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족 작가 작품선 4

그럼 그렇지!

역시나 말라버린 우물같이 내 기억속에 바싹바싹 밑바닥을 드러내고있는 그대로이다. 아빠트들도 들어서고 높다란 빌딩들도 들어서있지만 그런것들이야! 내가 그동안 살고있던 도시에서 너무 봐서 그런가? 도대체 심드렁한 이 심정은 뭔가.


타고 가시우다

웬–걸?! 한족인줄 알았는데 조선말이다. 좀은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틀림이 없는 조선말이다.
초우쌘주우?(조선족이세요)
내가 중국어로 묻는다. 묻고나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부터 그랬다. 연변의 한족들도 조선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
슈퍼에서 나오고있던 참이였다. 한아름의 식품이 안겨져있고 정말이지 빨리 내려놓고싶다는 생각을 하고있던참에 중늙어보이는 인력거군이 고맙게도 뺏다싶이 내가 안고있는 물건을 받아들고(?) 인력거가 세워진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나는 얼떠름히 앞서가는 인력거군을 따라간다. 이런 인력거를 타보려고 북경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법석대건만.


룡문교!

서시장을 지나고 지명지우물을 지나고 룡문교가 훤히 보이는 길옆에 있는 고모네 집, 지금은 정확히, 고모부네 집이 있다. 8년전에 고모가 세상을 뜬 뒤로 한번도 들리지 않았던 고모네 집으로 식품꾸레미를 안은채 인력거를 타고 향하고있는 나, 룡정은 그렇게 오랜 세월의 주름을 드러낸채로 조금은 징그럽게 조금은 친근하게 스물일곱의 나를 맞아주고있었다. 사막스레 다가오는 거리거리… 이런! 갑자기 열아홉살적의 룡정인지 스물일곱이 된 지금의 룡정인지 잠간 헛갈려진다.


고모부가 재혼을 했다고?

려권내러 룡정에 갔다 와야 한다는 내 말에 고모부가 재혼을 했다고 하면서 어찌하다보니 엄마의 어릴적 친구분이라고 그랬다.
이번에 가면 꼭 들려봐라. 네 아버질 봐서라두.
용드레우물, 인력거가 한창 건축중인 그래서 온통 두터운 먼지투성인 용드레우물이 보이는 거리를 터덜터덜 지난다. 룡이 날아나왔다는 우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녀자아이,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 밤새 했던 고민이 지글지글한 태양과 함께 비쭉 먼지아지랑이속에서 솟는다. 가을 갈대밭사이로 달이 뜨듯이 유유히, 조금은 쓸쓸하게.
룡이 어디로 갔을가? 도대체 그 룡은 우물속에 뛰여든 녀자를 업고 어디로 날아갔을가?
지금쯤은 날아나왔던 룡이 우물속에 있을가?
인력거가 오른쪽으로 굽어들고 이제 정면으로 그 우물이 보인다.
공원이라고 말하기도 먼, 유람지라 하기도 그렇고 그런… 도대체 저곳이 작아진걸가? 내가 커진걸가?
먼지가 씹힌다. 우드득우드득 사탕수수대를 씹듯이 씹다가 내뱉어버린다. 후유유.....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달리듯 이제 멈춰서고싶은데… 정말로 멈춰서고싶은데. 몸속 깊이 가득 쌓인 먼지덩어리들, 이리저리 구은다. 내보내달라고 세상으로 나가고싶다고 한다. 그러건말건 나 역시 청량한 샘이 넘치던 그때가 있었다는걸 모질게 기억을 한다. 그 청량한 샘, 이제는 말라버린 샘우에서 먼지가 날린다. 어느 사막에선가 날려온 모래알들이 시시각각 높다랗게 일어서기 시작한 벌거숭이건축물아래서… 누가 도시를 거대한 콩크리트숲이라고 했던가? 그 콩크리트숲속에서 나는 말라버렸다. 밑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이 되여가고있다. 차라리 사막이 되여버린다면 좋을것을… 가끔은 락타가 뚜벅뚜벅 찾아올거고 가끔은 오아시스를 끼고 푸덕푸덕 좋아할수도 있을것을. 나는 하나의 봉페된 마른 우물이 되고있었다. 말라버린 우물, 그리고 역시나 말라버린 우물같이 바싹바싹 터있는 밑바닥을 드러내는 작은 변강의 도시로 빠져들어간다. 룡이 날아나왔다는 우물이 있는 룡정으로.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

