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지금까지는 다가오는 동북아시대의 동향과 주변국 중국과 일본의 발전상황, 그리고 그 가운데 위치한 우리의 지정학적 입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론은 동북아시대의 평화공존과 발전을 위해 우리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 결속지대가 되어 동북아 블록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된다는 주장이다. 즉, 이를 위한 기능주의적인 대안으로 동북아FTA 결성과 한·중·일 복합해저터널(T&T) 구상을 제안한 것이다. 만일 이 일이 성사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시아 대륙과 유럽을 연결시키는 촉진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선두그룹에 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좀 더 엄밀하게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정신적 기초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흥부의 재해석, 포용의 성공전략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김영호 박사는 <21세기 키워드 시리즈>라는 컬럼에서 <흥부의 재해석>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남겼다.

“흥부와 놀부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창작 당시에는 물론 놀부는 악(惡)의 상징이며, 흥부는 선(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삶의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이들 두 인물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의 하나는 옛 소련의 몰락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의 등장인지도 모른다.

특히 1980년대 일본은 한때 세계 금융자본 약 40%를 점유하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 이래 역사상 최대의 채권대국이 되었는데, 그것은 사무라이적 인간상에 의해 주도됐다. 사무라이식 자본주의는, 안으로 일본 시민사회의 미성숙과 밖으로 세계 경제의 불균등성을 매개하고 있고, 최근 일본 시민사회의 성장과 세계경제의 균형회복으로 심각한 후퇴를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떠한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나는 흥부적 인간상이라고 하고 싶다. 흥부는 제비도 끌어안고 뱀도 끌어안고 박도 끌어안고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결합시키면서 혁신을 연출했다. 가난한 사람도 포용하고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간 놀부형 인간도 포용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나누어준다. 그는 남의 부(富)를 이전받아 자신의 부를 늘리는 제로섬 게임의 승자가 아니라, 타인의 부를 창출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나누어줌으로서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포지티브 섬 게임의 승자이며, 그러한 포지티브 섬의 결과를 공동체의 구성원과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룩해간다. 한국은 동북아의 틀 속에서 경합하고 있는 4강을 끌어안고 화해시키면서,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흥부적 화해상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흥부의 성공전략을 동북아관계에 적용시킨다면, 중국과 일본의 모든 이질적인 요인을 포용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혁신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중국은 한국의 고토(故土)인 고구려를 자기들 역사의 울타리 안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의 역사 개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차후 21세기 동북아의 국제질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다. 일본 또한 뒤질세라 그동안 계속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초청해놓고 그가 동경 하네다(羽田) 공항 도착 1시간 전, 일본의회에서 유사법안을 통과시키는 파렴치한 일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일본은 지난 역사속에서 마치 잽을 하듯 늘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는 식으로 한반도를 괴롭혀왔다. 우리는 지금 이런 두 이웃나라와 미래의 생존을 함께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전혀 상반된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다. 우리의 반도문화와도 이질감이 없지 않다.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그들의 모든 것을 포용하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

