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 ◇막하행 열차에 오르다
[서울=동북아신문]한 번 생각해 보라. 중국 본토도 아닌 동북쪽에 치우쳐져 있다고 해서 행정구역명도 현재 ‘동북3성(東北三省: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인 만주땅 그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하얼빈에서 중국의 최북단인 막하까지 열차 소요시간으로 20시간이 걸린다. 이 대단한 길을 고구려 제19대왕인 광개토대왕 이후 1600년쯤 내려온 역사의 시간 속에서 연개소문과 같은 날 태어난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20시간이라면 한국에서는 상상밖의 시간이다. 하얼빈에서 쟈그다치까지도 무려 11시간 소요되는 머나먼 거리였으니 말이다.
쟈그다치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 30분이었다. 갈아타야 하는 시간의 여유는 30분 정도로 곧바로 막하행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쟈그다치역 출구를 빠져나와 다시 쟈그다치역 입구로 들어가 얼른 매표하고는 막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1시간을 열차에 몸을 실어 북진해 와 막하까지 다시 8시간 정도를 더 가야하니 절반 조금 넘은 거리를 온 셈이다. 막하행 열차는 지금까지의 열차 안보다는 달리 한적한 분위기였다. 첩첩산골로 들어설수록 승객도 뜸한 듯했다. 중국땅 최북단으로 향하는 만큼 인간세상하고도 조금씩 멀어져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 ◇막하행 열차 속에서 만난 여인
동행한 백민시인의 기록에 보면 ‘서지월선생님이 한 조선족 아낙과 열심히 대화를 하고 계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새로 등장한 여인을 따라가 보자. 이전의 열차 속에서는 쟈그다치 중국여인이었는데 이번 열차 속에서는 조선족 여인으로 등장인물이 바뀌었다. 한국으로 말 할 것 같으면 60-70년대씩 올림머리를 한 퍽 용모에 신경을 쓴 조선족 중년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 여인이 먼저 우리 곁을 찾아와서 말문을 열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니까 우리도 반가웠다. 하얼빈에서부터 우리 일행을 보았다고 했다. 「흑룡강 7천리를 가다」라는 우리가 들고 있는 깃발을 하얼빈에서부터 발견했다는 것이다. 좀 어투가 퉁명스럽기도 하면서 다정다감한 내가 ‘아줌마, 그럼 그때 아는 체하지 왜 안 했어요?’하며 되물었다. 말도 매끄럽게 잘 하는 여인이었는데 개장집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일행을 묵고 가라고 한다. 아줌마의 인정은 대단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구미가 당겼다. 왜냐하면 이런 산간벽지 언저리에 내가 버려지길 바랬던 것이다.

줄곧 여행길을 쉼없이 오르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적한 곳에 처박혀 이태백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유자적해 보는 것도 진짜시인의 덕목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이 아주머니는 입담도 좋으시고 해서 금새 친숙해졌다. 다 큰 처녀애를 불러서는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성숙한 딸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이런 미녀를 따님으로 두셨군요.”하며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신림(新林)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 이름은 장정순 1962년생, 40세라 한다. 보신탕식당 이름은 ‘금강산개장집’ ,아주 맛있게 잘 한다고 그러신다. 점심식사때만 영업을 하는데 벌목꾼들의 식당이라 한다. 그러니 산간오지나 다름없는 곳인가 보다. 하루 수입은 800-1000위안이며 한달 순수익이 1만 위안 정도 되니 아주 벌이가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한번 가는 것이 최대의 꿈이며, 돈벌어 놓은 것도 있으니 “오빠! 내 한국 좀 가게
▲ ◇막하행 열차 속에서 만난 여인
불러 줘.”했다. 금새 나는 오빠가 된 것이다. 맘씨 고운 오빠가 된 것이다. 한국이 중국 조선족들에게도 최대의 인기종목처럼 선호되고 있다는 건 참으로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런 일이다. 이런 조선족 식당 아주머니도 한국 한번 가는게 생전 최대의 꿈이라 하니 놀랍지 아니한가.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지금은 계속 북진해야 하고 다시 내려올 때도 일정이 여의치 않을 것 같으니 다음 기회에 오면 꼭 그 ‘금강산 개장집’ 을 찾아가 며칠 묵겠다는 말을 남긴 채 신림역에 열차가 멎자 우린 또 한 여인과 생이별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입담 좋고 인정스런 장정순씨를 떨궈놓고 우리 일행을 실은 산간열차는 계속 북으로 북으로 봇나무 물결의 산림숲을 뚫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초가을날 차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수채화 풍경 다름 아니었다.

