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 목축업

조선이주민은 소로 경작하기 때문에 소를 많이 기른다. 광복 전 간도의 소품종은 조선소, 본지방소, 몽골소, 러시아소, 잡종소가 있다. 1821-1861년 조선이주민은 함북 등 지역에서 월강하여 개간함에 따라 조선소가 간도에 들어왔다. 1924년 조선소는 2만 8000마리였다. 일제통치시기 조선소는 소 총수의 60%를 점하고 몽골소가 30%, 러시아소 및 잡종소가 10%를 점하였다. 민간에서는 조선소로 지방소, 몽골소와 잡종하여 자발적으로 품종을 택하여 점차 간도농용소를 형성하였다.

소사양에서 조선이주민은 독특한 방법을 갖고 있다. 우사는 거실과 통하여 따뜻하고 사료는 가마에 넣어 끓였기에 소독되고 나른하며 먹이는 물은 쌀을 씻은 물이나 가마를 가신 물이므로 역시 따스한 것이다. 송아지 때부터 세심히 보살피고 사람과 소가 함께 지냈다. 밭갈이 전에는 힘내라고 찰떡을 먹이기도 한다.

간도조선이주민은 말을 기르기도 하였다. 1924년 간도에 3만 필 말이 있었는데 조선말 5000필이 있었다. 이밖에 본 지방말과 일본의 개량말, 러시아말도 있었다.

간도에는 본지방돼지, 조선돼지, 러시아돼지 등 품종이 있다. 1924년 간도에는 8만 1775마리 돼지가 있었는데 그중 조선돼지가 3만 2500마리였다. 1943년 간도의 돼지는 6만 8427마리로 줄어들었다. 조선이주민은 나머지 음식, 잡초, 겨를 돼지사료로 하였다.

1937년 간도에는 2만 6300호가 개를 3만 2667마리나 길렀다. 그중에는 조선개도 있었다. 당연히 지방개가 위주였다.

양과 염소는 주요하게 중국인들이 사양하였다. 1924년 간도에는 12호의 중국인이 395마리 염소를 길렀고 1943년 간도의 양은 3550마리였다. 1878년 중조변경 일대에 소급성돌림병이 일어 대량의 소가 죽었다. 1913년 왕청현 하마탕 전하촌, 후하촌(현 홍일촌)에서 소급성돌림병으로 103마리 소가 죽었으며 사망률은 64%이다. 1916-1930년 용정에서는 소급성돌림병으로 1161마리 소가 죽었다. 간도지방에는 여러 가지 짐승병이 돌았는데 마비저, 우역, 탄저, 광견병, 구제역 등이 가장 많았다.

1.1. 제2절 금 융

만주조선이주민에 대해 금융업은 엄청난 업종이 아닐 수 없었다. 국가적인 후원을 상상치도 못할 형편에서 오로지 사회의 밑바닥에서 자체의 힘으로 한 푼씩 모아 기초를 닦아야만 했었다. 맨손으로 창업하기란 언제나 간고한 작업인 것이다.

초기, 조선이주민은 금융기관보다는 몇 사람으로 구성된 저축금을 모았다. 물론 금액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이주민에게 있어서는 이용할 만한 활동무대였다. 1919년 3월, 조선이주민의 금융기관으로서는 용정촌에 간도흥업주식회사가 세워진 것이다. 자금액은 10만 원이고 사장은 강재후 씨였고 1926년도에는 대부금 총액이 49만여 원이었다. 이는 위만주국 이전 간도의 유일한 조선이주민의 금융기관이었다. 대표적이고 규모가 큰 업체를 소개한다.

▪무역흥업주식회사 본 회사는 처음에 조선이주민무역흥업회사로 불렸으며 간도 국자가에서 영업을 하였으나 1917년 9월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용정에 본점을 개설하고 국자가, 투도구에 지점을 두고 간도 각 지역에 출장소를 내왔다. 자금은 10만 원이었고 조선과 간도의 생산품 매매, 수출업을 주요 업무로 했다.

