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수필

▲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담사시에 찍은 사진
국경절 날 화룡 누님네 집에 모여 어머님 3년제를 무난히 지내고 이튼날 형제들과 작별하면서 우리부부는 내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며 태줄을 묻은 고향, 아직 고향의 어느 산 언덕에 아버지가 외롭고 쓸쓸하게 누워 있는 그 곳, 그곳으로 찾아 떠났다. 딸과 함께 갔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사업때문에 어쩔수없이 딸은 그냥 훈춘으로 향했다.

이제 고향에 가면 심장에 꽁꽁 묻어둔 그리움을 따뜻하게 마음을 열어주는 고향땅에서 달래보아야지. - 택시가 소골령 아흔아홉고개 굽이굽이를 아츠랗게 달리노라니 어즈러움증이 있는 안해는 자주 신음소리를 내군 했다. 그러면서도 가을풍경이 다분한 소골령의 황홀한 단풍과 기묘한 산세에 저도모르게 감탄을 토하군 했다.

동남쪽으로는 북한이 환히 보였고 상류인 두만강을 거슬러 달리면서 보노라니 두만강 건너쪽 북한의 산변두리는 칼로 벤듯한 절벽에 은띠같은 한줄기 폭포까지 조화를 이루면서 제법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하였다. 포장길 량옆에는 단풍든 나무들이 주인인양 줄느런히 서서 길손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는가 하면 미술가의 세련된 손에서 조예가 깊게 다듬어진 미술작품처럼 죽-죽 줄무늬 간 절벽들이 머리우에서 내려보고있어 그 전경이 한결 돋보였다.

어느덧 하천벌을 지나 군함산기슭에 오붓하게 자리잡은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숭선진 고성리에 이르렀다. 장장40여년만에 찾아 뵙는 고향, 고향의 산언덕 어디선가에서 무정하고 불효한 이 자식의 초라하고 로숙한 모습을 아버지께서 내려다 보시는것만 같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고 아버지의 혼을 향해 목 빠지도록 힘껏 부르고 싶었다. 세상에 태여나 4살에 돌아가신 아버지, 평생 한번도 아버지를 불러보지도 못한 설음과 한이 북받쳐올라 오늘만큼은 실컷 아버지를 부르고싶어졌다. 목청껏 부르면 화답이 올듯 두만강이 출렁출렁 흐르고 군함산이 쩌렁쩌렁 울리는듯싶었다.

인젠 어머님까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의 산소를 더는 찾을길 없고 찾는다 하더라도 확인할수 없을것 같았다. 40여년의 긴긴 세월에 손길이 닿지 않았던 외로운 묘지라 형체를 알수 없을것 같아 나는 그냥 고성리를 아버지집이라고 하고 싶었다. 진정 군함산을 아버지산이라고. 믿어서인지 마치 아버지께서 뒤늦게야 찾아온 매정하고 무정한 우리를 보고 흐뭇해하고 기뻐하시는것만 같았다.

안해의 요청으로 화룡시 풍경구인 숭선진 고성리 홍기하에 가 보기로 했다. 길이 생소했던 우리는 도보로 5분이면 갈수 있는 거리를 15원에 택시를 타고 갔다. 참으로 홍기하는 도화원 같았다. 거기에 장관인 폭포까지 있어 더 아름다왔다. 아츨한 산꼭대기를 가리마처럼 살짝 가르고 쏟아져 내리는 상상할수도 없는 한줄기 하아얀 물줄기, 볼수록 신기하기만 한 폭포였다. 쉼없이 내리는 폭포는 아직까지 마을이 여느 마을들처럼 황페화되지 않고 오붓하고 아담하며 생생함을 뜻하는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외롭고 쓸쓸하게 오늘까지 기다리셨듯 래일도 기다리실거다. 고성리의 산과 물은 모두다 아버지같았다. 어지러운 세월에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라진배농장에 자리를 정해놓고 돌아오시다가 두만강에서 수중고혼이 되신 아버지, 남평해관 임직원들에 의해 임자없는 시신으로 군함산기슭에 묻힌 아버지, 아버지 령혼이 살아숨쉬고 있고 나의 태줄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고성리는 정녕 나의 사랑스러운 고향이다. 50여년을 눈물없이 꿋꿋이 살았지만 사나이는 결국은 고향땅에 눈물을 휘뿌려본다. 장장 50년만에 찾은 아버지의 령혼이 살아숨쉬고 있는 그곳 고성리에!.

짤리운 군함산 꼬리를 빠져나오면서 어딘가에서 넉가래같은 손을 젓는 아버지가 있을것 같아 자꾸만 차창뒤 유리창을 내다보았다. 아버지께서 흐뭇히 미소를 머금고 손을 저으시면서 따라오기라도 할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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