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중국 연변대학 김호웅교수가  2월18일 방송통신대학교 재외한인학회포럼에서 발표한 글의 요지이다.  편집자 주]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따로 살아간들/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고려속요「정석가」에서

  1.머리말 

▲ 중국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
1990년대 초반 정판룡(鄭判龍) 선생이 “시집 온 며느리론”, 즉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처음으로 논지를 편 후 조성일(趙成日) 선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전개했고 이러한 관점은 다다소소 차이는 있지만 김강일, 김관웅 등 선생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황유복(黃有福) 선생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과 이중적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조성일 선생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고 황유복 선생이 다시 매몰차게 받아쳤다.  

조성일 선생과 황유복 선생은 중국조선족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이고 두 선생의 쟁론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 및 향후 생존과 발전전략에 관한 원론(原論)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으로 이를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대할 수 없다. 황차 본인은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고, 특히 디아스포라의 시학(詩學)으로 중국조선족 문학작품들을 다루어온 것만큼 두 선생의 논쟁(아래에 “조-황 논쟁”이라 약함)에 대해 명철보신, 수수방관할 수 없다.

 상술한 문제에 비추어 이 글에서는 “조-황 논쟁”의 문제점을 살펴본 후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 이중문화신분, “제3의 영역” 및 “접목의 논리” 등에 관한 필자의 소견을 내놓음으로써 학계의 보다 깊은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1.조-황 논쟁의 초점과 문제점  

조성일 선생이 지적한바와 같이 황유복 선생은 한국에서「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들이다.

 ▲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 “조선족”은 “한반도의 족속”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 “100%조선족”일 뿐이다.

  ▲ 조선족에 대한 중국 지성인들의 불신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첫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의 기본적인 관점을 반박하지 않고 이른바 “이중성”이란 낱말을 꼬투리로 잡아 상대를 공격한다. 물론 조성일 선생의 논의에 일부 개념을 정치(精緻)하게 다루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총체적으로 정판룡 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논의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현대한어사전』에서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의 뜻풀이를 이용해 조성일 선생의 지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황유복 선생이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조선어에서 이중성은 다음과 같이 뜻풀이가 된다.

 1. “한 가지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

(한국『새우리말 큰 사전』)

  2. “한 가지 사물이 한꺼번에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

(조선『현대조선말사전』 )

  3. “한 가지 사물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질.”

(중국『조선말 사전』)

이처럼 이중성이란 통일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속에 있는 모순성과 불일치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통일성이라는 이 전제는 거론하지 않고 조성일 선생이 마치 “모순성과 불일치성”만 강조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조선어에는 쌍중성(雙重性)이란 낱말이 없기에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한어(漢語)의 언어습관과 한어 낱말의 함의를 가지고 조선어로 글을 쓴 조성일 선생의 전반 견해를 왜곡하고 공박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하면 말꼬투리를 잡아서 조성일 선생의 “조선족이중성론”을 논박함으로써 상대를 “궁지(窮地)”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둘째, 기실 개념 사용에 있어서 더 큰 혼란에 빠진 것은 오히려 황유복 선생 자신이라는 사실을 유식한 네티즌들이 지적하고 있다.

“황유복 선생의 용어 사용에 혼동이 있다. 중국 56개 민족을 nation이라 했는데, 응당 ethnic group라 해야 한다. 황유복 선생은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韓民族은 다른 민족이라고 했는데, 중국국민이 nation의 개념이고 조선족이 ethnic group의 개념이다. 따라서 ethnic group 면에서 조선족과 한민족은 같은 민족이고 조선족과 중국국민은 nation에서 같은 민족이다.”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민족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만 강조한 반면에, 민족은 혈연(血緣), 역사적 기억과 문화, 영토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무시함으로써 편면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또한 황유복 선생은 한국계미국인들이 “탈한국적인 코메리칸사회”를 만들었듯이 중국조선족도 100여 년간의 이민사, 정착사, 투쟁사를 통해 이미 중국사회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것만큼 중국조선족이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일종 허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조선족공동체가 한국사회와 구별되는 점만을 이야기하고 중국 주류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른바 탈모국(脫母國)적인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 특히 민족교육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특히 “100%의 조선족”론은 중국조선족과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셋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을 비롯한 이른바 “이중성 논자(論者)”들은 중국 주류사회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친 노파심이라 하겠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 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 한 사이트에 실린 네티즌의 글을 논거로 삼고 있는데,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사람을 과연 “중국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nd Said, 1935-2003), 가야트리 스피박(Cayatri C. Spivak, 1942- ), 호미 바바(Homi K. Bhabha, 1949- ) 같은 이들의 지론은 차치하더라도, 중국의 족군(族群)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 종합하면서 중화민족은 “다원일체의 구조(多元一體格局)”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비효통 선생과 같은 중국 최고 석학의 견해는 왜 고려하지 않는지?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이 가지는 이중문화신분에 관해서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 선생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일된 현대 중화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이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역사가 남겨놓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중국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인 왕녕 선생도 “문화신분과 그 동일시는 천성적이고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분에는 천성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있는데,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있어서 한 인간의 민족과 문화 신분은 얼마든지 이중적이거나 지어는 다중적일 수 있다”고 하였다

