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룡해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명예회장

차례

1. 들어가면서
2. 산동성 조선족의 맥락
3. 산동성 조선족의 삶의 현장
  1)조선족 인구분포 개황
  2)조선족단체 개황
  3) 코리아 타운 현황
 4.조선족 사회의 취약성
 5.  나오면서 - 조선족의 미래전망

 

1. 들어가면서

세인들은 우리를 흔히 백의민족 혹은 배달민족 또는 과경(跨境)민족이라고 일컫어 오고 있다. 태초로부터 백의겨레들은 백두산을 맥으로 하고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을 젖줄기로 겨레의 얼과 생명력을 키워왔다. 장장 반만년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겨레들의 숨결은 산줄기따라 강줄기따라 저 멀리까지 퍼져 흘러가고 있다. 생명의 연장선에서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소중한 뿌리들을 땅속 깊이까지 얽기설기 뻗혀나가고 한 두가지 나무들을 부추켜 살려 무성한 숲을 이루어갔다. 오늘날 해외 백의겨레는 총 800만 명으로 세계 140여 개 나라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중국에 225만 명, 일본에 80만 명, 러시아에 45만, 미국에 130만, 중남미에 10만, 그리고 캐나다,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에 널려 살고 있다. 그 중 중국에 제일 많이 집거해 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중국 조선족들은 원래의 보금자리에서 오손도손 살아오던 고향—서식지를 떠나 철새처럼 황하와 장강을 넘어 계속 남으로 이동해오고 있다. 흩어져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자꾸 흩어지기만 하고 뭉치지 못하면 정체성이 흐틀어지기 때문에 가담가담 하나 둘 <<작은 동네>>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해 시급히 재확인하고 규명하여야 한다는 필요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산동성내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삶의 현장을  거시적으로 소개하고 아울러 산동성 조선족 사회의 미래를 짚어보고자 한다.
 
2.  산동성 조선족의 맥락

산동성의 조선족은 백의겨레의 또 다른 하나의 갈래이다. 저는 이 갈래를 과경민 (跨境民)의 후손이라고 부르고 싶다.  19세기 중말엽부터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두고 삶의 터전을 중국 대륙 쪽으로 넓혀 온 중국 조선족은 오늘날 이 땅에서 자치정부를 세우고 민족의 공동체를 이루어왔다. 이 과정에는 시종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의 대이동 역사는 세 차례를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제 1차 이동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4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 여기에 세차례 이민 고조기가 있었다. (각주: 예를 들면 1875년 봉천성(奉天省)에서는 봉금령(封禁令)을 폐지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길림성의 봉금령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 두 성에 청정부는 무민국(扶民局)과 황무국(荒务局 ) 을 설립해 조선과 산해관 이남의 가난한 백성들을 불러들여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기사년 (1969년) 게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때 조선 북부지역에는 재해가 들어 수많은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이것이 제1차 고조기를 이루었다. 

제2차 이민고조기는 1910년에 조선반도에서 일제의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한합방(韩日合邦)”이 체결된 다음이다. 이 때 많은 독립애국자들과 농민들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했다. 제3차 이민고조기는 1936년 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이다. 위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이민협정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위만주국에 1만호의 이민을 보내기로 했다. 1941년에 일본정부는 <<개척단(开拓团)>>이라는 명의로 조선 남부의 농민들을 각지에 보냈다.  제2차 이동은 1945년 해방을 맞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많은 중국 조선족들이 연변과 흑룡강 및 료녕성 각 지역에서 대거 조선반도로 넘어갔다. 다시 고국에 돌아간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려 210만 명의 조선사람들 중에서 40% 이상이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 재일동포는 60%가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시기는 원점으로의 귀환을 꿰했던 대이동으로서 이민으로부터 국민으로 다시 복귀를 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계속 중국 땅에 남아있던 조선족들은 점차적으로 정착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52년에 정식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를 길립성 연길에 세움으로서 조선족은 당당한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민족자치제도의 도입은 조선족의 주체성을 합법적으로 굳혀오게 했다. 이 시기는 중국조선족들이 중국이라는 이 넓은 땅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민족적 주체성을 이룩한 시기로서 조선족의 훌륭한 인재들이 관내의 대학이나 군대에 갈 수 있었다. 