커오면서 엄마에게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 이 한마디였다. 엄마 말이 맞았다. 학교에 내는 학잡비며 생활비며 책사는 비용이며 등등때문에 엄마한테 손을 내밀 때면 엄마가 했던 그 한마디,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 그때는 꼭 주면서도 그 한마디를 곱씹어대는 엄마가 많이 짜증나있었지만 전문대를 나오고 당시 소학생이였던 우리들이 노오란 병아리 같은 입을 짝짝 벌리며 외웠던 우리 나라 수도 북경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나는 엄마의 한마디를 곱씹어대고있었으니까. 아하,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 구인광고지를 들고 일자리를 찾으면서 그리고 본과대생들보다 엄청 차이난 월급봉투를 헤아리면서 새로 들 세방주인과 가격을 옴니암니 따지면서, 나는 엄마가 내게 했듯 자신에게 중얼대고있었다.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
어데선가 이런 문장을 읽은적이 있다.
1900년에 세계인구의 13%가 도시에서 살았다고 하고 지금은 50%가 넘는 인구가 도시에서 사는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과 한세기만에 도시인구가 네배로 증가했는데 중국도 도시화가 지금은 비록 40% 정도이지만 지속적으로 증가할것이라고 한다. 조선족의 도시화는 60% 정도로 중국내 다른 민족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다고 했다.
나와 함께 졸업한 조선족학생중 한명도 연변으로 돌아간 애가 없다. 리유야 간단하다. 도시에 있다보면 자연히 더 큰 도시를 지향하게 된다. 누구의 말처럼 “자연스러운 소득격차”때문이기도 했고 더 중요하게는 도시는, 더우기 우리 나라 수도 북경은 매력이 넘치는 문화도시였으므로.
2005년이 되였을무렵 이미 조선족은 기존거주지인 동북3성을 떠나 연해 경제지역으로 진출한 인구가 60만명 이상에 달했고 한국과 일본, 미국을 비롯해 해외로 진출한 조선족인구가 4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북3성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이며 이 지역에서도 50여만명은 동북지역의 도시에 집중되여있다고 한다. 이처럼 방대한 인구이동은 세계상에서도 전쟁이나 큰 재해를 당한외에는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했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의 조선족의 이동, 그 문장을 읽으면서 호호탕탕이란 단어를 떠올리고있었다.
호호탕탕!
우리 민족은 이제 호호탕탕하게 대륙으로 세상으로 나아가고있었다.
나 역시 그 호호탕탕한 대렬에 발을 맞추어 우리 나라 수도 북경으로 들어온것뿐이였다.
《중국고대사에 이름을 남긴 조선사람들》이란 단 한권의 책과 엄마가 한국서 보내준 옷 몇견지, 운동화 한컬레, 연한 하늘빛의 커피잔 하나,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산 아버지의 손바닥만한 CD기 하나 그리고 몇장의 음반, 그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왁스의 첫 음반도 있었다. 그것들을 담은 배낭을 둘러메고 북경으로 향한 날, 장춘에는 비가 내리고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딸이 돌아와서 중학교 수학선생으로 살아가길 바라고있었다.
“안 돌아와 살겠으면 다신 오지두 말거라.”
“알았습니다.”
모질게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울면서 짐을 싸고있었다. 울다가 상우에 놓인 북경행 기차표를 멍하니 주시하다가 다시 울고있었다. 아이처럼. 썩뚝, 아버지와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가슴 어느 구석에선가 메아리가 되여 반복되고있었다.


우리두 시내가서 살가?

룡정주변의 농촌마을에서 살고있다가 엄마의 우리두 시내가서 살가? 한마디에 온 집 식구가 이사짐을 싸들고 시내로 들어온것은 내가 여섯살 때였다. 엄마는 서시장에 매대 하나를 내고 누가 보기에도 너무 신나게 런닝그며 팬티며 양말이며 수건이며를 팔고있었다. 신앙이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인 엄마는 정말로 억척스레 돈을 모았고 끝내 아무 직장도 찾지를 못한 아버지는 집안일을 하는것으로 꽤 만족한듯싶었다. 아버지는 가끔 나와 오빠를 데리고 고모집에 놀러 가군 했다. 내 기억엔 엄마와 함께 갔던 기억은 한번도 없다. 엄마는 거의 360일을 매대에 나가있어야 했었으니까. 처음엔 아버지가 가끔 봐주군 했지만 그것도 며칠, 엄마는 아버지가 물건 팔줄을 모른다고 타박을 했고 아버지는 허허허, 웃으며 엄마가 집구석에 잔뜩 쌓아놓은 물건보따리들을 씨엉씨엉 서시장으로 날라다주군 했다.
90년대가 막 숨을 헐떡이며 후반으로 치솟고있던무렵,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그래서 철밥통을 갖고있었던 고모부도 일자리가 없이 늙은이들의 장기판을 쫓아다니던 그 세월, 우리 집 생계가 엄마한테 달려있듯이 고모네 네식구의 생계도 자연스럽게 고모의 한몸에 쏠리게 되였다. 고모는 동성으로 나가는 길어구의 공장에서 청소부일을 하고있었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두 아이의 뒤바라지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고모는 매일 퇴근후엔 서시장 청소부일을 나가군 했다. 어둠이 거뭇거뭇 내릴무렵 고모는 시장 여기저기에서 주은 채소잎들이며 썩어들어가는 과일들이며를 주머니에 담아들고 집으로 돌아오군 했다. 아주 가끔 밥먹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엄마와 한창 고중시험준비중인 오빠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고모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을 맞춰 고모네 집으로 갈 때가 있었다. 고모는 그 작은 몸체에는 어울리지 않은 큰소리로 오빠 왔소! 어서 올라오오, 아부지 꼬랭이 또 따라왔소? 하면서 내 손에 사탕이며 과자를 쥐여주군 했다. 아이때부터 쭉 그래 온 고모는 내가 중학생이 되여서도 그랬다. 나팔꽃같았던 고모의 웃음, 왜서였을가? 아이적부터 고모의 얼굴은 내게 나팔꽃같다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는것은? 내앞에서는 늘 띠띠따따 나팔을 불어대는 새벽의 나팔꽃 같은 고모지만 내 등뒤에서는 한낮의 축 늘어진 나팔꽃 같은 고모일것 같다는 묘한 기운, 그런게 있었다. 고모한테는.
고모부와 아버지가 웃방에서 장기를 두고 나보다 두살 많은 고모사촌오빠랑 학교친구들에게서 빌려온 만화책을 보는 새에 고모는 부리나케 가마를 가시고 불을 지피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군 했다. 그리고 연변뉴스를 보면서 고모가 먹는 량을 옆눈으로 지켜보고있던 아버지는 매번마다 걱정을 했다.
“고렇게 먹구 어데서 기운나서 일을 하냐?” 
고모는 고추장을 듬뿍 찍은 오이를 뚝 한입 떼여 씹다말고 걸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가진거 힘뿐이잖소! 그래두 농촌서 잔뼈가 굵었는데… 오빠두 농촌에선 힘장사더니 시내 들어오니까 그 힘두 못 써먹구… 형님은 뭐라 안하우? 몇년째 이러구 있는다구…”
“뭐라긴? 제가 우겨서 시내 들어왔는데…”
아버지의 대답은 영원히 끝소리에 깊은 한숨이 묻어있었다. 아버지의 한숨이 끝나기도전에 고모부가 역시 구들고래 꺼질것 같은 긴 한숨을 몰아쉬였다.
“아무리 힘이 넘쳐두 뭐 일거리가 있어야 말이지. 공장이 다 망하는 판에 애들 공부나 시킬라는지 큰애는 대학시험을 치겠다고 난린데… 형님은 힘이 좋아서 인력거라도 끌면 되지만 나야 원, 본래부터 비들비들한 이 몸땡이를 가지고… 후루룩.”    
말을 하다말고 고모부가 고모가 떠다놓은 숭늉으로 꾸룩꾸룩 양치질을 했고 고모는 그러는 고모부를 찔 가로째려보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암만 그래두 그렇지 인력거라니 뭔 말이우? 오빠가 농촌에 있을 땐 생산대 회계일두 했었는데… 그때 따르는 처녀들이 얼마나 많았다구. 공장들이 망해서 그렇지 안 그러믄 오빠두 어데서 한자릴 할수가 있을건데… 헌디 요즘은 그 인력거가 왜 그리 많이 나왔는지 길 다닐 땐 여간 조심을 해야 한단 말이우.”
“왜 당신 오빠는 인력거를 끌믄 안되구 그래 난 된단 말이우? 어제 나보군 인력거를 끌라면서?”
고모를 향해 두눈을 부릅뜬 고모부는 화가 난듯 얼굴이 붉어져있었고 허 참! 하고 아버지가 끌끌끌 혀를 찼다.
“이눔의 세월이라구야, 이렇게 사지가 펀펀해가지구도 제 밥벌이를 못하니 허 참!”
그무렵이면 아버지는 내게 소리를 쳤다.
“우리 인자 집에 가자!”
그리고 고모부와 아근바근하는 고모를 향해 너두 일찍 자라. 래일 또 일나가야 하니까. 하고는 신을 찾아신고는 가로등이 밝아있는 거리로 나서군 했다.
니 고모가 고생많네라.
더럽고 희미한 골목길을 빠져나가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니 고모는 아버지때문에 하고싶은 공부도 그만두었단다. 네 할머니 힘으로는 고모까지 공부시킬 여력이 없었거든. 네 고모가 공분 더 잘했는데. 그래도 남자가 공부를 더해야 한다면서 절루 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일찍 시집을 갔지. 저렇게 고생을 할줄 알았으믄…”
그쯤에서 아버지는 다시 침묵한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잡는다. 아버지가 기운을 넣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밝은 저 큰길로 나가려면 조금 더 걸어야 했다.


