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사회학 박사 예동근

[본지는 재한중국(인)동포유학생들에게 문학의식을 고취하고 한중문학발전에 기여하고자 7월 30일부터 10월 30일까지 제5회 소정문학장학금 수혜자 작품공모를 진행하였다. 그중 고려대 박사 예동근의 '회전의 메아리'도  선정되었다. 편집자 주]  

回轉의 呐喊

(一)

 

해고의 유령이 신종플로처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해고(解雇)는 더 이상 무서운 공포가 아니다. 신종플로의 백신이 제한되듯이 해고의 기회조차 받지 못한 남편이 집에서 안해와 아들에게 폭행을 한다. 그리고 자신도 한 번도 “恩賜”받지 못한 해고(解雇)란 선물은 바로 안해와 아들에 대한 추방이다.

 

그녀에게 주부(主婦)란 정규직은 이렇게 남편사장에게 박탈되었다. 그러자 인차 대한민국의 추방령도 통고받았다. 경제위기란 망돌은 남편처럼 아내와 아들의 인권을 콩가루로 만들어 놓았다. 위장결혼이 아니고, 피해자란 법적인 판결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출입국사무소는 모자에게 비자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위장결혼과 전쟁, 법적 정의의 권위를 수호하는 위대한 법집행자들의 구호에 두 모자(母子)는 “추방자”로 전락되었다.

 

(二)

엄마와 함께 출가한 4살 난 유리(遊離)는 아빠를 한 번도 증오한적 없었다. 그는 아빠를 망각하였다. 엄마처럼 집안의 물건을 박살내고, 폭행을 한 공포의 기억은 마치 신종플로의 공포도 모르거니와, 자신의 몸에 신종플로 항체가 생긴 것도 모른 것처럼 자연스러움 자체였다. 그는 가리봉동에서 이방인을 돌보는 교회목사를 “아빠”라고 불렀다. 교회에서 생활하고, 아빠의 설교를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지루하면 엄숙한 십자가에 가서 “아빠”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재롱을 피우기도 하였다. 다만 저녁에 잠잘 때 “아빠”의 품에 안겨 잠잘 수 없어 캄캄한 밤이 싫었다.

 

 

(三)

추방,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처음으로 유난히 쌀쌀한 한국의 겨울철에 현장으로 나갔다. 허약한 신체와 서투른 일솜씨는 겨우 하루에 7시간의 노동대가로 2만원의 수당을 가졌다. 그것도 파트타임제의 일당이 조금 올라서 2만원이다.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젊은 20대 중반에 아이를 가진 이혼녀의 신분-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고향의 부모와 친구들을 어떻게 마주 보겠는가가 더 걱정스러웠다. 4년 동안 남편의 “매”와 “욕설”이란 그의 유일한 한국어 교재였다. 아이는 왜서 인지, 중국어를 잘 알아듣지만, 어머니와 한국어로만 대화한다.

 

(四)

우연히 그녀의 아들인 유리(遊離)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래도 고향의 맛이 생각나서 중국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리는 4살인데 고추장과 김치를 너무 좋아하였다. 엄마는 이 얘가 아빠를 닮은 체질이라고 하였다.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잘 놀던 유리가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더니, 한국어(韓國語)로 “아바!” 하였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애가 아파서 ‘아파’라고 들었다. 그러나 유리의 엄마는 인차 교회의 목사를 “아빠”라고 보고 싶어한다고 하면서 눈믈을 훔쳤다. 그 추방당함으로 ‘목사아빠“마저 못 보게 되는 국경의 벽이 한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유리의 자그마한 입에서 갈수록 높이지고 정확한 발음은 닭똥처럼 또랑또랑하였고 원초적인 아빠의 냄새가 풍기는 ”呐喊“이었다.

과연 대한민국은 그의 아빠인가? 역사의 회전은 다시 메아리친다. 무섭게, 치열하게 재현된다.

예동근 프로필:  재한조선족유학생네크워크 제1기 회장,

                            고려대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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