로 상대를 포용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키워왔다. 세인을 놀래운 <한강의 기적>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고 한국드라마 “보고 또 보고”로부터 시작한 한류는 세찬풍을 중국으로 몰고와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붐을 일으켰다.

왕보하: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특히 교수님이 나이든 분이신데 할아버지말투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선배님들이 <통역>해 주셨어요. 듣기 쉬운 말로 해석해 주었지요. 발음도 잘 되지 않아서 선배들의 꾸지람을 많이 받았고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 한번은 제가 전화를 받았는데 잘 알아듣지 못해서 직접 조교실에 가서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야, 그렇게 쉬운 말도 못 알아들었어. 너 한국어 배웠지 않아. 너 너무 심한것 아니야. 그것도 못 알아들었어>제가 너무 창피해서 그만 눈물을 찔찔 짰어요.”

해 설: 중 한 두나라는 같은 문화권에 속한다고 하지만 왕보하에게 있어서 한국어는 언어 환경이 없이 시작한 낯선 외국어이다.

중국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뒤바뀌어 주어, 술어, 보어인 중국말 어순을 꺼꾸로 해야 하는 한국어… 중국에서 나서 자란 한족으로 한국어를 익혀가는 것은 왕보하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 더운물과 찬물을 마시는 같지 않은 생활습관, 행인 우측통행과 좌측 통행의 전혀 다른 교통규칙, 천천히 문화와 빨리빨리 문화, 이런 두나라 문화적 차이 속에서 왕보하가 풀어가야 할 숙제는 두 나라 관계처럼 많고 많았다..

왕보하: “2003년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200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접 한국으로 유학왔어요. <ㄴ>와 <ㄹ>발음이 안되서 교수님이 저보고 발음할 때 혀를 앞으로 밀어 밀어 그냥 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발음을 잘 하려면 마늘과 김치를 많이 먹어야 한대요. 매우니까 혀가 펴져 발음이 잘 된다고요. 처음에는 입에서 냄새가 나서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잘 먹어요.>
해 설: 왕보하가 경원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할 때 조교로 있으면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선배가 지난 일을 말해준다.

태환오빠: “ 중국에서 온 인들은 <얼굴>같은 <ㄹ>발음을 잘 발음하지 못해요. 그래서 마늘을 많이 먹으라고 했지요. 마늘이나 김치를 먹고 매워서 하, 하, 할때 <얼굴>이라고 발음 하라고 하면 혀가 펴져서 정말 제대로 잘 발음 하거든요. 안 해 봤지요.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보세요. 아-- 그런데 이건 제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학을 하면서 만들어낸 이론이예요. 하,하,하…앞으로 제가 책을 쓰면 <마늘 한국어?>라고 이름을 달가 해요”

해 설: 선배 말을 곧이 곧대로 듣는 순박한 왕보하는 한국어를 잘 하기 위해 마늘과 김치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마늘과 김치를 많이 먹어서 인지 아니면 그가 고심히 공부해서 인지 왕보하의 한국어 수준이 날에 날마다 달라져 갔다.

외국어를 배울 때 배운 단어를 그러한 환경속에서 써보아야 잘 배울수 있고 또 인상 깊게 남을수 있다.
왕보하는 배움에서 파고들어가는 성격인지라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재미난 일도 많았다.

왕보하: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 어떤 단어는 대충은 아는데 어떤 때 어떤 환경에서 쓰이는지를 알고 싶었어요. 예를 든다면 <뻥치네>같은 거얘요. 그래서 한번은 성진이 오빠를 만나자마자 <오빠 뻥 치시네요>하고 말했어요. 성진이 오빠는 화가 나서 거의 뛰다 싶이 하면서 말을 못했어요. 성진이 오빠는 좀 과장한 표정을 하는 편이얘요. 그래서 오, 이런 단어는 어떻게 쓰는지 알았어요”

해 설: 왕보하는 <뻥치네요>가 부정적인 의미인지도 잘 모르고 선배에게 써보아 선배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성진오빠: “처음 당했을 때 어, 어, 하면서 야가 나한테 이래도 되는건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못했어요. 내가 화가나서 그러는데 <배운거 써보았을 뿐 이얘요. > 뭐, 뭐라고? 누구한테 배웠는데, <태환오빠한테요. 태환오빠가 성진이 오빠한테 한번 써보라고 했어요. >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보니까 태환형이 보하한테 배워준 것 이였어요.”

태환오빠: “한번밖에 안 배워 줬어. 이거 큰일 났네. 나쁜것은 다 내가 배워주었다고 하니까”

해 설: 한국에서 좌충우돌하면서 한국어를 배워가던 왕보하의 한국어 능력은 현저하게 제고되였다.

