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문아연구소
수석이사  수석연구원
카사이 노부유키
笠 井 信 幸

⑴ 프롤로그

⑵ 재일 조선족의 특징과 그 모습 
 ➀ 중국인은 재일 조선족의6배, 한국인은 재일 조선족의 5배
 ② 개인네트워크와 집단형성력 
 ③ 중국조선족의 다언어 우월성

⑶ 재일 조선족이 선배민족에게서 배워야 할점
 ➀ 민족 아이덴티티 유지강화― 청나라인, 재일화교, 화인들은―
 ② 민족 유지의 힘― 재일 한국인들은―

⑷ 재일 조선족의 극복과제 
 ➀ 개인 네트워크의 한계 
 ② 재일 조선족사이의 온도차 
 ③ 새로운 민족네트워크 시스템 
 ④ 시대 뒤에서 가는 강점

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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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프롤로그
그들은 스스로를「중국 조선족」이라고 한다. 「중국」이란 중국에 거주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일본에 입국한 그리고 중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 등 의미가 있으며,「조선족」이라는 중국 국내의 55개의 소수민족중의 하나로서 중국거주 해외코리안등 뜻이 담겨져 있다. 즉 중국조선족이란 중국에서 일본에 도래(渡来)한 조선족,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조선민족과는 구별되여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보면 조금 특이한 느낌이 든다. 일본 출입국통계는 국적별로 입국자를 구분되여 있고 민족별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국적에 의해서 중국인, 한국인등과 같이 나누어 지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은 중국인이다. 그리고 일본 체재, 거주 또는 교우 (僑寓)(호적을 옮기지 않고 거주하는 것) 하고 있는 외국인을 재일 미국인、 재일화교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본에 거주・교우 하고 있는 중국에서 일본에 도래한 조선민족들을「재일 조선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중국조선족을 가리키는 경우에서는 그들을「중국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재일 조선족은 언제부터 온 것인가?  최초 일본에 도래한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대개 1980년대 중순에 중국정부에서 정책적으로 교원들의 해외 연수가 인정되여 그 중 연변대학 조선족교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해외에 나오는 것이 금지되여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이처음으로 되지 않을가 추측된다.  그러나 일본통치시대 잔류고아(残留孤児)들이 조선족들과 결혼한 일본인은예외이다. 90년대에는 유학생 입학규제가 완화되어 대졸자, 고졸자 유학생들에게 유학문이 열렸다. 또한 그 무렵에는 일본의 IT관련 기업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족 IT기술자를 중심으로 스카우트 하여, 일본기업 취직기회도 확대되었다. 그 후 유학생이나 일본어 연수생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 취직 혹은 기업(起業), IT업종을 중심으로 한 기술자의 일본에 도래도 증가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는 재일 조선족은 가족까지 포함해 6~7만명에 달한다고 하는 특히 수도권에는 4~5만명이 거주해 있다고 말하지만 정확한 인원수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 해외로 출국하는 조선족의 국제 비교는 대단한 규모가 아니다. 2010년 연변주 공안국, 출입국 관리국의 발표에 의하면 2003년부터 연변주민이 매년 출국하는 나라는 50여개국이며 가장 많이 출국한 해에는 95개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이 80% 정도로, 러시아에는 5~7%, 일본은 5% , 북한은 4%정도로 근린 제국에 출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입국한 조선족들은 아직까지 일본에서도 소수민족이다.
본고에서는 재일 조선족을 일본사회 및 일본인의 시점으로부터 파악하고 그들의 민족성 및 그 특징 일본사회에서의 정착과정 그리고 향후 과제를 고찰한다. 이럴 경우 일찍 동아시아로부터 도래한 청나라인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조선인의 사례를 참고로 한다.