나 한국 돈벌러 갈람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몇달째 장사가 잘 안되는편이였다. 엄마는 아글타글 장사를 해 일년을 벌어봤자 한국나간 사람들의 두달 월급 정도밖에 안된다는데 쇼크를 받은 모양이였다. 그무렵 작은이모가 한국에서 일을 하고있었다. 나간지 이년 정도 된 이모는 그릇가시는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연길에다 아빠트 한채를 사놓았다고 했고 엄마는 더는 신나게 가게일을 할수가 없었다. 엄마는 가게를 처분하고 통장의 돈을 모두 찾아냈다. 그동안 모은 대부분의 돈을 들여서야 엄마는 한국땅에 발을 들이밀수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듯 엄마가 부쳐온 돈으로 우리 세식구는 먹고 입고 살고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밥을 짓고 설겆이를 하고 고모부를 따라 로인들의 장기판으로 나가군 했다. 그러는 동안 오빠가 대학을 졸업했고 나는 장춘의 대학에 입학을 했다. 
1990년대 이 사회의 거대한– 한국로무의 붐, 수많은 조선족들이 “코리안드림”의 유혹에 끌려 한국으로 몰려간다.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번해지고 “기회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 온 가족의 생계와 심지어 그들의 사활을 내건 “도박”을 하는 등등 내 주변의 짠한 실례들– 흐름속에서 나는 가뜩이나 동그란 두눈을 더욱더 크게 떠야 했다. 그렇게 2000년이 되였고 엄마는 여기저기 유격전을 벌리는 불법체류자가 되였다. 그해 줄곧 천진에서 회사를 다니고있던 고모사촌언니가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회사를 다니면서 만난 한국남자라고 했고 내가 대학을 졸업할즈음 언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여있었다. 두살 이상인 고모사촌오빠는 초중을 다니다말고 내가 대학에 붙기 전해에 광주로 갔다. 거기서 옷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고 아주 가끔 메신저에서 만나군 했는데 오빠의 그 약품때문에 튀를 한 돼지껍질처럼 껍질이 잔뜩 벗겨졌던 두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와 만화책을 킥킥거리며 보았던 고모사촌오빠는 내가 북경으로 들어갈즈음에 결혼을 했는데 그 대상이 현지에 집이 있는 한족녀자라고 한다. 고모부는 그때까지도 쭉 혼자서 살았다. 한국으로 시집간 딸과 광주에서 일을 하는 아들이 보내는 생활비로 잔뜩 멋을 내면서. 진작부터 그 나이쯤으로 늙어있던 고모부는 그때쯤에야 겉늙어보이질 않았다고 하는데 그무렵부터 겉멋을 피우며 돌아다닌다고 유세를 떨긴! 하고 고모부를 눈꼴 사나와하던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였다. 어느새 아버지는 혼자서 그 자리에 남겨져있었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드린 전화에도 아버지는 뭔 일이 있냐? 하고 물어왔다.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짜증스러움, 그것이 아버지 자신을 향한것이였었다는걸 썩후에야 알게 되였다.
이제 다 살았다.
고모사촌언니한테서 아버지의 이 말을 전해듣고 나는 푸들푸들 떨려오는 모공들을 보고있었다. 용드레우물같이 오래오래 그 자리에 남겨지리라고만 믿었던걸가? 아버지가 없어진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돈을 벌어서부터 달마다 꼬박꼬박 아버지에게 돈을 부치는것이 아버지를 향한 내 효심이라고 생각하고있었지만 그것 역시 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알수 없는 그 짜증으로부터 벗어날수가 있길 바라서였다. 아버지가 여유있는 얼굴로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려행도 다니고 그러길 바라서였다. 그것이 내가 원한 아버지의 모습이였으므로. 그럼에도 아버지는 남들은 몇번씩 갔다 온 장백산에도 경박호에도 한번 다녀온적이 없었다. 두번인가 동네 로인팀들과 함께 연길공원에 다녀온것이 내가 알고있는 아버지의 려행의 전부였다. 북경에 놀러 오셨으면 하는 내 제의에도 갓 집을 산 오빠가 심수로 모셔갈려고 해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였다. 아버지는 영원히 한마디였다.
“내 로친을 기다려야지 거기 가선 뭘 하냐? ”
“너 아버지도 늙었다. 너 엄마를 지난번에 봤는데 아직도 들어갈 생각이 없어보이더라. 이제 몇년이냐? 십년이 퍽 넘지? 너 엄마 돈두 많이 모았겠다. 너 시간 나면 아버지한테 좀 다니구 그래라. 계집애, 넌 왜 그다지도 모지냐? 네 엄마만 모진줄 알았더니… 니년은 더하냐?”
나이차가 많은터라 고모사촌언니랑은 별로 함께 있었던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언니랑 나랑 엮어주는건 틀림없는 피줄이라는 친밀감이였다. 언니는 글을 쓰고있었고 가끔 문학지 같은데도 발표를 하군 했다. 그런 언니를 나는 어느 정도 경모하군 했던것 같다. 내가 세번째로 찾은 직장 역시 언니가 주선해준 회사였다. 꽤 괜찮은 수입이 생겼고 어느날 언니가 말했다.
“너두 한국 시집오지 않을래. 괜찮은 사람 하나 있는데… 네가 오믄 나두 심심치 않을거 같구. 싫어?”
한국사람이길 바랐던적이 있었다. 나 자신이 한국사람이라면 환상을 했던적이 없었던건 아니였다. 아주 은밀한 곳에서 나는 늘쌍 자신이 한국사람이 아니였던것을 부끄러워했던터였다. 그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지가 않았다. 엄마의 한국말투가 어색했던것처럼 나 역시 어느때부터인가 어색하게 한국말을 하고있었다. 한국회사였으므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왜? 연변말이 촌스럽게 생각되였으므로 촌스러운 연변말을 할 때면 회사의 한국직원들이나 먼저 입사한 조선족직원들이 확 내쪽에 눈길을 주며 속으로 킬킬 웃고있는걸 듣고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한국말을 하고있었다.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이 더 편하게 느껴지고있다는게 왜 그다지도 처참했을가? 중국사람들, 그들과 함께 중국사람들이라고 중국말을 하고있는 현지의 사람들을 통칭했다. 언제부터였지 나는 그렇게 훌쩍 자신을 중국사람중에서 빼내여버린것이. 한류의 붐이 계속되고있었고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중국사람들의 눈길이 달라져있었으므로. 어느날부터인가 한어를 잘할수가 없었다. 떠듬떠듬, 왜? 왜? 나는 너무 괴로와져있었다. 떠듬거리는 자신이 연기를 하고있는것 같아서.