왕보하의 한국 생활기를 지켜보았던 친구는 그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친구(녀): “저는 그것까지 기억해요. 한번은 교수님이 중국인인데 공부를 아주 잘 한다고 소개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왕보하, 왕보하, 보하언니 하면서 지냈는데 후에 보니까 저와 동갑이었어요. 제가 처음 보하를 만난 것은 술자리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이 중국인으로서 한국사람처럼 한국말을 너무 잘한다는 인상이었어요.”

태환오빠: “한국말을 잘해서 택시기사들이 중국사람인 줄 몰라요. 처음 왔을 때는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한국말을 여우처럼 잘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해 설: 마늘과 김치를 많이 먹어야 한국어를 잘 할 수 있다고 왕보하에게 장난기 어린 충고를 했던 대학원 선배 이태환도 왕보화의 유학생활 5년을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태환오빠: “제일 처음 보하에 대한 인상은 4글자로 말할수 있어요. <촌스럽다>. 그때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 옷을 입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금방 와서 한국의 매운 음식에 적응이 안되어서 얼굴이 벌게서 다녔지요”

해설: 경원대학교로부터 고려대학교로, 석사생으로부터 박사생으로 이렇게 왕보하가 탈바꿈하면서 금상첨화로 그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태환오빠:“한번은 추석이어서 다른 중국사람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보하가 있기에 추석에 집에 안 가는 가고 물었더니 안 간 대요. 그러니까 어찌겠어요. 우리 집이 여기서 5분 거리인데. 그래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집에 딱 들어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보하를 보고 <야, 힙붙이고 앉아>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알아듣지 못해서 <얘? 얘? >하면서 앉지도 못하고 서 있었어요. 보하가 우리어머니 양딸이라고 하면 우리 어머니 성격에는 아마 맞지 않을 걸요. 친딸로 보고 있지요. ”

어머니: “나도 모르겠어요. 어쩌다 정이 들었는지. 처음에 왔을 때 내가 설거지시켜 보았어요. 얘는 설거지하나 깨끗하게 못했어요. 그런데 얘가 뭐나 한번만 배워주면 제대로 잘 해요. 그래서 난 얘가 고와요. 사실 얘가 못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얘가 곱거든요. 그래서 옷도 사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했어요. 얘가 고시원에 있다가 혼자서 독립해 나온다고 하기에 이사할 때 이불, 베개, 가마, 수저, 그릇 할 것 없이 내가 몽땅 장만해 주었어요. 제가 중국역사에 대해서 이것저것 잘 물어봐요. 차를 몰고 가서 꾸러미 꾸러미 부려주었지요. 얘가 나를 잘 만났지요 뭐.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 하는지 아세요. 나의 별명은 <해결사>얘요.”

해설: 왕보하 대학원 선배의 어머니인 이상태여사, 그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중국인 왕보하에게 친어머니처럼 가무를 가르치고 생활을 가르치는 한편 딸을 시집보내는것처럼 살림살이도 준비해 주었다. 국경과 문화, 인종의 계선을 넘어 맺어진 그들의 다정한 모녀관계는 일반 사람의 사유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면에서 볼 때 왕보하는 정말 행복한 한족처녀이다.

왕보하: “어머니는 딸이 없어서 저를 친딸처럼 여겨요. 얼굴이 밝은 표정이 아닌 분이어서 모두 무섭다고 해요. 하지만 정이 대게 많아요. 어머니는 상상할 수 없이 깨끗한 분이에요. 내가 일요일이면 집에 가서 밥 얻어 먹으로 가요. 가면 밥하는 것 배워라, 청소하는 것 배워라, 요리하는 것 배워라 라고 하며 배워줘요. 그래서 많이 배웠어요. 지금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찌개, 삼계탕, 약밥 등을 모두 할 줄 알아요.

한국음식은 맵고 짜고 담백해요. 중국음식은 기름이 많지요. 나는 산동 사람인데 산동의 음식은 짜고 기름이 많아요.”

해 설: 5년 간의 한국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한국 문화를 이해하게 된 왕보하는 음식문화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왕보하: “한국은 거리가 깨끗하고 할머니들은 연두색 바지에 핑크색 웃옷을 입기 좋아해요. 화장도 진하게 하고 다녀서 밝게 보여요. 그런데 중학교 여학생들이 옷을 너무 몸에 꽉 끼게 고쳐 입고 다녀서 좀 불편해 보여요. 아가씨들은 너무 유행을 따라서 겨울에는 오히려 치마가 짧아지고 여름에는 치마가 길어요. 지하철에서 보면 너무나 유행을 잘 따라서 다 비슷해 보여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여기는 너무 민주인 것 같아요. 거리에서 데모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해 설: 고향을 떠나 낯선 한국 땅을 밟은 지도 5년이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누구나 그러하듯 왕보하도 고향집 생각을 한다.

