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평화상 수장자로 케냐의 여성 환경부 차관인 마타이(64)가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아프리카에 3천만그루의 나무를 심는 '그린벨트 운동'을 이끌고 있는 여성운동가 마타이를 '민주주의 와 인권 그리고 평화 특히는 여성의 권리를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광범위한 노력'해 와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환경운동가로 평화상을 받는것은 전쟁시기 평화를 절박히 수요하고 주장한데 비하면 그 평화상의 의미가 무색해보이기도 한다.

평화로운 세상이지만 아직도 세계 유일 분단국의 사각지대에서 중국동포들의 암울한 인권과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를 주장하며 온몸을 던져 투쟁하는 서경석목사가 노벨상후보가 된다면 나는 그에게 한표 던지고 싶다.

서경석목사, 이젠 그 이름은 우리 중국동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서경석목사는 일찍 96년 326명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몇천명이 병원에 가고 집 빼앗기고 가정이 파탄에 이른 '동포초청피해사기사건'의 조사참으로 연변에 갔다가 넘 암담한 현실과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귀국하자 서울조선족교회를 창립해 전문 중국동포의 인권을 상담하고 동포들 대변해 정부에 동포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흑기사이기때문이다.

내가 서경석목사를 처음 만난건 2년전 어느날 즉 2002년 정부의 불법체류자 강제추방 반대 초불시위때부터다.그전까지 교회문과 담 쌓아 30년 넘게 살아오던 나는 한국에 나와 불법체류자로 전락되여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며 나름대로 스트레스와 정신고통을 받으면서 불합리한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대림역 지하철역에서 초불시위에 동참하길 바라는 전단지를 받고 처음으로 서경석목사를 알게 되었고 서울조선족교회도 알게되였다.
서경석목사의 눈물겨운 호소와 진지하고 진실된 모습에 초불시위에 참여한 2000여명의 중국동포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도 동감을 표했다. 사실 나도 그때부터 서경석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였다. 당시 말로만 동포를 동정하는 한국사람들을 많이 봐 왔지만 실질적으로 동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서경석목사님을 처음 보는지라 넘 고마웠었고 존경스러웠었다.

초불시위에 이어 나는 주저없이 목사님과 같이 삭발하는데 동참했다. 20여일간의 서경석목사님과 중국동포들의 단식투쟁으로 끝내 서울출입국관리소소장이 서경석목사님과 만나 1년 연기하는 큰 성적을 이루었다. 그소식을 듣고 많은 동포들이 생기와 힘을 얻었고 기쁨을 되찾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종 서울조선족교회와 같이 했다. 비록 지금까지도 한번도 교회서 예배를 드린적 없지만 수시로 사이트를 찾거나 가끔씩 서울조선족교회에 들리곤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도 서경석목사님은 한 초라하고 작으마한 동포교회의 목사라고만 알고있었다. 하지만 서경석목사님이 동포들 위해 투쟁할적마다 정부는 동포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부의 '불법체류자 3,4년미만자 합법화 조치','5700명 불법체류자 국적회복신청서 헌법소송',이어 재외동포법개정안 국회통과, 대통령의 중국동포인정과 법무부 중국동포 국적회복시행강령, '외국인고용제의 실시', 국회의원들의 '재외동포문제연구회'출시 등 중국동포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누구도 언급하는 이가 없던데로부터 국가차원에 이르게까지 되였다.

한사람의 힘으로 동포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준 서경석목사님은 중국동포들의 대부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국적회복서류간소화, 국제결혼피해급증, 임금체불 등 불법체류자들의 인권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어 서경석목사님은 주야 구분없이 동포들 위해 뛰고 있다.
밤새면서 글쓰고 읽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씩 서경석목사님은 머리를 빗질 안한 모습을 할때가 많다. 날을 새는 경우가 많아서다. 연애시절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운동시절,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약속사이에 잠시 빈 시간을 이용해 신혜수씨(부인,당시 24세)와 데이트를 했다.'서경석씨는 왜 그렇게 머리를 안 감아요?''근지럽긴 한데, 도무지 목욕할 시간이 없어'.30여년 지난 지금도 재외동포 인권과 나라걱정하는 서경석목사에겐 시간이 너무나도 모자란다.

서경석목사는 민주화운동시절, 2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2번 더 감옥살이 한후 미국에서 박사학위따고 목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5년간 미국에 있으면서 재외동포들의 회의도 소집했고 1987년 김대중전대통령의 귀국 환영대회 사무국장을 맡아 재미교포 3천200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귀국후, 1989년 부동산 투기 근절하는 새로운 운동 '경제정의 실천 시민연합'즉'경실련'의 대표를 맡았고 베트남, 북한, 이라크돕기운동, 재외동포돕기 운동위원회 대표,'나눔과 기쁨' 공동대표 등 현 서울조선족교회 담임목사외 많은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일 하고 계신다.

나는 가끔씩 서경석목사님이 왜 '한국의 아브라함'집안에서 안일한 인생을 보낼수 있었음에도 이길을 택했는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서경석목사님의 증조할아버지 서경조목사님은 한반도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우셨고 서경조목사님의 형님인 서상륜목사님은 한국 최초 성경책을 한글로 번역해 한국에 들여와 보급하셨고 조부 서병호 장로님은 한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으셨다. 또한 서병호 할아버지는 김구,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로 활동했고 상해 임시정부 의정의원 겸 내무위워을 지내시기도 해 서경석목사 아버님 서재현 장로 부자가 각각 독립운동의 공로로 국민훈장 애국장을 받으시기도 했다.

서경석목사 아버지 서재현씨는 상해 국립동제대학 대학원을 나와 1948년8월 상해에서 돌아와 진해 해군 공창장과 인천 해군 공창장을 지내 보기드문 석사학위까지 받으신 엔지니어이자 최고 경영자이시고 어머니는 남경의 금능대학(지금의 남경대학)나오신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인텔리 여성이시다.

서울공대에 입학한 서경석목사는 유복하고 아늑한 생활을 할수 있었음에도 모든걸 포기하고 무엇이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것인가를 생각하였고 대학시절 경제복지회라는 운동권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시절을 열게 되는데 현 보건복지부 김근태의원도 당시 경제복지회 선배다.

지금 애를 낳는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말도 있다. 반면 군대가기 싫어 병역비리를 저지르는 의원들 자식들이나 연예인, 스포츠인들도 많다. 친일파청산, 국가보안법페지 등 탄핵으로 정치파행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또 무겁고 힘든 과제를 안고 나아가고 있다.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가 있다'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문제와 동북아 중심지로서의 한국 나아가서는 통일로의 한반도 등 아직도 우리에겐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이런 관점에서 서경석목사님을 다시 돌아봤을땐 너무나도 보귀하고 자랑스러운 보석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99년을 기준으로 서경석목사는 학생운동으로 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전반생을 보냈고 또 다른 후반생을 중국동포와 북한동포들과 함께 하고 있어 영원히 지지 않는 한 별로 우리 민족사의 한페지에 반짝이지 않을가 생각도 해본다.

중국동포들의 가슴속엔 서경석이라는 엠블렘이 영원히 새겨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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