고모가 말이다… 죽었다. 배추 두포기때문에

엄마가 돈을 보내 산 핸드폰으로 받은 아버지의 첫 전화는 고모의 부고였다. 그리고 나는 아부지 꼬랭이 또 따라왔소? 하면서 내 손에 사탕이며 과자를 쥐여주던 고모를 떠올리고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뜸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아버지의 뒤를 따라 들린 내 손에 고모는 아이적처럼 사탕이며 과자를 쥐여주군 했다. 그러는 고모가 조금 짜증나있었고 언제부턴가 고모네 집에서 큰길로 빠져나오는 그 침침한 골목길이 싫어져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무렵 우리 집은 새로 지은 아빠트로 이사를 했다. 물론 엄마가 보낸 돈으로 산 집이였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였다.
“인젠 네 언니와 오빠도 일을 하게 돼서 생활도 많이 피였는데 뭐라고 지금껏 서시장 청소를 하는지 모르겠다싶었는데… 이번 겨울김장김치를 한다구 나보구 배추를 사지 말라구 그러더니 그날, 배추를 산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갈가? 그랬더니 나보구 인력거를 낼거니까 걱정 말라구 하더라. 그러더니 저녁뉴스가 막 시작하는데 전화가 왔더라. 니 고모부가. 네 고모가 시병원에 실려갔다고. 고모부 말이 그날 오후 고모가 배추를 사왔는데 집에 와서 세여보니까 배추 두포기가 모자라더란다. 그 두포기를 찾으러 시장에 간 사람이 두시간 넘도록 안 오기에 네 고모부가 시장에 나가니까 사람들이 그 아주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그러더란다. 그 장사군과 말다툼이 있었는데 네 고모가 본래 심장이 안 좋은편인지라 갑자기 심혈관이 막혀버린 모양이다. 새벽 두시쯤에 숨이 멎었네라.”
아버지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침침한 고모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떠올리고있었다. 비가 온 뒤에는 온통 진흙탕이였던 여름 내내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을 그 골목길을. 그리고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한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몇번이고 안 오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길이 멀다는 핑게로 아니면 공부가 바쁘다는 핑게로 다음번으로 미루고있었다. 그무렵, 나는 아르바이트로 하는 돈벌이에 착실히 미쳐있었다. 심수에서 꽤 이름난 한국회사를 다니고있던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 네식구는 제각기 흩어져 그 세월을 견디고있었다. 혼자 남겨진 아버지는 언제쯤이면 엄마도 나도 오빠도 모두가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믿고있었던걸가?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서 누이동생을 잃은 슬픔을 속으로 삭히였는지 알수가 없다. 그무렵부터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있었다. 술을 그렇게 마셔선 안되는데… 그렇게 고모부가 걱정을 하더라고 고모사촌오빠가 내게 전했다. 아버지가 술과 친해지는 동안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언니가 걱정해준 한국남자가 아닌 조선족남자였다. 북경에서 내가 알고있는 몇 안되는 조선족남자중 한 사람이였던 그 남자는 반년쯤 사귀다가 헤여지고말았다. 어떠한 장소에선지 한국사람이건 조선사람이건 아무런 가름없이 턱턱 연변말을 해대는 멋진 그 남자는 돈 버는 일보다 돈 쓰는 일에 선수였고 절대로 나는 그 한가지만으로도 견딜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남자에 대해 고마와하고있었다. 촌스러운 연변말을 아주 호기로운 근사한 말로 바꿔준 그 남자에 대해. 그것은 아무나 쉽게 할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였으므로. 그리고 나는 역시 그 남자처럼 아무하고도 턱턱 촌스러운(?) 연변말을 할수 있게끔 되였다. 그리고 아무하고도 특히 내게 호기심을 품고 물어오는 현지인들 하고도 조선족입니다! 할수가 있게끔 되였다.
조선족? 어데서 왔어? 북조선? 남조선? 아, 요즘은 한국이라구 하지?
아니고, 중국사람인데!
중국? 정말?! 어데?
연변! 길림 연변이라고 들어봤어? 장백산! 천지!
그럼, 정말 중국사람이야?!
그럼! 중국조선족!