▪협동저금계 1915년 음력 1월에 설립되었다. 70여 명 조선이주민의 협동저금에 의한 것이며 1917년에는 자금이 4900원에 달하였다. 자금을 내줄 때는 첫째, 부동산을 담보로 하고 대부기한을 3개월로 정하며 이자는 월 3-4푼으로 하였다. 그러나 상업에 대해서는 연대책임으로 신용대부하며 주로 용정촌과 부근 지방의 조선이주민거주민에게 대부하였다.

▪저금조합 연길현 동성용가 거주 조선이주민 원수천 외 4명의 공동출자에 의해 자본금 4000원으로 부근의 조선이주민에게 부동산을 담보로 대부하고 금리는 월 4푼이고 대부 기한은 2개월이다.

이외에 길동식산(殖产)회사, 식산상회, 연화조합, 공익저금조합, 식산저축단, 동신조합, 부흥전당포, 협신상회, 협성회, 공상회, 균평회사 등이 있다.

1926년 통계에 따르면 간도에 세워진 중국 측 금융기관으로 1909년 국자가에 설치된 ‘길림관은호은행’, 1914년에 설치된 사영 ‘광익전장’(广益钱庄), 1917년 설치된 ‘중국은행지행’, ‘식변(殖边)은행’ 등이 있고 일본인의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은행 파견소, 동양척식회사 간도파견소, 간도상업 금융회사(이상 용정에 있음) 및 일본영사기구 소재지역에 분포된 5개 금융부가 있다. 이런 금융기구는 조선이주민도 대상하여 업무를 보았으며 조선이주민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었다.

▪조선은행파견소 1916년 용정촌에 설치되었으며 주로 무역상과 거래하였다. 일찍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용정촌 화재민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영사관 안에 설치되었던 간도구제회를 전신으로 하여 1918년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파출소의 이름으로 나타난 이 금융기관은 주로 일본인과 조선이주민을 대상하여 농업자금 대부를 취급하였다.

▪간도상업금융주식회사 1918년 11월 11일 조선이주민과 일본인이 조직한 것으로서 창립자금은 10만 원이다. 1926년 말 대부금 총액은 176만 8000여 원에 달하였고 저금 총액은 98만 2000여 원이었다. 1927년에 은행으로 고쳤다.

▪조선인민회금융부 1920년 일본육군성에서 재만조선이주민에게 하달한 10만 원의 최초기금으로 용정촌, 국자가, 투도구, 훈춘, 배초구 등 상부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주로 농촌의 중농 이하 서민계층을 대상했다.

▪금융부 1920년 조선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의로 일본정부에서 10만 원을 지출하여 조선이주민거이민회의 부속사업으로 삼고 총영사의 감독 밑에 영사관 소재지 5곳에 금융부를 설치하였다. 1926년 말 대부금 총액은 24만 원이었다.

다음 1930년 이후의 상황을 적으면 아래와 같다.

주식회사 동흥(东兴)은행 1933년에 자본금 100만 원으로 창립되었다. 대표인물은 방규환(方奎焕) 씨였고 본사는 도문에 두고 연길, 용정, 명월구, 돈화, 왕청, 훈춘, 목단강, 가목사, 안도, 임구, 영안, 동경성, 삼도구 외 수 곳에 있었다. 큰 주주는 石本惠吉(10만 원), 山本庄吉(30만 원), 강윤길(28만 원), 방규환(15만 원)이다. 동흥은행은 만주 내 조선이주민이 설립한 유일한 은행이며 1945년에는 만주중앙은행의 투자로 자본금이 500만 원으로 늘어나 일대 큰 은행으로 재출발하게 되었으며 명칭도 동만은행으로 개칭되었다.

▪간도흥산(兴产)주식회사 1935년, 자본금 10만 원으로 창립되었다. 사장은 박헌씨었고 본사는 용정촌에 앉혔다.

