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조선인의 산업, 금융, 무역 및 교통운수

제1절 산업

1. 공업

20세기초, 만주조선인의 공업은 맹야상태에 있어 그 규모를 논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09년, 일본은 용정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고 중국정부도 용정에 성부국을 내왔다. 용정은 수로로는 해란강이 있고 육로로는 용정에서 연길, 화룡, 삼도, 돈화에 이르는 도로가 있으며 철도로는 천도경편철도가 용정을 경유하고 있어 교통이 극히 편리한바 중외화물의 집산중심이었다. 본세기 20년대에 접어들어 공상업이 흥성하는 국면이 나타났으나 20년대 말 일본자본의 등장과 독점의 형성으로 하여 민족공업은 요람에서 요절의 운명을 맞다싶이 되었다.

간도의 공업은 주로 가공업으로서 그것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농가의 부업에 속하였다. 대체로 양주업, 착유업, 제분업이 있었다. 술과 콩기름은 본 지방에서 소모하는 외 타지방에까지 수출되었다.

양주공업은 수수, 옥수수, 피낟, 보리 등 지방토산물을 원료로 하기에 경영하기에 편리했다. 조작기술은 재래적이여서 순 인력으로 하고 있으며 생산량도 낮다. 1924년, 간도에 24개소의 술공장이 있었는데 연길, 화룡, 왕청 등 4개 현에 18개 소가 있었다. 그중 7개 술공장이 규모가 컸는데 술생산량은 당시 3개 현(인구 37만 3000여 명) 인구당 평균 2.3kg씩 돌아간 셈이다. 간도에서 제일 큰 술공장은 동성용의 관만춘씨가 노동자 40-59명을 고용하여 3명의 지주와 합작하여 꾸린 것이다. 이밖에 찹쌀이거나 기장쌀로 황주를 빚고 보리로 청주도 빚었다.

1924년에는 콩기름과 콩깨묵을 생산하는 전문공장이 32개소가 있었으나 설비가 원시적이고 생산량도 높지 못하였다. 연길, 화룡, 왕청 등 3개 현의 20개소 착유공장의 콩기름 연간생산량은 828만 kg이고 콩깨묵은 84만 kg이었다. 콩기름은 식료와 공업용으로 소모되는 외 국내와 해외에 수출되며 콩깨묵은 가축사료로 해외에 많이 수출되었다.

간도의 제분업도 원시적이었다. 1924년 국자가에 연자방아간이 24개소가 있었고 용정, 투도구에 약 20개소, 나머지 시가지와 농촌에는 약 2-5개의 전문제분소가 있었다. 농가의 부업으로 경영되는 것도 있었다. 기계동력을 이용하는 제분소(카나다인이 경영)는 용정에 하나 있었고 기타는 말, 소와 같은 가축을 동력으로 삼았다.

농산물재조업에는 또 깨기름을 짜거나 감자농마국수를 누르는 것이 있으며 일부 조선인은 엿도 달이었다.

재만조선인의 제조업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 도구들의 제작, 공급에 그치였으며 재래방법에 의한 옛모습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인은 놋그릇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으나 당시 일본에서 수입된 백색도자기가 사용되는 탓에 놋그릇의 제작은 점차 줄어들어 종사자는 15호에 불과했고 년 제작액은 8000원 안밖으로 계산된다.(동척발간《간도사정))

철공업은 몇 사람씩 경영하는 야장간 정도였다. 용정촌과 국자가에 조선식가마와 중국식밥가마를 전문생산하는 공장이 4개소가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는 주물공은 20여 명 밖에 안되며 그 경영자는 모두 중국인이다. 그후 일본과 러시아에 새 철제품과 기계제품의 수입이 증가됨에 따라 점차 위축되었다. 종사자는 대부분이 농업겸직자로서 약 70호 조선인이 종사하고 있으며 제작물로는 호미, 칼, 낫, 우마발굽철(马牛蹄) 등이다.

주물제품은 조선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하였고 소소한 제품이 간도에서 만들어졌으나 후에 중국인이 주물업종을 독점하였다.

도자기업에 종사한 것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비교적 많았다. 토기업은 규모가 작았으며 제품은 주민들의 일용폼인 질그릇이었다. 이런 질그릇은 원시시대의 미관과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시장가격도 매우 낮았다. 토기업자들은 또 기와도 생산하였다.