삼림을 뚫고 북으로 북으로 치닫는 열차의 긴 행렬도 장관을 이루었는데 마치 붉은 머리통의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숲을 헤치고 기어가는 형상이었으며 열차가 하루종일 쉬임없이 초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진군하듯 나아가며 펼쳐 보이는 차창 밖 풍경 또한 총천연색 연속필름처럼 펼쳐지고 있었으니 바로 봇나무들의 행렬이었다. 한국에서는 낯설기만 한 이름의 나무인데 자작나무로 보면 옳을 것이다. 꼭 버드나무 같이 생겼는데 나무 줄기가 유난히 흰색을 띠고 있어 은사시나무같이 줄지어 서서 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은 수채화 같은 풍경을 연상시켜 주었던 것이다.
▲ ◇차창 밖 봇나무 풍경
이파리는 버드나무 이파리 같이 연녹색을 띠며 바람 불면 팔랑개비처럼 환상적인 몸놀림을 일으키는데 초가을이라 아직 잎은 연녹색을 띠고 있지만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 이파리들이 노랗게 물 들면 더욱 환상적인 세계 속으로 빨려들 거라는 생각이 생각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이런 봇나무가 만주땅 북부지역에 산재해 있는 막하로 가는 열차의 차창 밖은 온통 봇나무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으니 이런 장관은 가히 절경이었다. 삭막하고 허허로운 벌판으로 이름나 있는 만주땅이라지만 강을 만나면 강을 만나는 대로 속 시원하고 숲을 만나면 숲을 만나는 대로 마음 상쾌한 만주땅인 것을! 나는 한국의 콜룸부스가 되어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만주땅 최북단을 북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차창 밖 봇나무 풍경
세상에 어느 신께서 이런 대자연의 신비를 연출해 내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봇나무는 만주땅 가는 곳마다 눈에 띄는 특산품 같았다. 만주땅 시인들도 봇나무에 대해 더러 시를 썼고 보면 그게 보통 스쳐지나갈 나무는 아니었다. 중국조선족 남영전시인도 시집 『 백의 넋』에서 봇나무를 노래했고 보면 예사로운 풍경의 나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람의 채찍질에 등이 구불고 / 눈보라 물어뜯어 옷이 찢겼네 / 근육은 불거져서 돌뼈가 되고 / 살가죽 갈라 터져 창상이 되고 / 하늘은 너에게 공정치 못하건만 / 너는 하냥 쓰러질 줄 몰라라 / 돌바위에 뿌리박은 부락들이네 / 자랑차게 머리 쳐들 산민들이네 / 봇나무여 봇나무 / 굴함없고 불멸하는 족속들이여' (남영전 詩 ‘봇나무’전문) 시인의 눈에 비친 봇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조선민족의 처해진 삶으로 읊은 것 같다.

▲ ◇막하행 열차 속에서
이런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고 초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이 세상하고는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열차 안이 텅 비어지기도 했다. 한 객차 안에는 열 명 정도도 안되었다. 많은 간이역을 지나오며, 지나올 때마다 산골 소읍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붉은 벽돌로 쌓은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열을 지어 모여있는 풍경 그 자체가 사회주의국가의 똑같은 모습으로 읽혀졌다. 열차가 삼림을 뚫고 들어갈수록 정차하는 소읍마다 통나무더미와 목재소가 눈에 띄였다. 끝없는 산림을 뚫고 열차는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여러 번 틀면서 지나가는 풍경 또한 이런 곳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열차여행 다름아니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이 넘었다는 '대흥안령산맥'이 차창 왼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동행해 주는 것이었다.

함께 동행한 백민시인은 ‘막하 가는 길은 참으로 절경이다. 우수수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소리를 열차 안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지금 이곳은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진다. 그만큼 가을이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 열차가 막하에 가까울수록 사람들도 멀어지고 여름도 멀어진다.’고 기찬 표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그의 여행노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장장 22시간의 기차여행, 언제 또 내가 이런 긴 열차여행을 해 볼 수 있을까? 철로변의 나무를 흔들며 기차가 간다. 북으로 북으로, 북으로 기차가 간다.’고. <계속>

◆쟈그다치에서 막하로 열차가 삼림을 뚫고 가는 한 폭의 수채화같은 풍경.
◆쟈그다치에서 막하로 가는 열차속에서, 한국 서지월과 신림에 살고 있다는 조선족여인과 딸과 함께.
◆쟈그다치에서 막하로 가는 열차속에서, 「흑룡강 7천리를 가다」깃발을 배경으로 신림에 살고 있다는 조선족여인과 함께.(한국 서지월 백민, 조선족 소설가 김송죽, 조선족여인 장정순씨, 이별리시인.
◆쟈그다치에서 막하로 한 폭의 수채화같은 환상적인 봇나무 산림을 뚫고 북진하고 있는 열차의 행렬. 마치 붉은 머리의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숲을 헤치고 기어가는 형상이다.
◆초가을 막하 가는 길 철로변 소읍의 풍경. 획일화된 집들과 나무 울타리의 텃밭이 인상적이다.
◆광개토대왕이 넘었다는 차창 밖 왼쪽 '대흥안령산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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