고모가 말이다

아버지는 매번 그렇게 내게 고모의 얘기를 해왔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누이동생의 고생을 혼자서 봐주기 힘들어하고있었다. 고중을 다니고있었고 나는 매일매일 이어지는 시험공부에 뙤약볕밑의 꽃이파리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자정이 될무렵에야 고모집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그때까지도 책상앞에 앉아있는 내게 말을 건네왔다.
“고모가 말이다. 힘들면 좀 고모부더러 저녁이라도 지으라고 하든지 하다못해 설겆이라도 시키든지… 왜 그렇게 둔축하게 일이란 일은 다 제몸에 끌어안을라구 하는지 모르겠다. 눈코 뜰 새도 없이. 참, 그래서 좀 한마디 했더니 니 고모가 그런다. 오빠가 한뉠 앞치마 두르구 밥을 하구 설겆이 하는거 보는것만두 구차하다구. 물어보자, 너두 그러냐? 너두 아버지가 집에서 이러고있는게 싫으냐? 오빠노릇두 못하고 아버지노릇두 제대로 못하구… 미안하구나.”
“울 엄마두 아버지 같은 오빠가 있다믄 아버지처럼 가슴 아파하잖겠슴까?”
자전거를 타고 일하러 가다가 얼음길에 넘어져 다리를 크게 상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었다. 웬지 나는 화가 나있었고 그 상대가 절대로 아버지가 아닌것만은 분명했지만 아버지의 눈을 마주볼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좋은 사람인데 고모도 좋은 사람인데 하다못해 고모부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세상은 이 많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을 살기가 힘들게 할가? 엄마 역시 먼 땅에서 돈버느라 고생하는것이 좋을가? 세상이 갑자기 멀미가 나려고 하고있었다. 내앞에 서있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세상의 멀미에서 벗어날 멀미약 같은걸 줄수가 없다는걸 열여덟의 나는 그 순간 문득 알아버렸다. 착한 사람이라고 이 세상이 더 잘 대우해주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뾰족뾰족 솔잎같이 내 가슴을 찌르고 심장으로 파고들고있었다. 그 솔잎끝으로 내 심장에 주입된 독약 같은 생기가 내 온몸에 찡하니 퍼지고있었고 나는 더 이상 꽃이파리처럼 늘어져있을 새가 없다는걸 알았다.


직공이라면 단줄 알았지!

고모는 고모부의 모든것에 불만족이였다. 나이도 여섯살이나 더 많았고 겉늙어보이고 게으르고 딸려있는 늙은 부모에 리혼한 형제까지. 고모부를 말할라 치면 고모는 늘 입버릇처럼 외웠다.
“하두 철밥통이라니까 그렇지.”
고모말처럼 정식공에게 시집온 고모는 그렇게 남보란듯 잘살아온 날이 하루도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결혼초기에는 늙은 부모를 모시느라 바빴고 그다음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빴고 아이들이 다 커서는 그 바쁘게 보내온 나날들이 몸 세포세포안에 바쁘게 자리를 잡아 한가하게 보내는게 더 바쁘게 되여 더 바쁜 날들을 보내고있었던 고모였다. 고모는 인생이란 배에서 부리워진 날까지 심하게 멀미를 앓고있었고 장시간의 그 멀미에 습관이 되여 오히려 멀미를 앓지 않는것을 이상하게 여기고있을 정도였다.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고모가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안하고 챙겨주는 밥이나 먹구 발바리나 같이 놀구 저런 녀자들은 뭔 재미로 사노?”


다음해면 들어갈게요!

엄마는 늘 그랬다. 올해까지만 벌고 다음해면 들어온다고. 내가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북경으로 들어간 뒤부터 아버지는 엄마가 있는 한국으로 가길 원했다. 로무로 나가서 하다못해 공사장에서 벽돌이라도 날라야지, 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다고 그러세요. 그러지 말구 좀만 더 기다려주세요.”
엄마는 말투가 아예 바뀌여져있었고 그런 엄마를 내가 어색해했듯 아버지도 어색해했을거라 짐작이 된다. 엄마는 웬 영문인지 아버지의 한국행을 견결히 반대하고있었다. 그렇게 한해두해 흘렀고 그럼에도 엄마는 다음해 또 다음해로 귀국을 미루고있었다. 어느날부턴가 아버지는 다시는 한국행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묵묵히 늙어가고있었다.
아버지가 혼자서 늙어가고있던무렵 나 역시 혼자였다. 혼자서 산보를 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낯선 커피점에 앉아 낮커피를 홀짝이군 했다.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외로왔다. 외로움이 ²처럼 질기게 달라붙고있었다. 산다는게 외로움 자체이지 않을가싶을 정도로. 어느날 혼자서 이화원을 돌다가 문득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내 자신이 외로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 외로움이 나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한가닥의 끈이 되길 내심 바라고있었던걸가? 밤이면 꿈속에 나의 무양무양한 아버지가 보였다. 혼자서 술을 마시며 한숨을 톺는 아버지를 보았을것이다.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한국돈환률이 떨어지면서 한해 또 한해 미뤄오던 귀국을 실행했다. 가을이 될무렵이였고 엄마는 돌아오던 참으로 연길에다 집을 마련했다.  
엄마가 말했다.
“한국은 얼마나 깨끗하다구 그러냐? 여기는 넘 지저분하다. 어제 연길 서시장에 갔었는데 왜 그렇게 눈 감기냐? 살기는 그래두 한국이 좋은것 같다. 연길에다가 집을 샀는데 요즘엔 쫭스(장식)를 한다. 방이 세개라서 이담에 너하구 오빠가 와두 다 제 방이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하믄 그때 그 쬐꼬만 핑팡(단층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한구들에 식구들이 주르륵 누워자구. 거기서 밥두 먹구 너들은 숙제두 하구…니 아버진 몸을 거두잖아서 머리칼이 하얗다. 좀 염색을 해주재두 어데 말이나 듣냐? 자연색이라나 뭐라나… 내 원 참, 이제 겨우 오십이 조금 넘었는데 완전히 아바이다. 엄마두 왔는데 집에 안 오겠니? 한족굴에서 좋냐? 청가맡구 왔다가라. 아버지 이제 니가 거기 간걸 말 안한다.”
한국이 살기 좋다고 하는 엄마의 어투는 돌아온지 한달만에 아예 연변말로 돌아와있었다. 엄마가 온밤을 내 전화에 대고 사설을 늘어놓아도 싫지가 않을것 같다. 이제야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짜릿짜릿 온밤 신경을 긁고있었다. 내 아버지, 후- 웬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싶어져있었다. 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될무렵 엄마와 아버지는 새집에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룡정에 사는게 좋지, 이 나이에 왜 옮겨앉을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전화에 대고 불만을 토했지만 아버지 목소리는 이미 그제날 짜증이 암류같이 은근히 흐르고있던 목소리가 아니였다. 그리고 새해가 되였다.  2009년 .