제3차 대이동 시기는 1978년으로 부터 시작되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의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이민고조가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중국조선족 공동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물결에 힘입어 조선족들은 외국으로 중국 연해도시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중, 후반기 부터 조선족들이 김치장사나 식당업으로 청도, 연대, 위해 등지에 동북 3성으로부터 조선족들이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1990년 위해-인천간 이동페리가 처음으로 개통되면서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떠나는 조선족들이 대거 산동성을 경유하면서 위해, 연대, 청도가 한낱 더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989년 산동투자 제1호 한국독자기업인 <<청도토프톤전기회사>>가 청도시 청양구 선가체촌에 자리를 잡았다. 이 기업에 조선족들이 취직하게 되면서 한국기업에로의 취직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한수교해인 1992년이후로는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물결처럼 밀려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는 매년 증가세를 보였다. 산동성의 조선족의 역사는 6,70년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 관내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산동성의 연해도시인 청도나 연대에 직업을 얻어 정착생활을 한 조선족 과학인과 간부들이 있었고 또 제남이나 청도, 그리고 위해시에 해군, 육군 등 정보부문에서 근무하는 조선족 군인들이(현귀춘 등) 여러 명 있었다. 이 외에도 해양산업에 종사하는 과학자, 학자분들(허동우 등)이 70년대에 청도로 진출하였다. 

  위의 세 차례의 민족 대이동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사는 모든 백의겨레의 역사에 속하는 하나의 민족의 이민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산동 조선족의 역사와 현재는 중국 조선족뿐만이 아닌 해외의 모든 겨레들의 역사와 현재의 연장인 것이다.


3. 산동성 조선족의 삶의 현장

1) 조선족 인구 분포개황

현재 산동성내 조선족인수는 대개 30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도시에 20여만명, 연대시에 4만 명, 위해시에 3만 명, 기타지역에 1 만 여명으로 추정)   

  (1) 청도 현황
1978년 이전에 청도에는 다만 138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구성원들은 주로 대학교 졸업후 과학기술부문에 배치받은 고급인재, 고위급 전업군인, 항일간부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의 물결에 힘입어 동북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청도에 진출하기 기작했다. 처음에는 김치장사, 작은 음식점을 차리고 또 서서히 기업에 발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자 한국기업의 진출과 더불어 일부 조선족 기업가들이 청도에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는 매우 우수한 기업인들이 사업에서 성공하여 청도에서 자기 위치를 튼튼히 차지해왔다. 현재 연해도시 청도시에는 조선족이 20만 명을 웃돌고 있으며 거기에 한국인들이 12만 명이 상주하고 있다. 그리고 청도에는 우리 조선족 기업이 1천 여 개가 있고 한국기업이 약 6천 여 개가 있다. 청도 조선족 기업은 주로 서비스 업종이 우세를 차지한다. 그리고 규모가 비교적 큰   일부 기업들도 있는데 주로 외향성과 시장주도형의 범주에 속해있는 기업으로서 수출형기업과 경영자유화 정도가 비교적 높은 것으로 특징적이다. 없던 데로부터 있는 데로 발돋음을 한 청도 조선족 기업은 이미 상당 규모를 갖춘 수준으로 육박하고 있는데, 반대로 청도 조선족 기업들은 토대가 튼튼하지 못하고 아직도 단독으로 시장경쟁을 하고 기술장비 수준이 낮은 등 취약성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헤쳐나아가는 길에서 계속 피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금 청도시는 중국 조선족의 새로운 큰 동네로 거듭나고 있다. 그 중에서 청도시 호적에 적을 둔 조선족 인구가 약 1만호에 달하며 청도시에 아파트를 구입한 수는 대략3만 5천 호를 웃돌고 있다. 청도 조선족 구성류형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노동자(한국기업)이고 그 다음으로는 개체영업자들과 회사원들, 다음으로는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교사와 정부관원 및 공무원들이며, 그 다음으로 일부 무역회사 사장님(CEO)이다. 그리고 이런 구성원의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청도 조선족 사회의 일원을 구성하고 있다. 청도조선족 집거지의 형성과 더불어 학교교육이 요청되었다. 청도에서는 현재 조선족 학교를 두 개를 설립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연해도시에서 유일한 학교인 것이다.
 