⑵  재일 조선족의 특징과 그 모습 

➀ 중국인은 재일 조선족의 6배, 한국인은 재일 조선족의 5배,
동아시아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민족의 물결은 지금까지 3차례 있다.1) 제1차의 물결은1859년 일본의 개국(開国)을 계기로 유렵 상인과 함께 청나라 사람들이 도래(渡来)한 것이다. 제2차 물결은 1876년 (일조 수호조약: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한, 한반도로부터 노동자와 유학생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제3차 물결은 1980년대 중반무렵부터 유입(流入)한 재일 조선족이다. 이 물결은 새롭지만 아직도 작은 물결이다.  현재 일본거류자 6~7만이라고 하며 또한 수도권 거주자는 4~5만명이라고도 한다. 재일조선족의 유입•거주는 아직도 인구규모도 적고 역사적으로도 25년  길지 않다.  참고로 청나라인(재일화교)은 150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재일 조선족의 6배, 마찬가지로 한국등 조선인은 130년 재일 조선족의5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② 개인 네트워크와 집단 형성력
재일 조선족은 개인적 네트워크를 구사(駆使)하여 정착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들은 집단화, 조직화가 뛰어난 민족이다. 그것은 고향을 떠난 역사가 길고 중국내에서도 소수민족으로서 살아 가기 위한 지혜였다. 국내의 거주지에서도 살아 가기 위한 동족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 왔다. 해외에 진출하여서도 그 방법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연변대학 출신으로 이루어진 연변대학 교우회, 누구도 참가할 수 있는 천지협회, 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치바 OKTA(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본부는 한국, 일본지부중의 하나임) .
학자•연구자•대학원생을 대상으로한 조선족연구학회, 동북아청년련의회 등 6팀을 포함한 재일 조선족축구협회, 재일 조선족여성회, 재일
조선족 인터넷사이트로서 유명한 SHIMTO, 그 외 업계, 학생등의 소규모 조직• 네트워크화된 집합체가 있다. 
그 배경에 따르는 것은 강한 동족의식을 가진 개인적 네트워크이다. 창업한 회사가 사원을 모집할 경우, 능력을 요구하는 불특정 다수보다는 동족을 모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일본에서 취업이 어려운 동족에게 취업 기회를 주는 효과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민족을 수렴하는 효과를 가지며, 7만의 회원수를 가지는 SHIMTO 등 위의 각 조직을 활용하여 응모하는 경우도 많다.

③  중국 조선족의 다언어 우위성
다언어의 특징은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에 능숙한 다언어, 우위성이다. 동아시아에서 이 정도 민족단위로 다언어 우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중국 조선족뿐이다.  50대에서 30대 후반의 1세들의 상당수는 고국에서 일본어 기초가 있는 사람도 많고 일본에서 일본어 습득이 다른 민족에 비해 지극히 빠르고 일본어교육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의 언어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내에서 일본어가 뛰어난 민족이라고 알려져 온 우위성이 향후 계속 유지될지는 의문된다.  그것은 1세의 년대가 배워 온 그러한 일본어 습득 기회가 급속히 감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에서는「40세 이상 90% . 30세 이상 60%는 일본어를 안다」고 한다. 한편 「25세 이하는 30%가 상한(上限)」이라고 하며 “일본어 세대”는 확실히 축소되고 있다.2)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3)
가. 일본어교육 환경 변화 
* 1990년대에 들어 와서 일본어반이 격감한 것 
* 일본어 교사들이 전근이나 전직을 피할 수 없게 된것 
* 일본어 수준 높은 중견(中堅) 이상 교원 감소 
* 일본어 교육  자체 질이 떨어진 점  
* 남은 교원 일본어 연수 기회가 없고 교원교육 질 저하 
* 새로운 교재 나와 있지 않은 것 
* LL교실등 교육설비 부족 

나. 학생들의 영어과목 선택기회 증대 
중학교에서 외국어 선택은 대학 입시나 IT기술 습득등 계획적으로 많은 학부형들이 학교측에 영어반을 마련하도록 하고 아이들에게도 영어를 추천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일본어를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외국어를 주로 영어로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증가한 것이다. 
해외 유학에는 영어취득은 필수이며 유학한 선배들이 유학처에서 영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이 고생하고 있는 경험으로 일본어보다 영어를 우선하는 동기가 강하다.