주지하디시피 중국학계에서는 3천만 이상의 화인, 화교들을 디아스포라(流散 혹은 離散)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각종 저서들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고 이에 대한 중요한 학술회의도 여러 번 한적 있다. 일례로 현재 고등학교 통용교재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양내교의『비교문학이론교정』에서는 전문 "신분연구"라는 장을 설정하여 세계의 디아스포라문학을 논하면서 3천만 화교의 이중문화신분이 문학창작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그럼 아래에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특성에 대해 좀 더 이론적으로,구체적으로 접근,논의해 보고자 한다.  

  2. 디아스포라와 이중문화신분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 산재(散在)를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주로 헬레니즘시대 이후 팔레스타인 이외의 곳에 사는 유대인 및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 아르메니아인이나 세계 각국에 널려 사는 중국의 화교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들을 좀 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디아스포라(diaspora)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지난 세기 70년대 탈식민주의문화이론이 나오면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문화신분이나 소수민족담론에 있어서의 중요한 용어, 지어는 하나의 이론적 범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학자 슈트아트 ․ 홀(Stuart Hall0, 1932- )은 『문화신분과 디아스포라』라는 저서에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처음으로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소문자로 디아스포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사용한 이 술어는 그 직접적인 뜻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은유적인 뜻을 취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와 같은 분산된 민족공동체, 애오라지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심지어는 기타 민족을 큰 바다로 내몰면서라도 그 어떤 신성한 고향에 되돌아가야만 비로소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특정 민족공동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부하고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종족’형식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낙후된 디아스포라 관념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액운,그리고 서방이 이러한 관념과 동모(同謀)하고 있음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경험은 결코 본성이나 혹은 순결도에 의해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며 필요한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정의를 내린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결코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생존을 꾀하는 신분관념은 아니다. 말하자면 혼합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신분은 개조를 거치거나 그 차이성으로 말미암아 부단히 생산되고 재생산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갱신하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본질을 가진 카리브 사람들은 바로 그 피부색, 천연색과 얼굴모습의 혼합이며, 카리브 사람들의 음식은 각종 맛의 혼합이다.디크 ․ 헤프디그의 재치 있는 비유에 의하면 이것은 ‘뛰여넘기’ 이요, ‘썰어서 뒤섞어놓기”의 미학으로서 이는 역시 흑인음악의 영혼이기도 하다.”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바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대문자 디아스포라에서 파생되었지만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새로운 뜻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넓은 개념과 함의를 가진 새로운 용어로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외래어를 가급적으로 자기의 언어기호로 전환시켜 사용하기를 고집스럽게 견지해 온, 문화적 주체성이 아주 강한 중국에서는 이러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숫제 “족예산거(族裔散居)” 혹은 “이민사군(移民社群)”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 중에서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내용이 첨가된 새롭게 확장된 소문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관심이 모여지는 것은 아이덴티티의 문제이다. 문화연구에서 신분이나 정체성이라는 이 두 개념은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의 원래의 기본함의는 물질. 실체의 존재에 있어서의 통일된 성질이나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철학의 견지에 본다면 독일 철학가 헤겔이 제기한 “동일성”의 개념으로서 이를 영문으로 번역할 때 역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했다. 이 경우에는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으로 사유와 존재 사이의 동일성 문제를 설명하였는데, 이런 동일성 속에는 사유와 존재의 본질만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차이성도 내포되어 있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일종 변증적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당대의 중국의 문화연구 분야에서 서양의 철학, 인류학, 사회학과 문화연구의 영향 하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를 번역하여 사용하거나 정의를 내리는 경우에 적잖은 혼란이 존재하고 있다. 즉 학자에 따라 “인동(認同)”, “신분(身分)”, “동일(同一)”, “동일성(同一性)” 등 한어 단어들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명석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사천대학교 염가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당대 문화연구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에는 두 가지 기본적 함의가 있다. 첫째는 어느 개체나 집단이 특정한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인하는 명확하거나 현저한 특징을 가진 의거나 척도, 이를테면 성별, 계급, 종족 등등인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분”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나타낼 수 있다. … 다른 한 면으로 한 개체거나 집단이 자기의 문화상에서의 신분을 추적하거나 확인하는 경우에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라고 할 수 있다. 