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2절 반일투쟁

1.. 1. 반일투쟁을 위한 준비

1910년경 만주에는 조선정치이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독립을 되찾고 민족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유지인사들이었다.
1911-1914년 대종교 총본부가 서울로부터 화룡현 청파호에 전이되었다.
‘신민회’의 이회영 6형제가 1910년 12월 13일부터 60여 명의 방대한 권속을 이끌고 유하현 삼원포에 오자 이동녕, 이상룡, 김동삼, 주진수, 윤기섭 등 애국유명인사들도 모여들어 중진을 이루었다.
1910년 가을,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은 고국을 떠나 타향길에 올랐다.
1910년 3월, 홍범도는 장백현 십칠도구 왕가구로 전략이동을 했다.
1911년 10월 이진용은 약간 명의 부하 의병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동했다.
1917년 김좌진은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외에도 김규식(1913), 김동삼(1911), 양기탁(1916), 안희제(1911), 서일(1910), 안무 (1910), 조맹선(1910), 전덕원(1911), 백삼규(1911) 등이 만주로 건너왔다.
1909년, 이동춘의 발기로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고 1913년 2월, 김약연, 이동춘은 ‘간민회’로 확대하였다.
1910년 말, 서일은 왕청현 덕원리에서 계화, 현천묵 등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동휘는 용정에서 ‘삼국전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는 한편 사립학교를 세워 계몽교육을 밀고나갔다.
황병길은 훈춘 일대에서 백삼규, 오병묵 등과 함께 반일을 주선으로 한 ‘기독교우회’를 조직했다. 황병길은 또 ‘훈춘상무회’를 조직하였다.
김익근, 김문호 등은 ‘배일흥한’을 고취하는 ‘나자구농상회’를 왕청에서 조직했다.
1915년, 이동휘, 장종휘 등의 노력으로 ‘만국개량회’가 조직되어 연해주와 간도와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대일작전을 추진키로 하였다.
1919년 3월, 구춘선을 회장으로 하는 ‘독립기성회’가 국자가에서 탄생하였다.
1919년 3월, 간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국민회’가 설립되었다.
남만에서는 1910년대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허혁이 초대단장이었다.
1914년, 통화현 팔리소 소북차에 백서농장이라는 독립군농장이 건설되었다.
우병렬, 이진룡 등은 관전현 야하구에 ‘향약계’, ‘농무계’를 조직했다.
북만에서는 1910년 4월 ‘대한인국민회 만주리지방총회’가 결성되었다.
1910년 봄, 김성무는 목릉하 유역, 흥개로 북쪽에 위치한 백포자 일대에서 ‘신한국민회’를 세웠다.
위와 같은 시기 만주에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반일지사, 유지인사들에 의해 꾸려졌으며 반일사상은 날로 농후하였다.
1919년 여름부터 간도에서는 반일무장대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왕청현 서대파, 화룡현 삼도구, 용정현 도목구(현 안도현 복흥향)에 사관양성소를 건립하였다. 1920년 여름, 반일무장은 7개로서 2900여 명에 이르렀고 보총 2600여 자루, 기관총 5정을 갖고 있었다.
서일을 총재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에 둔 항일부대는 600여 명에 500여 자루 보총, 150자루 권총, 3척의 기관총을 갖고 있었다.
안무가 이끄는 무장대오는 400여 명에 보총 450여 자루를 갖고 있었다. 본부는 연길현 이란구에 두었다.
최명록을 사령으로, 박영을 참모장으로 한 왕청현 봉오동무장부대는 300여 명에 보총 350자루, 기관총 2자루를 갖고 있었다.
홍범도가 인솔하는 연길현 명월구(현 안도현에 귀속)무장부대는 300여 명에 보총 300여 자루를 갖고 있었다.
1920년 7월, 왕청현 가야하 장자동에서 반일무장단체대표대회를 열고 연합작전협의를 달성하였다.

1.1.2. 2. 3․1 3반일시위

3․13반일운동은 조선3․1운동의 한 부분이다. 그 준비사업으로는 반일인사 33명이 국자가에 세운 ‘독립운동의 사부’, ‘철혈광복단’ 등이다.
3․1독립선언서는 안동을 거쳐 남만주에 전달되었고 3월 7일에는 용정에 전달되었다. (1919년 2월, ‘조선독립서’는 상품 속에 넣어 용정에 부쳐왔다(김규철 「해란강반의 봄우뢰」)는 일설, 3․1운동소식에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 교원 최봉익이 즉시 서울에 가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조선이주민백년사화」 제1집)는 일설도 있다.)
홍상표 씨는 3․13 당시의 기억을 「간도독립운동비화」에서 이렇게 적었다.