다. 제도적 이유 
대학입시에서 유명한 대학 리공계 학부나 일부 문과계 학부에서는 영어를 수험 필수로 하기때문에 일본어 수험이 불리하게 되어 있다. 
제도적 요인의 제일 큰문제점은 국가교육위원회 입시센터 영어출제 범위의 공표(公表)이다. 수험생들은 이런것에 의한 충분한 준비가 가능하지만 한편 일본어는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적절한 수험대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본어입시 문제도 비교적 어렵기 때문에 영어 선택자 보다 입시 성적 저하의 불리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향후 일,중,한국의 언어로 중국 조선족의 어학 우위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앞으로 뉴커머(新参者)가 유리한 것은 일,중.한.영의 4개국어로의 언어 우위성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⑶  재일 조선족은 선배로부터 배워야 할 것 
➀ 민족 아이덴티티 유지 강화―청나라인 재일 화교. 화인들은?― 
재일 화교, 재일 한국인은 이미 4세 5세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재일 조선족은 1세 중심으로 2세 아이들이 출생하고 있다. 선배 민족의 1세 2세들은 일본에서 정착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해 왔다. 거기에는 각각 민족의 독특한 방식을 볼 수 있다. 청나라인을 루트로 하는 재일 화교•, 화인은 관제묘 마조묘라고 하는 정신문화를 정착시켜 현재까지 계승해지고 있다. 4)
요코하마 중화가에서는 춘절기간에 사자무용, 용무, 중화 무용, 쟁,등의 민속 예능을 실시한다. 특히 사자무용 예능은 요코하마 중화가에서의 가장 역사가 있는 문화 예능으로서 알려진다. 재일 화교 1세 상당수는 광동 출신자가 대부분이고 그들의 향토에서 전해지는 남방 사자무용을 반입한 것이다.
관제제, 마조제, 국경절 등 연간행사에는 반드시 사자무용을 하며 중화 청년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재일 화교•화인 세대를 넘은 민족 아이덴티티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능 문화계승에 의한 민족 아이덴티티의 유지강화는 중요한 수단이다. 재일 조선족사회에서도 적지만 이러한 예능활동은 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 개별적 활동역역(領域)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있어서 민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래지 않아 조직적인 민속 예능의 실현이 필요하게 될것이다.
차세대에 대한 민족교육에 의한 문화전승도 중요하다. 재일 화교, 화인은 요코하마 중화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재일 한국인은 도쿄 한국학교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기회는 일반교육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 전승기회로서도 유효하다.
재일 조선족은 아직도 그 규모가 작고 전문적 교육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치바 OKTA가 년간 1차 개최되고 있는「차세대 무역 스쿨」에서  20대~30대의 차세대가 참가하여 비즈니스 교육을 받고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족여성회에서는 매달 한번 모임활동중, 2개월에 1 번씩은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중국어 기초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통민속문화교육에서는 엤동화등을 교육하고 있다. 그외 전문교육으로서는 조선족연구학회가 주최하는「연구회」「국제 신포지움」은 젊은 조선족 연구자들의 수업 장소가 되고 있다. 

(일본에 있는 한국•조선학교)
★ 학교법인 백두학원, 건국학교(오사카시 스미요시구)
  건국유치원, 건국초등학교, 건국중학교, 건국고등학교 
★ 학교법인 금강학원(오사카시 니시나리구) 
★ 학교법인 쿄토국제학원(쿄토시 히가시야마구) 
      쿄토국제 중학교•고등학교
      쿄토한국 중고등학교        
★ 도쿄 한국학교 초•중•고등부(도쿄도 신쥬쿠구) 
★ 나고야 한국학교(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주:나고야 한국학교는 주로 일본 사회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장소가
되고있으므로 보통 포함 되지 않는다 
★ 학교법인 도쿄 조선학원.


