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와 목사 문익환…알고보니 한동네 '동갑친구'

중국 용정 명동촌의 문익환 목사의 집 전경.

◇ 윤동주 생가의 저녁노을

용정에서 확트인 남쪽으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왼쪽에 큰 선바위가 버티어 서 있다.

그 입석을 지나면 오른쪽에 조그만 시골마을이 보인다. 윤동주 생가 표석을 굽어돌면 북풍받이가 전혀없고 마당 텃밭도 넓고 뒤란도 밭을 일구어놓은 전형적인 한옥이 보이는데, 바로 윤동주 생가다. 내가 몇 해전 생가를 찾았을 때 마침 서녘하늘 위로 저녁노을이 빨랫줄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시인의 혼이 얼비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고 없는 날들이 모여/불타고 있는 저 꽃밭 좀 봐 !/가만 있질 못하고 떠서/흐르는 꽃밭 좀 봐! /식지 않은 하늘이 보여주는/뜨거운 심장의 꽃들이 뒤돌아보며/무어라 중얼거리네/죽어 말없는 시인은 하늘에 /넋을 묻었나?/저녁이면 찾아와 붉게 타올랐다가/저승길 먼 듯 썰물지는/저것 좀 보아!'(서지월 시 '尹東柱 詩人의 生家 저녁 노을' 전문)


◇ 문익환 목사의 집을 찾아서

몇년이 지나 다시 용정강덕진료소 소장인 오정묵 시인이 내게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윤동주 마을에 문익환 목사가 살던 집이 있는데 자신이 매입해서 문화공간으로 꾸미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고 비어두었기에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으며 기와로 이은 집 뒤편에는 굴뚝이 치솟아 있어 지금이라도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문 목사가 한국의 재야운동가라는 것을 오 시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를 써서 시집까지 낸 건 모르고 있었다. 나는 덧붙여 문 목사의 아들인 문성근씨가 한국의 유명한 영화배우라는 것, 특히 내 친구인 소설가 하일지가 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 영화화되었는데 강수연과 함께 주연한 배우가 문성근이라 일러주었다.


◇ 일제치하 가장 불우했던 대표적인 두 서정시인

일제치하 가장 불우했던 대표적인 두 서정시인을 꼽으라면 김소월과 윤동주일 것이다.

김소월은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성도와 어머니 장경숙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철도를 설치하던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이 되자 할아버지가 그를 돌보았다. 소월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서춘•이돈화•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6년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년 32세 때 곽산에서 음독자살했다.

중국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전경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과 어머니 김룡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에 있는 리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그해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각각 옥사했다. 윤동주의 경우 그나마 유해가 만주땅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어 지금도 많은 한국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비해 김소월은 어찌됐는지 모른다.

◇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

문 목사는 윤동주와 같이 명동에서 자랐으며, 윤동주와 함께 입학해 명동소학교와 용정중학교에 다녔다.

윤동주는 문익환과 동갑이고, 갓난 아기 때 문 목사 모친의 젖을 같이 빨아먹고 자랐다 한다. 명동소학교 같은 반이었고,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평양숭실학교에도 같이 다니다가, 신사참배 물결에 반대하여 자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다시 용정 광명학원 중학교에 편입한 것도 같다. 둘 다 공부를 잘 했는데 윤동주는 소년시절부터 시인이었으며 문 목사는 70대의 만년에 이르러 시를 쏟아낸 것이다. 문 목사의 시집 중 '옥중일기'의 머리말에 보면 '동주형! 나같이 평범한 시인도 감옥에 들어오면 시가 쏟아져 나오는데, 형같이 타고난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날마다 숨쉬며 얼마나 절절한 시들을 짓씹었을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문익환은 감옥 가면 윤동주 감옥을 생각하고, 시를 쓰면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문 목사가 70의 나이에 쓴 시 '동주야'도 있다.

▲ 중국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가는 길의 선바위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카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문익환 시 <동주야>전문)

용정 명동촌에 가면, 한 시대를 숨가쁘게 살다간 두 인물을 만나게 된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민족혼을 시로 승화시킨 윤동주와 평생을 민주투사로 정의를 부르짖어온 문 목사이다. 한 동네에서 태어난 둘의 집은 아직도 남아있어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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