“……간도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7000-8000명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밀려왔다. 국민회에서는 연길 도윤 도빈에게 3월 13일에 독립선언식을 개최한다는 설명을 하고 식장의 경비를 하여 줄 것을 교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도윤은 곧 육군 멍부더어 단장에게 명하여 경비책임을 지웠다. (중약) 국민회에서는 식장을 중앙학교 뒤 채소 밭으로 정하였는데 중앙학교 뒷마당의 울타리를 경계로 하여 일본총영사관 치외법권 지역 밖이 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중약) 정오가 되자 천주교 성당의 종이 울리기 시작하였고 이에 화답하여 시내 각 교회 종들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초조와 흥분은 종소리와 함께 긴장과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종소리가 끝나자 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선언이 있었고 백하 김영학 씨가 뒤이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렇게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시가행진으로 들어가 오층대 길로 행진하는 찰나 경비를 하고 있던 중국 육군들 틈에서 일본형사들의 총성이 나더니 행렬 선두에 섰던 기수 박문호(이도구 장은평 학교 선생)가 현장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연발되는 총성에 명동중학교 충열대장 김극서의 조카 김병영 군이 순사하였고 뒤를 이어 피바다를 이루며 사상자가 속출하여 행진현장에서 도합 17명이 순사하였고 수십 명의 중경상자가 생겼던 것이다. (중약) 중상자 중에서 16명이 사망하여 도합 33명의 순국자가 생겼던 것이다.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서는 중국 육군 멍부더어의 부하가 발사하였다고 간도신보(영사관 기관지)에 보도하였으나 사상자에게서 빼낸 탄환이 일본경찰의 권총탄환이었음이 증명되었고 사실 중국 육군은 일발도 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국민회 간부와 필자는 민원장이 부상자에게서 적출한 탄환을 저장한 약병에서 목도하였는데 일본 권총탄환이었고 장총탄환은 일발도 없었다.”

3․13반일시위는 전 만주에 신속히 퍼졌다.
연길현의 이도구, 팔도구, 투도구, 용두산, 국자가 등 지역에서 수천 명이 참가한 반일시위가 폭발하였고 왕청현의 배초구, 나자구, 석현과 안도현의 현 소재지, 관지, 훈춘현의 현 소재지, 횡부자구, 로황구 등 지역에서 반일시위가 육속 일어났다.

사진 1-11-01 용정의 5층 건물, 오층대 거리에 위치하여 섰다.
남만의 통화현, 금두화락, 흥경현의 왕청문, 환인현성, 유하현의 삼원포 대화사, 장백현의 장백가, 팔도구, 매방로, 집안현의 양목교자, 구채원자 등 지역에서 수천 명의 군중들이 집회하고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3․13반일운동은 조선이주민의 반일투쟁이 무장반일투쟁에로 넘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었다. 4월부터 반일무장단체의 조직, 결사대원의 모집과 훈련, 군자금 모금, 무기구입 등에 동원되어 반일무장대오를 건립하고 무장투쟁에 궐기하였다.
1.1.3. 3. 15만 원 탈취기

1920년 1월 4일 오후 6시경, 장로교회 신도이며 철혈광복단 성원인 윤준희(尹俊熙), 최봉설(崔凤卨), 임국정(林国桢), 한상호(韩相镐) 등 4인(박세웅(朴雄世)은 불참)은 반일부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은행 회녕지행에서 용정촌출장소로 보내는 길회철도 부설자금 15만 원을 성공적으로 탈취하였다.


“……4인이 15만원을 약탈하여 가지고 해삼위 신한촌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교포의 집에 은신하고 있을 때 간도 일본총영사관 최홍섭 형사 지휘하에 형사대의 필사적인 수사로 은신처가 발견되어 급습을 받았다. 그리하여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의 3인은 1월 31일(28일 만)에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일부밖에 소비하지 못한 현금 13만여 원도 압수되었다. 다행히 최봉설은 뒷문으로 도망하여 잡히지 않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중약) 3인은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결과 임국정, 윤준희는 사형, 한상호는 무기, 전홍섭(은행원)은 1년 언도를 받았으므로 경성에 불복공소를 하였던바 결국 3인이 다 사형을 받고 청년의 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구국의 영령이 되었다. 은행원 전홍섭은 1년형 그대로 판결되었다.”(「간도독립운동비화」 홍상표)

1.1.4. 4. 봉오동섬멸전

1920년 5월 11일, 군무도독부와 신민단,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국민회 등 6개 반일단체지도자들은 봉오동에 모여 연합작전협의를 달성하였다. 5월 22일,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는 정일제1군사령부 소속부대와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간도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세우고 북로제1군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봉오동은 간도 도문에서 서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인데 지금은 도문시봉오저수지로 사용되고 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연합부대가 홍범도 장군의 지휘 밑에 간도에서 진행한 첫 저격전이다. 봉오동섬멸전은 청산리대첩과 더불어 간도지역 독립무장투쟁에서 가장 주목 받는 중대한 사건으로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간도역사연구」(윤병석) 등 학술저서에서도 상세한 자료와 견해를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봉오동전투 후 거행한 중간촌에서의 홍범도 장군 환영회의 주최자였던 홍상표 씨가 홍범도 장군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어둔다.