② 민족 유지의 힘-재일 한국인들은-
재일 한국인의 민족성 유지특징의 하나는 조직력이다. 민단(民団)(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본부를 핵심으로서 전국에 지부가 퍼져 있는 조직으로서 지금까지 재일 한국인 사회의 통일을 지켜 왔다. 
2차대전후 재류한 재일 한국인들은 조직력과 애국심을 갖고 계속 일본에 거주해 왔다. 전국에 흩어진 재일 한국인들에게 조직적인 행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통합하는 기능이 필요하였고 그 역할을 이루어 온 것이 1946년 10월 3일에 창설된 민단 이다. 재일 한국인의 조직력과 애국심은 모국이 곤란한 상황에 있을 처해 있을 때에 진행해 온 지원활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5)
재일 조선족은 아직 이러한 민족을 통괄하는 조직은 없지만 민족성 유지를 도모한다면 장래적으로는 전국에 흩어진  조선족을 뭉치게 하는 핵심기능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직은 단지 지휘,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문제나 고민 또 민족적 과제등을 거리낌 없이 상담하며 민족적으로 대처하는 유효한 기능이다. 
단지 재일 조선족이 중국, 한국, 북한의 중간적 존재인것을 고려하면 국민으로서 재일 화인•화교와 합류해야 할지 혹은 민족으로서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에 융합해야 할지 또는 제3 선택으로서「우리식 」으로 독립적인 기능을 가져야 할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독립심이 강한 민족성을 고려하면 독자적인 기능을 가질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⑷ 재일 중국조선족의 극복 과제 

➀개인 네트워크의 한계
재일 조선족의 강점은 개인 네트워크가 윤활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이러한 네트워크는 동족 의식으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네트워크를 확대 충실하려고 하면  충분하지 않을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네트워크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극히 내향적이고 그 규모는 결코 크지 않다. 
원래 개인 네트워크란 그 기능이 한계적이고 그 한계적 범위내에서만 보다 밀도가 진한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모와 범위가 확대되어 그 관계가 복잡, 대중화되면 개인 네트워크는 한계에 이른다.

②  재일 조선족간의 온도차 
재일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는 결코 튼튼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적 의존성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그들의 출신지는 산재(散在), 분산되어 있어 일본에 도래한 그들은 그 출신지에 의해 동향의식(同郷意識) 가치관에 온도차이가 있다. 
재일 조선족은 한국에 재류하고 있는 노동자층과는 달리 기업가, 기술자, 학도 등 엘리트층이 중심인 것이 특징이다. 또 중국에서의 그들의 전통적 중심도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서 주 소재지는 연길시이며 연길시 출신 또 연변대학출신이 그들의 정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 소재지 출신자와 다른 지방도시 출신자 또는 지방 도시 출신자 사이에는 각각 동향성에 근거한 가치관의 온도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 네트워크 형성의 원인이 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견(私見)에서는 해외에서 한정된 거주자가 형성하는 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온도차이를 제거하여 협조성을 높일 필요가 있으며 그 근원인 중국 사회에서 형성된 생활방식, 가치관 및 역사적 의존성은 일본사회에서는 필요없을 것이다. 
오히려 차세대를 위해서도 민족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일본 사회에서의 역사적 의존성을 새롭게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즉 1세의 동향성에 의한 횡적인 온도차이를 배제하고, 다음의 세대와의 종적 제휴를 지금의 1세 세대가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배  도래인의 경험으로 보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1세가 아니라 2세 3세에 의해 가치관의 전환이 진행되며, 그 후세대로 1세 2세에 없는 새로운 가치 정의가 생기기 때문에 현재의 1세의 온도차이는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③ 새로운 민족 네트워크 시스템 
향후 다른 가치관을 넓리 받아 들여 하나의 사회를 형성•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계적 개인 네트워크를 초월한 기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를 들면 재일 한국국적인 조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재일 조선족의 강점인 네트워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족적 특성에 배려하면서 현재의 개인 넷트워크와는 다른 새로운 민족 네트워크 시스템의 필요성은 높아질 것이다. 
재일 화교•화인이나 재일 한국인은 타운 (공생 지역)을 만들어 거주의 장소만이 아니고 그지역을 관광자원으로 하고 있다. 재일 조선족타운은 가능한가 라고 물으면 지금은 시기 상조이다. 현재 그들이 거주하거나 기업하고 있는 지역은 수도권일 경우 신오오쿠보 코리안타운 및 그 주변이나 아키하바라로부터 케힌토호쿠선 연선 사이타마 근교가 많다. 아직도 선적 공생지역(線的共生地域)을 형성하고 있으며 향후 면으로서의 거주지역을 형성할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그러나 조선족타운을 형성하면 거기에서부터 동족성•지연성에 근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 시스템 형성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④ 시대 뒤에서 가는 강점 
현재 재일 조선족사회의 중심은 1세이며 3세 4세의 중심 즉 3대 4대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선배도래인의 성숙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다고는 할수 없다 . 그러므로 선배도래인 1세와 재일 조선족 1세들의 비교로부터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재일 화교 최초의 도래는 150년전, 재일 한국조선인은 130년전, 재일 조선족은 25년전으로 1세 도래인과는 100년 이상의 시간 차이가 있다. 재일생활에서 이 차이는 지극히 크다. 시간적인 차이보다 국제환경이나 일본 사회의 외국인 수락숙도에 있어서 천지 차이이다. 
즉 재일 조선족 1세는 그 생활에서 선배도래인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으며 한편 그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후발성 이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2세 3세의 생활을 통찰함에 있에서 이「유리성」을 어떻게 다면적으로 살려 갈것인가가 현재 1세에게 주어진 문제이다. 선배 사회는 보고(宝庫)이다.

