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 제3절 상업과 무역

1.1. 제3절 상업과 무역

일찍 1881년 봉금령 해제와 함께 훈춘부도통은 훈춘 득승문 밖에 우마시장을 열었다. 그 후 국자가, 용정 등 지역에 육속 정차별 대우장이 나타났다. 초기 간도의 상업활동은 농산물을 교환하는 무역시장이 위주로 되고 그 외 화폐를 매개로 하는 공업제품의 교환활동과 교환쌍방이 일정한 기한을 정하고 진행하는 외상매매도 있었다. 청나라 말, 민국 초기에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간도 상업도 점차 도시상업으로 넘어갔다.
상업활동이 비교적 흥성된 곳은 용정촌, 국자가, 투도구, 달라자, 남양평, 배초구, 명월구, 돈화 등지이다. 이런 곳에는 상점 등 시설이 있어 여러 상품을 매매하고 있었지만 기타 농촌에서는 장날을 정하며 인근의 주민에게 상품매매를 하였다. 1929년 통계를 보면 간도 경내의 시장은 30개였다.  

▲ 사진 1-10-03 용정의 우시장

 연길현 경내에 14개:
국자가, 용정촌, 투도구, 이도구, 팔도구, 로투구, 동불사, 의란구, 세린하, 팔가자, 조양천, 화첨자, 옹성라자

화룡현 경내에 8개:
다라자, 개산툰, 회경가, 삼도구, 쟈피구, 석건평, 걸만동, 백도하자
왕청현 경내에 5개:
배초구, 대감자, 대두천, 가야하, 양수천자

훈춘현 경내에 3개
현성, 마적달, 연통라즈

화물대가지불에서는 소매와 도매를 불문하고 현금과 외상거래를 하고 있으며 현금거래가 위주고 신용 있는 고객에게는 1개월 기한으로 외상을 허용하는 상황이다. 시장에서 교역된 상품들로는 일본제품, 조선제품, 중국제품, 러시아제품, 유럽과 아메리카 제품이 있으며 조선제품은 수입량이 적으며 조선이주민의 식료품과 청진의 마른물고기는 대개 조선이주민 상인이 마차에 싣고 와서 현금과 교환하고 돌아가는 것이 통례이다.
농산물의 수출은 조가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거개가 용정촌, 국자가, 투도구시장에서 일, 조, 중인의 손에 매수된 후 일조상인에 의해 조선이주민의 식량으로 회녕과 청진 지방에서 수출되고 중국인에 의해 훈춘을 통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출된다.

 

▲ 사진 1-10-04 간도 도문세관

 용정촌은 간도상업의 중심지였다. 1907년 조선통감부용정파출소가 세워질 당시 용정촌은 96호 조선이주민과 5호 중국인이 있었으나 그 후 일본총영사관과 중국 측의 사무기구가 설치되고 천도경편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1924년에는 1만 5000여 명 인구를 소유한 시가지로 변모했다. 일본총영사관을 비롯한 병영, 세관, 세무국, 상부국, 체신국, 거유민회, 학교, 은행, 교회당, 여러 전문회사 등이 설치되었고 개인, 단체에서 경영하는 공장, 상점과 봉사업종이 흥성하였다. 용정촌은 일제의 간도통치 중심지였다. 매월 음력 2, 7을 장날로 정하고 2일은 남십자가를, 7일은 북십자가를 중심으로 장을 보았고 수레나 말 등에 물건을 싣고 모여왔다. 조선이주민은 주로 광목, 면화, 화장품, 모자, 신발, 일용잡화, 마른물고기, 절인물고기, 도자기, 우, 마, 닭, 알류, 화목 등을 교환하였다. 장날엔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어 시내는 매우 흥성하였다. 기재에 의하면 용정촌 장날에는 보통 3만여 명 사람들로 붐비어 오가는 우마차가 통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울, 가을 계절에는 상품교역액이 2-3만 엔에 달하였다.
국자가는 간도에서 두 번째로 되는 도시이다. 일찍 초간총국 남강분국(1881년), 무민부 겸 이사부(1903), 변무독반공서(1908)가 설치되었으며 1909년에는 청나라의 변방아문인 연길부가 설치되어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액목, 동녕, 영안 등 8개 현을 통관하는 길림성 동변행정의 중추로 되었다. 국자가는 민국시기 군벌이 간도를 통치하는 중심으로 되었다. 국자가는 중국상인을 위주로 하였다. 1924년 국자가에는 9576명 인구가 있었는데 중국인이 7883명으로서 총인구의 82%를 넘었다. 일본인은 191명이었다. 국자가의 상업은 용정촌 또는 간도의 기타 지방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주로 조선이주민과 일본인을 대상하는 거래로서 상품은 일본제품 또는 한국제품이며 수입지는 청진, 서울, 용정촌이며 현금과 수부분의 외상으로 거래한다. 장날은 음력 4, 9로 하고 있으며 국자가 동쪽 조선이주민마을 부근에 시장을 설치하고 상인들은 길가에 난전을 벌이고 배천, 광목, 도자기, 모자, 신발, 마른 물고기, 절인 물고기, 성냥, 담배, 비누, 종이 등 일용품을 진열하였다. 고객은 대부분이 부근의 농민이며 농번기는 모여드는 사람이 적고 추수 후에는 평시와 달리 성황을 이룬다. 겨울에는 부림소도 끌고 와서 파는 자가 많았다. 