  (2) 연대, 위해 현황
연대시에는 현재 조선족이 약 4만 여명이 집거해 있는데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연대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조선족 교수(교사)는 약 100여명을 웃돌며 그외는 대부분이 한국기업에 취직한 조선족들이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찾이하고 일부는 유통회사와 같은 경영인들(CEO)과 식당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들이 있다.
위해는 비록 작은 도시이지만 조선족이 약 3만명 있다. 산동대학위해분교를 비롯한 대학교에도 조선족 교수들이 계시고 그외 중국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사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기업에 취직한 조선족이 많으며, 무역인, 자영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2) 조선족단체 개황

  산동의 조선족 사회는 또 자기의 이익과 권리를 충분히 향수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협회를 설립하고 점차적으로 민족의 구심점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청도에서 보면 1997년 3월에 처음으로 <청도조선족기업협회>를 내왔으며, 이어서 <청도조선족여성협회>, <청도조선족노인협회>>,<청도조선족골프협회>,  <청도조선족축구협회>,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등 큼직한 단체를 내오고 여러 가지 유익한 사업과 행사들을 성황리에 이끌어냈다. 청도에서 <<전국조선족운동대회( 2005년)>>를 개최하였고 또 <청도조선족기업인협회>의 주최하에 매 2년마다 대형 운동회를 열고 또   <<청도 조선족 민속축제(2006년)>>도 성공적으로 치루어냈다. 지금까지 무려 6차례에 걸쳐 대축제를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이끌러 냈다. 청도의 조선족 사회는 지금 가는 곳마다 집단을 형성해가면서 다종다양한 문화체육활동을 활성화`해가고 있다. 예를 들면 청양구, 이창구를 비롯한 청도지역 방방곳곳에서  매년마다  크고 작은 강좌, 세미나, 친목회, 동창회, 고향회, 학생연합회 등 협회에서 특색있는 강좌, 세미나 등 문화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골프협회, 축구협회, 여성협회, 문화인협회 등 협회들은 앞다투어 다채로운 활동을 벌려가고 있다. 청도는 지금 백화가 만발하듯이 각가지 활동들이 생기를 띠고  우후죽순마냥 싹을 터치면서 무르익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서  청도의 미래의 흐름을 주름잡기 위해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를 결성했다. 이 협회의 발족은 역사의 필연적인 산생물이다.  이 협회는 비록 뒤늦게 설립(2006년 12월)되었으나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하여 문화(기업)사업 전략과 발전을 꾀하고 새로운 비전의 틀을 마련하고자 청도 조선족의 대단합과 친목을 취지로  <<청도조선족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2007년과 2008년)라는 테마로 학술세미나를 세 차례나 진행해왔다. 뿐만 아니라 <청도과학문화인협회>는 경제인들과 손잡고 세계를 지향하는 차세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청도차세대무역스쿨(2007년, 2008년)>>을 2기에 걸쳐  실시해왔다.

    연대에서도 <<연대조선족기업협회>> 가 이미 발족했으며 여러가지 유익한 사업을 하고 있다. 조선족 기업인들은 500만을 연대경제기술개발구에 투자하여 그 수익금의 1/3을 연대조선족사회에 기부, 1/3은 분배한다는 규정까지 세웠다.  위해시에서도 조선족기업회가 (2005년 9월11일에 연대조선족기업협회 주비위원회가 발족) 지역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조선족의 민족전통과 문화를 계승한다는 취지하에 발족하여 활약하고 있다.

  현재 산동성내 조선족 기업체는 청도지역에 2천여 개, 위해시에 1천여 개, 연대지역에 500여 개에 달한다. 그 외에 일조, 제남, 유방, 하택 등 산동 기타지역에 500여 개 기업이 있다. 그리고 산동지역에 1000만원(인민페)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80여 개에 달한다.  산동성 조선족은 또 한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거래하면서 한국인들과의 연대성을 밀접히 이어가고  있다. 산동에는 이미 우리 조선족과 한국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도 산동 조선족 사회의 불가분리의 구성원으로 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같이 현재 산동 지역에는 조선족과 한인 사회가 하나로 어우러져 무려 40만 명에 달하는 새로운 집거구를 이루고 있어 그 미래가 밝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3)  코리아 타운 현황
 
