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4절 중공영도하의 반일투쟁

1.. 붉은오월투쟁

1930년 5월, 조선이주민은 중공당의 영도하에 간도를 중심으로 하여 ‘붉은오월투쟁’을 벌였다. 5월 1일, 용정 200여 명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했고 간도의 20여 개 중소학교에서 동맹휴학하였다. 투도구, 화룡현 자동, 대립자, 명동(현 용정시에 속함), 왕청현의 북하마탕, 연길현 평강(현 화룡시에 소속), 석문, 팔도구 등 지역에서 군중집회와 반일시위가 있었다. 북만의 아성, 해구, 황산취자, 취인창 등 지역의 30여 명 조선청년은 할빈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였다. 유하, 청원현의 500여 명 조선농민은 소금세, 고리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27일, 약수동 1000여 명 군중들은 심판대회를 열고 친일주구와 지주를 처단하였으며 농민적위대와 약수동소비에트정부를 건립하였다. 이는 동북의 첫 노농정권이다. 5월 29일, 삼도구조선이주민은 친일지주의 가옥을 불사르고 삐라를 뿌리며 ‘오주폭동’의 서막을 열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봉기군중은 지주 가옥 19채를 불살랐고 다리 4곳을 파괴하였으며 전화선 10여 곳을 끊었으며 발전소 하나를 파괴하고 친일학교 5개소와 조선인민회 여러 개를 불살랐다. 용정에서의 경제손실은 1만 7500여 원에 달했다.
▲ 사진 1-11-03 1930년 5월 1일, 허흥식 등 조선청년의 습격을 받은 할빈일본총영사관, 깨진 유리창이 보인다.


1..2길돈봉기

1930년 8월 1일 새벽, 돈화, 액목 두 현에서 대규모의 농민무장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총지휘는 마천먹이였다.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사람인데 1924년에 돈화현 오동향에서 중국국적에 가입했고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남창봉기가 실패한 뒤 상해를 경유하여 간도에 왔다. 이번 폭동대원은 약 600명이였다. 이들은 철도선을 파괴하고 2개 나무철교를 불태웠으며 10여 대 전선대를 찍어버렸다. 신개도보위퇀 제1정대 제1분대 방비소를 습격하여 보총 16자루, 탄알 1000여 발과 일부 군용물자를 노획하였으며 5칸의 병영을 불태웠다. 또 마효 육군 제7퇀 유격연방소, 돈화현공안국 남황니하 제3분 국주재소, 액목현 관지의 군대기지를 습격하였다. 폭동이 끝난 뒤 임시소비에트조직과 적위대를 건립하였으며 삐라를 뿌리고 많은 양식을 몰수, 얼마 후 대오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 사진 1-11-04 연길감옥탈옥기념비, 김명주 유가족에서 후원, 2000년 연변예술극장 울안에 세워졌다.

1.3 춘황투쟁

추수․춘황투쟁은 1931년 가을부터 1932년 봄에 이르는 사이 간도농민들이 중공동만특위의 직접적인 영도하에 조직 동원된 한차례 대규모 투쟁이다.
연길현 관도구, 대흥동, 연길 국자가, 화룡현 각 구위, 왕청현 배초구, 소왕청, 대왕청, 석현, 훈춘현의 밀강, 경신, 대황구 등 지역의 농민들이 소작료를 인하하고 채무를 폐지하는 투쟁을 진행하였고 주구들을 붙잡아 처단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약 1만 6000여 명이 추수투쟁에 참가하였다.
춘황투쟁은 추수투쟁의 계속이며 발전이다. 1932년 2월 초, 연길현 의란구 일대의 수백 명 농민은 중공당의 영도 밑에서 식량을 ‘꾸고’ 식량을 빼앗아내는 춘황투쟁의 첫 포를 울리었다. 이번 춘황투쟁에 약 2만 명 농민이 참가하여 3개월이나 투쟁을 견지하였다. 춘황투쟁은 중공당이 농촌에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할 수 있는 훌륭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1.  4. 연길감옥투쟁

연길감옥을 당년에는 길림성 제4감옥이라고도 불렀으며 위치는 지금의 연변예술극장 자리이다.
1931년 초, 옥중의 혁명자들은 중공연길감옥위원회를 내왔다. 서기에 김훈, 조직위원에 이진, 선전위원에 오세국, 군사부 부장에 윤범, 감찰위원에 소승호였고 군사부에는 폭파대, 방화대, 무장탈취대 등 11개 분대를 두었다. 연길여자사범학교 학생 김인애(공청단원이며 김훈의 사촌누이)가 옥외연락을 책임졌다.
제1, 2차 파옥투쟁이 실패 후 감옥 내의 주요 영도자들이 연이어 암살되었다. 1935년 음력 5월 7일, 제3차 파옥 때는 김명주, 이영춘, 이태근 세 사람으로 파옥 지휘부를 구성하고 17명 ‘파옥결사대’를 내왔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으로 하루 미루어 7일 300여 명의 ‘죄수’가 파옥탈출에 성공하였으며 그중 약 절반은 도목구 신선동 유격근거지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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