단어의 속성으로 보면 ‘신분’은 명사로서,그 어떤 척도나 참조계로서, 확장된 그 어떤 공동한 특징이나 표징이며,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는 것은 동사로서 다수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를 뜻한다. … 오늘날 문화연구에서 고정불변의 본질주의적인 안광(眼光)으로 “신분”이나 그것을 확인하려는 입장은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문화연구에서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에서의 부동한 개체나 공동체의 “사회신분”과 “문화신분”이다. “사회신분”이나 “문화신분” 문제는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나는 누구(身分)”인가? “어떻게, 왜 누구(認同)인가?”를 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문화신분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跨境民族)”의 후예들로서, 근대적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왕조의 봉건학정과 자연재해 및 일체의 침탈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민들을 비롯한 의병장, 독립운동가, 교육자, 문학인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김관웅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애초부터 “‘집’잃고 ‘집’을 찾아 해매는 미아(迷兒)”들― 무국적자(無國籍者)들이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치발역복, 귀화입적(薙髮易服, 歸化入籍)의 치욕을 감내해야 하였고 일본의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의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 1930년대 초반의 민생단사건, 만보산사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양자택일의 고뇌에 시달려야 했고 궁극적으로 희생양의 비애를 맛보아야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에 온 조선인들은 논농사를 도입해 동북지역의 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반제반봉건의 중국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함으로써 중국 국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자신의 물질문화, 제도문화, 행위문화, 정신문화 일반에 커다란 애착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100여 년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교육과 문학예술을 통해 “조선족으로 살아남기”에 성공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엄연한 중국국민이로되 여전히 이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이중문화신분을 두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의 세계에만 속하지 않는다.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인 동시에 미국인이기도 하다. 이는 나에게 기괴하면서도 실지에 있어서는 괴이하다고 할 수 없는 이중배역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나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신분은 모두 분명하지 않다. 매 하나의 신분은 나로 하여금 색다른 영향과 작용을 하게 한다.”

사이드와 같은 탈신민주의문화의 이론가들은 이중 내지 다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제1세계에서 제3세계의 대리인의 역할을 함과 아울러 제1세계의 이론을 제3세계에 전파해 제3세계 지식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켰다. 『여용사(The Woman Warrior, 女勇士)』(1976)라는 작품으로 미국 주류문학계와 화인문학계(華裔文學界)에서 모두 이름을 떨친 바 있는 저명한 여성작가 양정정(楊亭亭, 1940-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신은 미국의 화인구역에서 자란 화인후예 여성작가이다. 그는 학교에서 거의 모두 미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기억과 마음속 깊이에는 늙은 세대 화인들이 그에게 들려준 여러 가지 신물이 나면서도 전기적인 이야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비범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 그 자체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보다 더 자전(自傳)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적잖은 화예작가와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소설’영지(領地)에 대한 경계 넘기(越界)이며 뒤엎기(顚覆)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생활경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전적 성분에 지나치게 많은 ‘허구’적 성분이 끼어있다고 말한다. 실지에 있어서 다중(多重) 문체를 뒤섞는 이러한 ‘혼잡식(混雜式)’책략이야말로 양정정의 ‘비소설(非小說)’로 하여금 미국 주류문학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하였고 영어권 도서시장에서도 성공하게 하였다. 양정정,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화예작가들의 성공은 비단 ‘다문화주의’특징을 가진 당대 미국문학에 일원(一元)을 보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화인문학의 영향도 넓혀주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나 양정정과 마찬가지로 중국조선족들, 특히 중국조선족 지성인들은“조선문화”와 “중국문화”라는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광복 전에는 중국 경내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이라는 이중적 역사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싸웠고 광복 후, 특히 개혁개방 후에는 중한 교류의 가교역할과 남북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문화”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한족은 물론이요, 기타 소수민족과도 구별되며 또 “중국문화”적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남한이나 북한 또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와도 구별된다.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김학철 선생이 중일한 3국을 무대로 싸웠고 후반생을 피타는 고투로 중국에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임종을 앞두고 그 자신의 뼈를 고향인 강원도 원산(元山)에 보내기를 바랐던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중국의 주류사회에 참여, 적응하여 자기의 확고한 위치를 찾으면서도 자기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고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실체이요, 이중문화신분이다.