목공업은 주로 목조가옥을 건축하는 대목과 가구를 짜는 소목이 있었다. 목공업을 전문업으로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농사를 하면서 겸하였다. 한때 용정촌에 있었던 목공 1명과 국자가에 있는 목공 2명이 전문 우마차를 만들었다. 종사인원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합하여 120호에 달하였다.

피혁정제공업도 주로 국자가, 용정촌, 투도구에 많이 집중 되고 기타 지방에는 희소했었다. 품종으로는 피물의복, 울로신과 소, 말 등 집짐승의 장식품이다.

장공장은 국자가와 용정촌에 3개소가 있었는데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였다. 원료는 콩, 보리, 밀 등이었다. 당시 이런 원료는 많았지만 소금값이 너무 비싸서 장을 생산하는 사람이 없었다. 많은 농민들은 자체로 장, 간장을 만들어 자급하였다.

벽돌공장은 주로 용정촌, 국자가, 투도구 등 시가지부근에 있었으며 생산하는 벽돌의 종류는 붉은벽돌, 검은벽돌, 점박이벽돌, 푸른벽돌 등 4가지였는데 규격과 시장가격은 각기 부동하였다.

간도의 전등업, 전화업은 중국인자본가에 의해 1919년부터 시작되었다. 전화는 1919년에 국자가, 용정촌, 달라자, 남양평, 동불사 등 지역에 개통되었으며 1923년부터는 배초구, 의란구, 이도구 등 지역에도 개설되었고 조선 회령대안 경비의 전화까지도 가설되었다. 전등업은 무수툰씨(중국인)가 1919년에 발기하였으나 1924년에야 발전소를 세우고 전기를 뽑았다. 훈춘지방도 1922년부터 전등을 볼 수 있었는데 도중 중지되었다가 1927년에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민국시기 간도에는 제지업자가 모두 4호 밖에 없었다. 생산량은 12만 5000 kg밖에 안되여 연수요량 200만kg을 만족시킬수가 없어 외지역에서 수입하였다.

용정은 조선이주민의 집거구이며 간도의 공상, 무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용정의 공업은 당시 조선인의 공업륜곽을 반영할 수 있다. 아래에 용정의 공업에 대해 간단히 적어둔다.

무삼목재주식회사 방영지씨가 경영한 용정에서 제일 큰 회사이다. 주로 목재를 경영하였는데 국내외에 널리 판매되었다. 그중 대부분은 일본으로 나갔다. 회사에서는 스스로 《무삼회사화페》를 발행하였으며 후엔 이《화페》가 사회에서도 유통되었다.

유삼목재회사 경리는 악보신이다. 수로와 기차, 자동차로 목재를 실어냈다.

대흥전기회사 무탁신, 무경남 부자가 경영하였다. 많은 지주자본을 받아들여서 지주가 실업자로 되게한 선례이다.

용정전화회사 방지함, 서약정이 경리이다. 경영범위는 연길, 돈화, 훈춘, 왕청이었다.

제분공장 상해의 왕씨라는 자본가가 경영하였다.

전씨제지공장 경리는 진옥씨였다.

술공장 백거용, 광흥원, 해원장 등 술공장이 있다. 광흥원이 조양천으로 옮겨갔는데 곧 지금의 조양천술공장의 전신이다.

사탕공장 화순탕장(和顺糖庄) 등 여러 집이 있었다.

길순채석공장 노동자가 수십 명이 있었다. 산의 돌을 여러가지 모양새로 쪼아 건축에 제공하였다.

동양자동차회사 화교 여소파씨가 경영했다. 연길, 훈춘, 돈화, 왕청 등 지로 통했다.

유원전호 (钱号) 화교 여임해씨가 경영했다.

비교적 큰 상점은 복증원,복성동, 순발상, 열래동 등이 있었고 큰 식당은 룡원거, 유휘반점 등이 있었다.

중소형 철공장은 동아철공장 등이 있었고 관(官)상(商)이 합영한다는 회사로는 천도경편철도회사, 천보산은광회사, 연화금광회사가 있었다.

재만조선인의 공업 중 정밀업이 가장 뚜렸한 위치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재만조선인이 쌀생산자였다는 점이다. 1934년 6월 현재, 만주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정미소 240개소가 있었으며 점치적으로 기계화, 기업화로 나갔다. 아래에 간도외 지방을 살펴보겠다.