▪배초구권업주식회사 1932년 자본금 8만 원으로 세워졌다. 사장은 김하청씨었고 전문업무는 강명길이 맡았다. 본사는 배초구에 앉혔다.

▪길림흥업사 1922년 5월에 창립되었다. 자본금은 1만 원이고 사장은 오덕림, 이사는 박기백이며 본사는 길림에 있다.

▪돈화금융주식회사 1933년에 창립되었다. 자본금은 10만 원이고 사장은 강윤길씨이며 본사는 돈화에 있었다.

1926년 철령지방의 금융기관을 보면

▪철령금융조합 1925년 12월에 창립되었다. 참가자는 54명이고 기본금은 1572소양원 (小洋元)이다.

▪개원금산조합 1926년 6월에 창립되었다. 참가자는 90명이고 기본금은 400원이다. 본부는 개원에 있다.

▪3․1농우(能友)조합 1925년 8월 개원에 세워졌는데 참가자는 156명이고 기본금은 2340원이다.

▪해룡농상무조합 1926년 2월 해룡에 창립되었으며 참가자는 60명이고 기본금은 7470원이다.

1944년 위간도성금융기관으로는 주요하게 위만주국중앙은행 연길지행, 흥업은행 연길지행, 연길상공금융합작사, 간도은행, 만주척식회사지점, 간도무진회사, 대성은행 연길분행, 흥농합작사와 16개 전당포가 있었다.

▪만주중앙은행 연길지행 원래의 연길영형관은전호를 접수, 관리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초기에는 현 연길시 진학가파출소 맞은 편 검은벽돌청사에 자리잡고 있었다. 1938년 총행 청사를 본따서 새 청사를 지었다. 옛터는 국자가와 해란로가 교차하는 어구의 동남쪽에 있다.

▪연길상공금융합작사 위만주국의 관청금융기구이다. 총사는 신경에 있다. 1937년에 설립되었다. 전신은 ‘금융회’이다. 금융회는 조선총독부에 예속되었으며 구체적 임무는 연대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조선농민에게 대부금을 내주어 부림소와 농구를 사게 하는 것이다. 중국인의 업무는 취급하지 않았다. 1941년 새로 영업층집을 지었는데 집터는 연길백화청사 새로 지은 층집 자리이다. 합작사는 중․소상공업자들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저금, 대부금, 금액지불 등 실무를 취급하였다.

▪대성은행 연길분행(후에 할빈은행 연길지행으로 고쳤음) 주식회사 성질을 띤 민간 은행이다. 본행은 할빈에 있었다. 중국인 상공업자를 대상으로 실무를 취급했었다. 연길분행 옛터는 지금의 연변소수민족상점 자리이다.

▪연길무진회사 월로임을 생활원천으로 하는 노동자, 직원을 위하여 봉사한 민간금융기구로서 ‘발회(拔会)’형식으로 자금을 융통하면서 몇 가지 금융실무를 취급하였다. 옛터는 연길계량기공장 길 서쪽의 단층집이었고 새로 이사한 층집은 지금의 연변전업국 남쪽에 있었다.

1936년 6월 말 현재 만주조선이주민금융기관 영사관별 상황은 표 1-10-01과 같다.

▲ 사진 1-10-02 간도 연길금융회

 

8․15광복 후 한 시기 간도의 금융기구는 문을 닫았다. 1946년 4월 12일 해방 후 연변의 첫 은행인 길동은행이 탄생하였다. 경리는 엽극 씨였다. 후에 몇 차례 조절을 거쳐 1950년 말 동북은행연변지행으로 고쳤다. 소속으로는 안도, 왕청, 도문, 훈춘, 연길, 화룡에 6개 판사처와 석현, 로투구, 조양천, 투도구 등 5개 영업소가 있다. 322명 직원 중 63%가 조선이주민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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