 3. “제3의 영역” 또는 “변연문화형태”

연변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의 거주지는 특수한 공간적 특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중심부로 놓고 말하면 주변부로 되지만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고 경계 너머에 모국이나 다른 민족국가가 있기에 연변은 그야말로 호미 바바의 말 그대로 “제3의 영역”― “찬란한 변두리”에 속한다. 호미 바바는 “국가들 사이의 틈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가적인 문화를 ‘위치 짓기(locality)’는 그 자체 내의 관계에 있어서 통합되지도 않았고 단일한 것도 아니며 그 바깥이나 너머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순하게 ‘타자’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 경계선은 야누스적(Janus-faced)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밖/안의 문제는 항상 잡종성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사람들(people)’을 혼합하고 의미의 또 다른 측면을 생산해내며 또 필연적으로 그 정치화의 과정에서는 재현을 위하여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힘과 정치적인 적개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측면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호미 바바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특징인 자본의 전지구화현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여러 인종들 간의 교류를 통해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나서 문화적 잡종성을 발생한다. 즉 현대사회의 변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잡종적이고 전환적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며 경계의 존재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게 하는 “제3의 영역”을 만들어내게 한다. 이러한 “제3의 영역”은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이 혼합, 용해, 재구성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김강일 선생은「변연문화의 문화적 기능과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우세」라는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성(邊緣性)”을 갖고 있으며 일종의 변연문화형태라는 관점을 내놓았는데,이는 호미 바바의 “제3의 영역”이라는 개념과 맞먹는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정치, 경제생활의 측면에서는 기본상 중국화(中國化)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있으며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제3의 영역”― 변연문화형태에 속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변연문화형태란 두 문화의 틈새에서 일정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그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대인 공동체, 동남아와 북미에 있는 화인(華人)공동체,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 퀘벡의 프랑스인 후예들의 공동체 등에는 모두 이런 문화형태가 존재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 특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개 이상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적 성격으로 나타난다.

둘째, 변연문화형태는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형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기능을 하고 있다. 시스템이론(系統論)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단일한 문화계통에 비해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다양한 문화계통들 간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의 전통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다. 오직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그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변연문화형태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장점(長點)을 갖고 있는 동시에 자기의 많은 단점(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 문화에 발을 붙이고 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신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러한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중국조선족들은 근 10만 명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었다. 2003년 연말 한국에서 발생했던 일부 중국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중국국적포기청원은 모국문화로의 일변도(一邊倒)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로의 일변도 경향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중국은 지금도, 앞으로도 중국조선족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가급적이면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연변을 비롯한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변연문화형태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 거주지는 한반도의 원문화(原文化)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중국진출이나 중국에서의 한반도진출에서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반도나 중국에 모두 유리하다. 특히 중국조선족사회의 존재는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양측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신호를 창출하여 전달하는 극히 중요한 문화전환기능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족사회는 문화적으로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전환계통 혹은 문화중개계통의 기능은 상대방의 문화를 피수용자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신호로 전환하여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 문화체계가 서로 대립되어 있고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방식과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을 때 문화전환계통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과 한국과 같이 이념과 제도의 차이로 인해 반세기 이상 분단된 상태에 있었던 문화계통들 간의 교류는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빠른 시일 내에 문화적인 융합을 이룩하자면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문화중개계통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4.맺는 말:“통합”의 원리와 “접목의 미학”