“봉옷골은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는 보리 이삭이 핀 때였다……홍 장군은 주민들을 잠시 피하게 하고 서산에 올라 복병하였다. 예측대로 일본병사들은 고개를 올라와서 사면을 살피었다. 마을과 사면은 고요할 뿐 아무 이상이 없었다. 홍 장군과 장병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학교를 포위하였다. 때마침 학교로 들어갔던 일본병사가 나오기 시작하여 교정에 다 나왔다. 홍장군은 일발을 사격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학교를 향한 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적은 당황하여 교정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쓰러져갔다. 이 포위전에서 적은 응사할 겨를도 없이 전멸되었다. 홍장군은 사격을 마치고 정세를 살핀 후 교정으로 내려갔다. 교정에는 일본병사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홍 장군은 일본병사들이 남긴 장총과 탄환을 거둔 후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봉옷골을 철수하여 모방면으로 향하였다. 이 전투를 ‘봉옷골 전투’라고 한다.
(중략) 봉옷골 전투가 있은 지 며칠 되던 날 홍장군은 장병과 함께 노루구가 바라다 보이는 노두구 고개 참나무 숲 속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약) 고개 밑 밭에는 보리가 한창 피어 무성한데 일경들이 허리를 굽히고 보리밭을 헤치며 오는 것이었다. 홍장군은 전 장병을 복병시킨 후 (중약) 적은 보리밭은 빠져나와 산을 오르려는 참이었다. 이에 때를 놓치지 않고 홍장군이 일발을 발사하였다. 이에 맞춰 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적은 불의의 사격에 마구 쓰러졌다. 혼비백산한 일본경찰은 사상자를 돌볼 겨를도 없이 총 퇴각 도망쳐 버렸다. 이때 일경 지휘자는 간도 총영사관 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 평정삼대치라는 보고를 입수하였다. 홍장군은 전멸시키기 전에 수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대로 이동하여 대명월구(대묘구, 다묘거우) 영생동 중간 마을에 진주하여 약 2주간 있었다. 이 전투를 ‘노두구령 전투’라고 한다.
(중략) 두 차례의 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무찌른 홍 장군에 대하여 감격한 서부국민회와 옹성습자국민회, 그리고 숭례향 교포들은 연합적으로 홍범도 장군 전승 축하회를 열었다. (중약) 축하식이 끝난 후 식사가 있었는데 당시 숭례향에는 백미가 나지 않으므로 동불사(90리)에서 백미를 구입하여 왔고, 옹성습자국민회에서 커다란 소 1마리와 전 숭례향 교포들이 1마리를 잡아 장국밥으로 장병들을 만족하게 (입대후 백미밥과 육류식은 처음) 접대하였다. 홍장군 환영회에서는 무장 독립군 의군부와 정의부 장병들도 초대하였다(「간도독립운동비화」 홍상표).

1.1.5. 5. 청산리대첩

청사리전투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대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청산리대첩에 대한 학술연구는 윤병석, 신용하, 박영석, 송우혜, 김정미 등 여러 학자들이 심도 있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으며 중국에서도 「홍범도장군」 등 전문서적들이 출간되어 폭넓은 연구에 일조하였다. 본 지면은 다만 독립신문 제98호에 실렸던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2의 한 토막과 홍상표 씨의 청산리대첩에 관한 서술 한 단락을 옮긴다.

“청산리 심림 중에서 적으로 하여금 자상충돌케 하고 거기서 160리 되는 2도구로 강야행군하여 갑산촌에 도착하여 잠깐 휴식하고 다시 거기서 30리 되는 천수평 부근에 이르니 때는 21일 상오 4시이더이다. 거기서 척후 2명을 천수동에 파견하였더니 적의 기병 40여 명이 천수동 인가에서 사영한 것을 방문까지 열고 회보하였나이다. 이와 동시에 적의 보병 1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는 천수동에서 동으로 8리 되는 어랑촌에 숙영하는 것까지 탐지하였나이다. 아직 미명에 우리 여행단 80명이 포위하고 장차 습격하려 할 시에 아의 후방부대에서 수방의 방총을 발함에 적은 경기하여 혹 도보 주하며 혹 기마하고 도하는 것을 아군 400명이 일시에 사격하여 도주한 4기 외는 전부를 멸하였나이다.”(김훈 「북로아군실전기2」)

또 홍상표 씨는 아래와 같이 청산리대첩을 적고 있다.