하지만 흥부식 성공전략은 일부 학자의 특수한 견해가 아니다. 최근 세계적인 법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서구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예일대 법대 에이미 추아교수도 최근 자신의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초강대국의 최우선 조건을 ‘관용’이라고 정의해 비상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추아교수가 말하는 관용이란 단순히 인권과 같은 현대적 의미가 아니라 이질적인 집단이 특정 사회안에서 뿌리내리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강대국을 탄생시킬 수 있는 인적자원과 능력은 어느 특정 민족이나 종교집단에서만 배출되는 게 아니므로 최고의 인재를 원한다면 인종, 종교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대 그리스국가 스파르타도 제한된 시민들로만 전사들을 충당하려다 실패했으며 16세기 초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역시 유대인과 무슬림을 배척하고 동원 가능한 인적·물적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데 반해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하나의 커뮤니티 안에서 소통하고 존중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미국이 앞으로도 이를 지켜가려면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의 고유한 인종집단 혹은 종교집단에 묶어 놓으려는 시도나 제국의 야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두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전통, 역사, 문화안에 갇혀 주변국가와 손잡기를 머뭇거린다면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야말로 동북아시대의 평화공존을 위해 흥부처럼 또 추아교수가 분석한 바 2천년 인류역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도 끌어안고 중국도 끌어안고 주변국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끌어들여 품고 가겠다는 자기 희생의 비장한 각오가 없다면 동북아시대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며, 선진국의 꿈도 더 나아가 강대국의 꿈도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국가와 관계맺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중국은 무엇이든 삼켜서 중국화하는 전형적인 대륙문화이고, 일본은 외부로부터의 반응에 민첩하게 자신을 변화시켜 배타적인 자신만의 부가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전형적인 섬나라문화, 즉 해양문화권이다. 우리에겐 이 두 가지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전통과 경험과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흥부식의 포용전략으로 동북아 FTA와 T&T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나는 이것을 제로섬 게임의 반대개념인 포지티브 섬 게임에서 차용하여 코리안 섬 게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2천년의 역사를 가진 반도의 나라, 동북아의 허브인 한국이 창출한 포용과 상생의 게임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코리안 섬 게임을 수행해나갈 것인가. 이를 위해 그간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오가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실제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길을 닦아라, 미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작년 봄 일본 큐슈에 갔을 때 마침 3월 1일이었다. 일본 땅에서 3.1절을 맞기는 처음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던 그날 오후, 전 큐슈지역 철도청장을 역임한 이시이 요시타카 (石井幸孝) 회장을 만났다. 나가사키현 출신인 그는 정년퇴임을 한 뒤, 후쿠오카 일한친선협회를 이끌며 한일간 FTA성사를 위한 민간경제협력 및 항만교류 업무를 위해 뛰고 있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시이 회장을 만난 나는 한 달 전에 일어로 번역해서 보내준 나의 졸저 <동북아 연합의 꿈>을 읽은 소감이 어떠냐고 성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비교적 차분하게 나의 주장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 동북아시대의 국제협력모델 창출방안 즉 한ㆍ중ㆍ일 3국을 ‘한 몸’으로 연결ㆍ입체화 시키는 상호주의 관계구조를 높이 평가했고, 또한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대중교통인프라인 한일해저터널과 철도연계망 확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동의해주었다. 더불어 이시이 회장은 이 일이 막대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삼국 간 관계자들의 심도 깊은 교제와 토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례 포럼이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 예로서 그는 2000년도에 있었던 <일본·네덜란드 교류 400주년 기념행사>를 설명해주었다. 당시 일본 철도공사가 주관했던 이 행사는 네덜란드 덴 하그역에서 중국 북경에 이르는 장거리 철도여행플랜이었는데 그는 각 국가 간 노선도까지 직접 그려가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참고로 일본 큐슈 지역은 일본 개화기인 1860년대부터 네덜란드와 활발한 교류를 해왔고, 지금도 면적과 인구, 개인소득이 비슷해 여러모로 서로에게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 관계다.

이시이 회장이 말한 유럽과 아시아 대륙 간 철도대장정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1980년대 말 일본 국철이 민영화되자 큐슈의 철도공사와 네덜란드 철도국은 더욱 밀접한 교류를 해왔는데, 마침 2000년도가 양국 간 교류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양국 철도당국과 전문가들이 모여 2000년 9월과 10월 사이에 네덜란드 수도 덴 하그에서 출발해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 타쉬켄트, 알마티, 키르키스탄(옛 실크로드 지역)을 거쳐 중국 북경 역에 도착하는 실크로드 대장정을 이루어냈다. 모두 11개 국가를 거쳐 24일 동안 달려온 이 철도대장정은 침대칸이 딸린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차량을 이용하였으며, 여행 참가인원은 일본인 60명, 네덜란드인 40명이었다.

당시 이 기념행사는 개인이 200만엔(¥)의 경비를 부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유럽과 중국, 러시아ㆍCIS 국가 간의 철로 폭이 달라 도중에 환승을 해야 하는 불편도 있었지만 이 국제간 장거리 철도여행 행사를 무난히 성공시킨 양국 철도청 당국자들은 앞으로도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추진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다음해인 2001년도에 영국에서 열차테러사건이 발생하자 후속계획이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이시이 회장은 늘 마음속에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거쳐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를 지나 유럽에 이르는 ‘신 실크로드 철도 대장정’ 을 꿈꾸어왔다.

