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학 동북아 엘리트 양성중심 꿈꾼다
연변과학기술대학 김진경총장

 

김진경, 그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중국에서 최초로 그것도 편벽한 지역으로 알려지는 국경도시 연길시에 대학을 세운 미국적 한국인이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하여 이런 편벽한 지역에 오늘날 와서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시설이 구전하며 이미 중국국가교육부로부터 몇개 학과를 중점학과로 부상시킨 대학을 설립할수 있게 되였을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고저 기자는 얼마전 김진경총장(박사)을 찾았다. 중국에 대학세울 꿈 어릴적부터 싹트기 시작 김진경총장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반도를 강점한 시기에 태여났다. 그가 어린시절 때 아버지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농업학교를 세우면서 중국동북에 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이는 10여살이였다.

그가 당시 어릴적에 받은 것은 '일본천황의 은혜속에야 생활이 윤택해질 수 있고 일본이 불원한 장래에 미국과 영국을 전승하면 더욱 좋아진다'라는 교육 그 자체였다. 이렇게 그는 어린시절에 철저하게 일본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과 시대변화는 정반대였다. 소학교(당시 일본이 국민학교라고 호칭) 2학년 시절,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일본이 전패하고 광복을 맞게 되자 드디여 자기는 일본천황의 아들이 아니고 일본국민도 아니며 조선반도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반도가 일본에 침략당해 경제적인 략탈을 당한 것은 물론 민족의 언어, 문자마저 박탈당하게 된 치욕을 알게 되였으며 따라서 어린 마음을 앗아갈 뻔했던 일본의 철저한 노화교육과 기편성 교육을 알게 되였다.

광복후에 자기언어로 교육을 받으면서 또 일본이 어떻게 조선반도를 침략했다는 '반일교육'도 받으면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가 겨우 15살되던 중학교 3학년때 그는 국가가 다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참군했는데 한국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군인이였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는 전쟁이 없어져야 하고 평화가 와야 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년시절의 이런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장차 커서 반드시 아버지가 밀고 나갔던 교육사업을 계승하리라 결심했다. 교육사업을 하려면 연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피부로 느낀 그는 광복후에 영국 류학의 길에 올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 그에게는 대학에서 첫 동양인 졸업생대표로서의 연설할 기회가 생겼다. 그는 연설에서 자기는 금후 광활한 천지인 중국에 가서 교육사업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천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많은 외국인들은 경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현실적으로 실천할수 없는 짓이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 그럴수도 있었다. 당시 중국대문은 굳게 닫겨져 있어 외국인의 출입은 금물이였다. 하지만 불원한 장래에 중국대문이 열리리라는 신념을 굳게 믿으면서 그는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전공했고 또 수많은 돈을 벌어 재벌이 되였다. 중국대문이 열리자바람으로 중국향발 1986년, 그는 미국 공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왔다.

그러나 미국공민으로 중국에 오기 싶으면 오는 것이 아니고 왔어도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싶어도 마음대로 실현할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당시 중국 현실 그 자체였다. 이러저러한 조소와 비난과 각종 저애력이 그로 하여금 리상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지역일수록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것을 랭정한 시각으로 보게 되였고 아무리 험난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애심으로 충만된 리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것을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당시의 중국은 대문이 열리면서 서양세계의 호감은 가지게 되였으나 어떤 대국은 비난의 목소리도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 즉 이런 대국은 자기의 잣대로 중국을 재고 있었다는 점이다.당시의 중국은 후진국이였지만 이른바 문명 선진국이라는 국가도 아주 락후한 력사와 후진국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중국을 모독, 멸시하는것을 한 동양인으로서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어 중국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첫 변호사건은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사건'이다. 당시 그는 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미국정부는 미국공민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그를 인차 떠날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떠날 대신 숙소를 천안문광장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충문문호텔로 옮기고 력사적인 그 시각을 모두 바라보았다. 중국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미국 '뉴스저널'에 '미국공민이 본 천안문사태'라는 글까지 발표했다.

