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룡남 시인이 kbs한민족방송국 기자와 나눈 대담

[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 이상규 선생이 2010년 11월 17일(수요일) 오후 3시, KBS라디오·한민족방송국에 가서 취재를 받을 시  중국 연변의 조룡남 시인도 전화취재를 함께 받았었는데, 조룡남 시인이 그 일부를 정리하여 본지에 보내왔다. -편집자 주] 

▲ 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 이상규 시인이 KBS라디오한민족방송에서 취재를 받고 기념사진 남기다.

기자: 안녕하세요?

답: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KBS방송국의 선생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자: 지금 지옆에 이상규 회장님이 자리해있는데 두분도 인사 나누시죠.

답: 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사모님께서도 안녕하시지요? 승훈이, 지은이도 다 잘 있구요? 손주님도 많이 컸겠네요. 덕분에 우리 두 늙은이 다 잘있 습니다. 한국의 두애도 다 잘 있구요. 작은애는 지난 8월 박사과정 이미 졸업했구요. 어저께 력사유적지 답사차로 중국 료녕성으로 떠나온다고 합 디다. 집에는 들새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기자: 두 분은 언제 처음 알았나? 서로의 첫 인상은?

답 : 1996년 여름이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 연길의 어느 초등학교 한 녀교사 가 두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한국에 나가 한 식당에서 일하 였는데 이상규선생님께서 그 녀교사의 어려운 처지를 들으시고 많은 배 려를 베푸셨나 봅니다. 그 녀교사는 중국에 돌아온 후 이상규선생님의 신세를 갚으려고 남편과 의논하고 이상규선생님을 중국에 초청했습니다. 백두산과 만리장성을 구경시키려구요. 그 녀교사는 이상규선생님의 시에 깊이 심취되여있었는데 이 기회에 중국에서 이상규선생님 시집 한권 출 간하여 여기 동포들에게 소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 서 그녀의 남편되는분이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시편집을 담당하고있던 저를 찾아오게 되였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상규선생님과의 만남이 이 루어지게 된겁니다. 우리의 첫만남은 그의 시를 읽은 뒤라 그이는 시에 서와 같은 성실하고 소박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습니 다. 시의 풍격은 곧 그 시인의 인격이니까요.

기자: 조룡남 시인은 이상규 회장님이 중국에 갈 때마다 만난다고요?

답: 그렇습니다. 이상규선생님이 중국에 오셨을 때마다 만났지요. 그것도 번 마다 공항에 나가 마중을 했구요. 지금까지 15년간 38차 중국에 오셨으 니 38번 만난거지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3번 다녀왔으니 합치면 모두 41번 만난거로 되겠네요.

기자: 만나면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요?

답: 이상규선생님 체류기간은 늘 짧았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도 많습니 다. 그래서 우리 단 두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늘 제약을 받게 됩니다. 주로 나누는 이야기는 그번 행사나 활동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장학상 수여식으로 오셨을 때는 이곳 고교의 분포, 학생들의 공부상황, 가정경제 상황, 장학생 선발과정, 회의장소와 회의순서 등등이 화제로 됩니다. 또 문학상 시상식에 오셨을 때는 중국조선족문학현황, 대표작가와 대표작품, 문학간행물과 단행본 출판상황, 그번 수상작품 내용과 선발과정 등등이 화제로 되지요. 그래서 듣고싶은 그의 시창작경험담이나 인생경력 등은 극히 단편적인것들만을 들었을뿐입니다.

기자: 조룡남 시인은 이상규 회장님의 중국내 활동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 겠네요?

답: 그렇습니다. 저는 이상규선생님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가장 잘 알고있는 사람 가운데의 한사람입니다. 저 말고도 류연산교수, 한석윤회장 등 몇사 람 더 있습니다만. 그의 후원으로 처음 열렸던 《아리랑》문학지의 “세기 교체기의 사색”세미나, 화룡 숭선세미나, 훈춘 방천세미나 등에 다 참석 했구요, 할빈에서 가진 한얼패수필상공모 시상식, 자치주의 재정난으로 8 년간 중단되였던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시상식, 6회에 걸친 소정장학상 수 여식, 중조어린이 글짓기경연 등 행사와 활동에 저는 다 참석했었습니다. 그리고 반일시인 심련수문학자료 발굴활동과 문집출판행사에도 관여했구 요. 하지만 눈길을 헤치고 그 위험한 천리 산길을 가야 하는 장백현 기숙 학교 후원활동에는 감히 따라나설 엄두를 못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열 린 중국 류학생 후원활동에는 못갔지요. 그리고 비암촌 유치원후원행사, 한문《천지》잡지 후원행사 등 몇몇 행사에도 참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들어서 잘 알고있습니다.