홍범도 안무 두 장군은 1920년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22일) 청산리 백운평에 진주하여 여기서 왜군과 대결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중약) 일전을 결심했던 두 장군은 정세의 불리함을 파악하고 결전의 다른 기회를 노리며 음력 9월 13일 이른 아침 북진하여 안도현 경내로 들어갔다. (중약) 안무 장군의 전 장병은 돈화현 중국인의 부락 양수천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40여 리 더 가서 우리 교포들의 부락 사하얄(사하얄)에 집결하여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사랑과 환영을 받았다. 홍장군의 전 장병이 양수천자에 집결하였을 때 돈화현가에 도착한 국민회 간부와 돈화현가 국민회 책임자 김정식 씨는 돈화 현장과 중국 육군단장에게 교섭하여 사하얄에 집결하여 한국인 부락에 주둔한 안장군과 방금 양수천자 중국인 부락에 주둔한 홍장군의 장병이 북진하는 도중 중국 관민으로부터 숙식에 대한 원조를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현장과 단장은 이미 홍장군의 용명을 들은지라 쾌히 승낙하였다.

사진 1-11-02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500평방미터의 부지에 너비 25미터, 높이 17.6미터의 화강석으로 되었다.

 

 


(중략)한편 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장병을 통솔하여 음역 9월 12일 해 질 무렵 군정서구역 정인강을 경유하여 어랑촌에 도착하였다. 그때 동편으로부터 왜군 보병이 척후병을 선두로 군정서 독립군을 목표로 어랑촌을 향해 추격해오고 있었다. (중약) 이렇게 대군의 진격을 맞게 된 김좌진 장군은 준마를 타고 선두에서 전 장병을 지휘하여 산골짜기를 따라 질주시켜 적을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적군은 독립군을 전멸시킬 기세로 골짜기로 추격해 왔다. 용장 김좌진은 다시 명령을 내려 전 장병을 산으로 오르게 한 후 산마루를 타고 질주하게 하였다. 이렇게 산을 타고 후퇴하는 독립군을 발견한 왜군 다른 부대는 산마루를 따라 우리 독립군을 추격해 왔다. 즉 왜군은 산 아래 위에서 독립군을 추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약) 김좌진은 시각과 거리를 이용하는 전법으로 산을 내려 서쪽 산으로 질주 퇴각시켰다. (중약) 그리하여 산골짜기를 추격하던 적의 일대는 아군이 산상으로 도주한 것이라고 판단케 하였고 산마루를 따라 추격하던 적의 일대는 아군이 산을 내려간 것으로 판단하게끔 하였다. (중약) 일군은 추격을 멈추고 산 아래 위에서 자기편 군대를 적으로 오인하고 서로 사격전을 벌이었던 것이다. 이 자군상전은 총격전으로 일군은 수불상의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김좌진 장군의 우리 독립군들은 토벌군들의 추격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무사히 전진할 수 있었다. 어랑촌에서 휴식도 못하고 저녁도 굶은 우리 군정서의 장병들은 무거운 장총과 200-300발의 탄알을 양 어깨에 메고 지칠 대로 지친 피로한 몸을 이끌고 청산리의 연합결전을 이루지 못한 채 1920년 음력 9월 12일(양력 10월 23일) 황훈 준마를 탄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북진하고 말았다. (「간도독립운동비화」 홍상표)

그해 10월 하순부터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었다. 연길, 화룡, 훈춘, 왕청 4곳에서 10월 하순부터 11월까지 피살 3644명, 체포 155명, 소각된 민가 3520채, 소각된 학교 59개소, 소각된 교회당 19개소나 되는 피해를 보았다(「독립운동사」).
남만지구의 흥경, 유하, 관전 등 현의 피해자는 800여 명에 달하였다(「조선족혁명투쟁사」 황룡국).
그해 용정촌에 거주했던 캐나다장로파교회 의사 말틴의 「견문기」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10월 31일(일요일), 북경식 마차로 12마일 떨어져 있는 비암촌을 향해 용정에서 출발했다. 지난 10월 29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 전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는 사람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여 모두 총살했다. 그래도 채 죽지 않으면 불붙는 곡식단을 가져다가 불에 타 죽게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한 후 불속에서도 숨이 붙어 일어나는 자가 있으면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부녀들은 마을성년남자들이 한 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강박되어 끝까지 서있어야 했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됐다. 다른 곳에서도 30명 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한 후 석유를 부어 태웠다.
장암동습격사건에서도 일제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30명을 살해하고 다수의 가옥을 불태워버렸다. 일본병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하던 악습 그대로 조선부녀들의 머리에 꽂고 있는 은비녀마저 절취해갔다.”

