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어진 박사의 나의 일일일생

영혼의 단상(나의 일일일생 2010.11.17)

경희대에서 박사수료를 하기까지 15년이라는 세월, 법학이라는 학문의 꼬리표와 함께 경희 문이라는 선교회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라는 꼬리표를 갖게 해 준 신앙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예배와 말씀공부는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자로서 호흡하고 존재의 의미를 각인하는 만나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은 매주 월요일 학교 동아리방에서 신앙 동역자들과 함께 학생들과 식사교제를 하며 말씀에 기초한 삶을 나누는 'Joyfull Prayers'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하셨다. 이를 통해 신앙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을 후배에게 전하는 의미 있는 일을 감당하면서 한 마디 말씀이 우리네 인생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 순간순간 깨닫게 하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심을 체험하게 된다. 최근에 모임을 하면서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서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지만 믿음을 배워가는 중인 P라는 학생을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스라엘의 풍습인 계대결혼(자식 없이 죽은 형을 위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을 위한 상속자를 세우는 제도)과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고 육체와 상관없이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는 궤변을 통해 당시 로마식민지라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기득권자로서 온갖 이권을 누리려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들보다 좀 나았을지 모르나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진리의 본질에서 심히 일탈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치시려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논쟁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결국 기득권자들의 모함과 계략 가운데 잠잠히 십자가를 지시며 하나님의 길로 담대하게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사두개인처럼 부활이 없다 말하며 가식과 위선으로 진리와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2장 29-32절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인간의 막혀진 담을 허무시고 죄사함과 구원의 산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요, 우리의 답답한 죄문제를 대속하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다. 화평과 일치가 되신다.

하지만 현실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 남한과 북한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광풍과도 같았던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한의 강물이 휴전선의 깊은 계곡에 흘러 넘친다. 사두개인처럼 부활은 없고 광복은 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그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젊은 한 목숨을 희생해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도 그로 인해 후대가 하층민으로 전락한 유공자의 후손도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타국으로 갔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고려인으로 조선족으로 남은 자들도 있다.

전쟁과 분단의 고통과 그로 인한 왜곡된 현실이 자리 잡은 오늘날 그 누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권력이나 물질이나 그 어떤 것도 아닌 단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는 않을까? 세상에서 육체는 살았지만 영혼은 죽은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살아 있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을 소유한 생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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