전화벨소리

왕보하: “집에 있었군요. 식사했어요?

해 설: 부모님께 전화 할때면 왕보하는 고향의 심한 산동방언으로 대화를 한다.

왕보하—계속: “ <식사했어요? > <아니.> <요즘 바쁜가요?> <안 바빠.> <건강은 좋으신가요?> <응. 건강하다.> <엄마 바꿔주세요.>…<여보세요. 나 보하에요. > <응. 안다. > <지금 뭐해요? > <밥하고 있지.> <저녁에 뭘 드셔요.> <만두, 오이에 짜장을 찍어 먹지.> <좋은 음식 많이 해 드세요.> <좋은 음식을?> <난 지금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나도 널 보고 싶다.>…”

해 설: 다른집 부모와 자식들이 의례 그러하듯이 식사하였는가와 건강을 묻는 안부인사, 그리고 보고싶은 마음을 전하는 통화이다. 찐빵에 오이를 짜장에 찍어서 드신다는 어머니의 대답은 왕보하에게 더더욱 친근하게 들려온다.

한국에 간 다른 유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장만하는 것과 달리 왕보하는 당당하게 자기의 실력으로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사전편집실에 들어가 사전편찬에 참여하면서 집의 부담을 완전히 덜어주고 있다.

도원용부장: “제가 왕보하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해 설: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사전편찬부 도원용부장의 말이다.

도원용부장--계속: “우리 한-중사전이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는데 왕보하 선생과 다른 조선족 한 분이 둘이서 교정작업을 깔끔하게 끝내서 2008년 5월에 교정이 끝나고 2008년 10월에 한-중사전이 나왔어요. 그래서 원장선생님이 너무 기뻐서 왕보하를 칭찬해 주셨고 중국 왕복티켓도 장려해 주셨어요. 지금은 한-중관용어사전편찬을 하고 있는데 왕보하 선생의 박사논문제목도 한중-관용어대비분석이기 때문에 왕보하 선생이 주도적으로 학자답게 잘하고 있어요.”

해 설: 왕보하는 차분한 성격에 미소 띤 얼굴로… 열심히 일을 해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왕보하: “지금 저는 고려대에서 최호철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최호철교수: “ 우리가 받아들이는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학사, 석사생 들이어서 언어와 글을 다시 배워주어야 하는데 왕보하는 언어 소통이 문제가 없고 다른 대학에서 이미 석사논문을 써보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왕보하는 차분한 성격이고 말이 적은데…”

해 설: 중국사람이 한국말을 아무리 잘 한다고해도 한국사람만은 잘하지 못할것이고 말하기는 그나마 쉽다고해도 외국어인 한글로 박사논문을 쓰는 것은 힘에 부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전편찬에도 참여하면서 논문을 써가는 왕보하는 하루에 컴퓨터와 마주 하고 있는 시간이 적을 때는 12시간 정도라고 하니 그녀가 공부에 들이는 노력을 짐작할 만 하다.
왕보하: “나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에요. 나는 중국에 돌아야 내가 배운 것을 모두 학생들에게 배워주려 해요.

지금 중-한 관계를 놓고 보면 경제교류는 잘 진행되고 있는데 문화교류는 경제교류만큼 활발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봐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몇 달이 남았는데 나는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해서 중국작품을 한국에 알리고 한국작품을 중국에 알리며 두 나라 문화교류를 위해 저그마한 힘이나마 기여하려 해요.”

생일파티—

해 설: 산동성 시골마을 출신의 한족처녀 왕보하, 그녀가 지난 5년동안 서울에서 보낸 시간들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힘든 젊은 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중국에 돌아와 펼치게 될 인생은 중 한 두나라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를 하면서 보내는 왕보하라고 해도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

마침 왕보하의 생일이여서 공부에만 파뭍혀있는 왕보하와 그의 친구들에게도 숨돌릴 시간이 생기게 되였다.

<생일축하노래>

친구들의 축복—

왕보하--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소양강처녀>를 부른다.

왕보하의 노래에서 배경음악으로 바뀌면서

<다음역은 안암<고대병원앞>역 입니다. (영어로 다시 한번) 내리실문은 오른쪽 입니다. >

배경음악속에서—

해 설: 고려대학이 위치한 안암역, 그것은 왕보하에게 있어서 잊지못할 출행의 한 역이고, 서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한 역이다.

금후 왕보하가 인생의 항로에서 지나야 할 역은 많고 많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역을 지날지, 그의 인생 항로는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은근과 끈기로… 그리고 성실한 노력으로 인생의 문을 열어나가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음악계속-

해 설: 지금까지 라지오 다큐멘터리 <산동처녀 서울유학기> 편집에 이미란, 해설에 고려대학교 유학생 주옥이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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