기타 시가지의 상황도 용정촌, 국자가의 산업습관과 거의 같다.
간도의 무역은 거개가 일본이나 조선으로 나갔기에 일본인이나 조선이주민의 손을 거치게 되었으며 중국인은 별반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 농산물생산자가 거의 조선이주민이었으므로 지방에서의 매매가 전부 조선상인에 의해 진행되었고 수출업자의 3분의 2가 조선상인이었다.
간도지방에 있어서 조선이주민 기업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간도흥업주식회사 소속회사 외 몇 개 회사가 있다.
▪용정무역주식회사 1924년, 간도흥업주식회사에서 일본상인과 대항하기 위해 세웠다. 창립 시 자본금은 10만 원이고(후에 50만 원으로 증가) 사장은 이용석(李容锡) 씨였다. 용정에 본사를 두고 청진, 도문, 목단강, 돈화, 통화에 지사를 앉혔다.
▪간도곡물주식회사 193?년 간도흥업회사에서 자본금 10만 원으로 세웠다. 사장에 이용석, 전기흥 씨이며 용정에 본사를 두고 목단강, 돈화에 지점이 있다.
▪북만상업주식회사 1942년에 창립되었다. 자본금은 30만 원이고 사장은 강윤길(姜润吉), 본사는 길림에 있다.
▪국자가무역주식회사 1919년에 창립되었다. 자본금은 5만 원이며 사장은 장정룡, 본사는 국자가에 있다.
▪해동물산주식회사 1935년에 창립되었다. 자본금은 10만 원이고 사장은 이용석 씨이며 본사는 신경에 있다.
▪주식회사신민공사 1922년 7월 1일에 창립되었다. 대표자는 박영효씨 외 한국 유지인사이다. 봉천시 가모정 8번 지역에 있으며 경영항목은 농업, 임업, 국내외 물산의 수출입, 금융, 정미업, 신탁업 등이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시기의 간도무역은 조선, 노령연해지구, 길림 방면 등 크게 3개 경로로 진행하였다. 노령연해지구와의 무역은 훈춘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는데 주요한 수출품은 조, 입쌀, 콩, 소, 돼지, 술, 담배, 깨기름 등이고 주요한 수입품은 면포류, 사탕, 통조림, 구두, 석유 등 제품이다. 훈춘 대 러시아 무역은 1909년 이래 뽀시에트자유항의 폐쇄로 감소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909년 말 훈춘과 노령연해지구와의 무역액은 간도무역 총액의 20%였지만 1917년에는 10% 좌우로 하강하였다. 1918년 훈춘세관 통계에 따르면 대러시아 연해지방 무역수출은 19만 9210세관냥이고 수입은 7만 7275세관냥이다.
길림을 통해 간도로 들어오는 무역상품으로는 영구 자유항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구미상품과 국내 기타 지방에서 생산한 공업상품들이다. 간도의 수출상품은 주요하게 콩기름, 콩깨묵, 깨기름, 콩, 돼지, 짐승가죽, 약재 등이고 주요한 수입품으로는 소금, 면포, 울로신 등이다. 이 경로를 통한 무역은 1차 세계대전과 일본상품이 대량으로 간도에 밀려들자 그 무역액이 점차 줄어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1909년 길림을 경유한 간도무역은 총 무역액의 60%를 점하던 것이 1917년에는 20% 좌우로 내려갔다. 1917년 연길에서 길림에 수출한 무역액은 3만 5482엔이고 길림으로부터 수입한 무역액은 12만 2053엔이다.
조선과의 무역이 간도무역의 주체를 이루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일제가 간도를 만주침략의 전략요충지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각 면에서 침략을 다그친 데 있다. 1919년 도문강 대안의 삼봉으로부터 회녕 간의 철도부설과 용정촌으로부터 삼봉 대안의 개산툰까지의 철도부설은 조선의 청진, 웅기 항구를 통한 일본과의 무역을 더욱 활기 띠게 하였다. 훈춘지방 역시 웅기항구의 개항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촉진되었다. 간도, 훈춘과 조선, 일본 사이에 무역으로 수출된 상품은 콩, 잡곡, 소, 닭, 담배, 콩깨묵, 깨기름 등 농산물과 부산물, 농산물가공제품들이고 목재도 ‘훈춘재’ 또는 ‘간도재’의 이름으로 적지 않게 수출되었다. 조선과 일본으로부터 간도에 수입된 상품은 소금, 해어, 석유, 면포, 사탕, 고무제품, 금포 등 공업품과 해산물이다. 1918년, 용정세관무역통계에 따르면 수입액은 158만 2425세관냥이고 수출액은 118만 7690세관냥이다. 1927년 용정촌 무역수입액은 760만 5078세관냥이고 수출액은 851만 1244세관냥이다(표 1-10-02, 표 1-10-03).