음력설엔 꼭 감다

다시는 오지 말라구 했던 자신의 말은 감감 잊은듯 아버지는 전화때마다 빨리 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날, 북경에는 오랜만에 눈이 내리고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맑게 웃고있었다. 아이때처럼, 깔깔깔!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여기 지금 함박눈이 옴다. 거기두 옴까?”
“야, 빨리 와라. 아버지가 잘못된다. 어떡하냐? 어떡하냐?”
아버지가 쓰러졌다. 엄마몸이 많이 축해졌다고 전날까지도 닭을 사다가 닭곰까지 해줬다고 엄마가 짜면 물기가 줄줄 흐를것 같은 목소리로 그랬다. 그리고 나는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예약해야 했다. 이렇게 올려고 마음 먹으면 두시간이면 금방 올수가 있는것을…
“이게 우리 딸 맞소?”
두팔을 겨우 들면서 아버지가 물었다.
“그러믄요! 얘가 점점 크면서 제 고모 모양을 닮아가네.”
아버지의 위, 한번도 아버지의 위를 걱정해본적이 없다. 내게 제때에 꼭꼭 챙겨먹어야 한다고, 위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주던 아버지가 자신의 위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꼭꼭 하루 삼시 제때 밥을 챙겨서 잡수시리라 믿고있었다. 아버지가 늘 해오던 일이였으므로.
“위라는건 끊어내두 또 그만큼 늘어난단다. 걱정 마라.”
아버지가 웃었다. 하얗다. 머리는 끝내 염색을 하지 않은대로였다.
“세상이 온통 뒤흔들리는데 멀미를 안하는게 어디 있냐? 이까짓 위병쯤이야. 속을 통채로 게워내는데도 있는데… 우리 옛날에 살던 동넬 가봐라. 하나두 없다. 늙은이들밖에. 작은 마을들은 작은 마을대로, 큰 마을은 큰 마을대로, 작은 도시는 작은 도시대로, 큰 도시는 큰 도시대로,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대로, 큰 나라는 큰 나라대로… 다 멀미를 하잖냐? 이번에 뉴스를 보니까 그 미국두 경제가 말이 아니더라. 한국두 돈이 떨어져 말이 아니구… 지구가 몸살이를 하는데 도처에서 멀미약을 찾기보다는 제힘으로 키를 똑바루 잡구있어야 하는게다. 그걸 보면 말이야 중국이 참 대단하단 말이다. 신문에서 봤는데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로 약간의 영향도 받긴 했지만도 이제 미국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두개의 축이 되였기에 미국의 경제가 침몰하는것이 중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구 한다. 인제는 우리두 중국돈을 벌어야지 안 그러냐?”
아버지는 아프면서도 뉴스만은 꼭꼭 빼놓지 않고 보고있었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걸 알아야 밖에 나가있는 사람들이 마음 놓인다고 했다.
“네가 다니는 회사는 어떠냐? 괜찮으냐? 금융위기에?”
“괜찮을게 뭡니까? 회사에 결혼한 녀자들이 애를 갖느라고 법석대는데… 임신기와 포유기엔 회사에서 자르지 못하도록 법에 규정되여있으니까. 지금 같은 세월에 모두 애까지 동원해서 직장지키기를 하는 판에.”
“세상에!”
엄마가 딱 입을 벌린다.
웃다말고 통증에 두눈을 감고 이마를 찡그리고있는 아버지, 희끗한 머리카락이 정수리쪽에서 내리 날렸고 백설을 떠이고있는 한겨울의 천지가 커다란 우주의 우물같이 끈이 끊어진 내 가슴속 그 자리에서 솟아나고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였다. 수많은 세월 집에서 밥이나 하고 그릇을 가시던 아버지가 우리 가정의 키를 잡고있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온힘을 다해 이 가정이란 배를 이 세상의 풍랑속에서 똑바로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을.


어서 들어오거라!