기자: 이상규 회장님의 선행 내용을 책으로 묶은것도 아시나요?

답: 이상규선생님의 선행내용을 책으로 묶은걸 보지도 못했지만 듣지도 못했 습니다. 진작 그의 선행을 책으로 쓴다면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킬거라는 생각은 해왔고 또 이곳 류연산교수가 그걸 창작계획에 넣고있다는 말 은 들었습니다만... 어느 출판사에서 출간했는지요? 그 저자는요?...요

아, 그 스크랩 말씀입니까? 그 불완전한 작은 자료첩은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왜 이렇게 작으냐고? 빠뜨리지 말고 전부를 모아서 더 크게 묶으라고 권고했던것 같습니다.

기자: 이번에 한국 정부에 이상규 회장님에게 상을 내리라는 서명도 하셨나요?

답: 그렇습니다. 그 추천서에 서명했을뿐아니라 그걸 기획하는 모임에도 참 석했구요, 또 한석윤회장과 서명용지를 나누어가지고 모두 27집을 집집 마다 찾아다니며 직접 서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서명서는 한석윤회장 이 한국정부에 발송했습니다. 우리의 목적과 취지는 첫째, 한국정부에 감사를 드리려는것이며 둘째, 이상규선생을 포상하여 그의 공적을 정부 적 차원에서 긍정함으로써 그의 앞으로의 활동에 큰 힘이 실리도록 하 려는것이며 셋쩨, 그의 사적을 널리 홍보하여 이상규선생님과 같은 사람 이 더 많이 배출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이것은 한국국민과 이 곳 동포사회 나아가 한중 두나라간의 교류와 친선에도 크게 기여할것이 기 때문입니다.

기자 : 이 회장님의 수상 소식에 크게 기쁘셨겠는데? 이 회장님은 중국동포에 게 왜 이렇게 많은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나?

답 : 물론 기쁩니다. 그 추천서에 서명한 한사람으로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 졌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서명자들뿐만아니라 이상규선생님을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며 이상규선생님을 축하하고 한국정부 에 감사를 드리고있습니다. 하지만 섭섭한 생각도 없지는 않습니다. 장관 상이 얼마나 큰 상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상규선생님의 공적으로 볼 때는 좀 미약하다는 생각, 이보다 더 큰 국민적인 포상이 이루어졌더면 하는 아쉬움입니다. KBS TV에서 많은 다큐와 인물사적을 보면서 우리는 늘 “이상규선생의 사적은 왜서 다큐로 만들지 않을가? 그의 사적도 저들만 못지 않는데... 꼭 다큐로 제작하여 널리 홍보해야 한다”는것이 저희들이 평소 갖고있은 생각이고 소망이였습니다.

이상규선생의 봉사의 목적과 취지는 그의 인생관 즉 그의 인생철학에서 비롯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내에서도 다른 어느 나라에 가도 그 렇게 살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철학의 핵심은 “나눔”입니다. 그는 이 사 심없는 “나눔”에서 인생의 가치와 행복을 발견한것입니다. 그는 중국에 와서 동포들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렇게 행동할것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돈 몇푼 가지고 와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귀중한 정신을 충전하고 간다”, “후날 이곳 동포들이 우리보다 더 잘 살게 되면 그때 우리가 당신들것을 나누면 되지 않냐” 저는 이상 규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한국사회는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로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조룡남 시인은 중국내에서 이상규 회장님의 봉사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도 하시지 않나요?