일본군은 1921년까지 북간도 및 서간도 지방에서 학살만행을 대대적으로 저질렀다. 대표적 사례를 간단히 살펴본다.

장암동(獐严洞)학살사건
장암동은 용정 동성용향에 속한다. 용정동남쪽 약 6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1909년 개척되었는데 부근 골짜기에 노루가 많다 하여 ‘노루바위골’이라 불렀다. 주민다수가 기독교도이다. 1920년 10월 30일, 일본군 14사단 스즈끼 대위가 거느리는 보병 72명, 헌병 3명, 경찰 2명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 30분경에 장암동을 포위, 청장년 33명을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교회당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며칠 뒤, 다시 찾아와 무덤을 파헤쳐 시체들을 한데 모은 다음 석유를 쳐 소각해버렸다.
1999년 6월 30일, ‘용정 3․13기념사업회’에서 마을 입구에 ‘장암동참안유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의란구학살사건
청산리전투 당시 의란구에는 간도국민회 의군부가 있었다. 의란구는 당시 독립군부대의 본거지라 할 수 있었다. 10월 20일, 일본군 19사단 이스츠카(石冢) 대대는 의란구에 침입하여 이동근 등 8명을 살해, 4일 뒤 일본군 74연대는 양만홍 등 10여 명을 죽이고 학교 한 채와 민가 다섯 채를 불태웠다. 11월 3일, 일본군 76연대는 농민 이국화 등 16명을 학살, 김창홍, 노우선, 길렬의 집을 비롯한 31채 민가를 소각, 역시 같은 달 3일과 4일, 태양촌에서 교사 노우선 등 2명과 농민 이주향 등 13명을 죽였다. 11월 5일, 의군부 총무 최우익, 서무부장 이을, 홍정필 등 10명을 살해했다(「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개척편).

송언동(松堰洞)학살사건
1920년 10월 19일, 회녕수비대 대장 나리다(成田) 중좌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화룡 북장패촌장 이용점과 농민 장환두, 신국현, 김종민을 체포하여 풍도령에서 사살, 화룡현 사무사(四茂社) 송언둔에서 지계순 등 14명을 학살, 석유를 끼얹어 시체를 소각했다.

이밖에 서래동, 학서동, 마패촌, 세린하촌, 유동촌, 진채구, 평양촌 학살사건이 있다.
총살, 사살, 참살, 자살, 타살, 고문, 생매장, 방화, 약탈, 강간 등 극히 잔인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연길현 구사하에서는 피난 간 창동학교 교원 정기선을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빼서 서씨 집 가족과 함께 묶은 뒤 집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고 말았다(「独立新闻」 제93호).
일본군의 예봉을 피해 1920년 12월 중순까지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부대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이고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이청천이고 병력은 3500여 명에 달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우수리강을 건너 구소련으로 이동했다. 그 후부터 간도의 독립군무장투쟁이 자취를 감추었고 활동 중심이 남북만으로 옮겨졌다.
간도의 무장투쟁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1889년-1895년 8월까지 강원도 북부 태백산줄기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사격, 검술을 연마하였다. 1910년 3월, 만주로 망명했고 1913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여 1918년까지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지냈다. 1919년 이른 봄, 약 2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간도로 돌아왔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1921년 1월경 러시아 땅으로 다시 이주했다. 1922년 홍범도는 소련공민이 되었고 1937년 조선이주민강제이주와 함께 소련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 그곳에서 1943년에 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까자흐스딴 크즬오르다시에 있다. 홍범도 장군은 1962년 한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수여 받았다. 한편 그는 ‘전설적인 빨치산 지휘자’로 구소련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김좌진(1889-1930)은 조선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 「한성신보」의 이사, 오성학교 교감에 이어 신민회, 기호흥학회 같은 단체에 가입해 애국교육운동에 나섰고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양성에 진력했다. 이 과정에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한 그는 출옥 후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에 가입하고 다시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직에 오른 김좌진은 홍범도 장군과 연합작전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룩했다. 이후 영고탑에서 신민부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우고 한족연합회 주석으로 활동했으나 1930년 1월 24일 오전 7시경, 박상실(朴尚实)이 쏜 흉탄에 맞아 4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후 1934년 봄, 8로(김좌진의 8명 모사) 중 좌상인 정해식 노인의 지휘로 김좌진의 유해를 고향으로 반환하게 되었다.
고 강룡권 씨가 1990년 현지답사 당시 당지 노인들은 김좌진을 살해한 자는 김인관이라 했다고 적어두었다.
김좌진은 1926년에 19살 처녀 김영숙을 새 부인으로 맞았으며 딸 김강석을 보았다. 1990년 당시 김강석(애명 산조, 현 김순옥이라 개명)은 목단강시에 살고 있었다.