 산동성의 연해도시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현재 새로운 조선족-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집거구인 코리아타운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도시만 보더라도  코라아타운이 기본적으로 형성된 곳은 청양구와 이창구를 들 수 있다. 청도 유팅국제공항에서 시내로내려오는 중경북로 톨게이트 양쪽으로 즐비하게 들어선 식당가들인 평양만수관, 흥이원 백화점, 세진자동차 등을 비롯하여 이 곳에는 150여 개 업체가 자리잡고 이색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또 청양구 중성로 북쪽 청도농업대학에서 남쪽 <오복정>한식점에 이르는 1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 한국성호텔,아리랑피자 등 80여개 상가들이 들어섰으며 남탄촌 부근 청양세기공원 주면에도 오아사스,신비원노래방 등 60여 개 상가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유팅입체교 와리촌 주위에도 50여 개 상가가 모여있다. 통계에 따르면 청양구내에만 조선족이 4-5만이  살고 있으며 조선족 상가가 500여개를 웃돌고 있다고 한다. 그 중 90%이상이 음식점, 직업소개소, 노래방, 식품가계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외 또 발해만대주점 뒤쪽에도 400여 가구들로 이루어진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다. 요즘 또 주목할만한 것은 청도시와 즉묵사이에 위치해있는 서원장에는 5000여가구가 집단아파트를 거의 독점하다싶이 구입햇다는 것이다. 이곳은 비록 편벽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집거구를 더 넓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큰 코리아타운은 이촌을 들 수 있다. 이촌에는 현재 조선족이 약 3만 여명이 살고 있다. 이촌하를 가로지르는 다리밑에 재래시장이 즐비하게 앉고 조선족들이 즐기는 김치, 고추장, 명태 증 여러가지 민족 식품들이 팔리고 있는데, 이는 마치 연길 서시장을 방불케한다. 그리고 빈허로 주위에는 한국성을 비롯하여 100여개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상가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중국어를 쓰지 않아도 별반 불편한 점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촌시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바퉁화원에는 조선족이 270여 가구, 신웬소구에는 200여 가구, 동남서원에는 100여 개 가구가 살고 있다.

 위해에는 시내 중심에 조선족상가가 3개나 있다. 시정부부근의 환취구에 150여개 상가, 경제기술개발구에 20여개 상가, 하이테크개발구의 제왕궁에 30여 개 상가가 있으며 그 주면에 400여 개 가구의 조선족들이 집거해 살고 있다.

 연대시에서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해 있는 지역으로는 내산구의 석골툰과 황해성시화원으로  약 300여 가구의  조선족들이 아파트를 구입하였다. 연대경제기술개발구의 황해별정, 자허웬 등과 해변가 지역 아파트단지에도 조선족들이 몇십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연대개발구내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가게가 40여개 달하고 있다.

4.  산동 조선족 사회의 취약성

현재 우리 청도 조선족 사회는 여러가지 취약성도 갖고 있다. 우선 산동성 족선족 기업들은 외향성 기업이 대부분으로서 외국 기업의 의뢰도가 매우 높다. 그러므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기업문화가 정착되지 못햇다. 주로 한국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좁혀 서서히 독자적인 기업형태로 탈바꿈해야 한다. 앞으로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내 내수 상품과 자체의 브랜드 개발를 개발하고 세계에로 판매사장을 넓혀가야 한다. 그리고 서비스업이나 자영업기업들도 조선족과 한국인 사회만을 겨냥하여 영업해서는 안된다. 중국인들과의 시장경쟁에 투입하여 새로운 비전을 꿈꾸어야 한다. 

다음으로   산동 조선족 사회는 아직 핵심적인 자기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가지 협회와 조직은 많이 나온 상황이지만 시야가 짧고 명확한 취지가 없다. 다음으로  산동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대한 의뢰성이 매우 심하다. 반대로 중국과 한족과의 연대가 바약하다. 우리는 중국에서 발전하고 산동에서 삶의 터전을 더욱 굳건히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위기의식이 결핍히다. 세계적인 안목과 시야가 있어야 위기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량식위기, 금융위기, 에너지위기와 같은 염병을 앓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고 태평성남에게 뒤지고 비전을 잃게 세를 부를면 된다. 때문에 우리는 재빨리 우리 자체의 원심점을 만들어내야 한다. 여기서  산동 조선족 사회를 리드해나아갈 핵심적 협회 혹은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잠깐 언급해보고자 한다. 그것의 필요성은 첫째,  우리는 문화민족이라고 자처해왔다. 중국 조선족이 그러하듯이 청도 조선족도 스스로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 한 민족의 문화는 그 문화의 핵심적 원소가 있어야 하고  그 원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면 한 개인과 한 소집단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우리민족은 총체적으로 보면 흩어져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리스어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흩어 뿌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를 떠나 전세계에로 흩어진 일에서 비롯된 낱말이다. 이말은 민족의 이산(离散)을 뜻하는 말로 해석된다. 나무잎처럼 제각기 바람에 날려 흩어지면 그 뿌리는 고갈의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뿌리에 새롭게 물을 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5.  나오면서 - 조선족의 미래전망

