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름다운 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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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날엔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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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희정 수필

이렇게 가을 하늘 아름다운 날엔 나는, 문득 내가 그리워진다.

한번쯤 나를 돌아다보고 싶어진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 온 시간들 속에서 지금의 나의 모습과  앞으로 더 많이 살아야 할 나의 모습에 대해 이토록 가을 바람 투명한 날엔 진지하게 물어 보고 싶어진다. 나 누구냐고, 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냐고

 언제 부턴가 나는 매년 가을 하늘이 깊어지는 이맘 때 쯤되면 아름다운 시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원코리아라는 뜨거운 단어가 떠오른다.

오사카 성의 넓은 태양의 광장에서 내 민족이, 우리 동포들이 서로의 가슴을 열고 잠시라도 하나가 되는 가슴 벅찬 순간이 떠오른다.

유학으로 왔다가 우연히 한겨례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재일동포 3세 정갑수씨라고 하는 평화통일 문화운동가를 알게되었고, 그가 실행위원장으로서 추진하고 있던 원코리

아페스티벌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가 그와 결혼하면서 내 인생이 백팔십도로 바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은 일본에서 재일동포로 태어나서 겪어야 했던, 보이지 않는 차별, 분단된 조국의 아픔들을 극복하고 재일동포들의 위치를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플러스적인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정체성을 잃고 일본인으로 귀화해가는 많은 재일코리안들에게 코리안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평화의 심볼(symbol)로 한차원 높게 끌어 올리고자 열심히 노력하면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벗어나 누구나가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형식의 원코리아페스티벌을 시작했다.  

조국이여 /

그대의 흰 등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비 오는 날

부러져 쓸 수 없는 우산처럼

꺾여진 살이 아픈거지.

펼 수 없는 우산을 붙들고

지독히도 슬프게

내가 내리는 거지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세대,지역,계층간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통일, 나아가서는 지구촌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남의 나라 땅 일본에 살면서도 서로 반목과 사상적 갈등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재일동포들이 먼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자고 호소하면서 1985年 일본 오사카에서부터 시작된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 운동이다.

그 당시 우리 동포들은 민단과 총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서로 적과 적의 관계로 얼굴도 안 마주치고 싶어하는 분위기였고, 그리고 여러가지 일본의 정책적 차별로 인해서  재일코리안들 스스로도 자신을 감추고 싶어하고  부정적인 사고까지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새롭게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서로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 생각해 낸 것이 관혼상제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서로가 모여 돕고 함께 나누던 품앗이 정신의 축제였다. 

일년에 하루정도는 서로가 마음을 열고 같이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으며 노래와 춤등을 비롯한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통해 함께 즐기면서 자라나는 차세대 재일동포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심어 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이 지구촌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호소하며 재일동포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어필하면서 일본인들과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축제 형식의 페스티벌을 열게 된것이다.

그런 취지로 시작된 원코리아 페스티벌이 올해 10月24日로 第26回째를 맞이하게 된다.

그동안 원코리아 페스티벌은 조국의 평화통일과 동북아시아 코리아네트워크의 구축 및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활동하면서「원코리아」와「하나」의 이미지를 일본사회와 재일동포 사회에 깊이 침투시키고 널리 알려왔다.

남편은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이것 저것 일을 하면서 하기도 했지만 다른 일을 하면서 자원봉사로 큰 행사를 운영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남편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원코리아 운동에 전부 쏟아 부었다. 자연히 모든 생계는 내가 책임져야 했고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했다.

아이가 어리다는 것도 있었지만 원코리아 일도 도와야 했기때문에 시간적으로 많이 구속 받는 곳에는 취직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일이 힘들더라도 자유롭게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편을 도왔다.

사무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좁은 삯월세 단칸방은 서류들, 우편물들로 넘쳐났고 늘 어수선 했다.

작은 식탁 위에는 널려져있는 서류들로 밥 먹을 공간도 없었지만, 치우고 싶어도 치울 곳도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아이와 같이 밥을 먹으며 피난민 같은 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행사에 참가하여 도와주는 자원 봉사자들 중에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10시가 넘은 늦은 밤까지도 회의가 계속 진행될 때는 식사비를 절약하려고 집에 있는 김치를 넣고 김치찌게 우동을 만들어 주거나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주곤 했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을 보노라면 우리 동포들도 이곳 일본 땅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헐뜻고 비방하고 하는데 그러한 벽을 뛰어 넘자고 재일동포들이 주축이 되어 펼치고 있는 원코리아페스티벌 운동에 바쁜 시간들 내서 참가해 주고 같이 열심히 뛰어 주는 모습들이 너무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본땅에서 우리민족이 먼저 화합하자고、 평화를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외칠때마다 부딪혀야 하는 절망과 겪어야하는 어려움들, 그리고 억울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이 있었다. 또한, 결혼해서 줄곧 가정의 생계와 아이들의 육아문제를 혼자 떠안고서 어려움을 겪을 때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느낌도 들었었고, 나 자신도, 별로 잘난것도 없으면서 자원봉사로 원코리아 운동한답시고 가정도 아이들도 자기자신도 돌보지 못하며 헉헉대고 살아야하는 인생에 대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연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제일 미안했다.