고모부가 내 손에 무겁게 들린 식품꾸레미를 받아 내려놓는다. 까만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뒤통수를 슬슬 내리쓸며 고모부가 오십 중반이 되여보이는 아주머니를 내앞으로 내밀었다. 별로 크게 고생을 해본것 같지가 않은 얼굴이였다. 그 얼굴에 고모의 고달픈 그러면서도 새벽의 나팔꽃같이 활짝 핀 얼굴이 반사되고있었다. 고모보다는 하얀 얼굴이라는게 웬지 가슴이 울렁울렁한다. 멀미가 일듯이.
“순임이 딸? 엄마 많이 닮았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는다. 웬지 그 손에 잡혀있는게 부자연스럽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릴적부터 누군가를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 꾸벅!
“아버진… 좀 괜찮으냐? 래일쯤에 한번 가봐야겠다.”
고모부는 아버지가 앓아누운 뒤에 거의 일주일에 한두번씩 병문안을 다니고있었다.
“인자, 한번 보문 볼 날이 하루 줄어드네라. 네 아버지도 그간 고생 많이 했지.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했을게다. 네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다 제명이지… 그렇게 술을 마시더니, 통 말려두 말을 안 듣더니… 한동안 있을거지?”
고모부가 내 손에 아주머니가 깎아놓은 사과를 쥐여준다.
“먹어라, 어서. 괜한 소릴 하는가보다 내가.”
불쑥 내 손에 사탕이며 과자를 쥐여주던 고모의 목소리가 귀전을 친다.
“아부지 꼬랭이 또 따라왔네.”
언제부터 아버지 꼬랭이노릇을 그만두었던가? 생각해보면 많은 세월이 흘러있었다. 그 세월속의 아버지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아버지는 혼자서 밥을 드시고 설겆이를 하고 혼자서 가끔 고모부네 집으로 오고갔을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도착해야 할 해변을 아직 찾지를 못했을지도 아니면 진작 찾기를 포기했던걸가? 나는 늘쌍 고민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를 마주할 일이 언젠가부터 두려워져있었던것도 사실이였다. 아버지가 내 눈동자뒤에 숨어있는 아버지를 향한 그 떳떳할수가 없었던 느낌쪼각들… 그것들을 보아낼가 두려워져있었던걸가? 해변에 도착도 못했는데 이제 아버지는 달려야 할 배에서 내리려고 한다.
“어떻게 하구있는 일은 잘되냐?”
고모부가 물었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때로부터 지금껏 4년 사이 나는 세번의 직장을 옮겼고 세번째의 지금의 직장도 막 옮겨야 될듯싶다. 부서에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때 입사한 동료는 지금 임신 두개월째였다. 총부에서 감원명령이 떨어졌고 더 말할나위도 없이 내 차례가 될거라는걸 나는 분명 알고있었다. 엄마의 돈버는게 헐한줄 아냐?를 내 신조로 삼고있던 나는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안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있었다. 내 반쪽을 찾는다면 헐하게 돈을 버는 그런 사람으로 찾아야겠다고… 엄마의 그 한마디, 그것은 내 젊음의 저주였다. 그동안 나는 두번의 련애를 했고 그 한번은 동거까지 했었지만 결국 결혼은 포기하고말았다. 어느날 아침 동거하고있던 남자친구의 해장국을 끓이다가 이 사람도 돈버는게 헐한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 사람과 곧바로 헤여지고말았다. 그 사람이 밤늦도록 일을 하고 술에 취해서 자고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고역으로 되고있던 나날이였다. 그 사람은 뭐든 열심히 정성을 넣어서 하군 했다. 하다못해 물 한모금 마셔도 그랬다. 일도 열심히 했고 열심히 자신의 련인을 아껴주는 그런 타입의 남자였다. 자고있는 그 사람의 얼굴에는 깨여있는 내내 감추고있던 힘든 피곤함이 그대로 펼쳐져있었다. 나는 그런 그 사람의 잠든 얼굴을 보면서 잠을 청해야 하는 그런 나날을 더 이상 보낼수가 없다는걸 알았다. 차라리 차거운 벽을 마주하고 잠드는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과 헤여지고나서 아주 오래동안 혼자였다. 외로움이 좋아질무렵, 나와 함께 일본으로 가기를 원하는 지금의 남자를 만났다. 일본남자, 나는 내 나이 스물일곱에 코웃음쳤던 맞선이란걸 처음으로 보았고 그 남자를 선택했다기보다는 그 남자의 여유로움을 선택하고있었다…
“급해말구 천천히 해라. 일이란게 끝이 있냐? 휴식도 하면서… 우리 이 아빠트 괜찮지? 살다보니까 좋은 일두 생기구 한다. 뚱챈(철거) 들어가지구 생각지두 않게 아빠트에서두 살게 되고… 네 오빠와 언니가 돈을 마련했구나. 하여튼 네 고모가 불쌍하게 됐다.”
그러면서 고모부가 씩 웃음을 짓는다. 건°한 그 웃음이 웬지 보기가 좋다.
기어코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는 고모부에게 다음에 또 올거라고 하고 문을 나선다. 내 손이 더듬더듬 허공을 잡는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 웬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중국말을 나보다 더 잘하는 일본남자, 그 남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고모를 떠올리고있었다. 나 역시 저 남자랑 결혼하면-
하두 철밥통이라니까 그렇지, 했던 고모처럼 하두 일본국적이라니까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살가?
그럼에도 려권을 내야겠다고 마음 먹은건 절대로 고모처럼 배추 두포기에 죽는 일 같은건 없으리라는 믿음때문일가?
중년에 가까운 그 남자를 마주하고나서 나는 새삼스럽게도 내 나이를 손꼽아보고있었다. 많은 세월, 많이 늙어있던것 같던 자신이 그처럼 젊어보이기는 그때가 처음이였다.
못생긴 꽁지밖엔 없지만도 이것저것 다른 새들이 흘린 털을 주어다가 꽁지에 억지로 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럴 나이도 지났고. 나는 외로와져있었다. 그 외로움이라는 삭막한 우물에서 헤여나오고싶어져있었을뿐이였다. 그 우물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고저 했다. 그 누군가가 채워줄수가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찾고있었다. 그 누군가를.


하늘이… 넘 푸르다!