첫째, 지역사회의 친목과 대화합을 이룩하여 공동체 삶의 터전을 닦아야 한다. 저희들는 앞으로 청도지역에 청도조선족들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족회관>을 마련하려고 구상하고 있다. 그런 만남의 장을 통하여 청도 조선족의 친목에 유익한 모임과 행사를 가지고자 한다. 물론 장소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청도 및 산동조선족의 화합과 모임의 상징으로 부상할 때에는 장소이상의 의미를 띨 것이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향토색이 짙은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유토피아적인 이상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둘째,  조선족 경제인들의 경제사업과 경영방식에 적합한 토대와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와 겨룰 수 있는 무역 혹은 서비스와 문화특색을 갖춘 업종과 같은 산업의 구축에 힘써야 한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문화산업의 의의는 자못 중요한 위치로 부상하고 있다. 문화의 저력은 경제저력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이므로 지식과 문화의 쟁탈전은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다. 문화의 위력은 국경을 초월하여 과시되는 엄청난 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력전쟁이나 국토전쟁은 이미 무의미한 것으로 되었다.
 
셋째, 산동 조선족 교육에 새로운 활기를 부여해야 한다. 민족교육은 민족 의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중요한 고리이다. 현재 청도에는 중국 연해도시에서 유일한 조선족 소학교가 2 개가 있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민족교육의 과제를 지어준 셈이다. 우리는 조선족학교의 기초교육에 모를 박고 새로운 교육제도와 새로운 규모를 갖춘 교육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청도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조선족 학생들이 기타 소수민족 학생들이 받는 혜택을 향수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서 목표교육과 직업교육 등 다양한 형태의 미래교육의 토대를 마련해가야 한다. 
 
넷째, 산동 조선족 사회의 학술 및 문예, 체육 등 활용에 대한 활성화를 실현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열린 사유와 열린 안목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 지혜는 한 개인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는 열린 대화와 논쟁을 거쳐 이론적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각종 학술세미나와 같은 연구활동들을 진행해야 한다. 뿐더러 문예활기와 오락의 기능도 잘 배합하여 다채로운 사회를 구성해나가야 한다.

다섯째, 산동 조선족은 정부의 지도하에 민족화합에 힘쓰고 정치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문화, 문명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당과 정부의 지도는 대전제이며 근본적인 원칙으로서 우리들은 견정불이하게 당의 방침과 정책을 따라야 한다. 이로써 민족의 대화합이라는 목표를 이룩할 수 있다.

중국 산동성 조선족 사회는 이미 중국 전역에서 제일 큰 조선족 집거지를 형성했고 또 앞으로 더 큰 비약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민족사회의 주체성을 초보적으로 이룩해왔다. 그러나 또 풀어나아가야 할 문제들도 적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우리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관심해야 한다.                                                                       

 2009년 11월 5일


[참고문헌]

 1. 玄贵春 许东禹 , <山东省朝鲜族的过去 现在 未来>,( 潘龙海、 黄有福,
<<跨入二十一世纪的中国朝鲜族>>, 延边大学出版社 2002 .1)

2. 论文集,<<环黄海圈中韩交流的历史、现状及未来 >>, 海洋大学,2005.12

3.이광규, <<在外韩人의 人类学的研究>>, 집문당, 1997.11

4. 이명학, <<청도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론문집(제2차 청도 조선족 학술세미나), 2007.12  p20

 5. 박영만, <<산동 조선족사회 어디까지 왔나>>, 론문집(황해권 한중교류의 역사, 현황과 미래-학술세미나,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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