 

      미안하다 아가야 /

 

미안하다 아가야

빨리 일어나, 빨리 먹어, 빨리가

아침마다 그렇게 말했던 것

 

이제 겨우 네 살 된 너의 발가락이

운동화 속에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도

기다려 주지 못했던 것.

 

보육원에 제일 먼저 가서 덩그라니

기다리고 있을 너의 쓸쓸한 시간보다

언제나 밥 줄 , 내 출근 시간에 매달려 동동거렸던 것.

 

용서해다오 아가야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 먼저 생각 했던 것

 

해야 할 다음 일들로 꽉 차 있던 머리가

즐겁게 종알대는 너의 하루 일과를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

 

고맙다 아가야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지켜 주었던 것.

 

바쁘다는 이유로 시계도 못 보는 너에게 째깍 째깍

재촉만 해대는 엄마를 그래도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늘 사랑해 주었던 것.

 

그리고, 아가야

가끔은 물어 봐 주렴

“엄마, 엄마의 꿈은 뭐였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엔 우리집 해가 좀 천천히 떠올라 줄지도 모르겠구나.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닥쳐온 급작스러운 환경변화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분단되어 있는 민족의 역사적 아픔은 정말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것 들이었다.

이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누군가가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안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같이 힘을 합쳐 만들어가야 할 가치있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생계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이라든가 재일동포들의 화합, 넓게는 동북아시아의 평화까지 외치며 살아야 하는 한 사람의 아내 자리가 내게는 너무 힘에 부쳤었다.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대추차를 끓이다가 지은 시가 하나 있는데 옮겨적어 본다.

    대추차 /

얼마만큼 사랑을 해야

이토록 달고 향긋한 마음이 될까

끓이고 끓여

푹푹 녹아 없어져 버린 마음이

대추차 너에게 묻는다.

 산다는건 뭘까? 나는 어쩌다가 이곳 일본까지 와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또 재일동포로 살아가는 일은 왜 이토록 아프고 힘이 드는 것인지…….

같은 재일동포라도 일본에서 태어난 동포들과 나처럼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후에 건너온 뉴커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大阪에서는 민단, 총련이라는 남과 북을 대표하고 있는 기관들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차가운 기류가 복잡하게 엉켜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받는 것이었다. 민단 쪽에선 북한이나 조총련쪽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오해를 했고 또 총련 쪽에선 한국쪽에서 시켜서 하는것이라고 억지를 쓰며 협조는 커녕 방해를 할때도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일본에서 사는 일이 힘겹게 느껴졌다.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그리운 고향 땅 서울로 다시 돌아 가고 싶었다.

 타국살이

서울의 공기에 감염되고 싶은 날.

매일 똑 같은 이 아름다운 일상에서 이탈하고 싶은 날.

혼자선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이 땅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

나는 늘 다니던 길을 버려두고 좁은 골목길을 찾는다.

골목하나 다르게 걷다 보면 모든 것이 새로워져서

남아있는 내 삶도 이제는 밝을 것만 같은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어 오기 때문이다.

그래 무엇인가 몸살나게 그리운 날은 골목하나 다르게 걷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그리움이 가시지 않거든

저 골목 하나 돌아서면 내 조국이, 내 어머니가

나를 지켜보며 환하게 웃고 서 있다고 그렇게 위로하자.

그렇게 위로 받고 살자.

그리움 몹시도, 아프게 저려오는 날이면………

 그냥 한국에서 살았으면 못 느꼈을지도 모를 이 애틋한 마음과 멀리서 사느라 임종도 못 지켜드리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때면 잘 쓰지도 못하는 시를 끄적거리며 그리움을 달랬다.