1.1. 제3절 민족반일단체의 통일운동

일제의 ‘경신년토벌’ 이후 많은 조선이주민 반일민족주의단체들은 흩어졌거나 지하로 들어갔으며 항일의 중점은 남만지구에로 옮겨졌다. 1920년부터 다시 대오를 정돈하고 여러 단체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족주의단체의 통일운동은 남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원포는 남만의 반일운동에서 중심 위치에 처해 있었으며 그 작용은 자못 컸다.
만주지역 특히 남만의 민족반일단체의 운동에 대하여 신주백 씨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등 저서와 연변대 박창욱 교수의 「1920-1930년대 재만민족주의 계열의 반일독립운동」(1994), 권립 교수의 「조선혁명군과 양세봉 장군의 반일독립운동 평술」(1995) 등 논문에서 상세히 언급되었다. 또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의 운동에 대하여서는 「재만 한인사회와 민족운동」(황민호) 등 저서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본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개괄적으로 적어둔다.

1.1.1. 1. 삼원포

유하현 삼원포는 반일애국운동에서의 남만중심지였다.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의 반일근거지의 시조로 인정되는 경학사가 바로 삼원포에서 창설되었다.
경학사의 창시자는 이회영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가산을 몽땅 팔아 현금 40만 원을 마련해가지고 가족 40여 명을 거느리고 1911년 초 유하현 삼원포 서쪽의 추가가(지금은 이도구향에 소속)로 이주한 후 왠스카이의 승낙을 얻어 거주권과 경작권, 교육권 및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삼원포 일대에 조선이주민집거구를 형성하였으며 추가가에 반일민족기구인 ‘경학사’를 꾸렸다. 1000여명이 성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사장에 이상룡, 부사장에 이시영(이회영의 아우)과 이동녕,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겸직),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추대되었다.
1914년까지 경학사는 유하현 경내에서 26개소의 학교를 꾸리었으며 그중 삼원포 동명학교는 소문이 자자했다. 1911년 4월, 도산자의 대두자에 ‘신흥무관강습소’(교장은 이동녕이 겸직, 후엔 이회영이 담당)를 꾸렸고 1913년 4월 통화현 합니하에 정식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상룡이 교장 직을 겸직했고 후엔 여준이 넘겨받았다. 1911년부터 1913년 4월까지 신흥무관강습소에서는 군사골간 1400여 명을 양성했으며 1913년 4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골간 2100명을 양성해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를 토대로 ‘부민단’이 설립되어 자치범위를 넓히고 지도기구를 조절하였다. 이상룡이 총재로, 이회영이 부총재 겸 외무부장으로 되었다. 부민단은 관할범위를 5개 구로 나누었는데 총 1229호였다. 매 100-1000호에 구장을 두고 매 10호에 패장을 두었다. 부민단의 직책은 조선이주민 내부의 민사 및 형사 등 사무를 처리하며 조선이주민과 중국관리 및 민사분규를 해결하며 학교를 꾸리고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토지를 세 맡고 본 지역 조선주민을 조직하여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것이다.
1914년 부민단의 주체로 유하현 대전자향 팔리초 소북차에 ‘백서농장’이라는 군영이 세워졌고 김동삼이 농장장으로 추대되었다. 교원과 학원은 모두 385명, 적지 않은 군사골간을 양성해냈다.
1919년 3월, 남만 각지의 조선이주민반일단체 지도자들은 삼원포에 모여 부민단을 모체로 삼아 ‘한족회’를 무었다. 이삼석이 총장으로 되었다. 「한족신보」가 한족회기관지로 발간되었다.
1919년 11월, 육하와 통하, 해룡, 임강, 집안, 환인 등지의 반일단체가 삼원포에 모여 연합으로 전반 남만지구 조선이주민의 반일무장투쟁을 영도할 ‘서로군정서’를 건립하였다. 총재에 이택, 독판에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이택, 이상룡, 박건, 주진수, 왕삼덕, 정무, 윤복단, 김정수, 이종림, 김창무, 곽영, 안동식 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19년 4월 15일, 삼원포 대화사에서 ‘대한독립단’이 성립되었다. 본부는 대화사(현 화평향에 소속)에 설치되었고 총 병력이 560명이었다. 변호는 남만제1사단이었다. 총재에 박장호, 부총재에 백삼규, 총단장에 조맹선, 사단장에 김창묵과 방사규가 추대되었다. 1919년 8월 대한독립단의 병력은 1500명으로 늘어났으며 1920년 5월에는 장총 3300자루와 권총 130자루, 수류탄 1550개, 기관총 4문 및 탄약 19만 5300발이 있었다. 1920년까지 대한독립단은 중조 국경 부근에서 일본군경과 32차나 싸움을 벌였다.