디아스포라는 이중적 문화신분을 갖고 있기에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뿐만 아니라 문화변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다년간 중국인 디아스포라현상에 대해 연구를 해온 왕경무(王庚武) 선생은 모국과 거주국 문화 둘 중에 어느 쪽에 치우치는가에 따라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인(華人)들 중에서 다섯 가지 신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잠간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자(旅居者)의 심리, 동화된 자(同化者), 조절하는 자(調節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자, 이미 생활방식이 철저히 개변된 자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베리(Berry)의 문화변용에 관한 이론을 참조할 수 있는데, 그는 문화변용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제1단계는 접촉단계로서 서로 다른 2개의 문화가 만나는 초기단계이고 제2단계는 갈등단계로서 이민자들이 수용하는 주류사회가 이민자들에게 변화와 압력을 가하는 단계인데, 이 때 이민자들은 기원사회(Origin Society)와 정착사회(Host Society)의 문화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제3단계는 해결단계로서 문화변용의 특정한 전략을 사용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또한 베리는 소수민족집단 이민자들의 문화변용이 “다른 인종과 민족집단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와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이나 관습의 유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의해 문화변용은 통합, 동화, 고립, 주변화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통합(Integration)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거주국의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가하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경우이고, 동화(Asslation)는 이민자들이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여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정체성을 상실하고 주류집단에 흡수되는 경우이다. 고립(Isolation)은 이민자들이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문화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로서, 이들은 보통 차이나타운과 같은 소수의 이문화 집단의 거주지에 격리되어 산다. 마지막으로 주변화(Marginality)는 주류사회에 참여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문화도 잃어버리는 경우로서,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하여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연변의 시인 석화(石華, 1958- )는 그의 시 「연변 ․ 7 ― 사과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백두산 산줄기 줄기져 내리다가/ 모아산이란 이름으로 우뚝 멈춰 서버린 곳/ 그 기슭을 따라서 둘레둘레에/ 만무라 과원이 펼쳐지었거니/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 땅의 기름기 한껏 빨아올려서/ 이 하늘의 해살을 가닥가닥 부여잡고서/ 봄에는 화사하게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푸름 넘쳐 내더니/ 9월,/ 해란강 물결처럼 황금이삭 설렐 때/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사과만이 아닌/ 배만이 아닌/ 달콤하고 시원한 새 이름으로/ 한 알의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보다시피 석화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중국조선족을 사과배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노래하고 있다. 연변의 상징으로 되는 사과배는 함경남도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베여다가 연변 현지의 돌배나무 뿌리에 접목시켜 만들어낸 새로운 과일품종이다.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 유전인자와 북청 배나무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중국조선족은 중화문화의 신분과 조선민족문화의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과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박쥐처럼 기회주의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 중국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고,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며, 아무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도 아니다. 중국조선족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곳은 중국땅이다.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삶은 이제는 결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때로는 모국이나 거주국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을 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앞으로 우리 뼈가 묻힐 곳이며 또 우리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연변땅 또는 중국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속요「정석가」에서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강산에 대한 다함없는 향수와 사랑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가지 문화신분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1 : 1의 관계가 아니다. 더욱이는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외면한 이른바 “100%의 조선족”이라는 말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사과배를 예로 들면, 원예학에서는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접수(椄穗)라 하고 연변의 야생 돌배나무를 접본(椄本)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야생나무를 이용한다. 그래야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여 잘 자랄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물론, 한국의 후지사과나, 미국의 피스장미거나 간에 그 생명이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한 식물의 종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일으켰다 해도 그 원형은 자연 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경우도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가지고 살되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고이 간직하는 기초 위에서 중국 주류민족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자립할 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잃고 주류민족에게 동화되어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줄로 안다.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붕괴는 중국이라는 다민족국가가 지향하는 “다원문화”의 보존에도 하나의 비극이 될 것이다.

 요컨대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제한된 기회구조 내에서 “제3의 영역”과 이중문화신분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 “특권”과 우세를 충분히 살려 신분상승을 추구하면서도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합의 전략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합의 전략을 구사함에 있어서 거주국의 이민정책과 민족정책의 혜택도 받아야 하거니와 모국의 지원도 충분히 받아야 한다. 윤인진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모국과 거주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모국과 거주국이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재외동포가 모국과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을 경우에 모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되며, 특히 전지구화로 인해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모국이 재외동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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