이렇게 나는 가끔 센치해지기도 하고 힘들 땐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남편과 함께 원코리아페스티벌 행사를 이끌어 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작년에 사단법인 H2O 청소년사랑품앗이 운동본부를 알게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오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무턱대고 저녁에 전화 한 통화 하고 찾아간 나를 장문섭 사무총장님은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즉시 도움을 주시기로 약속을 해주셨다. 사무실도 임시로 사용하라고 하시고 도와 줄 스텝까지 구해주시면서 열심히 해보자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에 나는 너무 감동하여 아무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총장님은 이런 것이 품앗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무엇인가를 주었으니 너도 무엇인가를 달라가 아니라 그냥 생활 속에 배어 있는 나눔과 배려, 봉사와 사랑, 그런것들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것들, 그 자체가 품앗이 정신이었던 것이다

말씀을 나누면서 품앗이운동은 봉사의 개념보다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구별을 두지 않고 세대, 지역, 계층, 인종 간의 각자의 능력(문화, 예술, 체육, 교육, 봉사, 나눔, 기타)을 사회에 품앗이하는 상호 대등의 개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재 인식할 수 있었다.

순간 나는 원코리아페스티벌이 시작된 동기도 결국 이러한 서로 돕는 마음,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 양보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저변에 깔고 있었고 어려운 문제들일수록 축제에 참가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긍정적으로 풀어보자는 취지였건만 일을 진행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품앗이 정신은 잊어버리고 힘든것만 고달픈것만 떠올리며 용기를 잃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고 반성을 했다.

생각이 바뀌면 모든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게 된다. 그런 후에야 새로운 길이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재일코리안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스로가 마이너스적인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지만「경계」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해외동포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식민지정책을 펼쳤던 일본에서 차별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이중의 곤란을 안고 살아야 했던 어려움 속에서도NGO단체와 일본인을 포함한 재일동포 시민들이 연대해서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인류의 평화발전과 공생을 위해 25년동안 꾸준히 펼쳐왔던 원코리아페스티벌 운동은 이제 한 민족의 통일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사람들의 평화와 공생을 위해서도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져가야 할 운동이라 생각한다.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지금 재일코리안들과 일본인들, 그리고 본국에서 새로와서 10년 넘게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소위 뉴커머로 불림) 과 유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협동작업을 해나가고 있고 필리핀, 브라질등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약 3만명에서 많을때는 5만명 정도까지  모이는 대 규모의 행사로 점점 발전해 나가고 있다.

다문화 포용,외국인 배려의 측면에서 보면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자신들도 외국인 입장으로 일본에서 살면서 코리안보다 더 적은 숫자로 소수민족이라는 차별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와도 깊은 교류를 가지며 당일 행사에 같이 참여시키는 등 이미  세계인과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다문화사회 만들기를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큰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지원도  없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매번 재정적인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십시일반 조금씩 기부금도 내고 품앗이 형태로 힘을 모아, 26년전, 그 혹독한 냉전시대에 재일코리안들의 발상의 전환으로 이 행사가 시작되었고 노래와 춤, 어우러짐과 서로 나눔, 봉사와 사랑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문화, 축제형식의 평화운동

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그리고 코리안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일본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은 그 의의와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그러나 이젠 자원봉사자들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원코리아페스

티벌 운동을 한국에 후원회 모임을 갖는 등 여러가지로 방법을 모색하면서 조국에서 살고 계신 분들 중에서도 뜻을 같이 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힘을 합쳐 더욱 힘차게 펼쳐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25년동안  이 운동을 계속 해올 수 있었지만 몇년 전부터는 일본의 정책적 방해로 인해 파친코하시는 재일동포 분들이 도산하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여파로 원코리아도 올해 특히 심한 재정난에 빠져 이번 행사를 치룰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위기감과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 어려움들을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움직임들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일에 미약하지만 아주 작은 도구로라도 씌여 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없이 품앗이 정신을 잘 살려나가면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다보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원코리아페스티벌 행사를 통해 일본에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 확립과 차별화된 문화 아이콘을 만들어 내고 더불어 우리고유의 품앗이운동을 세계화 시켜나가는데 더욱 힘을 쏟을 생각이다.

우리 해외코리안들이 품앗이 정신을 가지고 매사 성실하게 살면서 그 나라에 모범이 된다면 코리아의 국격은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높아지리라….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10년 2월 2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제 1회 H2O품앗이 학술대회에서 임영상교수님께서 (한국외대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재외한인학회 부회장) 발표하신 [동포사회를 보듬는 ‘품앗이’운동]을 잠깐 옮겨적어 보겠다.

 글로벌코리아(Global Korea) 를 이루기 위한 지름길이 ‘글로벌코리안네트워크’의 구축이다. 아마 우리 정부는 정계와 경제계의 코리안 네트워크에 역점을 둘 것이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문화를 통해 거주국에서 코리안의 위상을 높이면서 다민족/다문화 공생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코리안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2009년 9월30일 제2회 재외동포정책 세미나)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오사카 이쿠노구 쓰루하시의 코리아타운은 일본 전체로서도 최대의 한인 거주지역이다. 1920년대 쓰루하시 부근에 히라노운하를 건설할 때 끌려온 한국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다. 쓰루하시 전철역 주변에 있는 “조선시장”은 코리아타운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태내는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고, 한국에서 판매하는 물건을 수입하여 거래하고 있다. 한국 식품점을 중심으로 한복집과 불고기집 등이 늘어서 있다. 최근에는 한류를 체험하기 위해 일본인들도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최고의 한류드라마[대장금]의 주인공(이영애)과 판소리 등 다양한 한국문화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들이 곳곳에 업소마다 부착되어 있다.