글이 실리자 그를 중국에서 돈으로 매수했다는 등 이러저러한 여론들이 쇄도했다. 그러나 그는 서양매체의 과분하고 편향적인 보도에 질책을 했을 뿐이고 또 당시 외국인으로 변호에 나선 것은 그가 혼자였다. 그리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90년대 초반기에 미국은 계속 중국의 인권문제를 들먹거리면서 경제제재와 함께 련결시키려고 시도하는것을 보고 또 언론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미국 클린턴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중국에서 력사상 처음으로 12억인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절대 작은 성취가 아니다. 중국은 아직 4억문맹이 있고 서양식의 민주주의를 실시하는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중국이 중국식의 사회주의 길을 걷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미국이 중국인권문제와 최혜국대우를 련계하는 것은 옳지않다.'라고 했다. 클린턴대통령은 1994년6월에 그에게 해답편지를 보내와 '중국의 인권련계정책'을 다시 수정하겠다고 했다.' 인권은 정치사상도 아니고 인류생존의 목표도 아니며 근근히 인류존엄의 필요조건'이라고 그는 말하면서 기본 인권은 인민이 밥 먹을 수 있고 직장을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개방이래 중국은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졌고 중국 동북3성은 곡물이 적치될정도에 이르렀는데 미국같은 나라가 자기의 자대로 중국을 재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에 대학을 세우려는 리상이 현실로 김진경총장은 중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대학을 창설해 지금까지 18년 생활하면서 중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피부로 느낀 산 증인이다. 그는 "중국이 그제날 5천년을 지내면서 왕권의 력사가 변하지 않았는데 모택동, 등소평의 위대한 사상으로 왕권의 력사가 인민의 력사로 변한 것은 천지개벽이다"라고 하고 나서 궁극적으로 중국식사회주의 개혁개방으로 즉 그제날의 투쟁방식이 아니라 인민의 복지와 삶의 질향상을 위해 중국정부가 노력하고 있는 점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현재 많은 나라들에서 큰 문제점들이 속출하고있지만 중국만은 안정과 번영으로 매년 8-9%의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경제 력사에서 희소한 일이고 또 모든 국가도 경의로운 눈길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일이라고 했다. 또 중국에서 최초로 외국인을 고등교육에 참여할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중국정신이라고 했다.

현재 개교 불과 14년만에 연변과기대의 많은 학과들이 국가중점학과로 지명되였고 중국속에서의 국제대학으로 13개 나라의 교수진들이 모여 전일제교육을 실시하게 된것은 중국정부의 관용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했다. 현재 이 대학을 졸업한 학생 100%를 각 회사들에서 앞다투어 받아가고 있는데 그중 20%가 세계 각국에 류학을 가고 있다.

이런 교육이 실천에로 옮겨진데는 평화와 인애를 학생들에게 꾸준히 부여한데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전쟁이란 동란시기에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았는가를 자기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몇번 이 대학 식당에 가서 오찬을 한 적이 있는데 세계각국에서 온 교수진들은 학생들과 똑같이 식권을 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경의스러운 마음이 생겼고 또 매번 대학을 다녀 갈 때마다 학생들은 무릇 어른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못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 대학은 교수와 학생사이는 물론 사회와도 평화 인애의 화기애애한 기분이 봄날처럼 감돈다는 느낌을 가졌다.

동포사회 보는 시각과 대학생양성목적

그는 중국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는 것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지금 중국 200만 조선족사회 특히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연변 조선족사회의 조선족인구감소, 학생감소로 인한 학교감소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소수민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살고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소수민족자치를 준것은 중국밖에 없다. 미국도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자치를 실시하지 않았고 모두 섞여 살고 있다. 끼리끼리 모여사는 것도 좋지만 경제, 문화 등 요소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것은 시대의 흐름이다. 조선족의 이동을 퇴보라고 볼 것이 아니고 또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이 발전과 성공이 아니므로 다른 민족과 다같이 어울려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국계가 불원한 장래에 없어지기 마련이므로 국제사회에서의 협소한 민족주의는 금물이다. 유럽에서 독일이 전쟁치욕을 철저하게 반성한 결과 현재 유럽은 이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가 작년 11월26일에 일본 마쯔무라 외무상의 초청에 의해 도꾜에 갔을 때에도 그들에게 일본도 독일과 같이 철저히 반성하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아세아의 일원으로, 친구로 될 때야만 아시아의 평화가 온다고 그는 역설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제품은 선호하지만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반성해야 한다.

중국 역시 불원한 장래에 국경이 없는 시대가 돌아온다. 특히 중국 동북3성은 조선, 한국, 일본, 러시아 등 나라와 잇대여 있는 삼각지역으로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 부족점을 미봉하면서 공동번영의 길을 걷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동북아는 유럽보다 지하자원, 인적자원, 자연자원, 기술자원이 매우 풍부하므로 모든 국가들의 상호 협력이 매우 필요하다. 이런 절박한 필요성을 감안해 연변과기대를 동북아평화와 공동변영의 길로 나가는 엘리트들을 양성해 동북아 련합을 구축하는 '산실'로, 중국, 한국, 조선, 일본 등 동북아 젊은 엘리트들이 모인 동북아 평화 '산실'로 부상시키고 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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