철령에는 기계정미소 5개소가 있었으며 그중 2개소는 대규모였다. 1919년 장선근씨외 수명이 발기하에 철령제분소가 설치되었고 정미기계 6대(20마력),그 가격은 1만 3000여 원이었다. 1926년에는 김치삼씨가 경영하는 동흥정미소 등 5개소가 있고 1932년 말에는 철령, 해룡 지방에 정미소강덕정, 덕일정미소, 공익정미소, 조선정미소 등이 있었 다.

봉천지방에는 1934년현재 25개소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정미소가 있다. 그중 개원 회사(경리 홍순형씨)는 자본금이 10만 원, 봉천의 신흥정미소(경리 김찬형)씨는 자본금이 8만 원, 개원의 신익상회(경리 문봉덕)씨는 자본금이 6만 원인 규모가 큰 정미소였다.

길림지방에는 1934년 현재, 조선인이 경영하는 정미소 5개소가 있다. 길림정미소는 일생산능력이 100석이며 자본금은 2만 원이다.

북만에 있어서는 1923년 현재, 명성양행 경영인 한명성(韩明星)씨가 할빈에 정미공장을 앉혔다. 한명성씨는 할빈재주조선인중 유일한 자본가였다. 니코리스크, 해삼 위, 상해 등 지역에도 토지, 가옥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본금은 200만 원으로 추측되었다.

정미업 외 기타 공업에 대해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간도 외 지방)

길림지방에는 인쇄, 어업, 야장, 비누 등 조선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있었으며 자본금은 7000원을 넘기지 못하는 소규모였다.

봉천에는 삼성고무공장(경리 라경석), 평안회사 (경리 박민수)씨가 있었다. 그중 삼성고무공장의 자본금은 3만 2000원이다.

이밖에 1940년 이후 새로 등장한 조선인공장이 있었다. 그대로 적어보면

남만방직주식회사는 1940년에 설립되었다. 사장에 김년수씨였고 자본금은 10만 원, 소재지는 봉천성 소가툰이다.

남만면화주식회사는 이세환(李世桓)씨가 사장직을 맡았고 자본금은 10만 원, 봉천에 세워졌다.

동양양주주식회사는 자본금이 10만 원, 강영모씨가 사장을 맡았다.

 

2. 광산업

간도의 광산자원은 매우 풍부하다. 일러전쟁 후 많은 사람들이 간도의 광산을 개발하려고 탐사설계하고 채굴도 하였지만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간도의 천보산동은광, 봉밀구금광, 팔도구금광, 훈춘동구금광, 훈춘화보탄광, 로투구 탄광 등은 비교적 큰 규모를 형성하였다.

천보산동은광

천보선동은광은 1884년 산동성 임구(临朐)현에서 온 류야장(刘铁匠)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워낙 훈춘에 있는 왕씨를 찾아 떠났는데 천보산에 이르러서는 더 갈 생각을 버리고말았다. 어느 하루 산속에서 한무리 노루들이 창졸간 뛰쳐나오는 바람에 그의 나귀가 얼결에 놀라 고삐를 끊고 달아나버렸다. 그는 행방 없이 산속을 헤매며 나귀를 찾았다. 문뜩 산우에 있는 돌덩이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까이 가보니 은광석이었다. 그후 한달 품을 들여 그와 이웃 3호는 은광석에서 새하얀 은덩이를 뽑아내게 되었다.

훈춘초간국 총관 정광제(程光第)는 은전 3만 냥을 마련해가지고 1887년 정식으로 천보산은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개업초기는 비교적 흥성되여 은일생산량은 700-800냥에 달하고 300-500명의 광부가 있었으나 1902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중지되었다.

1911년 9월, 심양에서 일본인의 《남만대흥회사》는 정광제와 결탁하여 50만 원을 투자하여 채굴권을 절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기간 약탈적 경영방식 으로 동(铜)채굴을 다그쳤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 가격이 폭락되여 일본인은 광산을 페광하고 광부 217명(조선인 194명)을 해고하였다.

