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1.1. 제3절 민족반일단체의 통일운동

1.1.1. 3.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투쟁

1929년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칭되자 혁명나라 군대도 조선혁명군 군대로 개편되었고 이진택이 총사령으로, 양세봉이 부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조선혁명군 군대는 군사제일의 노선을 걸었다. 본부를 신빈현 왕청문 산구에 앉히고 조선청년을 모집하고 단기 군관학교를 꾸리며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조선혁명군 군대는 400여 명 대원을 가진 반일무장대오로 발전하였다. 1932년 3월부터 동변도 보안사령인 우지산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영릉가, 흥경 등 지역에서 혈전을 벌려 수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1932년 12월 하순에 조선혁명군 군대와 요녕민중자위군은 합작하여 항일민족자위군을 조직하였는데 흥경에서 1개 대대의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그곳에 항일민중자위군 본부를 두었다.
1933년 5월 8일, 일본관동군은 공군의 엄호 밑에 1500여 명의 정예화한 보병을 출동시켜 흥경, 청원 지대를 대거 공격하였다. 이에 대비해 조선혁명군 군대는 유격전술을 채택하여 세 개의 사령부로 나누어 연합적이면서도 독립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1934년 3월, 흥경현 쌍림자에서 조선혁명군 군대간부회의를 열고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과의 합동작전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조선혁명군 군대는 양찡위, 이홍광이 거느리는 제1군 독립사와 연합하여 1934년 3월에 벌어졌던 유하현 삼원포습격전, 5월에 있었던 통화현 괴뢰 보갑, 자위대, 파출소습격전, 8월에 있었던 흥경에 대한 일본군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친 전투 등 수십 차례의 전투를 활발하게 벌였다. 1937년 7월, 조선혁명군 군대간부 박대호 등은 항련 1로군의 건의를 접수하였으며 1938년 2월, 부사령원 박대호, 제2사 사장 최윤구, 참모장 최기홍 등 60여 명은 환인현 우무령에서 정식으로 동북항련 제1로군에 가입하였다. 조선혁명군 군대의 무장투쟁 제1주의는 민족주의 전선의 반일투쟁방략의 최고봉을 형성하였다.
조선혁명군 역사 중 양세봉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양세봉(梁瑞风, 또는 梁世奉)은 호가 벽해(碧海), 1894년 6월 11일 조선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1917년 겨울, 요녕성 신빈현에 이사 온 그는 1922년 여름에 독립군에 가담했다. 1923년 초, 부대를 따라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 화사구에 이르러 광복군총영에 편입, 광복군총영의 검사관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에 조선혁명군 군대 부총사령으로 되었다. 그해 가을 원 총사령 양하산이 희생되자(관전현 하로하진 삼도구에 묘소가 있다) 양세봉이 총사령으로 추대됐다. 양세봉은 요녕민중자위단, 동북항일연군 등 반일부대와 연합작전하면서 동변도 일대에서 일제와 싸웠다. 그 가운데서도 1932년 4월과 5월 신빈현 일대에서의 승첩과 청원현전투, 무순진공전 등은 양세봉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또 5월에 치른 여섯 차례의 전투에서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 군대는 적 1000여 명을 살상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대승을 거둔 후 조선혁명군은 통화 강변에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양세봉이 교장을 맡았다.
1934년 9월 19일, 항일삼림대와 연합하자는 아동양이라는 ‘부대요인’의 건의를 듣고 그자를 따라가는 도중에 그자의 흉탄에 맞아 다음날 희생되었다. 환인에 있던 그의 묘는 1986년 9월에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이장되었다.
양세봉의 수하에는 장명도(张明道)가 있었다. 일명 장세량(张世良), 별명은 장포수, 싸창과 권총을 양손에 쥔 명사수였다. 1904년 4월, 조선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11살에 압록강을 발구로 건너 중국 요녕성 관전현 마가자촌으로 이주, 다시 환인현 향수하자로 옮겼다. 독립군에 가담한 그는 1933년 1월 조선독립혁명나라 군대(총사령은 양세봉) 제3방면군 사령으로 있었다. 1937년 1월 27일, 군용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환인현 감장구촌에 갔다가 일․위경찰의 포위에 들어 포위돌파전에서 적탄에 맞아 희생, 그때 33세였다.

1.1.2. 4. 한국독립군

1930년 즉 김좌진 장군이 암살된 그해 7월에 홍진, 이청천, 민무, 안훈 등은 한족총연합회를 토대로 한국독립당을 세웠다. 중앙위원장에 홍진, 군사위원장에 이청천이 맡았다.
1931년 11월 오상현 대석하자에서 한국독립당은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과 한중합작을 상의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정신에 따라 한중연합군은 거의 날마다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특히 대전자령에서 한국독립군이 주력이 되어 일군 아즈까 연대를 전멸시킨 대첩에서는 노획물이 군복 2000벌, 박격포 5문, 군량, 문서, 군용품 20여 마차, 담요 3000매, 평사포 3문, 소총 1500정에 달하고 있다(「한국독립사」 277-278페이지).
1933년 하반년까지 한국독립군은 만주에서 싸움을 견지하다가 일제침략이 전면화됨에 따라 대한임시정부의 소명으로 중국 관내로 들어갔다. 이청천, 조경한 등 20여 명 골간들은 관내로 옮겨갔고 북만에 남았던 한국독립군의 골간도 선후로 관내에 들어가게 되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동북에서의 투쟁은 결속되었다.
백산 지(이)청천(池青天 1888-1957)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三清洞)에서 태어났고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2월 4일, 관비생 5명에 뽑히어 일본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10년 유년학교, 1912년 동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가 되어 봉사하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위로 승진하여 청도전쟁에 참가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적진을 탈출, 남만에 도착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만주땅을 밟으면서부터 이청천으로 개명하고 교관이 되어 군사교육을 스파르타교육방법으로 가르쳤다. 1920년 가을, 안도현 삼인방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합유하고 밀산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모여 온 우군부대와 제휴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1924년 전후하여 정의부 군사부 사령관으로 심혈을 기울여 노력했다. 9․18사변 후 홍진과 한독당을 조직하였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사령관에 추대되었다. 1957년 1월 15일, 70세로 생애를 마쳤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