1.1.2. 2. 참의부․정의부․신민부

1922년 6월 30일, 환인현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족연합회’ 등 단체는 ‘대한통군부(统军府)’를 건립하였으며 두 달 후에는 이를 발전시켜 ‘대한통의부(统义府)’를 세웠다. 총장에 김동삼, 중앙본부는 관전현 하루하(下漏河)에 두었다. 1923년 8월, 통의부에서 분립된 의군부는 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라 하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관하는 새로운 조직을 정비하였다. 관할구역은 백두산하 집안현을 중심으로 환인, 임강, 장백 등 압록강 이북 지구와 통화 이남 지구이다. 관할 호수는 1만 5000여 가구였다. 참의부는 지방행정 조직형식으로 관할지역을 구획, 관리하였다. 참의부는 초기의 무장투쟁우선주의 노선으로부터 1927년경에는 자치우선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참의부는 산업의 진흥과 문화계몽 그리고 민족교육에서도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1924년 11월 25일(성립날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음), 12개 반일단체 대표들이 화전현 관가(官街)에서 정의부를 건립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정의부헌장’을 발표하였다. 헌장에는 “본부는 인류평등의 정의와 민족생영(生荣)의 정신으로써 광복대업을 극성(克成)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혀있다. 정의부의 주요 활동구역으로는 길림, 장춘, 흥경, 통화, 화전, 반석, 관전 및 돈화, 액목이었다. 1926년 말, 참의부가 공제하는 지역을 제외한 남만 전역에 걸쳐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1만 7000가구, 8만 7000여 명의 조선이주민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행정, 입법, 사법 등 3권이 분립되고 구, 지방, 중앙 등 3급 조직을 가진 민주정체의 조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부는 한인자치행정과 독립군의 행정을 담임하는 군정부로서 발전을 하였다. 정의부의 자치행정의 주목표는 교육과 산업의 향상에 있었다. 1929년 3월, 정의부가 해체되었다.
1925년 3월 10일, 북만에 있던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교육회, 북만지역 대표, 조선국내 대표 등이 영안성 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창립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였고 참의원 원장은 이범윤, 검사위원장에 현천묵, 군사위원장에 김좌진이였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小秋风)에 성동(城东)사관학교를 설립하여 500여 명의 사관을 배출하였다.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대비해 무기장비를 갖추기 위하여 군수자금모집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신민부의 문화계몽사업은 조선이주민 자녀의 의무교육을 목표로 하여 소학교 50여 개를 설립하였다.
3개의 지방정부는 창립된 후 1-2년간의 조선국내 진격전도 벌이었고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몇몇 주구를 청산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의 똑딱선을 습격한 사건이 그 일례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적 조류에 맞추어 정당정치가 실행되었고 ‘정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걷게 되었다.

