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IGM 이사장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누가 이시대를 이끌어갈 것인가'세미나 주제강연

‘아시아의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세계의 세력 구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G2'라는 말이다. G2라는 말은 미국과 중국이 대등한 2개의 나라라는 것을 시사하는 말인데 왜 멀쩡하게 있는 미국을 제치고 아시아의 시대라는 말이 나올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지난 30여년간 미국과 중국은 기가 막힌 공생관계를 이룩해 왔다. 미국은 중국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하고 그 대신 중국은 미국에 수출하여 번 막대한 양의 달러로 미국 국채를 사서 미국의 재정 적자를 메워주는 그런 공생의 관계였다. 미국이 가진 막강한 군사력과 미국이 제공하는 거대한 시장은 그 동안 중-미 관계에서 확실한 미국 우위의 구도를 만들어 왔다. 그 구도가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지금 서서히 뒤바뀌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무서운 나라로 부상하고 있다. 내년이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될 중국은 지금 무려 2조 달러(한국 GDP의 2배)가 넘는 외환 보유고를 갖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전세계에 무자비하게 과시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미국의 상황은 너무나 초라하다. 빚 투성이에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도움 없이는 경제적 자생력을 갖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마구 돈을 쓰는 바람에 내년까지 무려 3조 달러가 넘는 재정적자를 기록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외국이 미국의 국채를 사주지 않으면 앞으로 어디서 돈을 조달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다. 더욱이 중국은 현재 무려 7천6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채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데, 중국이 어느 정도 손해를 각오하며 이를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하면 미국의 이자율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이며 이는 미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미국은 이러나 저러나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중국 내수시장의 잠재력에 전세계가 놀라
그렇다면 미국은 중국에 대항하여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큰 시장과 무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중국에게 위협적인 무기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무리 중국이 미워도 중국 수출품에 대해 미국은 문을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에 대고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강력하게 자유 무역을 주창해 온 미국이 덤핑이라든지 하는 특별한 범법 행위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 제품에 대해 문을 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미국이 시장을 부분적으로 닫는다고 하더라도 중국은 내수 시장을 개발하면 얼마든지 활로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번 경제 위기는 중국 내수 시장에 기반한 중국 경제의 잠재력을 세계가 다시 한번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기가 왔을 때 세계는 중국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선진국 시장에 물건을 팔아 살아 가는 수출 의존형 국가인 중국이 수출 시장인 선진국이 어려운데 혼자만 독야청청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전 세계의 예측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중국의 내수 시장이 이미 급속히 자라고 있다는 조짐이 도처에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내륙 도시인 산시성 같은 곳은 이번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무려 12.9%의 높은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중국 내 도시들의 성장은 지속될 것이고 향후 2025년 이내에 인구 100만명 이상을 가진 도시가 221개가 생길 것이라 한다. 실제 중국은 이번 경제 위기 중 선진국의 침체로 인해 수출이 19.5%나 줄었는데도 여전히 8.3 %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중국 경제의 자생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 경제는 앞으로 20년 이내에 미국 경제를 능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당초 예상보다 10년이나 앞당겨진 것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앞당겨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군사적으로는 미국이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무력을 가지고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13억 인구에 핵 보유국이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을 상대로 하는 무력 위협이 지니는 엄청난 리스크를 미국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닌 한 미국이 무력 위협을 협상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 마디로 미국에게는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딱히 없는 것이다.

오바마의 수모, 중국의 우위 단적으로 드러내
결론적으로 미국과 중국 간 협상의 역학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자는 중국이지 미국이 아니다. 중국과 미국은 모두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지난 달 오바마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처절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드러났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가지 형태로 중국으로부터 노골적인 박대를 받았고 미국은 그 수모를 묵묵히 감수했다. 오바마는 중국 시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었고 오바마의 행사는 중국민에게 생중계되지 않았다. 떼를 쓰다시피 해서 이뤄진 타운 홀 미팅에서는 훈련된 중국 공산당 청년 연맹의 단원들만 나와서 앵무새 같이 훈련된 질문만 하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미국이 온라인으로라도 생중계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는데, 중국은 처음에는 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오리발을 내밀고 말았다. 이러 저러 행사 때 중국의 고위관료가 수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오바마가 혼자 만리장성을 외롭게 걸어 다니는 사진은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전 세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임 대통령들이 중국 방문 시 중국 아이들과 시민들에 둘러 싸여 행복한 웃음을 짓던 것에 비해 오바마의 이 고립된 모습은 중국의 숨겨진 의도와 그 노골성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 오바마는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환율 문제, 인권 문제 등 주요 이슈에 대해 뼈있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중국을 떠나야 했다. 그것이 중-미 관계의 현실인 것이다.

미국은 앞으로 중국의 요구를 귀담아 들을 것이고 아마도 가능한 한 중국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최소한 비토권, 나아가서는 미국을 상대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중국 우위의 현실이 G2라는 말이 시사하는 대등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중국이 중심이 되는 소위 ‘아시아의 시대’가 예고되는 가장 큰 근거인 것이다.

