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3절 민족반일단체의 통일운동

일제의 ‘경신년토벌’ 이후 많은 조선이주민 반일민족주의단체들은 흩어졌거나 지하로 들어갔으며 항일의 중점은 남만지구에로 옮겨졌다. 1920년부터 다시 대오를 정돈하고 여러 단체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족주의단체의 통일운동은 남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원포는 남만의 반일운동에서 중심 위치에 처해 있었으며 그 작용은 자못 컸다.
만주지역 특히 남만의 민족반일단체의 운동에 대하여 신주백 씨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등 저서와 연변대 박창욱 교수의 1920-1930년대 재만민족주의 계열의 반일독립운동;(1994), 권립 교수의;조선혁명군과 양세봉 장군의 반일독립운동 평술;(1995) 등 논문에서 상세히 언급되었다. 또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의 운동에 대하여서는;재만 한인사회와 민족운동;(황민호) 등 저서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본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개괄적으로 적어둔다.

1. 1. 삼원포

유하현 삼원포는 반일애국운동에서의 남만중심지였다.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의 반일근거지의 시조로 인정되는 경학사가 바로 삼원포에서 창설되었다.
경학사의 창시자는 이회영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가산을 몽땅 팔아 현금 40만 원을 마련해가지고 가족 40여 명을 거느리고 1911년 초 유하현 삼원포 서쪽의 추가가(지금은 이도구향에 소속)로 이주한 후 왠스카이의 승낙을 얻어 거주권과 경작권, 교육권 및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삼원포 일대에 조선이주민집거구를 형성하였으며 추가가에 반일민족기구인 ‘경학사’를 꾸렸다. 1000여명이 성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사장에 이상룡, 부사장에 이시영(이회영의 아우)과 이동녕,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겸직),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추대되었다.
1914년까지 경학사는 유하현 경내에서 26개소의 학교를 꾸리었으며 그중 삼원포 동명학교는 소문이 자자했다. 1911년 4월, 도산자의 대두자에 ‘신흥무관강습소’(교장은 이동녕이 겸직, 후엔 이회영이 담당)를 꾸렸고 1913년 4월 통화현 합니하에 정식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상룡이 교장 직을 겸직했고 후엔 여준이 넘겨받았다. 1911년부터 1913년 4월까지 신흥무관강습소에서는 군사골간 1400여 명을 양성했으며 1913년 4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골간 2100명을 양성해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를 토대로 ‘부민단’이 설립되어 자치범위를 넓히고 지도기구를 조절하였다. 이상룡이 총재로, 이회영이 부총재 겸 외무부장으로 되었다. 부민단은 관할범위를 5개 구로 나누었는데 총 1229호였다. 매 100-1000호에 구장을 두고 매 10호에 패장을 두었다. 부민단의 직책은 조선이주민 내부의 민사 및 형사 등 사무를 처리하며 조선이주민과 중국관리 및 민사분규를 해결하며 학교를 꾸리고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토지를 세 맡고 본 지역 조선주민을 조직하여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것이다.
1914년 부민단의 주체로 유하현 대전자향 팔리초 소북차에 ‘백서농장’이라는 군영이 세워졌고 김동삼이 농장장으로 추대되었다. 교원과 학원은 모두 385명, 적지 않은 군사골간을 양성해냈다.
1919년 3월, 남만 각지의 조선이주민반일단체 지도자들은 삼원포에 모여 부민단을 모체로 삼아 ‘한족회’를 무었다. 이삼석이 총장으로 되었다. 한족신보가 한족회기관지로 발간되었다.
1919년 11월, 육하와 통하, 해룡, 임강, 집안, 환인 등지의 반일단체가 삼원포에 모여 연합으로 전반 남만지구 조선이주민의 반일무장투쟁을 영도할 ‘서로군정서’를 건립하였다. 총재에 이택, 독판에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이택, 이상룡, 박건, 주진수, 왕삼덕, 정무, 윤복단, 김정수, 이종림, 김창무, 곽영, 안동식 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19년 4월 15일, 삼원포 대화사에서 ‘대한독립단’이 성립되었다. 본부는 대화사(현 화평향에 소속)에 설치되었고 총 병력이 560명이었다. 변호는 남만제1사단이었다. 총재에 박장호, 부총재에 백삼규, 총단장에 조맹선, 사단장에 김창묵과 방사규가 추대되었다. 1919년 8월 대한독립단의 병력은 1500명으로 늘어났으며 1920년 5월에는 장총 3300자루와 권총 130자루, 수류탄 1550개, 기관총 4문 및 탄약 19만 5300발이 있었다. 1920년까지 대한독립단은 중조 국경 부근에서 일본군경과 32차나 싸움을 벌였다.

1. 2.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1922년 6월 30일, 환인현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족연합회’ 등 단체는 ‘대한통군부 ’를 건립하였으며 두 달 후에는 이를 발전시켜 ‘대한통의부를 세웠다. 총장에 김동삼, 중앙본부는 관전현 하루하(下漏河)에 두었다. 1923년 8월, 통의부에서 분립된 의군부는 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라 하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관하는 새로운 조직을 정비하였다. 관할구역은 백두산하 집안현을 중심으로 환인, 임강, 장백 등 압록강 이북 지구와 통화 이남 지구이다. 관할 호수는 1만 5000여 가구였다. 참의부는 지방행정 조직형식으로 관할지역을 구획, 관리하였다. 참의부는 초기의 무장투쟁우선주의 노선으로부터 1927년경에는 자치우선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참의부는 산업의 진흥과 문화계몽 그리고 민족교육에서도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1924년 11월 25일(성립날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음), 12개 반일단체 대표들이 화전현 관가(官街)에서 정의부를 건립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정의부헌장’을 발표하였다. 헌장에는 “본부는 인류평등의 정의와 민족생영의 정신으로써 광복대업을 극성(克成)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혀있다. 정의부의 주요 활동구역으로는 길림, 장춘, 흥경, 통화, 화전, 반석, 관전 및 돈화, 액목이었다. 1926년 말, 참의부가 공제하는 지역을 제외한 남만 전역에 걸쳐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1만 7000가구, 8만 7000여 명의 조선이주민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행정, 입법, 사법 등 3권이 분립되고 구, 지방, 중앙 등 3급 조직을 가진 민주정체의 조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부는 한인자치행정과 독립군의 행정을 담임하는 군정부로서 발전을 하였다. 정의부의 자치행정의 주목표는 교육과 산업의 향상에 있었다. 1929년 3월, 정의부가 해체되었다.
1925년 3월 10일, 북만에 있던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교육회, 북만지역 대표, 조선국내 대표 등이 영안성 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창립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였고 참의원 원장은 이범윤, 검사위원장에 현천묵, 군사위원장에 김좌진이였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500여 명의 사관을 배출하였다.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대비해 무기장비를 갖추기 위하여 군수자금모집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신민부의 문화계몽사업은 조선이주민 자녀의 의무교육을 목표로 하여 소학교 50여 개를 설립하였다.
3개의 지방정부는 창립된 후 1-2년간의 조선국내 진격전도 벌이었고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몇몇 주구를 청산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의 똑딱선을 습격한 사건이 그 일례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적 조류에 맞추어 정당정치가 실행되었고 ‘정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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