1934년 천보산광산은 생산을 다시 시작하였다. 1936년 5월에 이르러 일당 광석 용해량은 80톤이며 순금속 5톤을 뽑아냈다. 1936년 10월, 일본인 이이다 등은 50만 엔 자금으로 신경에 《천보산광업주식회사》를 내왔으며 1942년에는 천보산광산을 일본 미쯔이재벌단에 팔았다.

간도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채금을 시작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1890년 경,훈춘 대평구지방에서 조선인이 금산지를 발견하고 채금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간도채금의 첫 시작으로 된다. 1897년 경부터 간도에서는 많은 금산지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유명한 금광은 봉밀구(투도구서남쪽 약 4km 지점) 금광과 팔도구금광이다.

봉밀구금광 봉밀구금광은 사금과 석금광으로 이루어졌는데 사금광은 1897년부터 채굴하기 시작했고 석금광은 1901년부터 정광제에 의해 경영을 시작했다. 사금광은 첫 몇 년간은 매우 흥성하여 광부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곳에서 70냥짜리 큰 금덩이도 나타났다고 한다. 후엔 각종 원인으로 매년 10여 명이 농가의 부업으로 채금하는 형편이다. 봉밀구 사금광 역시 첫 몇 년은 흥성하다가 민국시기에는 농가의 부업으로 매년 20여 명이 채광에 종사할 뿐이었다.

팔도구금광 1906년 정광제가 팔도구의 여름철 시내물을 이용하여 소규모의 채금을 시작했으나 중지되었다가 민국시기 관상합영인 연화금광회사에 의해 계속 경영 되었다. 여름철이면 50여 명 채금노동자가 있었으며 매일 매인 평균 3푼내지 5푼의 금을 생산하였으며 금함유량이 비교적 좋았다.

훈춘동구금광 19세기 60년대부터 채금을 시작했다. 1870년 경,마적달향 삼도구 금광에서 훈춘동구금광을 새로 꾸리고 대량의 사금을 캐내였다. 이 금광은 서쪽으로는 로룡구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마적달에 이르는데 길이가 35km 되고 너비는 약 3-5리 되었다. 1910년후부터 훈춘의 채금열은 진일보 고조를 이루었다. 훈춘 동구금광의 황금은 질이 좋아 소문이 높았다. 주로 천진과 상해 등 지역에 팔렸다. 1920년 일제의 《경신년대토벌》로 하여 채금열은 식어졌고 금점군들은 타향으로 흩어졌다.

훈춘화보탄광 훈춘시가지역에서 서북쪽으로 약 20여 리 떨어진 영안향 관문주자촌 서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1898년, 우씨가 10명 좌우의 탄부를 모집하여 가지고 훈춘경내에서 맨 먼저 탄광을 개발하였다. 1923년 오영성이 정부의 허가를 받고 탄광을 운영하였고 설비도 개선하여 생산규모도 확장하였다. 생산량은 한달에 400톤이였고 탄광에서 석탄 1톤의 가격은 9원 35전이었다. 훈춘시가지역에까지 실어가면 운비는 2.70원이었다. 9.18사변 후, 생산을 중지 하였다가 1933년 7월 다시 회복하였다.

로투구탄광 로투구진서북쪽 원보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탄광구역내 면적은 100만평방m이다. 이 탄광은 1886년 개간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1888년 훈춘초간국이 정식으로 천보산은광을 경영하면서부터 로투구탄광은 신속히 개발되었다. 1915년에는 중국인 장봉의씨가 한시기 독점하였으며 1918 년부터는 로투구매연회사에 경영권이 넘어갔다. 이 시기 매일 탄부 177명 (조선인 125명)이 45톤 좌우의 석탄을 캐냈다. 이 석탄은 천도철도를 통해 여러 역전과 민용공업에 공급되었다. 9.18사변 후, 일제가 탄광을 독점하였다. 1932년에는 33만 톤의 석탄을 빼앗아갔다. 로투구탄광에는 《만인갱》이 있었다. 로투구진서북쪽 원보산남쪽기슭에 있는데 동서 길이는 1000m, 너비는 700 m이며 탄부의 유해 1만 900구가 묻혀있었다. 1974년, 중국정부는 《만인갱》옛터에 탑식기념비를 세우고 유골전시관을 꾸렸다. 많은 유골들은 왜놈의 쇠사슬에 얽매인채 있으며 적지 않은 탄부의 두개골에는 쇠못이 박히여 있었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