답: 저는 이상규선생님의 봉사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으로는 되지 못합니다. 모든것은 이상규선생님이 고찰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는거고 저는 다만 옆에서 그를 힘껏 도와드리고 밀어주는 일을 할뿐입니다. 물론 이 회장님 께서 타인한테 서 정보를 얻고 계시를 받고 하기도 합니다. 도문시 량수 의 한 고교생이 대학입시에서 북경의 한 유명대학에 입학했는데 돈이 없어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되였다는 소식을 한 기자한테서 듣고 이상규 선생은 즉시 량수의 그 고교생 가정을 찾아가서 그 학생과 부모를 만나 고 집 형편을 료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를 후원할 결정을 내린겁니다. 이상규선생님은 그 학생이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경제후원을 맡아하여 이곳 사회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있습니다. 몇해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이란 대형총서를 출판하였는데 이 거액의 자금을 이상규선생이 후원한것입니 다. 이것은 류연산교수가 제안한것으로 이상규선생이 받아들여 성사시킨 것입니다. 류연산교수는 저보다도 이상규선생님을 더 잘 알고 늘 붙어다 니며 선행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본래 이 전화인터뷰도 류연산교수가 나와 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신병으로 입원하여 병원치료 를 받고있습니다.

기자 : 중국동포를 위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상규 회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11) 이상규선생님의 중국동포를 향한 무한한 애정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저 는 이상규선생님을 보면서 인간의 위타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고 생 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일밭에서 얼굴이 새까맣게 탄 장학생의 어머니가 장학금을 받고 이상규선생님을 찾아와서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릴 때 이상규선생님도 그이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 면 저의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왔습니다. 이상규선생님은 저와 이렇게 말 씀했습니다.“ 돈 몇푼으로 저 선량한 사람들의 눈물을 우롱한것 같아서 참으로 부끄럽다” 그리고는 “다른 어떤 활동은 잠시 접을수 있어도 이 장학금후원활동만은 계속하여 견지해 나갈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저 들앞에 사기군이 되는 큰 죄를 짓게 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사랑이란 곧 희생입니다. 중국동포들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이상규선생님은 많은것을 희생했습니다. 자기 두 자녀의 대학진학도 못시켰고 그렇게 즐 기고 좋아하던 물스키도 다 팔아서 후원금으로 썼습니다. 이상규선생님은 진정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고상한 사람입니다.

기자 : 두분 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서로 하고싶은 말씀을 나눠 보시죠...

답 : 수술한 허리는 지금 어떠십니까? 소홀히 말고 꼭 잘 치료하셔야 합니다.

근간에 《사람아, 사람아》라 이름한 저의 졸작 시집 한권이 출간되였습 니다. 한석윤선생님이 요새 한국으로 가신다기에 그 인편에 보내드리겠습 니다. 읽으시고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기자: 조룡남 시인은 한국에도 와보셨을텐데, 한국에서 만난 이상규 회장님 의 모습은 어떻던가?

답: 한국에서도 이상규선생님은 중국동포를 도와주기 위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였습니다. 그는 하늘이 도와서인지 하는 일이 잘 된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들도 많이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검박하였습니다. 친구집 혼례식에 가야 하는데 입고 갈 례복이 없어 부인 과 의논하는 말을 엿듣고는 가슴이 찡해났습니다. 그의 부인도 아주 착하 고 도량이 넓은 녀인이였습니다. 부인이 뒤에서 바가지를 긁는다면 이상 규선생님께서 어찌 자유롭게 활동하실수 있겠습니까? 한두푼 드는 일도 아니구요. 어느 해 이상규선생은 중국에 오시면서 어쩌다 새 양복을 맞춰 입고 오셨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새 양복을 사입고 오셨는가고, 옷이 날 개라더니 참 보기 좋다고 모두들 우스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때 그는 그 새 양복을 여기 어느 어려운 문인에게 벗어 주고 갔습니다. 하지 만 모두들 별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이상규선생님은 원래 이런 사람이 니까요. 저는 그번 이상규선생님이 돌아가서 사모님한테 야단을 맞지는 않을가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기자: 조룡남 시인 외에 중국에 있는 동포들은 이상규 회장님을 어떻게 생각 하나? 이상규 회장님 덕분에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한 느낌이 상당히 좋 을 것 같은데?