이쿠노구의 코리아타운도 대립과 갈등의 재인코리안 사회의 전형이었다. 민족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조총련과 일본 공립학교와 한국계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민단 간에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그런데 26년 전인 1985년, 오사카 재일 코리언 사회는 해방40주년을 맞아 원코리아, 통일 한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통일운동이자 문화운동인‘원코리아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주최측은 특히 젊은 세대가 관심을 가지는 록, 재즈 등 현대음악이나, 영화 , 연극 미술행사를 개최하고, 한류도 받아들였다. 나아가 ‘원코리아페스티벌’을 통일(원코리아), 아시아공동체(원아시아), 세계시민(원월드)을 지향해, 열린 이미지, 넓은 미래의 비전으로 발전 시킴으로써 국적이나 민족을 불문하고 누구나가 참가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갔다.

1990년 행사에 참여한 김덕수(사물놀이패)와 강상중(도쿄대 교수), 양석일(작가), 구로다후쿠미(배우), 기타노다케시(코미디언)등 한국과 일본의 저명인사들이 ‘원코리아페스티벌’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4세기 반의 세월을 통해 ‘원코리아’의 이미지는 재일 코리안사회의  소통코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원코리아퍼레이드’(교토), ‘원코리아바둑대회(도쿄)’ 등 크고 작은 동포행

사에 ‘원코리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004년 [원코리아페스티벌실행위원회]는 [재일한국민주인권협의회]와 [민족교육문화

센터]와 함께 [코리안NGO센터]를 결성 했다. 아직도 재일코리안 사회 일각에서는 ‘원코리아페스티벌’을 수용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작년 10월 제25주년 행사를 계기로 ‘원코리아페스티벌’은 코리아NGO센터와 함께 재단법인화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해 12월21일 여의도 의사당로22번지 이룸센터 지하1층에서 개최된 원코리아페스티벌실행위원회 부위원장인 김희정 시인의 시 낭송회에 모인 ‘품앗이’ 인사들을 보고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 자리 잡고 있는 원코리아페스티벌이 어떻게 하여 글로벌 코리안 ‘문화’ 네트워크의 전형이 되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

공평하게 공존하지 않는

그러나 이제는 어느쪽도 멈출 수 없는

소중한 내 삶의 뜨개질.

 아무리 엮어도 엮이지 않는

그러나 이제는 어느쪽도 그리움 남는

따뜻한 내 삶의 실타래.

 

 내게 있어 두 나라는,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한국이기도 하면서 또한 내 인생의 반을 뿌리내리고 살아온 일본이기도 하며,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내 민족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21세기는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지구촌 가족의 시대이다.

내 나라, 내 민족뿐만 아니라 현재 글로벌 경제위기로 전 세계가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협력, 나눔, 배려, 포용 등의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품앗이 정신이 더욱더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원코리아페스티벌 운동에 우리 고유의 품앗이 정신이 살아 숨쉬며서 새로운 이미지 ,새롭게 거듭나는 운동으로 돌파구를 찾아 이끌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품앗이 운동과 원코리아페스티벌의 취지 가운데 세계인, 세대간, 지역간, 계층간의 어울림의 장을 열고 이해와 화합으로 함께 평화로운 세상, 열린 세상을 만들가자는 부분이 일맥상통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지식씽크넷에 많이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내심 내가 씽크넷 멤버이고 가족이란 사실에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씽크넷이야말로 살아움직이는 아이디어의 보고이고 품앗이 정신을 가장 잘 이끌어내고 있는 정말 소중한 모임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없지만 씽크넷 회원분들과도 같이 고민하고 같이 생각하면서 올해 원코리아 행사를 준비해가고 싶다. 점점 각박해져가는 일본의 상황도 있지만 올해는 자원봉사자들의 일손도 턱없이 부족하여 아직 전단지도, 포스터도 만들지 못한 상황인데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모든 상황들이 바뀐다는 사실을 배웠다.

반 잔 정도 들어 있는 컵의 물을 보면서 벌써 물이 반이나 비었다고 말 할 수 도 있고

아직 반이나 남아있다고 말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나는 지금 뜨겁게  감사하고 있다

내 잔에 아직도 반이나 물이 남아있음에…….

씽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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