려권수속을 마치고 나온 오후의 하늘은 꿈속같다. 파아란 하늘,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을 빨아들일듯이 기운차게 숨을 들이킨다. 내 몸속이 파랗게 물이라도 든듯이 갑자기 푸르싱싱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데선가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소리가 난다. 우리 말 노래다. 듣기가 좋다. 기분이 흐뭇해진다. 휴- 한숨을 내쉬고 이 거리의 어느 말라빠진 나무밑에서라도 깊게깊게 잠이 들것 같다. 밤중에도 무더기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삼환로변의 북경의 아빠트의 나의 방, 아주 오래 된 옛말 같다. 나이 많은 일본남자, 그 남자도 전생에 만난듯 아리숭하다.
그리고 휘청휘청, 용드레우물가–
락타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로 황사가 거리를 덮고있던 그해 여름, 지하철을 타고있었다. 처음으로 타는 지하철이였다. 지하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있다는데 놀라왔다. 커다란 벌레 같이 렬차는 꿈틀대며 달렸고 나는 이 도시의 밑바닥을 돌고있었다. 내게는 락타가 없었으므로 감히 황사가 심한 지상으로 나갈 엄두도 낼수가 없었고 또한 유일한 친구 하나외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도시에서 딱히 찾아갈데도 없었던터이므로… 일자리는 생각외로 찾기가 힘들었고 앞날이 떨어진 나무잎같이 아등그러져가고있는듯한 느낌이였다.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내게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것도 시집을 오라고 한다. 왜? 한국인인데? 내가 물었고 엄마는 흐흐흐 웃으며 살기가 좋으니까, 그러니까 네 언니도 시집왔지 했다. 그러니까 모두들 한국엘 오지 못해 란리가 아니냐고, 시집온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했다. 전문대생에게 이 도시는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 지하외에는. 반년을 먼저 들어온 친구는 지하실에서 살고있있다. 하루종일 지하에 있다가 밖에 나서면 눈이 부셨다. 갑자기 못 나올데를 나온듯 세상이 달라져있었다. 해며 나무며 새들이며 사람들이며…
렬차에 앉아 거뭇거뭇 지나는 차창을 내다보며 래일까지 찾아보고 안되면 차집이나 식당에라도 나가야지, 생각하고있는데… 갑자기 렬차가 멎었다. 렬차원이 뭐라고 방송을 해왔지만, 그대로 영영 지하에 멈춰버린대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계속하여 제 생각에만 골몰하고있었다.
그때였다.
차창으로 휙- 하얀 할아버지가 날아들어왔다. 차창은 꼭 봉페되여있는데 문도 잠겨진대로인데… 하얀 할아버지가 내곁에 시부저기 앉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못 본듯이 모두들 무표정들이였고 나는 눈을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싱긋이 웃는다. 하얗게. 둥그렇게 떠진 내 두눈도 하얗게 질린다. 내 하얗게 질린 두눈으로 뭔가가 둥실둥실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것은 한마리의 앙증스런 귀여운 은빛룡이였다. 화들짝! 이럴수가.
룡이네!
할아버지가 아무말없이 씩 웃으면서 그 룡을 쥔채로 렬차에서 뛰여내렸다. 유유히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뒤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를 지른다. 헌데,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아무 소리도.
렬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는 마른 우물이 되여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럴수가.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젊을수가 없었다. 내 나이 스물둘에.
그 대신에 그 우물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질 않았다. 노트북이 왔고 최신형의 핸드폰이 왔고 수많은 옷가지들이 왔고 보석들이 왔고 고급의 커피와 커피잔과 양주와 자가용이 왔다. 그럼에도 채워지질 않는다. 그 우물을 채우기 위한 내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였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질 않는다. 일본남자의 비싼 아빠트나 차나 그것들로도 채워지질 않는다. 마른 우물, 바싹 마른 우물의 밑바닥을 멍청하니 들여다보면서 어느날 나는 문득 그 할아버지와 작은 귀여운 은빛룡을 떠올리고있었다…
청담한 흰빛이 솟아오른다. 용드레우물, 정말로 룡이 나오려나봐. 내가 중얼거리는 새에 무더기로 쏟아지는 흰빛사이로 긴 수염이 드리운 하얀 할아버지 하나가 모습을 나타내고있었다.
아니, 저 할아버진?!
내 몸에서도 하얀 빛줄기가 첩첩 솟아오르고있었다. 그 빛줄기가 공중에 뜨더니 하나씩 글자가 되고있었다. 돈 버는게 헐한줄 아냐? 커다란 물음표가 내 발끝까지 드렁드렁 드리웠고 할아버지가 허허허 웃었다.
“내 자손답지를 않구나. 이따위 오물따위밖에 없냐? 제 몸속에 야광주가 있는데 이따위걸로 아글타글 굴다니… 우린 누구나가 몸속에 우물 하나를 품고 살아가구있지. 바싹 말라버린 우물이 아닌, 철철 시원한 샘물이 넘치는 우물속엔 언제나 아름다운 룡 한마리가 유유히 헤염치고있지… 모두들 잊고있어. 바싹 말라버린 우물이 전엔 맑은 샘물들이 넘쳐흐르던 살아있는 우물이였다는걸… 그 바싹 마른 우물에다 아무리 이런저런 물건들을 쌓아놓아봤자 다 욕망덩어릴뿐이야! 똑똑히 보거라! 너 자신을. 이제 네 몸으로 돌아가거라!”
휘익, 유현한 빛줄기가 모양을 바꾸더니 한마리의 은빛룡으로 변한다. 룡이라니? 그것을 굳이 령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늘이 촘촘한 몸뚱이를 번쩍거리며 구름우를 날아예는 한마리의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하얀 할아버지는 어데론가 사라지고 멍청히 서있는 내앞으로 커다란, 정말로 커다란 룡 한마리가 다가오고있었다.
“내가 네가 찾고있던 용드레우물에서 나온 룡이다.”
큰 룡이 입을 열었다. 선풍이 홱 지나간다.
“네 몸을 보거라!”
그 순간, 번쩍 내 마음의 눈이 띄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멍청해진 내 몸은 간 곳 없고 한마리의 작은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 몸을 일으키고있었다.
거리의 가로등들이 이 도시의 야광주마냥 빛을 뿜고있었다.


(<연변문학> 2009년 X호)
*편자주:본 작품은 제2회 두만강문학상 국내상 대상 작품입니다.
제2회 두만강문학상 시상식

출처:조글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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