그는 실제로 큐슈 철도청장 직을 퇴임한 후 후쿠오카와 부산을 오가는 쾌속선 ‘제트포일’을 운행하는 항운사의 초대 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7년 당시 초기에 배 한 척으로 시작했던 쾌속선 사업이 이제는 본격화되어 7척의 배가 매일 8회 왕복 운행하는 황금노선으로 발전했다. 이시이 회장은 이 쾌속선의 운항으로 부산과 후쿠오카는 이미 1일 생활권으로 변했다고 평가하며 부산 여성들이 후쿠오카 텐진(天神) 백화점에 쇼핑하러 오는가 하면, 후쿠오카 샐러리맨들도 생일파티를 하기 위해 아침 8시에 후쿠오카를 출발해서 2시간 50분 만에 부산에 도착해서 점심에는 한국식 갈비를 먹고 오후에는 쇼핑을 한 뒤, 저녁에는 자갈치 시장이나 삼계탕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다가 마지막 쾌속선을 타고 후쿠오카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는 한일 해저터널이 완성되고 철도와 차량이 자유왕래하기 전까지는 부산-후쿠오카 구간에서는 비행기보다 오히려 쾌속선 사업이 더 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평균 한 해에 60만 명가량의 여객이 오고가고 있으며 이제 곧 연인원 100만 명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한 개 항로의 쾌속선 운항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의 지역 항만도시가 일일생활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마치 동북아연합의 서막이 민간차원의 수요에 의해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설레임도 있었다. 부산과 후쿠오카 항로는 고대 일본으로 건너갔던 한반도 ‘도래인(渡來人)’ 들의 항로가 아니었던가? 세월은 가고 사람은 바뀌어도 길은 여일하게 남아, 고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일간 교류의 통로가 되어온 사실이 남다른 감회로 전해져왔다.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동북아연합체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한국에서 속 시원히 생각을 나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역시 한일해저터널의 시대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시대가 언제 열릴 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시이 회장은 그저 앉아서 미래를 기다리지 만은 않았다. 그저 꿈꾸고 있지 만은 않았다. 미래로 가기 위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또한 그의 페리호로 한국과 일본을 오간 사람들에게 한일해저터널 시대를 기대하도록 했고,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삶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생생한 사례를 선사해주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한일해저터널건설의 밑 걸음이 될 것이고, 장차 동북아공동체를 여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시이 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늘이 3.1절이라는 사실이 다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국가주권침탈에 항거하며 목숨 바쳐 독립만세를 외쳤던 날. 그 아프고도 자랑스런 기억이 있는 날에 하필이면 나는 일본 땅에, 그것도 일본의 개화기 때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켜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한반도강점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대거 배출시킨 큐슈 땅에 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큐슈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야망에 불탔던 일본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바로 그 땅에서 나는 동북아시대를 맞아 한국이 선진국의 꿈을 품고 힘차게 비상할 수 있는 활주로를 닦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탈냉전, 탈이념의 국제협력시대를 살아가는 글로벌 국제시민으로서, 진정한 한국의 선진입국을 위해서는 이 날을 한ㆍ중ㆍ일 3국이 ‘삼자가 하나’ 되듯 한 몸으로 거듭나는 공동체 역사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기념일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국경에 갇히지 말고, 과거에 묶이지 말고,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가장 가깝게 위치해 있는 큐슈를 이국의 섬으로 외면하지 말고, 해저터널를 통해 오히려 한반도의 일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서로의 상처와 한계를 치유해주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배우고 용납하는 역사를 함께 써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동북아의 새로운 미래의 장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날의 선조들이 피 흘려 지킨 조국을 반드시 동북아의 주역으로 날아오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을 위해 끝까지 나는 이 활주로를 놓을 것이다. 아니, 그 옛날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처럼 차라리 비상하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내 자신이 활주로가 되고 싶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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