민국시기 간도의 무역특점은 수출품 절대다수가 농산물과 공업원료이고 수입품의 절대다수는 공업제품이다. 일본과의 무역이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수입 총액이 늘 수출 총액을 초과한다. 그 주원인은 수출되는 농산물 가격이 낮고 수입되는 공업품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세관세가 낮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무역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특점이다.
위만시기 간도의 상업은 일제의 엄밀한 통제하에 있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일본제품이 압도적이었으며 상품경영자도 그 자본액과 경영규모로 보아 일본인이 위주였다. 상업자들이 경영하는 일본상품은 사탕, 면직물, 철제품, 일용잡화 등 소비품이 위주였으며 상품거래지점은 용정촌과 간도시였다. 농산물에 대한 일제의 약탈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농산물은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많은 것이 통치당국에 빼앗겼다. 하여 무역시장의 작용도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위만시기 간도에서 수출되는 농산물 중 콩과 콩제품이 첫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 절대대부분이 일본에 수출되었다. 수입품은 주로 일본의 공업제품인데 그 종류는 면직물, 기계와 그 부속품, 일용잡화, 역품, 연료, 가구 등이다. 1936년 통계에 의하면 간도에 수입된 일본제품 중 면직물과 강철이 상품 총액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자지방의 원료가 많이 수출되고 자지방에서 능히 가공할 수 있는 공업제품, 특히 소비품이 수입되는 현상은 식민지 상업과 무역의 또 하나의 특점이다.
봉천지방에 있어서 조선이주민 특산 상인을 적어보면 개원의 동성상회(자본금 7000 원) 경영자 이운만(李云万), 식산공사(자본금 1만 원)의 구수길(具寿吉), 대융상회(자본금 3000원)의 김운서(金云瑞), 신흥호(자본금 2000원)의 임중도(任重途), 삼익량기계(자본금 6000원)의 정면극(郑免极)과 봉천에 있는 반도상회(자본금 1만 원)의 김태호(金泰镐), 신익상회(자본금 3000원)의 문창헌(文昌宪), 구대공사(자본금 3000원)의 이종실(李锺实) 등이다.
아래에는 간도의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처했던 세관들을 간단히 적는다.

훈춘총관
1909년 2월 27일, 훈춘총관이 지금의 훈춘시병원 자리에 세워졌다. 그해 11월 20일(음력) ‘용정촌분관’을 설치하였다. 훈춘총관 관할구는 훈춘과 연길, 왕청, 화룡, 안도, 돈화, 액목, 화전 등 8개 현이다. 1924년 8월 1일, 원래의 용정분관이 총관으로 승격하고 원래의 훈춘총관이 분관으로 되었다. 1932년 6월 이후 일제가 직접 통제하였다. 1933년 8월, 도문세관이 성립되고 훈춘세관은 훈춘분세관이라고 고치였다. 해방 후 연변세관총관을 설립하고 도문과 훈춘에 분관을 설치하였다.

도문세관
1933년 9월 21일, 도문세관이 세워졌고 훈춘세관은 분세관이 되어 도문세관에 귀속되었다. 1934년 도문세관의 수입은 376.6만 엔으로 올라 도문세관수입의 5배였다. 1943년에 이르러 도문세관은 만주의 제일 큰 세관으로서 5개 성, 4개 분세관, 5개 출장소, 4개 파출소, 12개 분잡 및 26개 감시소를 관할하였다. 1945년 초에 신경세관 도문분관으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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