14) 저처럼 적극 나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이상규선생님 하시는 일을 지지하고 돕는 사람은 여럿 됩니다. 류연산교수와 한석윤회장외도 김학천 전임 작가협회 주석, 리성권 연변인민출판사 사장, 김해양 김학철문학연 구회 고문, 최삼룡 전임 연변문학연구소 소장, 김호웅 연변대 교수, 김룡 운 작가 등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들중에는 이상규선생님의 신세 를 크게 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규선생님 덕분에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아졌지요. 한때 이곳에는 개별적인 한국 사람의 사기행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규선생님은 여기 오셔서 이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면서 주머니돈까지 다 털어서 위로금으 로 내놓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피해자들과 주위의 사람들이 어찌 감 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번에 이상규선생님은 주머니돈까지 다 털어내놓고 비행기표값이 없어 기차를 타고 심양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한 장학생의 어머니는 이상규선생님의 선행에 감동되여 지금까지 한국말을 열심히 배 우고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을 준 한국분들은 여 럿 있었지만 한족에게까지 조선족동포와 차별없이, 꼭같이 도움을 준 사 람은 이상규선생님이 유일합니다. 이땅에서 조선족과 한족은 형제처럼 의 좋게 잘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규선생님의 깊은 뜻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그는 이곳 사람들 마음속에 한국이란 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높 은 위상을 심어준것입니다.

기자: 조룡남 시인은 올해 연세가? 언제부터 시를 써왔나요?

답: 해놓은 일 없이 나이는 많이 먹었습니다. 금년 75에 납니다. 시는 일찍 16살 중학시절부터 써서 신문과 잡지들에 발표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시같 은 시는 한수도 써내지 못한 부끄러운 시인입니다.

기자: 이상규 회장님도 시인인데 서로의 시에 대한 느낌은? 두부 앞으로 또 만날 계획은?

16) 낡았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시의 풍격은 그 시인의 인격이다”, “진실은 시의 생명이다”라는 시학관을 견지하는 사람입니다. 시는 곧 사 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상규선생님의 시에 큰 호감을 가지 고있습니다. 그의 인격처럼 그의 시도 진실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사랑과 인정미로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상규선생님의 후원활동이 계속되는 한 우 리의 만남도 계속될것입니다.

기자: 서로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답: 제가 이상규선생님께 당부하고싶은 말은 이상규선생님께서도 이젠 년세 가 적지 않으시고 최근에는 허리까지 다쳐서 수술하셨는데 건강에 각별 히 신경 써달라는 당부입니다. 이제 그만큼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셨으면 됐으니 행사나 활동을 많이 줄이시고 편히 휴식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 다. 가끔 홀가분한 빈몸으로 놀러오셔도 이곳 사람들은 이상규선생님을 열정적으로 반기고 만대접을 할것입니다. 저는 이상규선생님의 인생의 가 을날씨 청명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당부라면 지금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는 이상규선생님 후원으로 세워진 연변의 첫 노래비 “반디불비”가 있는데 언젠가 이상규선생님께서는 그 비옆에 자기가 후원하겠으니 정자 하나 세웠으면 하는 뜻을 말씀하신적이 있습 니다. 제 생각엔 굳이 그러실것 없고 지금 그 학원 학생들은 자기들의 문 학동아리를 “반디불문학사”라 명명하고 활동하고있으며 《반디불》이라 이름한 작은 문학간물도 발간하고있는데 지난 여름 이상규선생님께서 그 학원에 가셔서 학생들 행사에 친히 참석하셨던것처럼 연변에 오실 때마 다 반디불문학사를 찾아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자: 앞으로의 계획은?

답: 저의 앞으로의 계획은 별로 희한한것이 없습니다. 금년에 졸작시집 하나 출간했는데 욕심으로는 래년에는 동시집 하나 출간하고 후년에는 수필집 하나 출간했으면 하는 안속을 갖고있습니다. 하지만 실현될지는 장담할수 없습니다. 경제부담이 만만치 않은 사정도 있고 또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자신심도 그만큼 없어지는가 봅니다.

기자: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답: 뭘요? 제가 영광스럽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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