물론 중국에 더해 인도, 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경제 대국들이 선진국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이고 활발하다는 것, 그에 비해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상당 기간 동안 침체 내지 저성장의 늪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 그리고 아시아 경제의 역동성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 등이 아시아의 시대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또다른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구미열강의 시대 170년을 돌아보면…
그렇다면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좋은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많은 기회와 동시에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다. 세계는 한 때 분명히 아시아의 시대가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아시아의 시대가 서구의 시대보다 훨씬 더 길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지난 5,000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전 세계 GDP의 20-30% 이하를 차지한 적이 없는 나라였다. 지금 미국의 GDP가 전 세계 GDP의 20% 정도이니 중국은 무려 5,000년 동안 그런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유럽의 세력들이 세계 제패를 꿈꾼 적이 있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어느 영웅도 감히 중국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세계를 감히 ‘아시아의 시대’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시아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것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다. 이 전쟁에서 중국이 무참히 패하면서 중국은 ‘종이 호랑이’가 되었고, 구미 열강이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면서 ‘서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약 170년 ‘구미열강의 시대’ 중 그 첫 100년 동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100년 동안 세계는 2차례의 세계 대전을 포함하여 수많은 전쟁과 살육, 문명의 파괴가 있었다. 이러한 참혹한 역사가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독일, 이태리 등 서구 주도국들 중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미의 시대가 온전히 세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것은 불과 지난 약 60년 정도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100년이라는 참혹한 세계를 거쳐 비로소 세계를 주도하는 세력들에게 가치의 공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절대강자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나라였고 아울러 다른 주요 나라들도 미국과 이 가치를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미세계의 중심 세력이 동일한 가치 체계를 가지면서 세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소련이 망하고 세계가 진정으로 구미 중심 체제가 되었던 지난 20년은 인류가 특히 커다란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국지적 분쟁은 있었지만 큰 전쟁이 없었고 또한 경제도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지난 20년 동안 빈곤층에서 탈출한 세계의 인구는 그 이전 100년 동안 빈곤에서 벗어난 인구 보다 훨씬 더 많았다.

중국은 ‘아시아의 시대’ 비전을 갖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가치의 공유가 오기까지 세계는 근 100년 동안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아 시대의 도래, 중국 중심의 시대의 도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부심을 고양시켜주는 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냉정하게 중국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 대해 고민과 걱정을 해봐야 한다. 중국은 과연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인가? 중국과 다른 주요 세력 간에 가치관의 공유가 있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은 'No'이다. 중국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가 아니다. 인권은 존중되고 있지 않으며 그를 추구하는 민주 인사, 그리고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들은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있다. 올 7월에만 해도 위구르에서의 독립 요구 시위로 200명이 사망하고 1천 여명이 다치는 사태가 벌어졌었고 티베트, 위구르 등의 독립 운동은 중국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는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공무원의 부패는 여전히 창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중국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지도국으로서 어떠한 세계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내적으로는 수많은 불안 요인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적으로는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세계의 주요 이슈에 대해 의견을 밝힌 적이 거의 없다. 수많은 국제 회의에 참석하는 중국 대표들이 자국의 의견을 밝힌 적이 전무하다고 한다. 기껏해야 달러를 보완할 기축 통화로 IMF의 SDR을 활용하자는 의견을 밝힌 것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꿈꾸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도 거의 없다. 한 마디로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거나 아니면 그것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나라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매우 위험한 세상에 우리 인류는 지금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앞으로 빠르게 민주화되고 세계 공동체를 이끌 책임 있는 리더가 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실천 노력을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념적•중재적 리더로서 한국의 책임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한국이 손을 놓고 아시아의 시대가 세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세계적 상황은 한국에 사상 초유의 특별한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후진국에서 준선진국으로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서 도덕적 정당성과 성공의 노하우를 가진 아시아 유일의 나라이다. 한국은 또한 한류를 통해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문화적 공감대와 리더십을 인정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따라서 한국은 아시아 전체를 한데 묶고 올바른 가치관 위에서 아시아가 상호 존중과 공동 번영의 공감대 위에 세계 역사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역사적 사명이다.

그러기 위해 한국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한국의 전체적인 외교 전략이 다시 수립되어야 한다. 대아시아 외교를 확대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세계적으로 인정된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적극적인 대외 개방과 국내 체제 정비를 실천해야 하며 나아가 상호 호혜와 선의의 정신을 세계만방에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실천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중•일 관계가 상호 호혜적 경제 공동체 이념을 실천하는 모델이 되어야 하고, 한국은 이러한 모델 구축의 이념적 리더이자 중재적 리더가 되어야 한다. 한•중, 한•일 FTA는 아시아를 하나로 모으는 결정적 기폭제가 될 것이다. 또한 아시아의 후발 주자들에 대한 원조, 특히 경제 개발 노하우에 대한 지적 원조를 대대적으로 확대하며 그를 통해 한국이 선진과 후진의 중간에서 아시아를 묶는 융합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역할을 할 때 중국의 몰가치적인 행위는 자연히 견제될 것이며 아시아가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 나갈 수 있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시대는 세계 역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시대가 될 것이며 한국은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 의미 있는 세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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