⑸ 에필로그
조국과 떨어져 해외에서 생활하는 민족을「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하는 언설이 있다.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희랍어로「흩드려진것 」이라고 하는 의미로 잘 알려진 예에서는 팔레스타인의 밖에서 이산하여 헤어져 사는 유태인을 가리켜 그 이외에도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아르메니아 화인등을 들수 있다. 
 즉 본국외에 거주하는 집단을 디아스포라「정치상의 이유등에서 본국을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그러나 디아스포라는 그 근저에 피상적 비참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이주집단이라고 하는 비관적 함의가 있다.
그 의미에서는 재일 한국인1세나 중국 동북지방(간도)에 유출한 조선족1세들은 확실히 이러한 민족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뉴커머라고 하는 현대 해외 코리안과 같이 스스로 성장 기회를 찾아 세계에 펼쳐지는 민족집단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조선족 뉴커머들도 이 예에 빠지지 않는다. 
현대 재일 조선족을 비롯한 해외코리안과 같이 자기 발전과 본국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포함한 민족발전형 확산은 세계에 펼쳐지는「협노(協労)집단」이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 아이덴티티에 유지해 세계에 펼쳐진 월드 와이드•파트너인 것이다.
이 원고에서는 재일 조선족 2세 3세등 자손에 대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보다 좋은 사회를 남기기 위해서 선배 도래인의 재일 생활경험을 분석해 왔다. 
하지만 사실 선배인들은 2대 3대전에 간도(間島)로 이주한 중국 조선족 1세이며 자기들의 부모, 조부모이다. 
왜냐하면, 재일 조선족들이 전승하려고 하는 문화는 그 모두가 1세부터 계승한 것이며, 중국이라고 하는 타국땅에서 계속 유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향토인 고향의 산과 땅은 이동하지 않지만, 거기에 뿌리 내린 문화와 사회는 사람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끝)
注)
1) 카사이 노부유키 「동아세아 세차례 조류」
「제3회 재일 중국조선족 국제 심포지엄:동북아세아 공동체의 가능성과
코리안네트워크의 역할」2009년12월.
(笠井信幸 「東アジアの三つの波」第3回 在日本中国朝鮮族国際シンポジウム「東北アジア共同体の可能性とコリアン・ネットワークの役割」2009年12月)
2)요미우리신문 2007년12월28일.(2007年12月28日付け読売新聞) 
 (일본어)
3)필자의 현지조사(2008년9월).
4)「동아시아의 문화센타 요코하마 중화가-중국인은 서양문화의중계인-」
『항도(港都)요코하마의 문화론』코바야시 테루오 편저
관동 학원 대학 출판회 2009년 (일본어)
(東アジアの文化センター横浜中華街 ―中国人は西洋文化の介添人―
『港都横浜』
5) 카사이 노부유키「재일 한국인들의 조직적 모국 지원 활동」
『한국의 경제 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나가노 신이치로 편저  도서출판
 말글빛냄 2010년.


*재일 조선족및 그사회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아직 거의 없고 이원고는 필자의 일상적인 연구관심사로부터 친필 한것이다.
(在日朝鮮族およびその社会に関する研究は殆どなく、本稿は筆者の日常的な研究関心からまとめたものである)。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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