1.1.3. 3.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투쟁

1929년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칭되자 혁명나라 군대도 조선혁명군 군대로 개편되었고 이진택이 총사령으로, 양세봉이 부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조선혁명군 군대는 군사제일의 노선을 걸었다. 본부를 신빈현 왕청문 산구에 앉히고 조선청년을 모집하고 단기 군관학교를 꾸리며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조선혁명군 군대는 400여 명 대원을 가진 반일무장대오로 발전하였다. 1932년 3월부터 동변도 보안사령인 우지산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영릉가, 흥경 등 지역에서 혈전을 벌려 수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1932년 12월 하순에 조선혁명군 군대와 요녕민중자위군은 합작하여 항일민족자위군을 조직하였는데 흥경에서 1개 대대의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그곳에 항일민중자위군 본부를 두었다.
1933년 5월 8일, 일본관동군은 공군의 엄호 밑에 1500여 명의 정예화한 보병을 출동시켜 흥경, 청원 지대를 대거 공격하였다. 이에 대비해 조선혁명군 군대는 유격전술을 채택하여 세 개의 사령부로 나누어 연합적이면서도 독립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1934년 3월, 흥경현 쌍림자에서 조선혁명군 군대간부회의를 열고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과의 합동작전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조선혁명군 군대는 양찡위, 이홍광이 거느리는 제1군 독립사와 연합하여 1934년 3월에 벌어졌던 유하현 삼원포습격전, 5월에 있었던 통화현 괴뢰 보갑, 자위대, 파출소습격전, 8월에 있었던 흥경에 대한 일본군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친 전투 등 수십 차례의 전투를 활발하게 벌였다. 1937년 7월, 조선혁명군 군대간부 박대호 등은 항련 1로군의 건의를 접수하였으며 1938년 2월, 부사령원 박대호, 제2사 사장 최윤구, 참모장 최기홍 등 60여 명은 환인현 우무령에서 정식으로 동북항련 제1로군에 가입하였다. 조선혁명군 군대의 무장투쟁 제1주의는 민족주의 전선의 반일투쟁방략의 최고봉을 형성하였다.
조선혁명군 역사 중 양세봉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양세봉(梁瑞风, 또는 梁世奉)은 호가 벽해(碧海), 1894년 6월 11일 조선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1917년 겨울, 요녕성 신빈현에 이사 온 그는 1922년 여름에 독립군에 가담했다. 1923년 초, 부대를 따라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 화사구에 이르러 광복군총영에 편입, 광복군총영의 검사관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에 조선혁명군 군대 부총사령으로 되었다. 그해 가을 원 총사령 양하산이 희생되자(관전현 하로하진 삼도구에 묘소가 있다) 양세봉이 총사령으로 추대됐다. 양세봉은 요녕민중자위단, 동북항일연군 등 반일부대와 연합작전하면서 동변도 일대에서 일제와 싸웠다. 그 가운데서도 1932년 4월과 5월 신빈현 일대에서의 승첩과 청원현전투, 무순진공전 등은 양세봉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또 5월에 치른 여섯 차례의 전투에서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 군대는 적 1000여 명을 살상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대승을 거둔 후 조선혁명군은 통화 강변에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양세봉이 교장을 맡았다.
1934년 9월 19일, 항일삼림대와 연합하자는 아동양이라는 ‘부대요인’의 건의를 듣고 그자를 따라가는 도중에 그자의 흉탄에 맞아 다음날 희생되었다. 환인에 있던 그의 묘는 1986년 9월에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이장되었다.
양세봉의 수하에는 장명도(张明道)가 있었다. 일명 장세량(张世良), 별명은 장포수, 싸창과 권총을 양손에 쥔 명사수였다. 1904년 4월, 조선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11살에 압록강을 발구로 건너 중국 요녕성 관전현 마가자촌으로 이주, 다시 환인현 향수하자로 옮겼다. 독립군에 가담한 그는 1933년 1월 조선독립혁명나라 군대(총사령은 양세봉) 제3방면군 사령으로 있었다. 1937년 1월 27일, 군용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환인현 감장구촌에 갔다가 일․위경찰의 포위에 들어 포위돌파전에서 적탄에 맞아 희생, 그때 33세였다.

1.1.4. 4. 한국독립군

1930년 즉 김좌진 장군이 암살된 그해 7월에 홍진, 이청천, 민무, 안훈 등은 한족총연합회를 토대로 한국독립당을 세웠다. 중앙위원장에 홍진, 군사위원장에 이청천이 맡았다.
1931년 11월 오상현 대석하자에서 한국독립당은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과 한중합작을 상의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정신에 따라 한중연합군은 거의 날마다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특히 대전자령에서 한국독립군이 주력이 되어 일군 아즈까 연대를 전멸시킨 대첩에서는 노획물이 군복 2000벌, 박격포 5문, 군량, 문서, 군용품 20여 마차, 담요 3000매, 평사포 3문, 소총 1500정에 달하고 있다(「한국독립사」 277-278페이지).
1933년 하반년까지 한국독립군은 만주에서 싸움을 견지하다가 일제침략이 전면화됨에 따라 대한임시정부의 소명으로 중국 관내로 들어갔다. 이청천, 조경한 등 20여 명 골간들은 관내로 옮겨갔고 북만에 남았던 한국독립군의 골간도 선후로 관내에 들어가게 되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동북에서의 투쟁은 결속되었다.
백산 지(이)청천(池青天 1888-1957)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三清洞)에서 태어났고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2월 4일, 관비생 5명에 뽑히어 일본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10년 유년학교, 1912년 동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가 되어 봉사하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위로 승진하여 청도전쟁에 참가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적진을 탈출, 남만에 도착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만주땅을 밟으면서부터 이청천으로 개명하고 교관이 되어 군사교육을 스파르타교육방법으로 가르쳤다. 1920년 가을, 안도현 삼인방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합유하고 밀산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모여 온 우군부대와 제휴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1924년 전후하여 정의부 군사부 사령관으로 심혈을 기울여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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